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살을 먹었다.
전에 다음 아고라에서는 나이 한 살 더 먹는 기준과 관련하여 열띤 토론이 있었다. 지구상에서 나이 한 살 더 먹는 계산법이 세가지나 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므로 반드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부터이다.
우리나라는 유일하게 나이를 계산하는 방식이
세 나이, 연 나이, 만 나이 등을 혼용해서 사용함으로서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리고 지난 12월 6일 드디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법안심사 소위원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민법 일부 개정법률안, 행정 기본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의결함으로서 이르면 올해 안에 나이 먹는 기준이 만 나이로 통일될 예정이다.
덕분에 국민 모두는 1~2살 씩ㅡ(빼기)되는 호사?를 누릴 예정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자 석학으로 꼽히는 故이어령선생께서는 우리나라는 나이 계산법만 독특한 게 아니라,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라고 하였다.
서양은 나이 든다고 하며 중국은 나이를 첨(添)더한다고 하고 일본은 취(取)한다고 하는데 우리만 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하셨다.
또 한국은 존댓말과 반말이 존재하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말'의 역할은 대단하다. '말'은 곧 인간관계의 질서를 세우는 데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한국인이 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일례로 우리는 누군가 한 말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질서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때면, 우리는 그것을 말이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한다.
'대체 무슨 헛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며
애초에 말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같은 예시로 '말도 되지 않는다'라는 관용어가 있다.
이처럼 말을 신앙처럼 섬기는 국민이 나이는 한 살 더 먹는다고 말하는 건 어딘지 언발란스하다.
한국인은 먹방 못지 않게
먹는다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월드컵 같은 축구경기에서는 전 세계가 한 골 실점했다고 할 때 에도,우리는 "한 골 먹었다"고 하며, 야구에서는 선동렬같은 강속구 투수가 나오면 "겁을 먹는다"고 하고, 반대로 유희관 같은 느린 투수가 나오면 타이밍 잡는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겁을 먹거나 애를 먹거나 이래도 먹고 저래도 먹는다.
또한 심판의 억울한 판정에 항의 해봤자
씨도 "안 먹힌다"고도 한다.
한국인에게 삶이란 먹느냐
먹히느냐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또 마음도 먹는다고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못 할 게 없다고 한다.
우리는 먹지 못할 게 없다.
마음도 먹고
돈도 떼어 먹고
욕도 얻어 먹고
운동선수는 홍수환처럼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도 한다.
심지어 성적 표현으로 따먹는다는 말도 있다.
한국인은 늘 먹는다
먹고 먹고 또 먹는다.
먹는 것에 한이 맺힌 게 분명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까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헐벗고 굶주린 탓도 있을 게다.
그러나
꼭 가난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먹는 문화와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에덴동산에서 해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부터
인류의 비극은 시작되었으며, 해와가 선악과를 따 먹기 전만 해도 아담은 930세,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다고 구약성서에는 전한다.
또한 근대 민주주의의 시작은 윌리엄 텔의 사과에서 촉발되었고, 근대과학의 시작은 뉴턴의 사과였으며
현대미술의 꽃을 피운 건 세잔의 사과였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과) 컴퓨터는 정보혁명 PC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먹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간을 상징하는 <크로노스>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먹어 버린다.
시간이 먹지 못하는 것은 없다.
탄생 죽음 사랑 환희 아름다움 기쁨 감격 즐거움 쾌락 슬픔 좌절 분노 절망 고통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 점 남김없이 다 먹는다.
시간이 먹지 못하는 것은 없고 한국인도 먹지 못하는 게 없다.
그러고 보면
먹는다는 말 속에는 한국인의 뜨거운 열정
악착같은 승부근성, 전투력 등 불굴의 생존력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기필코 다 먹어치우고 마는 불굴의 정신력이 6.25로 폐허가 된 세계 최빈국을 단시간에 고속성장시켜 한강의 기적을 창출하는 밑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좀비정신 같은 비속어가 유행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덧 계묘년 해가 바뀌었고 크로노스와 한국인은
또 다시 2023년을 먹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 마음 먹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우화 하나가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를 뜻하는 하시디즘에는 <슬픔의나무>라는 우화가 전해진다.
사람이 죽으면 요단강을 건너듯 슬픔의 나무를 지나게 되는데 그 나무에는 살면서 겪은 온갖 슬픈 이야기들을 적어 놓은 쪽지가 가지마다 매달려 있다.
저마다 자신의 슬픈 사연을 종이에 적어 가지에 걸어 놓은 뒤 천사의 손을 잡고 나무를 한 바퀴 돌며 그곳에 적혀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읽는다.
