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70년,기적의70년]7부작中 4回 민주화와 80년대|자유시간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 4 回 민주화와 80년대 |
| ▲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김성환 · 홍순계씨(왼쪽부터)가 지난 28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시위가 벌어졌던 명동성당 입구는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앞두고 대규모 화단이 조성되면서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김춘식 기자. | |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들…타협의 민주화를 쟁취하다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4> 민주화와 80년대명동성당 농성이 민주화 운동 확산 계기 … 넥타이부대 참여로 6·29선언 이끌어내김영삼 · 김대중 분열로 정권교체 실패 …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 빠르게 거쳐전근대적 권위주의 정치 답습 한계도 “여야 합의 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고,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한다.”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당시 집권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 지도자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은 세계적인 민주화 물결에 합류하게 됐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는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 일본의 민주화는 패전 후 점령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 의해서 강요된 ‘외부 세력에 의한 민주화’였고, 대만의 민주화는 국민당이 자유화와 민주화의 속도를 조절한 ‘위로부터 통제된 민주화’였다. 반면에 한국의 민주화는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비용’을 치르고 쟁취한 민주화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시민의 함성 동아시아 민주주의 새 역사 쓰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년 6월. 서울 명동성당 앞 거리는 학생과 직장인들이 뒤엉킨 시위대들이 뿜어내는 민주화 투쟁 열기로 뜨거웠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막아 서자 자욱한 연기와 함께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구호를 외치던 김성환 씨(당시 28세)는 달려드는 전경을 피해 황급히 명동성당 구내로 몸을 숨겼다. 시위 대열에 섰던 회사원 홍순계 씨(당시 30세)의 흰색 와이셔츠도 최루탄 가루와 눈물로 범벅이 됐다. 건물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너도 나도 두루마리 휴지를 창 밖으로 내던지며 시위대에 호응했다.
2015년 5월 28일. 시위대로 가득 찼던 명동성당 앞 계단엔 이제 푸른 화단이 조성돼있었다. 김성환 · 홍순계 씨는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감회에 젖었다. 김씨는 명동성당 뒷 편으로 이어진 계성여고를 바라보며 “예전엔 성당과 담벼락으로 막혀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담 너머로 물과 김밥을 건네주며 응원하곤 했다” 고 말했다. 홍씨도 “명동성당은 당시 경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민주주의의 해방구였다. 학생과 직장인들이 이곳에 삼삼오오 모여서 밤새도록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 회상했다.
화이트칼라들 퇴근 후 명동 농성장으로 ... 예기치 않게 시작된 명동성당 농성
1985년 2·12 총선에서 시작된 군부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화 세력 간에 ‘밀고 당기기’는 2년 넘게 별 다른 결론 없이 장기화됐다. 이런 대치 국면이 무너진 것은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ㆍ13호헌 조치였다.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겠다고 밝힌 그의 담화문은 일순에 민주화 운동의 불을 댕겼다. 정권과 민주세력의 갈등은 거리에서의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 고 폭로한 것이다. 정권의 조직적인 은폐 사실은 국민의 분노를 불러왔고, 이를 계기로 5월 27일 범 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발족했다. 연이은 시위 공방 속에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중태에 빠지면서 국면은 크게 바뀌었다. 거리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졌고,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가세하는 범국민민주화운동으로 커졌다. 다음날인 6월 10일, 대학생뿐만 아니라 과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회사원들까지 합세한 시위대가 민주화의 성지(聖地)인 명동성당 앞 언덕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명동성당 농성대의 일원이었던 김성환(56)씨는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개 시위가 벌어지면 1시간 내로 진압이 되곤 했는데, 그날만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사람들은 골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또 시위를 벌였고…. 그게 하루 종일 계속됐죠. 그때 누군가 명동성당으로 가자는 얘기를 꺼냈고, 그 말이 입 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퍼졌어요. 해가 저물자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었어요. 한 천 명쯤 됐을 거예요. 그리고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철야농성이 시작됐죠.”
