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도보 여행에서
을지로 입구역에 내려서 치과에 갔다가 진료를 받고 도보역사순례를 하였다. 시청역쪽으로 걸었다. 시청광장이 나오고 서울도서관 지하로 가는 길에 시민청이 있었다. 그곳에는 구경거리가 많았다. 조선시대 무기를 만들던 유적지가 있었고 일반인들이 장기자랑을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그림전시공간도 있었다.
개인이나 기업이 독점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열린(open)공간의 가치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것이 프랑스에서 유명한 공화주의(republic) 아닐까? 시민청을 나와서 덕수궁 정문을 지나서 충정로역 방향으로 걸었다. 오늘의 목표는 서소문순교자 기념탑에 가서 기도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빌딩을 지나서 기차길을 지나 푸른 나무숲이 보이는 곳에 기념탑이 있었다.
기념탑은 공사판 안에서 쓸쓸하게 서 있었다. 아직 큰 공사가 진행중 이어서 지저분하게 여러 가지 작업도구나 재료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탑의 중심부에 편하게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고양이가 도망을 갔다. 나는 탑을 바라보면서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려고 하였다.
조선왕조때 이곳은 사람들의 목을 베는 곳이었는데 ***년 신유박해 이후 ***명이 넘게 순교하셨다고 한다. 기념탑은 3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형틀인 “칼” 모양 이었다. 기둥의 끝에는 동그란 모양의 구멍이 크게 하나씩 있었다. 중앙의 기둥에는 십자가에 메달린 예수님이 계셨다
바로 옆에는 목에 형틀 “칼”을 쓰고 있는 순교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영성체 처럼 동그란 원이 있는데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이라는 마태복음 5장6절이 써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순교자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탑의 모양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나는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싶다고만 생각 하였는데 가까이 있는 순교자들의 기념탑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견진성사를 받은 지도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조금 늦게 온 것 이라는 후회가 생겼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나와서 식당에서 청국장을 사먹었다. 그리고 다시 서울 시립미술관 쪽으로 걸었다.
미술관 방향으로 걷다 보니까 오래된 건물인데 예쁘게 생긴 박물관이 보였다.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이었다. 미국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가 조선왕조 말기 고종때 만든 서양식 교육기관이다. 이곳에서 이승만 박사가 영어공부를 하였고 김소월 시인도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연세대학이나 고려대학이 가장 오래된 사립학교라고 생각 했는데 그것은 아니었다.
배재학당이 천주교 신학교와 함께 가장 오래된 사립 교육기관 이라고 한다. 아펜젤러 목사는 아주 훌륭한 사람인 것 같았다. 교훈이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는 마태복음 20장의 내용이었다. 성경책이 있었고 피아노(한국최초의 연주용)가 있었다. 건물이 아름답게 생겨서 다시 가보고 싶은 박물관이다.
배재학당 박물관에서 나와서 서울시립미술관 쪽으로 다시 걸었다. 미술관은 내부 수리중 이었다. 미술관 마당에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란시스코 교육회관 쪽으로 걸었다. 정동교회를 지나 캐나다 대사관을 지나 걷다가 왼쪽에 벽돌로된 막힌 경계선 너머에 동상의 머리 뒤통수가 올라와 보였다.
유관순 동상 인듯하여 이화여고 정문을 통해 들어가 보니 유관순 동상이 맞았다.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활짝 피고 양손을 벌리고 무언가를 찾고 찬미하는 모습의 동상이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느낌인데 가까운 곳의 아시시 프란시스코 동상과 비슷한 자세였다. 유관순 동상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예쁜얼굴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몸동작이 아름다운 동상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이화박물관에 들어갔다. 한국여성교육에 대한 기록이 많았다. 흥미로운 체험이었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과 어록과 훈장이 기억난다. 신앙심이 깊은 개신교 신자 같았다. 미국인 선교사 매리 스크랜튼 여사가 만든 이화학당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의 시작점이었다고 한다.
한국여성들이 이화여대를 숭배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은 최초로 한국에서 여성교육을 시작했고 현대적인 다양한 과목의 교육을 시도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여성엘리트가 아주 많아 보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한국에는 아직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군대 부사관들, 시골 할머니들은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실업계 고졸 여성들이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본적도 있다. 그리고 한국은 독서인구도 작은 사회다. 자기들만의 잔치와 자랑을 보는 것 같아 조금 씁쓸했다. 이화박물관을 나와서 건너편에 있는 프란시스코 교육회관에 갔다. 입구에 한쪽 무릅을 땅에 대고 하늘을 찬미하는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동상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근처에 평화의 소녀상이 있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위한 동상이었다. 이화여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여 전국 고등학생들이 기부금을 모아 만든 동상이라고 한다. 장소를 구하는데 힘들었다고 한다. 동상의 바닥에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가 있었다.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봤던 김복동 할머니가 생각났다.
김복동 할머니께서는 공부해서 이화여대에 갔으면 한명숙처럼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내가 농활 갔을 때 만난 시골 할머니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유관순 동상이 이화여고 벽돌 돌담으로 막힌 경계선 안쪽에서만 볼 수 있듯이 한국여성이 인권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이화여대 라는 경계선 안에서만 가능한 것 아닐까?
은근히 한국인들이 꺼려했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역사를 품어준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감사 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한국천주교회가 마음에 든다. 성노예 피해자들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모습이 마구간, 구유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열심히 다니셨군요. 서울 시내도 곳곳이 역사 현장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