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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받은 사명의 자리에 머물라
마가복음 5:1~20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남동쪽에 있는 거라사 지방으로 배를 타고 가셔서 거기서 갈릴리 바다 근처 무덤 가에서 배회하며 자기 몸을 학대하는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 귀신들을 내쫓고 그의 정신을 온전케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몸 속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귀신들 곧 군대 귀신들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였을 때에 그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님께 집요하게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묵묵부답으로 계시니까 할 수 없이 또 다시 간청하기를 그러면 그 무덤 곁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던 돼지 떼에게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거라사 지방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그렇게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귀신들은 그 지역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을까요? 누가복음 8장에서는 이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내용에서 그 귀신들이 자기들에게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저갱은 영적 세계에서 지옥의 한부분으로서 밑바닥이 끝이 없이 깊은 영적 감옥을 가리킵니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하고 깊은 캄캄함이 가득한 곳으로서 장차 하나님께서 더럽고 악한 귀신들을 심판할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무저갱은 현재 악한 영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한 영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거기로부터 악한 마귀가 그의 부하들인 악령들을 세상에 보내어 세상을 어지럽히며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망과 음부가 불못에 최종적인 심판 날에 불못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때에 무저갱조차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9:11 말씀에 보면 이르기를,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불루온이더라”
고 하였습니다. 아바돈과 아불루온은 혼돈의 천사, 악한 마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아볼루온은 악령들, 타락한 천사들을 자기 부하로 부리면서 온 세상에 온갖 재난을 일으키며 영혼들 속에 죄악을 범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거역하며 불신앙을 가지고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어가려고 애를 쓰는 악령의 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거라사의 귀신들을 향하여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면 귀신들은 주님의 영적 권세에 의하여 순식간에 무저갱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들은 무저갱의 사자이자 악령들의 왕인 아볼루온 마귀로부터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무저갱으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은 그 거라사 지역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돼지떼에게라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허락을 받은 귀신들은 그 거라사인의 몸에서 빠져나가 그 돼지들에게 곧장 들어갔는데, 얼마나 많았는지 이 천마리나 되는 돼지떼 전체에 들어가자마자 돼지들이 다 미쳐서 갈릴리 바다쪽으로 달려가서 다 바닷물 속에 떨어져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마귀와 그 악령들은 사람이건 돼지건, 어떤 존재든지간에 이처럼 죽이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에 몰두합니다. 반면에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이 엄청난 숫자의 귀신들은 거라사 지역에 보냄받아 마귀가 명한 악한 일을 계속 저지르며 영혼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와 잡신 숭배와 미신에 잡혀 지내며 온갖 죄악들 속에 푹 빠져서 살며 혼돈과 무질서 속에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계속 일해왔던 것입니다. 그 중에 이 거라사 사람은 그 귀신들의 평안한 거처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곳에 나타나 그 사람 몸에서 나가라고 명을 하니 큰 일 난 것입니다. 더욱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시면 가장 악랄하고 포악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의 임금 마귀 앞에 불려나가 무서운 저주와 괴롭힘을 당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므로 그 귀신들은 보냄받은 자기의 사명지를 떠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심지어 예수님께까지 애절하게 사정 사정 빌면서 무저갱에 보내지 말고 자기들을 그 지역에 남아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마귀가 보낸 귀신들도 자기의 보냄받은 자리를 지키는 것을 목숨이 달린 문제로 알고 그 일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돼지들이 바다에 빠져 둥둥 떠 있는 끔직한 일을 갑자기 당한 돼지치기 목자들은 놀라서 거라사 시내에 들어가서 자기 주인과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현장을 보고 그 귀신들린 사람이 멀쩡해져서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런 일들이 또 일어나 돼지를 치며 살아가는 수많은 거라사 사람들이 이런 일을 또 당할까 염려해서 그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나가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네 땅에 계속 거하시면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경제적 피해가 생길까봐 예수님을 그 지경에서 떠나주시라고 그처럼 끈질기고 간절하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땅에 계시면 그들이 탐욕과 죄악을 계속 유지할 수 없고, 자기들이 믿고 따르는 미신과 잡신 숭배와 우상 숭배들의 악습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느끼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구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바른 정신이라면, 군대 귀신이 들려서 그 동안 짐승처럼 살아온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평안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갖춘 한 사람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 들어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네 동네에도 오셔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고 병든 자들도 고치고 방탕함과 싸움질과 도덕적 타락으로 무너진 자기 동네를 변화시켜주시기를 청하며 예수님을 붙잡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 속에 재물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게 만드는 악한 영이 자리잡고 있고 죄악을 즐거워하는 악령들이 잡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떠나가게 해야 자기들이 편하고 죄악 속에 계속 살 수 있기에 그처럼 예수님을 떠나가 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땅에 계심으로 그 땅이 복을 받을 수 있고 그 지역 사람들이 복과 은혜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그 지역 사람들이 거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곳을 떠나가시고자 다시 배를 탑니다. 