천사가 말한다.
이 많은 사연 중, 다음 생에 살고 싶은 것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
다음 생에 그렇게 살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적은 쪽지를 다시 선택한다고 한다. 사람은 유독 내 삶이 가장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나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연도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그에 비하면 내가 겪은 슬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인데..
이 우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소위 말하는 천국이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내 삶이 가장 행복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의 세상은 열린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천국과 지옥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인생을 눈물의 골짜기와 같다했고 석가는 인생을 고해(苦海)와 같다고 하였다.
또 미래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영혼이란 외계에서 죄를 지은 죄수들이며, 외계에서 죄를 지은 죄수는 지구로 보내져 인간의 몸 안에 가두어 살게 하는 방식으로 형벌을 준다고도 할 정도로
인간의 삶이란 눈물과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들 하지만 히다시즘 우화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에는 나보다도 훨씬 더 힘들고 불행한 사연도 많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아래를 보고 살다보면 그곳이 곧 천국이고 행복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즉, 천국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마음먹기>에 달렸고 마음먹기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음먹기'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기에 더욱 귀하다.
아무쪼록
23년에는 모두 마음 잘 먹어서 행복가득한 천국!
홍수환처럼 챔피언 먹는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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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여한가(餘恨歌)
옛 어머니들의 시집살이, 자식 거두기, 질박한 삶을 노래한 글!!!
한국 여인들의 결혼 후 시집살이에서 생기는 한(恨)을 이야기한 순박한 글입니다.
열여덟살 꽃다울제
숙명처럼 혼인하여
두세살씩 터울두고
일곱남매 기르느라
철지나고 해가는줄
모르는채 살았구나.
봄여름에 누에치고,
목화따서 길쌈하고
콩을갈아 두부쑤고,
메주띄워 장담그고
땡감따서 곶감치고,
배추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육포 유밀등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높이 간직하네.
찹쌀쪄서 술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박아 제일먼저
제주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술로 떠낸다음
청수붓고 휘휘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걸고
소주내려 묻어두네.
피난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하온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로 절구질해
연기불로 삶아건져
밥도짓고 국도끓여
두번세번 차려내고
늦은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풀솜
천근만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돌려 실을뽑아
날줄들을 갈라늘여
베틀위에 걸어놓고
눈물한숨 졸음섞어
씨줄들을 다져넣어
한치두치 늘어나서
무명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내려 삶아내서
햇볕으로 바래기를
열두번은 족히되리.
하품한번 마음놓고
토해보지 못한신세
졸고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꿰어
무거운눈 올려뜨고
한뜸두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끝이
손톱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자식들 헤진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수발 어찌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는데
공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안차
맵고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들어
방내부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가득
차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녀석 세워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리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시키면
일할엄두 사라지고
한숨만이 절로난다.
학식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들은
여나무번 족히되고
정월한식 단오추석
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사람 하나없고
여자라곤 상전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고추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매워라
큰아들이 장가들면
이고생을 면할건가
무정스런 세월가면
이신세가 나아질까
이내몸이 죽어져야
이고생이 끝나려나
그러고도 남는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없이
어느틈에 자랐는지
짝을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쌍같이
영감하고 둘만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것이
지지리도 복이없는
내마지막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마저도 쉽지않네.
안채별채 육간대청
휑ㅡ하니 넓은집에
가문날에 콩나듯이
찾아오는 손주녀석
어렸을적 애비모습
그린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짧은
제어미를 택했는지
곶감대추 유과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주어볼 틈도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일때는
객지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둘씩 모여들면
절간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된장 양념까지
있는대로 퍼주어도
더못주어 한이로다.
손톱발톱 길새없이
자식들을 거둔것이
허리굽고 늙어지면
효도보려 한거드냐
속절없는 내한평생
영화보려 한거드냐
꿈에라도 그런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고목나무 껍질같은
두손모아 비는것이
내신세는 접어두고
자식걱정 때문일세.
회갑진갑 다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채비
늦기전에 해두려고
때깔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든해 손없는날
대청위에 펼쳐놓고
도포원삼 과두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늙은이 수의일습
내손으로 다지었네.
무정한게 세월이라
어느틈에 칠순팔순
눈어둡고 귀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울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가먼저 죽고나면
그수발을 누가들꼬
제발덕분 비는것은
내가오래 사는거라,
내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마라
인생이란 허무한것
이렇게도 늙는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한도 난모른다
이세상에 미련없다.
서산마루 해지듯이
새벽별빛 바래듯이
잦아들듯 스러지듯
흔적없이 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