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8. 달마와 양무제의 만남-선법의 중국 전래
‘살찐 불교’비판…9년 면벽 禪의 새장을 열다
남인도 ‘왕의 아들’ 선법 전하러 중국에 오다
# 선법의 유입과 선종의 초조
달마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계승한 서천의 28조이자 중국선종의 초조로 불린다. 종문의 제일서로 불리는 〈벽암록〉이 달마에 관한 고칙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런 조통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선종의 초조에 대해서는 남종과 북종의 입장이 다르다. 북종에서는 5세기 초에 〈능가경〉을 번역한 구나발타라 삼장을 선종의 초조로 보는 반면 남종에서는 이보다 약 백년 늦게 온 달마를 초조로 삼는다.
<사진>조선 중기 김명국이 그린 달마절로도강도(達磨折蘆渡江圖). 무제와 헤어진 달마는 한 줄기 갈대를 꺾어 타고 장강을 건너 소림사로 갔다는 내용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그러나 초조를 누구로 보든 그들에 의해 선법이 최초로 유입된 것은 아니다. 이미 4세기 후반부터 인도와 서역으로부터 선정(禪定)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속고승전〉에는 무려 95명에 달하는 습선자(習禪者)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비록 달마가 선종의 초조로 불린다할지라도 선법이 달마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선은 달마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선의 역사가 달마라는 인물을 통해 선의 중국전파를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등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달마는 남인도 사람으로 바라문 국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선법을 전하기 위해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왔으며, 그를 맞이하는 양무제와 만났다. 그러나 이 만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 끝에 서로 인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 길로 달마는 소림사로 갔고, 그곳에서 혜가를 만나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설했다.
이상과 같은 〈전등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달마의 행적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즉 양무제와의 만남과 결별, 그리고 면벽을 통한 새로운 전통의 확립이 그것이다.
화려한 불사 이룬 양무제에 “無功德” 평가하고 소림사로
# 달마, 동쪽에서 양무제를 만나다
당대(唐代) 선문답의 정형구로 통용되던 것은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인가?(如何是祖師西來意)”였다. 〈전등록〉에 따르면 선법을 전하기 위해 중국에 온 달마의 첫 번째 행적은 양무제를 만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전법보기〉에 의하면 무제는 몸소 성 밖으로 나가 달마를 맞이했다고 한다.
달마가 도래했던 6세기 초 북중국은 호족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왕조국들이 생겨나 군웅할거하고 있었다. 중원을 꿈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화문화에 버금가는 형이상학적 체계와 선진문물이었다. 불교는 이들의 희망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열쇠였음으로 족장들은 서역의 고승을 앞 다투어 초빙했다. 스님들은 서역 각국의 정치, 군사, 지리 등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문물을 함께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제가 몸소 성 밖으로 나가 달마를 맞이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성을 떠나 당대의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낙양가람기〉(547)에 따르면 험난한 여행을 마친 달마는 화려하고 웅장한 중국불교와 마주한다. 그는 낙양 영녕사의 9층탑의 금반이 찬란히 빛나는 모습과 바람에 흔들린 풍경소리가 중천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보고 경탄했다. “150세가 되도록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이처럼 훌륭한 절은 보지 못했다”며 여러 날 동안 합장한 채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나 중국불교와 만나는 달마의 모습을 보다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독실한 불자였던 양무제를 만나는 것으로 그려진다. 황제와 나눈 문답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등록에 따르면 무제는 자신이 즉위한 이래 많은 사찰을 세우고 경전을 출간했으며 스님들을 공양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달마는 “아무 공덕도 없다(無功德)”고 단호히 말했다. 전등사서는 황제로 대변되는 화려한 중국불교와 그에 대한 달마의 냉정한 평가를 대비시킴으로써 선종의 정신적 지향점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짧은 대화를 끝으로 달마는 무제와 결별하고 낙양 인근의 소림사로 갔다. 당시 낙양은 비단길을 따라온 서양의 부와 문명의 집산지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불교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낙양 안팎에는 거대한 불교사원이 줄지어 건립되고 높은 불탑들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 같은 교단의 비대화는 446년 북위 태무제에 의한 잔혹한 폐불(廢佛)을 촉발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달마는 폐불이 막을 내리고 불교가 다시 화려하게 재건되던 시기에 중국으로 왔다.