그 때에 군대 귀신이 떠나간 그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 곁에 함께 있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 동안 군대처럼 많은 귀신들이 그 심령과 삶을 점령하여 완전히 피폐한 삶을 살았던 그가 예수님 덕분에 완전히 자유함을 얻게 되고 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가 자기는 예수님 곁에 있어야만 안전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은 당연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기를 놓고 가버리시면 언제 귀신이 또 다시 공격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당시 행정 구역인 데가볼리의 드넓은 지역이 옛 바산과 길르앗 라못 지역의 수많은 성읍과 마을들로서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도하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자기 대신에 그 거라사 지방 출신인 귀신 들렸다가 나은 사람을 자기 대신 그 지역에 남겨두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일대에 악한 영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막아내고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짐으로써 그 지역에 영혼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의 이 바람은 그대로 이루졌습니다. 이는 고침받은 그 사람이 데가볼리 중앙에 있는 거라사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전하고 나아가 그 지역 모든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이방 전도 여행을 한번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데가볼리 지역에 들렀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도자의 증언을 인하여 예수님의 방문 소식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삼일 동안 예수님 곁에서 지내면서 말씀을 듣고 병도 고침받고 일곱 개의 보리떡과 두어 마리 물고기를 가지고 남자만 사천 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에 남은 것을 거두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거라사인의 잔류는 그 지역에 오랫동안 맹위를 떨치고 있던 불신앙과 우상 숭배와 악한 영들의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고 복음이 힘있게 증거되며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 거라사인이 주님이 그 땅에 남아 있으라면서 고향에 가서 가족 친척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하여 사명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러한 놀라운 영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느 지역, 어느 땅에 거하는 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주변에 퍼뜨리는 영적 싸움의 중요한 통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장소에 가고 안 가고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사명지에 우리가 거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순종의 초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내신 자리에 우리가 있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악한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십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지 않고 우리가 임의로 그 자리를 떠나면 영적인 공격을 받게 되고 시험에 취약하여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냄받은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 자리에 순종하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영적 전신갑주를 입혀 주셔서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일들을 계속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러한 예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그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메소보다미아 지방의 갈대아 우르 성에서 떠나와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대기근이 그곳에 닥치니까 하나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애굽이라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하여 그 애굽에서 그는 아내 사라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일을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벧엘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순종하지 않고 벧엘 대신에 세겜 성읍으로 가서 세겜 땅도 사서 거기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의 젊은 추장에게 추행을 당하고 이로 인하여 세겜 주민들과 야곱의 아들들이 무서운 살육의 일이 일어나 자칫하면 야곱 집안이 몰살 당할 위기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반대로 이삭이 기근이 찾아와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가지 말고 이 땅에 머물라고 명령하시므로 이삭이 순종하여 애굽으로 안 가고 그 땅에 머물렀더니 하나님께서 이삭을 축복하사 대기근 중인데도 무려 백 배나 되는 농사의 수확을 거두고 양떼와 소떼도 엄청나게 잘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그가 보내신 자리에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도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으려고 자기 종을 메소보다미아로 보낼 때에 그 여자가 가나안 땅에 오지 않으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자, 아브라함은 그 여자가 가나안 땅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 여자는 그냥 놔두고 다만 이삭을 절대로 그곳 가나안 땅을 떠나 그 여자 사는 곳으로 가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번성하도록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삶의 터전으로 정해주신 그 가나안 땅에 머물 때에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삭이 가나안 땅을 떠나 그 결혼할 여자의 땅으로 가게 된다면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과 뜻은 성취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어느 땅에 거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결정입니다. 