김씨는 서울대 재학시절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제적된 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6월항쟁에 참여한 청년 운동가였다. 그는 당시의 뜨거웠던 민주화 열기를 보여주는 일화를 들려줬다. “하루는 한 시민이 다가와 고생이 많다며 흰 봉투를 주고 갔는데, 당시 돈으로 10만 원이 들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과 지지가 대단했었다” 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에 결정타를 날린 건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화이트칼라 중산층의 합류였다. 당시 현대해상화재보험 대리였던 홍순계(58)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홍씨는 “동료들 사이에 퇴근 후 을지로에서 골뱅이에 맥주 한잔 하자는 게 하나의 암묵적인 신호였다” 며 “오후 6시가 되면 명동성당에 모여 밤새 농성을 하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그러다 보니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잠이 든 적도 있다” 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함께 따라왔던 후배 여직원이 잡혀가는 학생을 구하려고 경찰에 달려들었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만큼 그땐 정권의 폭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팽배해 있었다” 고 말했다.
명동성당에 간 이유를 묻자 그는 “마음 속에 죄책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80년대초 전두환 군부 세력이 나라를 뒤집었을 때에 군복무 시절이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항상 비굴함이랄까. 역사 속에서 죄의식을 느껴왔다” 고 말했다. 그는 “명동성당에 머물면서 매일 밤마다 혹시 군대가 투입되는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뭔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 기분은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6월 15일까지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은 거리에서의 민주화 항쟁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계기가 됐다.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경찰력만으로 시위대를 장악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선택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의 ‘호헌철폐 직선쟁취’ 요구를 받아들 일 것인가, 둘 중 하나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온건파의 주도로 ‘6·29선언’을 선택했다.
| ▲ 6·10 규탄대회가 열린 명동성당 앞에서 시위를 하는 많은 사람들. | |
87년 체제는 타협의 민주화
1987년의 민주화는 6월 항쟁이라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와 6·29선언의 발표, 이에 대한 야당 지도자의 수용이라는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결합한 ‘타협의 민주화’였다.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는 권위주의 독재와의 단절을 요구했으나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주도한 제도권의 정치 엘리트들은 협상과 개혁을 선호했다. 6·29선언 때까지는 독재와의 단절론이 우세했지만 6ㆍ29선언 이후에는 제도권의 정치 엘리트들이 민주화의 의제와 속도에 관한 협상을 주도했다. 이들은 협상을 통해 개헌과 정초선거(定礎選擧,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선거)를 이른 시일 내에 마무리했고, 단절을 주장하던 재야 ㆍ 운동권 세력은 이 과정에서 배제됐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인 것도 치밀한 노림수에 따른 결단이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경제적으로는 성공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여기에 민주화 지도자인 ‘양김’(김영삼ㆍ김대중)을 분열시키고 지역주의를 동원한다면 민주적 선거를 통해서도 계속 집권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정치적 계산을 했다. 권위주의를 유지하는 것보다 계속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선호했던 그들은 권력에 남기 위해 권위주의 체제를 버리는 것을 양보했던 것이다. 실제로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의 분열과 지역주의의 영향으로 민정당 노태후 후보가 당선됐다. 김성환씨는 “당시 민주화 진영에서 단일화를 이뤄내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며 “양김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 말했다.
공고화 과정 거친 한국식 민주주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사망하지 않았다.
1987년 6월 민주화 이후 한국인들은 반년 만에 직선제 개헌을 완료하고 그 해 12월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선출했다. 이후 한국식 민주주의는 빠르게 ‘공고화’의 과정을 거쳤다. 1997년 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룸으로써 10년 만에 ‘압축적 민주화’를 달성했다.
‘압축적 민주화’는 선진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의 고비마다 민주주의 지도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래서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정치 지도자인 1노(노태우)와 3김(김영삼 ㆍ 김대중 ㆍ 김종필)에 의해서 한국식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시기를 ‘1987년 체제’ 또는 ‘3김시대’라고 부른다.
