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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현존 사본 현황
A different version of the Honilgangni yeokdae 혀ㅏ애 jido
최선웅 편집장(계간 고지도) Choi Sun-woogn chief editor
1402년(태종 2년)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학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모사본 즉 이본(異本)만 전해진다고 한다. 현재 밝혀진 이본은 총 7본인데, 이 가운데 6점은 일본에 있고, 1점만 한국에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현존 사본 일람은 다음과 같다.
No. 지도명 크기(가로x세로) 제작연대 소장처
1.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163*150cm 1470년이후 日本 龍谷大圖書館
2.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276.8*219cm 1567-1592 日本 本光寺
3. 大明國地圖 169.2*134.7cm 1549-1593 日本 本妙寺
4. 大明國圖 174*135.5cm 1549-1568 日本 天理圖書館
5. 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 178-169cm 1526년 日本 妙心寺 麟祥院
6. 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 183*176cm 1526년 日本 宮內廳書陵部
7. 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 198.5*170cm 1526-1549 한국 고려대인촌기념관
용곡대 소장본에 대해서는 이찬(李燦)교수가 1982년 원형대로 모사하면서 국내에서도 여러 학자에 의해 연구된 바 있으나, 일본에 소장된 이본들은 모두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만 연구되었다. 따라서 본 소고는 아키오카 타케지로(秋岡武次郞), 미야자키 이치시다(宮崎市定), 운노 키즈다카(海野一隆), 히로나카 요시오(弘中芳男), 다카하시 타다시(高橋正), 킨다 아키히로(金田章裕), 카와무라 히로타다(川村博忠), 미야 노리코(宮紀子), 이노우에 미츠유키(井上充幸) 등 일본의 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위의 일람에서 용곡대와 본광사 소장본은 지도명이 동일하고, 본묘사와 천리대 소장본은 지도명이 없어 임의로 붙인 것이며, 묘심사와 궁내청, 고려대 소장본은 변형된 지도명이지만 모두 동일하다. 경도대 킨다아키리로 명예교수에 따르면 지명 등을 포함해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용곡대와 본광사, 본묘사, 천리대 소장본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계통의 지도로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했으며, 특히 시기가 앞선 용곡대와 본광사 소장본, 약간 늦은 본묘사와 천리대 소장본과는 각각 별개의 그룹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노우에 미츠유키 교수는 명나라 학자 양자기(楊子器, 1458-1513)의 발문이 있는 묘심사와 궁내청, 고려대 인촌기념관 소장본을 모두 양자기발여지도(楊子器跋輿地圖)로 분류하고, 16세기 명나라에서 제작된 사본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한반도를 그려 넣고 지도명을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 이와 유사한 지도가 일본 수호시(水號市)의 창고관(彰考館)과 중국 여순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고,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화동고지도(華東古地圖)도 양자기도 계통으로 분류하고 있다.
본광사 소장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본 시마라바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 소장되어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종이에 채색으로 필사된 지도로, 크기는 가로 276.8cm, 세로 219cm로 용곡대 소장본보다 1.6배 가량 크다. 지도 용지는 가로 133cm, 세로 37cm 크기의 종이를 가로로 3매, 세로로 6매 총 18매를 이어 붙여 한 장으로 만들고 뒷면을 두껍게 배접했다. 도폭이 워낙 커서 종횡으로 각 여덟 번 접어 보관한 관계로 접힌 부분에 손상이 있고, 특히 오른쪽 하단 부분의 손상이 심하다.
일본 경도대학교의 미야 노리코 교수에 따르면 시마바라번(島原藩)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보리사(菩提寺)인 본광사에 전해지는 지도는 필적과 곳곳에 보이는 오자, 지질, 안료, 수파묘(水波描)의 묘사 방법 등을 통해 조선에서 전래된 지도를 에도(江戶)시대에 일본에서 모사한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한반도를 가장 큰 행정단위인 도별로 색을 달리 채색했다든지 빽빽이 채운 무수히 많은 타원형의 부호 하나 하나에 지명을 기록한 양식은 에도시대에 발달한 국회도(國繪圖)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제목 밑에는 역대 국도명이 적혀 있고, 지도 하단에도 권근의 발문이 들어 있어 지도의 체제는 용곡대 소장본과 거의 유사하다. 다만 지도의 제목 끝 부분이 용곡대 소장본은 ‘~~之圖’로 되어 있으나, 이지도에슨 ‘~~地圖’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지도의 채색은 적색, 갈색, 황색, 녹색, 감색 등 5색을 사용했는데, 내륙의 호수와 하천은 짙은 감색, 바다는 옅은 감색으로 수파묘로 표시했다. 문자는 먹으로 썼다.