사람이 어느 땅을 값을 주고 사서 자기 땅으로 소유하는 것은 거꾸로 그 땅이 그 사람을 사서 그 땅에 그 사람을 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땅을 사지만 땅을 사면 그 땅이 그 사람을 묶고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사람이 사서 그 집에 거하지만, 그 집을 사는 동시에 그 집이 그 사람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땅을 사거나 집을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냄받은 사명의 자리에 머물러야 하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사명지를 벗어나고 사명의 땅을 떠나면 어느틈엔가 보호막이 사라집니다. 영적으로 나태하게 됩니다. 수많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게 되고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다 끌려간 유대 백성 중에 일부 남은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자기들이 그 고토에 남을 것인가 애굽으로 갈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달라면서 어떻게 말씀하시든지 순종하겠다고 부탁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십일 동안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 땅에 머물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바벨론 왕에게서도 긍휼을 입게 해줄 것이라고 예언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믿지 않고 강퍅한 마음으로 애굽으로 도망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들에게 진노하여 애굽까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보내어 그 유다 사람들에게 칼과 기근으로 완전히 망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 깊은 지방까지 공격해 들어갔다고 세속 역사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명의 자리를 끝까지 잘 지키는 자들이 됩시다. 고난이 있다고 그 자리를 쉽게 떠버리면 결국 큰 화를 입거나 부끄러움을 입거나 더 큰 손해를 입게 됩니다. 영적인 사명도 이룰 수 없습니다. 당장에는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보내심받은 자리에 있어야 하나님께서 피할 길도 주시고 점점 더 크신 은혜 중에 장성해지고 동행해주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다윗의 삶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과 살해 위협 때문에 자기의 증조할머니 룻의 고향인 모압 땅으로 망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나마 이국 땅에서 목숨 걱정 없이 하루 하루 지낼 수 있어 좋았던 다윗은 다시 요단강을 건너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매일 자기 목숨을 염려하는 피말리는 도주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순종하여 돌아왔을 때에 예상대로 끝없는 도주의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어 사울 왕의 추격에서 지켜주시고 다윗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조금씩 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겼으나 그를 살려줌으로써 다윗의 아름다운 성품이 드러나고 백성들 가운데 그의 인망이 높아지고 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름부음받은 왕이라는 사실을 그 백성들이 서서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여 서쪽 블레셋 나라의 가드 성의 왕 아기스에게 육백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망명하자 다윗은 영적인 힘이 약해집니다. 그의 육신적인 목숨은 보존하고 평안은 얻었지만 자꾸 아기스 왕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자 대규모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는 가드의 성주 아기스 왕의 요청 때문에 자기가 장차 섬겨야 할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는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기스 왕의 동맹한 자들의 마음에 다윗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다윗이 블레셋 군대에 참여하는 것이 막판에 거부당했습니다. 그러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가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터에서 만나 죽여야 하는 기가 막힌 자리에까지 떨어질 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 없이 사명의 자리를 벗어남으로써 초래한 위기입니다. 다윗의 경우에서처럼 사명지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큰 영적, 물적, 인적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선지자 요나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니느웨 성으로 가지 않고 그 반대로 배를 타고 지중해 건너편 도시인 다시스로 가려고 했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고 선원들의 손에 의하여 바다에 내던지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그를 삼켜서 배에서 삼일 동안 있는 중에 회개함으로써 다시 육지에 토해내어 니느웨로 도로 가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사명의 자리로 가는 길, 사명의 길을 걸을 때에야 우리는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비록 고난이 있더라도 사명지에 있을 때에 우리 영혼은 안전하고 시련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어 끝내 이겨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평생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있게 하신 자리,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는 자가 됩시다. 주님께서 일하도록 명하신 자리를 함부로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있고 시련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자리를 옮기지 말고 부름받은 자리에서 끝까지 머물러서 맡겨주신 일을 꾸준히 행하도록 합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시며 영혼이 잘 되게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삶도 책임져주시어 번성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귀신들도 자기의 보냄받은 자리에서 절대로 안 떠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것이 그들이 사역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를 지킴으로 사탄의 나라를 지키고 영혼들을 멸망 길로 가게 만들고 혼란을 부추기는 그들의 일을 계속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당장 열매가 없고 어려움이 있다고 부름받은 자리를 저버린다면 그것은 사탄과 그 사자들인 귀신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열매가 없더라도 사탄의 방해가 거세질지라도 우리들은 부르심받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길진대, 때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입니다. 흑암의 세력을 굴복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사명의 자리를 귀히 여기고 끝까지 주님과 함께 부르심받은 사명의 자리를 순종과 믿음으로 잘 지켜 가는 주님의 용사들이 됩시다. 그리하여 장차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영광스러운 상들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