1987년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신군부의 핵심 인물이자 5공화국의 2인자였다. 하지만, 그는 권위주의로 회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떨치고 민주주의의 전복을 노리는 강경 군부세력으로부터 연약한 신생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은 노 대통령이 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부 출신인 노 후보의 당선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민주화를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대세로 만들었다.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였으나 3당 합당을 통해 집권 여당의 후보로 대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은 그가 군부개혁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하나회를 비롯한 정치 군인들을 숙청하거나 병영으로 복귀시켰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명명하면서 민주주의 공고화의 필수적 요건인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고하게 이루어냈다. 집권 후반기에는 군부 출신 전직 두 대통령을 군사반란, 내란, 부패혐의로 사법 처리했다. 이는 많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와 권위주의 과거 청산의 모범 사례가 됐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신생 민주주의가 공고화됐다는 가장 중요한 척도다. 한국은 1997년 외환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오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후보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달성하면서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선두를 달리게 됐다. 그 후 민주진보정권의 10년 집권에 이어 2007년 말에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이 두 번째 정권교체를 이루어냄으로써 한국은 두 번에 걸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민주주의 공고화 테스트’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통과한 국가가 됐다.
이제 모든 한국인들은 공정하고 경쟁적인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87년 체제는 민주주의만이 ‘우리 동네의 유일한 게임’이라는 것을 모든 국민 속에 확고히 자리 잡게 만든 공로가 있다.
혈연 · 지역주의 … 청산할 과제 산적 ... 가산(家産)주의 정치 답습 한계도
87년 체제의 지도자인 3김은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면서, 권위주의로의 회귀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공고화된 민주주의를 안착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스스로 전근대적인 가산(家産)주의 정치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가산주의란 측근과 가신을 중심으로 정당과 파벌을 운영하면서 충성에 대한 대가로 복지를 책임지는 정치 행태를 말한다.
특히 김영삼ㆍ김대중 대통령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와 싸우면서도 조직의 보존을 위해서 권위주의 독재자들의 가신주의와 비밀주의, 조직 내부의 권위주의 관행과 행태를 그대로 모방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가산주의 행태는 가신정치, 친 · 인척주의, 연고주의, 지역주의, 인치주의, 공공영역의 사유화 등의 모습으로 한국 정치에 내장됐다. 그 결과 양김 정부는 임기 말기에 가산주의적 부정부패로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통치불능의 식물정부가 됐다. 민주화가 이뤄진 87년 체제 속에서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 행태와 3김 시대의 전근대적 가산주의가 서로 공존하면서 충돌한 것이다.
홍순계씨는 “6월항쟁 때만 해도 직선제만 쟁취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지만, 점차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제는 87년 직선제 체제만으론 민의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
6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한국식 민주주의 앞에 드러난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나가느냐가 앞으로의 새로운 과제가 되고 있다.
- 중앙일보 |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천권필 기자. | 201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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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 인근 거리에서 시위에 나선 시민과 학생들. [중앙포토] | |
민주화 주역에서 정치 주류가 된 486세대
6월항쟁 선봉의 그때 그 사람들김대중 정부 때 정치권 본격 진입2004년 탄핵 역풍 대거 국회 진출 ... ‘신선함’ 잃고 ‘무능함’ 위기 맞아 1987년 6월 항쟁은 이른바 ‘486’ 정치인으로 불리는 민주화 세대를 낳았다. 486은 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을 일컫는 말로 지금은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됐다. 당시 ‘호헌철폐,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외치며 거리투쟁의 선봉에 섰던 486인사들은 6·29선언 이후 “민주화를 이뤄낸 주역”이라는 훈장을 받게 됐다.
486세대가 본격적으로 제도 정치권에 진출한 건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다. 6월 항쟁 당시 20대였던 그들은 사회 진출 이후 30대가 되면서 정치권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친노 핵심인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1981년 ‘부림 사건’의 주인공이었고, 이광재 전 강원지사 역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정책국장 출신이다. 2004년 총선에서는 탄핵의 여파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486 국회의원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이때 국회에 진출했던 운동권 출신 정치인은 이인영, 우상호, 최재성, 정청래 의원 등 10여 명에 이른다.
정치 권력에 진출한 민주화 세력은 다양한 정치 실험을 시도하며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다음 총선인 2008년 선거에서 줄줄이 낙마하면서 ‘탄돌이’라는 반짝 정치 세력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당내에서도 계파 갈등에 시달리며 구태정치를 답습했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야당 내 486 정치인들의 모임인 ‘진보행동’은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새로운 정치실험을 하려고 시도했지만 기존 계파의 벽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했다” 면서 해체 선언을 하기도 했다.
