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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다산多産 장학회외1편
김인술
배속에 자식을 남기고 아버지가 죽은 후 낳은 자식을 유복자遺腹子라 한다. 필자는 유복자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났다. 아버지는 1953년 사고를 당해 후유증으로 1954년 갑오년 음력 2월 19일 돌아가셨고 나는 같은 해 음력 8월 7일에 태어났다.
위로 형 둘과 누나 둘이 있었지만 바로 위 누나만 남고 형 둘과 누나 하나는 어려서 전염병으로 잃었다고 들었다. 낳아서 키우다가 잃고 또 잃고, 잃고 하니 자식 키우는 농사가 참으로 어려웠으리라! 부모님은 자식을 또 잃지 않기 위해 바로 위 누나의 이름을 천년만년 오래가는 바위처럼 오래 살라는 소망을 담아 “바우” (바위의 전라도 사투리) 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 죽을까 봐 필자가 태어난 후 출생신고를 할 때에서야 누나도 같이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누나는 정상으로 신고가 되었는데 필자는 53년 생으로 한 해 먼저 출생한 것으로 호적에 오기誤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을 여의고 얻은 아들이라 어머니는 생명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자식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유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행여나 잘못될세라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조석으로 빌었고 걸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자식을 위해 기도하셨다. 필자는 지금도 어머니의 그 기도 내용을 외울 정도이니 얼마나 많이 빌었던가?
“어진 삼신 제왕님네, 어진 칠성 제왕님네 우리 열 살 먹은 김 씨 대주 머리 고뿔(감기) 하나 없이 건강하고 무병하게 하여주시고, 남의 눈에 꽃으로나 나부(나비) 같이 이쁘게(예쁘게) 보일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제수(행운)가 물 묻은 박적(바가지)에 참깨 앵기(엉기)듯이 디리 디리(다래다래) 앵기게(엉기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이런 기도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 고희를 넘긴 오늘날에도 그 기도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다. 불행하고 가난했지만 그런 보살핌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변산의 중심부 내변산 청림리靑林里 노적露積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동천洞天이다. 과거 급제자가 10명 넘게 나온 명당 터로 부안에서는 제일 노적第一露積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필자가 태어나기 1년 전 면 소재지에서 고개 너머에 있는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자식을 낳아 계속 잃으니 하루는 용한 점쟁이에게 처방을 물으러 가셨었다 한다. 점사占辭는 ‘대를 이을 자식을 하나라도 얻으려면 이 동네를 떠나라’였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든 마을을 떠나 청림리靑林里 노적露積마을로 이주한 것이다.
이곳은 6.25 전쟁 때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남로당원들이 빨치산이 되어 숨어들어온 곳으로 그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소탕 작전 때는 마을 주민들을 소개疏開 시킨 후 작전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곳이었고 아버지는 일거리가 많은 이곳에서 복구작업을 하시다 사고로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34세의 청상과부가 되셨다.
집안 어른들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시어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터에 모아둔 재산도 없이 어린 딸과 태중胎中의 자식만 남기고 아버지는 떠나셨고 모든 것을 떠안은 어머니는 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떠난 그해 음력 8월 필자가 태어났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남편의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가시밭길을 해치며 살아야 했다. 두 남매를 혼자 키워내야 하는 짐을 짊어지신 것이다. 5∼6년이 지난 후 큰댁에서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 그곳에서 살게 했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 집 짓는 과정에서 문살 깎는 구경을 하다 대나무 문살에 필자의 눈이 찔려 실명의 위기에 처했고 눈 치료를 위해 이모가 계시는 김제로 나와 당시의 큰 도시인 군산에서 치료를 해야 하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까?
