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교실] 23. 돌은 가라앉고, 기름은 뜨고
사후세계는 생전 업의 결과로 결정
선업을 쌓는 것, 사후를 위한 저축
산 자와 죽은 자. 인간의 삶에 있어 이 보다 더 가슴 아프고 애달픈 관계가 있을까? 더욱이 그것이 만약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혹은 그에 비유할 만한 소중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라면, 그 공허하고 아득한 양자 간의 거리감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특히 산 자에게 있어 죽음은 미지의 세계이다. 도대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혹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며 지천을 떠돌아다니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은지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가슴이 저려온다.
그래서일까. 산 자는 죽은 자의 편안한 또 다른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싶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죽은 자를 천계에 인도해 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온갖 의식을 거행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하 이들이 좀 더 행복한 사후를 보장받도록 그들에게 많은 공양물을 바쳤다.
『가미니경』(伽彌尼經)에 의하면, 어떤 마을에서 죽은 자를 위해 법요를 하고 있던 한 촌장이 부처님께 ‘다른 바라문 사제들처럼 당신도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대답하신다.
“예를 들어, 여기 무거운 돌 하나가 있어, 이것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모두 기원한다고 하자. ‘돌아, 돌아, 떠올라라. 돌아, 돌아. 밖으로 나와라. ’아무리 열심히 기원한들 돌이 떠오르겠느냐?”
촌장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럼, 기름을 호수에 던져 넣고 모두 기원한다고 하자. ‘기름아, 기름아, 가라앉아라.’ 그러면 기름은 물속에 가라앉겠느냐?”
촌장은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생전에 생명을 해치고, 도둑질하고, 사음을 행하고, 실없는 말을 하고, 고자질을 하고, 거친 말을 내뱉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탐내고, 성내고, 잘못된 견해를 품었다면, 그의 사후, 설사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디 이 사람이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 주소서’라고 기원한다 해도, 그 사람은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반대로 살아 있는 동안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은, 그의 사후,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그가 지옥에 떨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어도 그 사람은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니라. 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물속에 가라앉으며, 기름은 뜨는 법이니라.”
초기경전을 통해 보는 한, 부처님께서는 바라문교에서 행하는 장의의례의 의미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사람의 사후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볼 수 있다.
선조에 대한 공양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권장하시지만,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운명을 바꾼다는 의미가 아닌, 감사보은의 마음에서 실행해야 할 일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냉정한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인과응보·자업자득이라는 불교의 기본적인 생각을 고려할 때 매우 납득할 만한 입장이다. 생전의 삶이든, 혹은 죽은 후의 삶이든, 그 삶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 주위에서 ‘우리 아무개는 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했어요. 혹시 지옥에 태어나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을까요?’라며 심난한 표정을 짓는 이들을 보게 된다.
그때마다 생전에 올바른 삶을 살며 선행을 쌓는 일은 자기 자신의 사후를 위한 저축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뒤에 남아 자신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주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日 도쿄대 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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