한반도의 지형 표현은 백두산에서 한반도 전역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연총식(連塚式)으로 묘사했다. 이와 같은 연총식 산맥의 표현법은 조선국팔도통합도(朝鮮國八道統合圖)나 해좌전도(海左全圖) 등 조선전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줄기 묘사법이다. 하천도 지류까지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분수계가 명료하게 나타나 있다. 중국의 하천도 한반도와 같이 훌륭할 정도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단지 산악에 대해서는 독립된 산 모양이 연속적 또는 부분적으로 그려져 있다.
용곡대 소장본과 본광사 소장본의 현저한 차이점은 일본과 유구 및 그 주변의 모습에 있다. 용곡대 소장본에는 일본 열도가 90도 돌려져 있으나, 본광사 조장본에서는 일본이 정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또 일본에 대해서는 배치 방향뿐 아니라 일본 지도의 종류 그 자체도 다르다. 본광사 소장본의 일본은 14세기 초에 발간된 백과사전인 <슈가이쇼(拾芥抄)>에 실린 일본 지도와 닮았고, 유구에 대해서도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에 실린 유구국지도(琉球國之圖)에 가깝다.
본광사 소장본의 성립 연대를 구명하기 위해 조선내의 지명을 고찰해 본 결과 첫째, 함경도의 압록강 상류부에 후대에 폐사군으로 불리는 것 가운데 우예(虞芮). 여연(閭延). 무창(茂昌)의 3군에 ‘고(古)’자가 붙은 군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 3군은 1456년(세조 원년)까지 존치했던 것으로 그 이후에 폐군되었다. 둘째, 함경도의 명천과 길주는 본광사 소장본에만 있는데, 예종 원년에 함경도 길주는 길성(吉城)현으로 격하되었지만, 그때 그것을 분할했던 명천(현)은 있고, 격하된 길성이 눈에 띄지 않는 대신에 길주의 이름이 보인다. 이것은 일단 격하된 길성이 다시 길주가 괸 1512년(중종 7년) 이후의 상황으로 간주된다. 이 두 지방명이 병기된 것은 1513년(중종 8년) 이후의 상황으로 간주된다. 셋째, 전라도 광주와 충청도 충주가 기재되어 있다. 광주는 1489년(성종 20년)부터 1501년(연산군 7년) 사이에 격하되어 광산현이 되었고, 충주는 1549년(명종4년)부터 1567년(명종22년) 사이에 유신현(惟新縣)으로 격하되었다. 따라서 이 두 기간은 지도 성립의 기간에서 빼지 않으면 안 된다. 넷째, 경상도의 거제도에 수영이 기록되어 있지만, 거제도 오아포(吾兒浦)에 있던 수영은 1604년(선조 37년) 고성의 두룡포(頭籠浦)로 이전해 조선말까지 그대로 있었다. 또 같은 경상도의 창원에 있는 병영은 1603년(선조 36년)에 진주 촉석산성에 옮겨 조선말까지 변하지 않았고, 더욱 울산에 있는 수영이 그려진 것은 적어도 임진왜란이 시작되는 1592년 이전이다. 따라서 본광사 소장본의 성립 연대는 빠르면 1513~1549년, 늦으면 1567년~1592년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본묘사 소장 대명국지도
일본 쿠마모토시(熊本市)에 소재하는 본묘사(本妙寺)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히고(肥後)에 봉해진 이후 1591년(天正 19년) 오사카의 서룡원(瑞龍院)을 옮겨 개창한 일연종(日連宗)의 명찰로 키요마사와 관계가 있는 지도가 이곳에 전해지고 있다. 사전(寺傳)에 따르면 “1592년(天正 20년) 정월 조센노에키(朝鮮의 役, 임진왜란)를 일으킨 히데요시가 키요마사에게 전략을 지시하면서 이 지도를 하사했다.”고 하나 확증은 없다. 이 지도는 1988년 4월 25일의 서일본신문 석간에 게재되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지도는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로 불린다.
