김아가다의 ‘후진’
헐티재는 송내골에서 대구로 가는 지름길이다. 길섶으로 다람쥐가 쪼르르 뛰어다니고 산새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길이지만, 자동차 두 대가 교행하기 어렵다.
아반떼를 몰고 오르막을 한참 올가는데 위쪽에서 스타렉스가 내려오고 있었다. 두 대가 마주보고 멈춰섰다. 뒤를 돌아보니 후진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비껴갈 요량으로 아반떼를 옆으로 붙였다. “아지매 낭떠러지에 떨어집니더” 라고 했다. 그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비켜주지 않으면서 어이가 없었다. 버럭 화가 치밀었지만 작은 소리로 욕을 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어느 쪽이 우선 순위일까. 아리송했다. 차에서 내려 보니 남자의 스타렉스가 오르막으로 오십미터쯤 후진하면 해결될 것 같은데, 내리막 후진은 배가 넘는 길이었다. 그런데 스타렉스은 꼼짝하지 않았다. 자동차 두 대가 으르렁거리며 기 싸움을 했다.
아무래도 스스렉스가 아반떼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눈치였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남자가 여자에게 양보한다. 하지만 남자는 고래 힘줄보다 더 질겼다. 세상 남자를 하찮게 보는 내 성질이 문제였다. 머저리같은 저 남자보다 내가 더 야무지다는 생각이 미치자 썩소를 날리며 내리막으로 후진했다. 애를 쓰며 내려가는 자동차의 코 앞에서 알짱거리며 따라 내려오는 저 인간심보는 무엇일까. 차를 비킬 수 있는 곳으로 내려오니 그때서야 모가지를 내놓고 고맙다는 말을 허공에 날리며 쌩 내려갔다.
재수 옴 붙은 날이라고 할까.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내려가고 상대편이 올라왔다. 또 남자였다. 이번에는 벤츠다. 조금 더 버티면 남자가 비켜 줄는지 모르지만 후진 잘 하는 내가 오르막으로 비켜 주었다. 벤츠를 탄 남자는 고맙다는 말이 없었다. 길을 비켜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부릉거리며 갔다.
산길에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 수양을 많이 해야 한다. 꼬부랑 길을 후진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지만 내가 당신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길을 비켜주니 마음이 편안했다. 오히려 휘파람을 불었다. 산중턱에 차를 세우고 마을을 내려보니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정겨웠다. 느긋함이 평화를 가져올뿐더러 지는 것이 곧 이긴다는 진리를 경험한 날이었다.
얼마 전, 서문시장에서 짐꾼 아저씨들 앞에서 박수를 받은 적이 있다. 명절을 앞둔 매목장이라 사람들이 북적이고 차들이 도로에 엉켜져 있었다. 신경질이 섞인 경적을 올리며 서로 먼저 가려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책책이 없었지만 갓길 쪽으로 내가 후진하면 소통이 될 것 같았다. 오십 미터 이상되는 거리를 머뭇거리지 않고 후진했다. 그때서야 서로 비켜주면서 도로가 정리되었다. 빨간색 아반떼가 교통이 정리된 길로 들어서니 아저씨 예닐곱 명이 손뼉을 치며 엄지를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후진에 자신이 생겼다. 후진은 무엇인가 양보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살면서 이런저런 예측하지 못하는 여러 장애물을 만나기도 한다. 죽기살기로 앞만 보고 달리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운전 뿐아니라 삶 속에서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지혜가 중요하다. 전진하는 것만이 인생의 성공확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양보와 배려는 미덕이며, 소통이다.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나도 뻔뻔하고 얌채같이 산 적이 많다. 상대편 운전자가 남자일 때는 아예 열쇠를 넘겨주며 차를 뻬달라고 했다. 물론 애교도 곁들인다. 여성은 약자라는 전매특허를 이용해서 남자들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얄팍한 짓을 한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여자가 이닌 신사(紳士)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승자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시원하게 물러서 주었다고 나르시시즘에 빠진 착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멋지고 괜찮은 여자이다.
*김아가다는 우리 수문대 출신으로, 감상적이고, 서정적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서술 형식으로, 즉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듯이 쓰는 수필가이다.
이야기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구조가 있다. 대립구조, 갈등구조라고 한다. 두 운전자가 으르렁거리는 것이 대립구조이다. 수필은 외적인 사건 이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 자기 내면의 갈등을 다룰 때는 내가 겪는 사건은 나의 실리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조건일 뿐이다.
여기서도 남자 운전자와 자기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의 원인 제공자일일 뿐이다.
* 김아가다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카톨릭에 아주 열성이며, 성격이 아주 밝다. 지금까지 발표한 글도 아주 밝은 내용이 많다.
수필이라면, 반드시 감성적으로 쓰야하는 것만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글이다
이 수필의 마지막에, 결어로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독자에게 훈시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닌지. 수필에서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멋지고 괜찮은 여자이다’라고, 눙치는 것은 괜찮은 수법이다. 독자에게 훈시한다는 느낌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 수필에서 작가가 말하는 ‘후진’은 양보이다.
삶에서 양보가 중요하다는 자기의 의견을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았던 자기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작가는 그냥 ‘양보합시다.’라고 말하는 것 보다. 사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의견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첫댓글 선생님 오랫만에 인사 드립니다
작가는 헐티재길이 넓혀지기전에 쓴 글이군요
어쩜 옆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 적은 글인듯 편하게 읽었습니다
또하나의 방식을 배움 합니다
선생님 내년애도 늘 건강 하시고 언제나 자비 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선생님곁에 머무시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