그러나 단시간에 진행된 외형적 성장이 정신세계의 풍요로움과 사상적 깊이까지 담보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달마는 무제의 불사에 대해 무공덕이라고 평함으로써 외형적 조불조탑(造佛造塔)에만 치중해 있던 당대의 불교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종사에 기록된 달마와 양무제와의 만남은 선법의 전래를 알리는 상징적 사건인 동시에 기존의 불교와 새로 전래된 선법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의도된 장치임을 알 수 있다.
권력과 결별…근본 회귀 ‘종교적 자각’ 천명
# 황제와의 결별과 ‘절로도강’
무제와 헤어진 달마는 한 줄기 갈대를 꺾어 타고 장강을 건너 소림사로 들어갔다. 달마가 장강을 건너는 이 장면은 달마절로도강(達磨折蘆渡江)이라는 한 폭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널리 전해진다. 그리고 선종의 사상이 체계화되는 후대로 갈수록 황제와 헤어지는 달마의 모습은 더욱 신비적인 모습으로 부각된다. 이는 달마를 황제와 분리시킴으로써 세속주의와 당대 불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선종의 종지를 나타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중국불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는 국가주의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달마가 도래했을 당시의 중국불교는 황실불교, 귀족불교, 학문불교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달마의 도강(渡江)은 바로 이 같은 전통과 단호히 결별하는 선법의 정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황제와의 결별은 단지 양무제와의 개인적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 성장과 기복에 치중한 당시 중국불교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는 세속주의를 부정하고 불교의 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종교적 자각에 대한 천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장강을 건너가는 달마의 모습은 중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는 장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 권위를 자랑하는 황제와 등진다는 것은 선종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하는 것이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면벽하며 몇 명의 제자를 두긴 했지만 3조 승찬에 이르기까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선종이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4조 도신대에 확립된 동산법문(東山法門)에 의해서였다. 국가권력과의 결별은 선법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랜 인고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만히 강을 건너가니 그 어찌 가시밭길을 면할 수 있었으랴!”라고 했던 설두의 송은 달마의 고뇌를 잘 읽고 있다고 평가된다.
9년 면벽…자기수행 전념하는 선종 전통확립
# 면벽, 새로운 전통의 확립
〈벽암록〉에 따르면 달마가 위나라에 도착하자 효명제는 칙명을 내려 달마를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달마는 조용히 소림사로 들어가 9년간 오로지 면벽(面壁)수행에 전념했다. 황제와의 결별이 왜곡된 불교와의 단절이었다면 면벽은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황제와 국가권력을 지지하고 외형적 불사에 전념하는 불교가 아니라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불교로서의 방향성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면벽은 곧 수행이라는 선종의 자기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유를 역사 속에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석문정통〉은 달마의 면벽에 대해 “안심(安心)이란 벽관(壁觀)을 말한다.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벽(壁)이라 한다.”라고 설명한다. 달마의 면벽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번뇌로부터 내면의 평화를 지키는 수행으로 평가한 것이다. 벽의 역할은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먼지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밀은 벽관에 대해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져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아야만 도에 들 수 있다”고 면벽의 의미를 설명했다.
결국 달마의 면벽은 자기수행에 전념하는 선종의 전통을 확립하는 기점이 되며, 이로부터 민중불교, 수행불교, 산중불교라는 중국불교의 새로운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같은 전환은 당시 중국불교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양무제와의 결별을 통해 극적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달마는 면벽이라는 수행전통의 확립을 통해 새로운 불교운동이 견지해야할 종교적 실천과 정신을 명확히 하고 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것은 15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달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재해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달마의 가르침은 인간의 내면에 관한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번뇌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고뇌가 있는 한 달마의 가르침은 날마다 그 의미가 새롭게 되살아날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서재영 /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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