일본의 지라학자 아키오카 타케지로의 저서 일본지도사(日本地圖史)에 이 지도에 대한 기술이 있다. 이 지도는 종이를 8매 이은 도폭에 그려졌고 족자로 되어 있는데, 족자의 크기는 가로 176cm, 세로 227.6cm이고, 지도의 크기는 가로 136.3cm, 세로 169.6cm이다. 묵필로 담채(淡彩) 부분이 있고, 지명은 대부분 4각이나 원형의 붉은색 위에 묵서하거나 백색의 4각이나 장방형, 원형 안에 묵서한 것이 있고, 일부는 백색 형태로 글자가 없는 것이 있다.
지도를 분석해 보면 이 지도는 일본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지도가 포함하는 범위는 1402년에 제작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거의 같고, 중국 오른쪽에 조선이 있고, 그 밑에 일본이 그려져 있어 이 같은 범위의 지도가 계속해서 16세기 말경까지 조선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대명국지도를 놓고 보면 중국과 조선의 형태는 대체로 비슷하나, 일본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크게 다른 점은 지도 북쪽의 지형이 거의 직선에 가까운 밋밋한 해안선으로 이뤄져 바다에 둘러싸인 대륙의 형상이다.
일본 지도는 역시 행기식(行基式) 지도 계통이고 위치는 거의 바르게 놓여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달리 혼슈(本州)와 시코쿠(四國), 큐슈(九州)가 따로 섬으로 그려졌고, 시마노쿠니(志摩國)가 육지와 떨어져 섬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의 일본 지도와 동일하다. 그리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없고 <해동제국기>의 지도에서 보이는 혼슈 북쪽의 에비스지마(夷島)가 역시 대명국지도에는 그려져 있다. 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없고 <해동제국기>의 지도에 그려진 유구국지도가 역시 대명국 지도에 그려져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대명국지도의 일본 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내용이 아닌 그 이후의 자료인 <해동제국기>의 일본지도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명국지도라는 지도명은 본묘사에서 붙인 이름이다.
천리대 천리도서관 소장 대명국도
일본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에 소재하는 천리도서관은 천리대부속도서관으로 여기에 용곡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계통의 지도가 소장되어 있다. 지도에 지도명이 없어 도서관에서는 ‘중국전도’라고 가칭하고 있으나, 본묘사 소장 대명국지도와 같은 계통의 지도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대명국도(大明國圖)라 부르게 되었다. 지도는 비단에 채색으로 정밀하게 그린 필사도로 크기는 가로 174cm, 세로 135.5cm이고 족자 형태로 되어 있다. 이쉽게도 간기가 없고 지도의 내력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해안선의 형태나 지도의 분위기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거의 같으나, 지도 북쪽의 지형이 본묘사 소장 대명국지도와 같이 직선에 가까운 밋밋한 해안선으로 이뤄져 바다에 둘러싸인 하나의 대륙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밖에 일본이 바르게 그려졌고, 대륙 남쪽 바다에 지명이 가득한 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다른 점이다. 또 하천이나 호수, 바다 등 모든 수부는 담록색이나, 황하는 황토색이고 중국 서쪽에 쪽으로 흐르는 흑수(黑水)로 여겨지는 하천은 청색으로 표현되었다.
이 지도의 제작 연대는 먼저 중국의 지명으로 보면 적어도 1467-1524년, 즉 명나라 중기의 자료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일본과 유구는 <해동제국기>의 지도를 따르고 있어 이 기간 동안이나, 1568년을 넘지 않는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를 보면 1469년(예종원년)에 천하지도(天下之圖)가 만들어지고, 1481년(성종 13년)에 대명천하도(大明天下圖)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1511년(중종 6년)에는 홍문관에서 천하여지도(天下輿地圖)룰 찬진하고, 1519년(중종 14년)에는 황명일통지리도(皇明一統地理圖)가 각각 헌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 특히 중종 연간에 중국으로부터 많은 지도가 들어오면서 그대로 헌상되거나 조선을 증보해서 한층 상세한 지도를 바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천리대 대명국도가 갖는 상세함과 화려함은 이와 같은 찬진지도의 일종이라는 것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다. 지도의 형태로 봐서 천리대 소장본과 본묘사 소장본의 원도는 의외로 이 같은 지도 가운데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로 보아 천리대 대명국도의 제작연대는 대략 16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묘심사 인상원 소장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일본 교토시(京都市)에 소재하는 인상원(麟詳院)은 임제종(臨濟宗) 대본산인 묘심사(妙心寺)파의 사찰로, 원래 에도막부의 3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유모인 카스가노 쓰보네(春日局)를 위해 건립한 보리사(菩堤寺)이다. 인상원에 소장되어 있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1935년 4월 경도도립박물관에서 개최된 묘심사명보전람회에서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란 이름으로 전시 공개된 후 1956년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고찰과 해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큰 족자로 표장된 이 지도는 나무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덮개의 겉면에는 ‘대명국지리도(大明國地理圖)’라 쓰여 있고, 덮개 뒷면에는 “寬永十三年頃德川家光公所寄附也元衝立鏡矣向來難護持係明治二十年夏製表裝以傳永遠 麟詳校割”이라고 지도의 내력이 쓰여 있어 이 지도는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1636년경 인상원에 기증한 것이다. 지도에 세로로 길게 난 2개의 흠집으로 보아 원래는 병풍에 붙어 있었던 것을 1887년데 지도를 떠어 족자로 만들었다. 지도의 표면은 거무스름하게 퇴색되고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선이나 지명이나 내용의 가독은 불가능할 정도이다.