486세대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이들이 변화와 혁신의 동력이 아닌 ‘물갈이’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훈장은 이제 무능함으로 비치고 있다. 최창렬 용인대(교양학부) 교수는 “486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명분 아래 아직도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있다” 며 “앞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은 지양하고 중도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 중앙일보 | 천권필 기자 | 201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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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한계
‘87년 체제’ 무엇을 남겼나더 강해진 경제 체력 … ‘민주정부 무능론’ 잠재워 우리는 60년대, 70년대의 산업화를 ‘압축적 산업화’로 부르는 것처럼 ‘87년 체제’ 하의 민주화를 ‘압축적 민주화’로 부른다. 이는 1987년 민주화 이후 불과 10년 만에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달성했기 때문이다. 정치 군인들은 병영으로 되돌아갔고, 각종 선거 경쟁이 제도화됐다. 무엇보다도 평화적 정권교체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남으로써 모든 한국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선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권력을 잡을 수 없다는 규범을 내면화하게 됐다.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절차적으로 공고화됐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과거 권위주의 체제보다 우월한 실적을 달성함으로써 ‘민주정부 무능론’을 잠재웠다. 권위주의정부 시대(1961년-1987년)와 민주정부 시대(1987년-현재)의 경제 실적을 비교하면, 경제성장률을 제외하고 총고정자본형성, 국내투자율, 국제무역수지, 인플레이션, 실업률 등에서 모두 민주정부가 확연하게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성장률도 민주정부가 두 차례에 걸쳐 외부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외환금융위기를 겪은 것을 감안하면 권위주의보다 열등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이룩한 경제 실적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민주정부들이 거둔 좋은 실적이 ‘좋은 민주적 거버넌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된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능력에 회의하기보다, 민주주의만이 ‘우리 동네의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제 한국에서 누구도 민주주의의 전복 가능성을 염려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공고화된 한국 민주주의가 질적(quality)으로는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몇몇 분야에서는 ‘민주주의의 후퇴’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후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역은 정치적 자유다. 국제인권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김영삼 정부부터 ‘정치적 권리’와 ‘시민적 자유’에 2등급을 부여함으로써 한국을 ‘자유로운(free)’ 민주국가로 분류했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에는 정치적 권리를 1등급 상향시켜 한국의 평균 자유지수를 1.5등급으로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정치적 권리를 다시 2등급으로 강등시켜 한국의 자유지수는 김영삼 정부 시대인 1990년대로 후퇴했다.
언론자유의 후퇴는 더욱 심각하다. 프리덤하우스와 ‘국경 없는 기자회’ 모두 이명박 정부 시기에 한국의 언론자유 지수를 ‘부분적으로 자유로운(partly free)’ 등급으로 강등했고, 아직까지 그 등급이 지속되고 있다. 인터넷언론자유(freedom on the net)도 2011년부터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강등됐고, 아직 자유로운 국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 도약을 이룩하지 못하고 몇몇 분야에서 질적 후퇴를 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산업화와 마찬가지로 ‘압축적’으로 이뤄졌다. 전근대적인 권위주의의 제도와 문화를 청산하지 못한 채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가신주의, 연고주의, 인치주의와 같은 전근대적인 관행과 문화의 찌꺼기가 ‘현재’ 민주주의에 들러붙어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고 근대와 전근대 세력 간에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여기에 정보통신(IT)혁명에 힘입어 탈근대적인 소셜미디어 민주주의까지 도입되면서 온라인 상에서 세대, 이념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가장 세련되게 해결하는 정치 체제다. 현재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갈등 구조는 이념, 정체성, 이익 갈등과 같은 비동시적 갈등이 공존, 충돌하는 복합 갈등이다. 이런 갈등은 부정하거나 전체주의적 틀에 가두어 버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복합 갈등을 다원주의적 공존과 권력공유 민주주의의 제도 디자인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질 높은 민주주의로 한국 민주주의를 재도약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과제다.
- 중앙일보 |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201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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