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놀랍고 감동적인 실화!
1. 2023. 11.29.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33대
와 34대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다.
나는 그 소식을 접할 당시 최봉익 목사님이랑 신림동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치과 치료가 옛 동네인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최대 교단인 조계종의 실세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자승이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불교 당국은 소신공양이라고 하지만 수사당국은 여러 가능성을 염두
에 두고 다방면으로 수사하고 있다.
어떤 종교든 생명은 귀하게 여긴다. 또한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에
대해 경계하며 죄로 단정한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각종 의혹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가 이토록 허망
하게 세상을 등진 사건은 씁쓸하다.
2. 1973년 2월 여전히 바람이 차가웠다.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얼굴의 두 청년이 해인사에 들어왔다.
춘천과 대구에서 각각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세속의 연을 뒤로하
고 온 청년들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열 명이 넘는 행자들이 있었지만 둘은 나이도 같고
들어온 시기도 비슷해 금방 친해졌다. 둘은 서로 의지하면서 본격적
인 행자의 삶을 시작했다.
수백 명이 넘는 고참 승려들을 위한 밥 짓기, 설거지, 여러 채의 사찰
건물과 마당 청소하기, 군불 지피기, 빨래 등 산더미처럼 일리가 많았
다.
하지만 친구인 둘은 함께 하였기에 그 모든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었
다. 또한 장차 승려로서 불쌍한 중생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그런 일들
은 기꺼이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여러 날 승려가 되기 위해 행자와 수행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이들에게 각각 자기 스승으로부터 법명도 주어졌다.
춘천에서 온 이는 ‘자승’, 대구에서 온 이는 ‘계정’이었다.
자승과 계정은 1년 6개월 정도 함께 행자 동기로서 지내다가 조계종
의 정식 승려가 되어 각각 자신에게 주어진 길로 떠나면서 헤어졌다.
3. 자승은 야망과 꿈이 큰 승려였다.
그래서 총무원장을 지낸 9대 ‘경산스님’과 30대 ‘정대스님’을 스승
으로 모시고 적조사, 용주사, 보문사 등에서 승려로 살았다.
그러다가 2009년 조계종 제33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
로 당선되었고, 4년 후 재선에도 성공했다.
총무원장 임기를 끝내고는 동국대 건학위원회 고문이자 총재가 되어
동국대학교의 실권마저 쥐었다.
자승은 이렇게 화려한 이력과 권력, 부와 명예를 한 손에 쥔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들, 정치가들, 심지어 대통령 후보들
마저 찾아가 茶啖 나눌 정도로 그는 다방면에서 영향력을 드러낸 종교
가 였다.
4. 자승에 비하면 계정은 소소했다.
계정은 합천 해인사, 공주 마곡사, 청도 용천사 등에서 승려의 길을
걸었다. 자승과 달리 계정은 그 어떤 권력도, 부도 명예도 탐하지
않았다.
그저 불경을 외며 자신을 수행하는 평범한 승려의 길만 정진할 뿐
이었다.
사실 승려의 길도 자신의 선택보다 대구의 한 병원장이면서 불심이
깊은 아버지 소원으로 네 아들 중 셋째아들인 자신이 선택되었을 뿐
이었다.
계정은 불교철학에 심취할수록 도리어 마음이 공허해졌다.
우울증 마저 찾아와 승려의 길을 계속 걸어갈 자신도 없었다.
승려가 된 지 10년이 되었을 때 계정은 결단했다. 승복을 벗고 환속
하기로 말이다. 여러 날 번민과 고민을 해도 그 길만이 자신이 살길
이었다.
환속하기 전날 밤, 청도 용천사에서 자승과 계정, 그리고 또 다른 승려
친구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삶의 고뇌를 나누었다. 다음날 계정은
절간을 뒤로한 채 세상으로 돌아왔다.
통신사업을 하며 잘생긴 외모로 CF모델로 데뷔해 여러 편의 광고도
찍었다. 의사 아버지를 둔 예쁜 한 여성을 만나 결혼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해 절간에서 있었던 순진한 그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연속되는 실패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배운 것이 불경을 외며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 매달 2번씩 대구 팔공산
갓바위 올라가 108번 절하며 부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더 고통스러웠다.
더 이상 자신을 버틸 힘이 없었던 그는 생을 마감하려 했다.
대구 삼덕 소방서가 보이는 한 설렁탕집에서 소주를 마시고는 마지막
으로 아내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전화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의 아내는 반갑게 맞으며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하니 얼른 오라 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어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 평소 자신을 전도하려 했던 송이 아빠를 만나 복음을
듣고 마침내 바울처럼 그날 극적으로 주님을 영접했다. 3일 후
부터 새벽예배까지 나갔다.
막다른 길목에서 주를 만난 그 기쁨과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날 이후 승려로서 도를 닦을 때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이 그의
생을 덮어버렸다.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워 그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다. 승려가 아니라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늦은 나이였지만 칼빈대학교에 들어가 성경과 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다.
승려에서 목사가 된 그는 지금 자신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코스타
강사로 일본과 필리핀 등 선교지에 다니면서 전하고 있다.
어느새 그의 나이도 내일 모래면 칠순을 맞이하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같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가 바로 최봉익 목사다!
한때 계정과 자승은 같은 길을 출발했지만 자승은 불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계정은 목사가 되어
지금도 복된 삶을 살고 있다.
* 인생은 누구의 손에 붙들리느냐의 차이다.
< '23.12.8. 김민영 블로그 >
※°♧° 신앙과 '인간의 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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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
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
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목사
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게 사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
수명은 97세다. 고 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