지도 본체는 가로 179cm, 세로 176cm의 크기로 거의 정방형이고, 비단에 그려져 있다. 지도 맨 위쪽에는 본묘사의 대명국지도와는 달리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라는 지도명이 있다 지도가 그려진 범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달리 철저하게 중국과 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떨어져 나간 지도 하단에 오른쪽 난에는 천하의 위소명(衛所名)이 열거되어 있고, 가운데 난에는 이 지도의 원도를 제작한 중국 명나라 학자 양자기(楊子器)의 발문이 쓰여 있고, 맨 왼쪽 난에는 지도를 보기 위한 범례가 글로 기재되어 있다. 범례 글 뒤에는 ‘嘉靖五年歲次丙戌春二月(吉州)’라고 쓰여있다. 가정 5년이면 1526년이고 조선 중종 21년 때로 이지도의 제작 시기가 된다.
궁내청 서능부 소장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궁내청(宮內廳)은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관리를 받는 황실관계 국가사무를 담당하는 곳이고, 서릉부(書陵部)는 황실에 전하는 고전적과 고문서를 소장 관리하는 곳으로 역사적 자료가 45만 점에 달한다. 이곳에 묘심사 인상원의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같은 형태의 지도가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 역시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졌고 크기는 가로 183cmm 세로 176cm로 족자로 만들어져 있다.
지도의 제목이나 하단부의 천하의 위소명, 양자기의 발문, 범례 등이 묘심사 인상원의 지도와 동일하고, 인상원 지도에 비해 대체로 보존이 양호하고 색상이 선명하여 지도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 지도 역시 범례 말미에는 ‘가정5년(嘉靖五年)’이란 연도가 기재되어 있어 지도의 제작 시기가 1526년임을 알 수 있다.
묘심사와 궁내청 소장본 지도와 거의 같은 지도가 경도개 문학부 지라학교실에 소장되어 있다. 이 지도는 에도시대에 일본에서 모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도대가 2001년 입수한 것이라 한다. 종이에 그려진 이 지도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 180cm의 정방형으로, 조선과 중국의 주요 도성에만 채색이 되어 있고 그 밖에는 단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묘심사 소장본은 마모가 심해 지도의 내용이나 지명을 읽을 수 없는 반면 이 지도는 내용이나 지명 등이 대단히 선명하여 지도가 지니는 유용성은 의외로 크다고 본다.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소장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이 지도는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졌고, 크기는 가로 198.5cm, 세로 170cm로 두쪽 병풍으로 되어 있다. 지도의 크기나 내용은 물론 필체, 채색에 이르기까지 묘심사 인상윈의 지도와 흡사하다. ‘가정5년(嘉靖五年)’의 연도도 존재한다. 역사지리학자 아오야마 사다오(靑山定雄)의 지명 고증에 따르면 1549년(명종 4년)부터 1567년(명종 22년)까지 충청북도의 충주가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는데, 유신현이 표기되어 있어 1526년(중종 21년)부터 1567년 사이에 양자기도를 원도로 필사된 것이라 한다.
지도에 포함된 지역의 범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달리 중국과 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그려졌고, 조선의 각 도별 구분이 두렷하고, 중국과 조선의 부분이 보완되어 있다. 특히 백두산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는 강조되지 않았으나, 이 지도에서는 뚜렷하게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지도는 1980년대에 일본에서 구입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 계간 고지도 창간호 24p-31p 까지 옮겨 적음:솔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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