이로 인해 김제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없는 살림에서 당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중학교부터는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야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시절이라 먹고살 만한 집안이 아니면 학교 가는 것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당시 분위기로 여자인 누나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지 못할 형편인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동네 한 어른께서 등록금을 빌려주어 가까스로 입학은 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겪었을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리고 그 빚을 갚아가며 때마다 수업료를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을까?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고등학교 진학의 발판을 마련했다. 때마침 풍년이 들어 진학할 꿈이 실현되었고 서울로 진학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어머니는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 변두리인 잠원동으로 이사하여 손에 익은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당신 주머니에 비상금이 없어도 아들의 비상금은 항상 챙겨 주시는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배려로 나는 궁한 티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마침내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당당히 전교생을 대표하는 학생회장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학생회장 선거운동 과정에 당선을 기원하는 부적을 만들어 학생복 어느 곳에 바느질로 부착해놓으실 정도로 아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당시 선거운동자금으로 예금해놓은 3학년 등록금을 찾아 써야만 했고 낙선하면 학교를 휴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당선되면 장학생 예우를 받아 등록금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절실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의 앞날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고 뒷바라지하셨던 때로는 통 큰 여장부이시기도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학교 추천으로 취직이 되어 이때부터 필자가 가사를 책임질 수 있게 됐고 어머니의 수고를 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벌어서 집도 마련하고 혼인을 하여 손주도 안겨드려 효도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 월급쟁이로는 요원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4∼5년 근무했을 때 건설사에 중동 붐이 일게 되었다. 1군 업체인 우리 회사도 중동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원해서 중동에 파견근무를 요청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어머니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잠시 불효가 되더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머니와 잠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나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손을 뒤로하고 중동 근무를 선택했다. 1년여간 무사히 책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비록 변두리지만 서울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고 혼인하여 그 이듬해 아들 손자를 안겨드려 작은 효도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를 안정시켜드린 후 내친김에 두 번째 중동 근무를 자원해 근무하던 중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을 접하고 3일 만에 귀국하여 정신없이 5일 장을 치렀다. 절망이었다. 어머니가 아들에 올인하셨듯 나 자신 또한 어머니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이 당장 내 삶의 목표였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무엇으로 위안 삼아 삶을 살아갈까? 하는 맨 붕 상태가 와버렸다. 장례 휴가를 마치고 현직에 복귀해야 했으나 어머니가 꼭 위험한 사지에서 불러들인 것만 같아 복귀를 포기하고 국내 근무를 선택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우연히 은행 통장을 발견했고 그 속에는 당시 300만 원이라는 꽤 큰돈이 예치돼 있었다. 뻔한 살림살이에 아끼고 아껴 표나지 않게 자식들을 위해 모아놓은 것이지만 차마 쓸 수가 없었다. 이후 이 돈을 어떻게 값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마땅치 않아 세월이 지나면서 세 자녀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쓰임이 많아져 뜻은 있지만 실행하지 못하다가 만학을 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그때까지 발간한 네 권의 책의 출판기념회와 어머니께 바치는 논문 봉정식을 기획했다. 그리고 이때를 기해 어머니가 남겨놓으신 300만 원이 당시 화폐가치로 환산하니 3,000만 원 정도가 되어 3, 000만 원을 종잣돈으로 하고 책의 인세와 판매 수익을 장학금으로 하는 어머니의 이름을 딴 ‘유이례 다산장학회’를 설립하여 다출산 가정을 선정해 장학금을 주어오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이 많은 집을 정말 부러워하셨다. 젊어서 먼저 낳은 자식들을 셋씩이나 잃었고 남편마저 젊어서 여의어 평생을 어린 자식들을 외롭게 키우며 사셨다. 필자에게도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당부하셔서 둘도 많다 하나만 낳으라.는 시절에 셋을 낳아 길렀다. 자식을 낳아 기르려면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경비가 발생한다. 따라서 많이 낳으면 힘들고 고생할까 봐 많이 낳으려 하지 않는 시대이다. 그러다 보니 저출산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출산을 장려하는 국가시책에도 부응하고 생전 자녀가 많아 다복한 가정을 소망하셨던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세 자녀를 낳아 길렀고 혼인한 아이들한테도 세 자녀 이상 낳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둘째까지는 의무이고 셋째부터는 애국이니 1억씩 장학금으로 내놓기로 해 큰 아들네가 셋째를 출산해 장학금 1억을 지급했다. 그리고 사회의 다출산 가정을 선정해 매년 장학금을 10년째 지급해 오고 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보은報恩 편지쓰기 운동
필자는 감히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 하면 ‘보은’이라 말하고 싶다. 은혜를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이다.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은혜, 나를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한 은혜, 그리고 편안하게 살게 해준 나라와 나라를 지켜준 선열들에 대한 은혜를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또한 이 세상 만물을 있게 한 하늘과 땅에 대한 은혜, 이런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사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우리는 은혜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勘案하여 ‘보은 편지 쓰기 운동’을 전개해 보면 어떨까 한다. 그리고 좋은 글들을 묶어 책으로 만들어 보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때그때 그분이 아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분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분들은 대부분 그러한 사연들을 한두 가지 이상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혹 이 책을 읽는 분들은 ‘보은 편지 쓰기 운동’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지를 써 은혜를 입은 분께 전달하고 그 편지를 복사하여 보내주시면 됩니다.
가능하다면 보은 편지 대회도 정기적으로 열어 볼 계획도 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사연을 가진 분들을 한군데 모시고 보은 잔치를 베풀어 드리는 것도 인생의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필자가 은혜를 입은 스승님께 보낸 오래된 보은 편지를 한 통 소개할까 합니다. 잘 된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솔한 마음을 담아 보낸 글로 처음 쓰시는 분들께 참고가 될까 하여 싣습니다.
은사님께!
