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상과 단절됐던 공간의 일부가 일반에 공개됐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통의 중심지에서 때로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던 이 땅은 용산 미군기지가 경기도 평택으로 옮겨 가면서 드넓은 부지 중 미군 장교 가옥으로 활용되던 공간을 일반에 공개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SNS를 통해 매력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공개되며 다음 날 바로 다녀왔다.
바로 근처에 용산가족공원이 자리해 있어 위치의 혼선이 올 수 있었지만 경의 중앙선 서빙고역 1번 출구로 나오는 길 건너편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옥들의 모습을 눈에 바로 담을 수 있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 한 번에 200명 씩만 입장할 수 있도록 순번을 조절하고 있었으며 다행스럽게도 줄을 선지 얼마 되지 않아 간단한 절차 이후 번호표를 받아 든 뒤 공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울 한가운데 자리했지만 어느 잘 차려진 스튜디오에 온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1. 미군 장교 가옥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 나오는 그 가옥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세트장처럼 잘 꾸며진 가옥들은 본디 영화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만들었다 해도 믿을 만큼 정갈한 모습들이 인상적이었고 집 호수를 알려주는 듯 한 숫자들과 벽돌과 창가에 가득 담긴 햇빛이 이곳의 분위기를 더욱 진득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비행기는 타지 않았지만 여행을 떠난 느낌을 이곳에서 만끽할 수 있다는 게 근처 동네가 이태원이라는 사실과 엮이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잠시 공간을 파악하고자 카메라 전원을 내리고 주변을 살폈다. 같은 양식의 가옥들이 끝없이 펼쳐졌고 가끔 가옥 벽면에 새겨진 LH마크가 이곳이 한국임을 상기시켜 주며 미지의 세계로 떠난 내 의식을 현실로 되돌려 놓곤 했다. 덩달아 제한된 인원만 상주했기에 어디서든 여유로운 분위기의 사진과 저마다의 기록들을 남길 수 있다는 점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렇게 크게 전체를 돌아본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셔터를 살포시 눌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뷰파인더에 신경을 집중하던 중 미군 장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던 바비큐 시설 주변에 위치한 전봇대에서 이른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주변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가옥들의 형태가 뿜어내는 분위기에 젖아 가는 중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들 덕분에 순간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음악을 들은 사람들도 순간의 감상에 젖어드는 모습 또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가옥들과 담장 사이로 비치된 벤치와 소화전 그리고 영어로 한 가득 담긴 팻말이 눈길을 끌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 여기다 싶은 부분들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원하는 한 장의 사진을 담기 위해 줄을 서야 될 정도였다.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지 못한 지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찾은 듯 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서울 한가운데 위치했기 때문일까? 가끔 가로수길을 거닐다가 만났던 장면들을 용산공원 곳곳에서 목도할 수 있었다. 바로 모델들을 대동한 채 쇼핑몰 촬영도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짙은 갈색을 벽지 삼아 대비되는 색상의 옷을 입은 채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떤 곳은 이동식 행거를 대동해 실시간으로 착장을 바꿔가며 촬영을 이어가며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도 이 공간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줬다.
덩달아 가옥들 옆에 자리 한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절기에 맞게 더욱 공간을 풍성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도 절로 들었다. 이곳에 머물며 활용하던 바비큐 시설들과 정자 그리고 그들이 모습을 담은 영상을 담으며 한편으론 감사함과 정겨움을 또 한편으론 이곳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머릿속에서 창조되고 있었다.
2.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과거
과거 이곳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할 당시 이곳을 병참기지로 삼았던 것에서 부터 비롯된다. 당시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채 명목상의 항전을 이어가고 있었고 한반도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이후 조선이 수도를 이곳 한양으로 지정하면서부터 용산은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뒤로는 한양과 맞닿아 있어 전국에서 올라온 물자들이 모이는 장소로 활용되며 교통의 요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이곳의 성격은 180도로 달라지게 되는데, 개전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곳을 보급기지로 활용하며 조선 정부를 벼랑 끝까지 압박하였고 그 역할은 명이 참전한 이후 조명 연합군이 한양을 재탈환하기 전까지 지속되며 침략의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며 청일전쟁 시기 즈음에 청나라 군과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이후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 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일제의 무력에 의한 조선 지배의 근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산 자락에 경술국치 이후 조선 총독부가 생기기 전까지 조선 통감부도 들어서며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와 함께 주한 일본공사는 구용산 일대가 양화진보다 도성과 가깝기 때문에 거주와 통상의 유리함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대외무역시장으로 개방하였고, 덩달아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의 거주율이 증가하게 된다. 이후 1908년 통감부 철도 관리국이 용산역 앞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신시가지로의 형성이 본격화된다.
이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정 시기로 돌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지에 안착 현재의 용산기지 시절로 자연스럽게 접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직간접적으로 한국의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경기도 평택으로 군 기지를 옮길 때까지 서울의 한가운데 자리하게 된다.
일부만 개방되어 있어 여전히 담벼락을 주변으로 접근 금지 팻말과 영어로 쓰인 안내문구가 묘한 이질감을 가져다줬으며, 콘크리트 벽 너머로 보이지 않는 드넓은 부지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곳곳에 남아 있는 낙서들과 누가 살다 갔는지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간접적으로나마 현장감을 극대화시켜주는 듯했다.
3. 앞으로가 기대되는 용산공원
절차상 아직 논의 중인 문제가 남아 있지만 남은 관련 공간들을 모두 이전시킨 뒤 광화문에 위치한 주한 미국 대사관을 이곳으로 이전 한국의 센트럴파크를 필두로 내세우며 2027년 까지를 목표로 완공시키겠다는 기사를 최근 접할 수 있었다. 조감도에 의하면 용산공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하철 역만 8개에 강북 주요 권역을 아우를 전망이다. 실제 뉴욕의 센트럴 파크보다 조금 작은 규모였는데 그대로만 만들어진다면 콘크리트로 뒤덮인 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또 다른 기적을 눈에 담을 수 있을 듯하다.
더불어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광화문 광장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된다면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녹지와 문화가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이 탄생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서울과는 또 다른 모습을 마주할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그리고 이 공간에서 어떤 문화 콘텐츠들이 생산될지 벌써부터 너무 기대가 된다.
그와 동시에 불현듯 동북아시아의 우리의 지정학적 입지 조건과 분단의 현실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점 더불어 그 현실로부터 우리와 운명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느끼며 복잡 다양한 현실도 함께 실감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한껏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고마운 마음도 함께 되새겨 본다.
짧고 굵었던 모든 구경을 마친 뒤 번호표를 반납하고 용산공원 밖을 나섰다. 타이밍 좋게 찾아와서 그런지 들어올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의 줄이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기다림을 택했고 가볍게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여운을 곱씹고자 한남동 근처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문득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는 무엇을 해 볼까 라는 미래가 절로 풍성해지는 고민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며 순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