선생님! 그간 강녕하시지요? 그리고 사모님 병세는 좀 어떠신지요? 오랜만에 찾아봬온 그날 반가우면서도 마음으론 표현하기 힘든 세월의 무상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제 마음속에 항상 버팀목 같은 분으로 의지해 오던 선생님께서 옥체가 상하시어 조금은 초췌憔悴한 모습을 뵈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동안 우울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추상秋霜 같은 호령으로 제자들을 지도하셨던 선생님의 옛 모습을 떠올리면서 정말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옛 모습에 저희들의 어릴 적 모습들이 추억이 되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지금의 제 모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주름이 한 둘 늘어나는 초로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다시금 실감했으며 정말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 시간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저는 몇 년 전부터 가끔 고향에 가보고 싶은 충동에 이끌려 고향을 찾곤 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저의 부모가 묻히신 부안! 호기심 많던 초등학교 시절과 청운의 꿈을 꾸었던 중학교 시절을 보낸 김제! 지난 2월에는 김제시에서 주관하는 지평선 아카데미에 초청되어 강의 가는 길에 고향 마을 분들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대접한 후 4~5백 명의 고향 분들에게 2시간 동안 강연을 했습니다.
3월엔 김제 시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2회에 걸쳐 직무 교양교육을 실시하면서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금의환향하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부모님이 살아 계서서 이 광경을 보시면 어떤 표정이실까? 그리고 은사님께서는?
저는 그날 강의에서 “오늘 이 자리에 서서 강연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그 옛날 남곡 중학교 시절 이공필 선생님께서 국사시간을 통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지도해 주시고 추천해 주셔서 읽었던「조선총독부」라는 책을 만나고부터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인생의 방향이 정해져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선생님을 자랑스럽게 소개했습니다. 오늘을 있게 해 주신 선생님께 서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 인사 올립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선생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면 이 일이 제 자신이 어릴 때 세웠던 인생의 방향과 일치하느냐를 항상 되물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주권을 빼앗기는 일이 또다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조선총독부」란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
저는 지금, 나라를 잃었을 때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을 하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우리 문화를 찾고 지키는 문화 독립군이 되자고 교육 때마다 역설합니다. 백범 선생님께서“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김구 선생님께서 꿈꾸셨던 평화의 나라! 문화국가를 위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지난 10월 중국 여행 중에 중경(충칭)에 들려 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하였을 때 백범 선생님 흉상에 큰절을 올리고 왔습니다. 그런 어른들의 애국심을 조금이나마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으로 늘 고민합니다. 이런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선생님께 항상 감사합니다.
지난번 찾아뵈었을 때 완당阮堂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비유하여 말씀하심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완당의 제자 이상적에 비유하셨지만 저는 이런 비유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지척의 거리에 살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점 다시금 죄송합니다. 지난 1월 제주여행 때 추사 기념관에 들러 서예평론가인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로부터 세한도에 얽힌 뒷이야기와 당대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선생과 얽힌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을 감안하면 생명을 담보해야 가능한 제주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제자의 도리를 다한 이상적은 정말 이 시대에 저희가 본받아야 할 인간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제 간의 의리가 무너지고 선생님들이 노동자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스승을 임금이나 부모와 같은 반열로 섬겼던 옛정서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선생님!
세상이 어떻더라도 저는 선생님과 같은 분을 만나 스승과 제자로 살아왔던 지난날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 앞으로도 오래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선생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저는 오래도록 행복이란 선물을 기대하겠습니다. 지난번 뵈었을 때 시력이 약해지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도 60이 넘으면서 시력이 약해져 “눈에 눈”이라는 눈 영양제를 먹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3개월분 1박스를 우선 보내봅니다. 드시고 혹, 도움이 되시면 3개월 후에 더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루에 한 알 아침이던 점심이던 식후에 드시면 된다고 합니다. 거르지 마시고 꾸준히 들어 보십시오.
선생님! 시간 되는대로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찾아뵐 때까지 내내 건강하십시오.
開天後개천후 5910(2013)년 癸巳年계사년 立冬節입동절
弟子제자 能山능산 올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은은 인간의 도리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라 생각합니다. 좁게는 부모에 대해, 조상에 대해, 스승에 대해 넓게는 자연과 국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사람의 도리일 것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동참을 기대합니다.
전북 부안 내변산 노적마을 출생
2024년 6월 월간 문학공간 신인상 수상으로 문단 데뷔
저서
▶ 잃어버린 생명의 밥상 (2006년 밀알출판사)
▶ 하늘에 길을 묻다 (2012 밀알출판사)
▶ 자식농사 잉태하면 늦다 (2015 밀알출판사)
▶ 인생의 4계 (2015 학예사)
▶ 생명의 밥상이야기 (2017 학예사)
▶ 하늘에 길을 묻다-수정증보 (2020 밀알출판사)
▶ 태훈(교)에서 카이스트까지 (2023 밀알출판사)
5. 논문
▶ 한민족 제천의례와 국조사전의 통시적 연구 – 박사논문
▶ 일제 이항의 성리학 연구 – 석사논문
6. 연재기고문
▶ 한국인의 생활문화 – 식품음료신문 30회
7. 수상내역
▶ 2005 신지식농업인장 수장 –농식품부 장관
▶ 2005 올해의 신지식인 선정 - 행자부장관
▶ 농식품부장관 상 - 2008년 (농업경쟁력강화 공로)
▶ 대통령표창 – 2013년 (농업경쟁력강화 공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