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회 太極風水硏究會 답산 안내 (마산. 2015년 4월 12일)
마산시 현동에 있는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墓소를 찾았다.
韋庵 張志淵은 조선왕조 말기인 1864년(고종1) 경상도 상주목 목내면 동광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장지윤(張志尹)이고 호는 위암(韋庵) 또는 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소매당 장영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운소(雲沼) 장용상(張龍相)이고, 장석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으로 이사 했다가 20세 때 구미시 상모동으로 옮겨 20년을 살았다.
과거제도가 없어지기 직전인 1894년(고종 31)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1906년 서울 제동으로 이사했으며, 만년에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살다 타계하였다.
현동 근린공원 내에는 유명한 근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이며 우국지사였던 위암(韋庵) 장지연 선생의 묘가 있다.
墓所의 좌향은 卯坐酉向으로 서쪽을 바라보며, 미돌혈형(微突穴形)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유산천이 흐른다.
야트막한 동산에 사방이 아름다운 산으로 룰러싸여 있어 해질 무렵 복잡한 세상사를 생각하기에 좋은 곳이다.
뒤에는 祖山이 둘러쳤고, 아름다운 案山과 朝山들이 위암 장지연 선생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
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듣기 위해 묘소로 모이는 듯 꿀 틀 거린다.
韋庵 墓所 앞으로 옥동공원과 환호공원으로 가는 산책로에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어 쓸쓸하지 않을 뜻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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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看山地 제말 장군(諸沫將軍)의 墓所는 마산시합포구 진동면 다구리에 있다.
제말 장군(諸沫將軍)은 명종 7년(1557년) 고성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당시 조카 제홍록(諸弘祿)과 의병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나 선조 27년(1594) 성주성에서 전사하였다.
당시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 내륙에는 곽재우(郭再祐), 제말(諸沫)이라 하였다.
將軍을 날아다니듯 빠르다 하여 비장군(飛將軍)이라 일컬었으며 왜적도 장군을 두려워하여 싸우기를 피했다 한다.
나라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제말 장군과 조카 홍록에게 병조판서를 추서하고 이를 기리는 비석
을 성주와 진주성에 세웠다.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쌍충효사적비(雙忠事蹟碑)를 내렸는데, 성주와 진주에 각각 모셔져 있다.
또 문중에서도 이곳 다구 리에 경충제(景忠齊)를 세워 장군을 향사하고 있다.
諸沫將軍의 묘소는 진동면 다구리의 옥녀봉(玉女峰) 남단 구릉 조금 가파른 곳에 있다. 묘에서 남쪽으로는
다구벌과 竹島를 지나 진동만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조망이 탁월하다.
좌향은 子坐午向에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靑龍과 白虎가 겹겹이 감아주니 얼마나 좋은가 바다 가운데 案山
과 멀리 朝山인 죽도(竹島)가 혈장(穴場)을 배알하는 듯.
將軍 墓의 묘역은 992㎡ 남짓한 규모로, 봉분과 비갈, 상석과 망주석 1쌍이 있다. 원래 문인석도 있었는데
30여 년 전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봉분의 형태는 세로가 약간 긴 원형으로 세로 710㎝, 가로 670㎝이다.
봉분 앞쪽으로는 큰 돌을 이용하여 길이 8.58m의 계절(階節)을 설치하였다.
무덤의 전면 중앙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는데, 상석의 크기는 105×76×24.5㎝이고, 받침의 높이는 29㎝이
며, 향로석의 크기는 29.5×25×40㎝이다. 무덤의 전면 동쪽에는 비갈을 세워 놓았고, 크기는 127×62.5×29㎝
로서 재질은 사암이다.
묘 앞 碑石에는 돌 이끼가 세월을 말해주듯 倭亂의 중심에서 온몸을 던져 죽음으로 지켰던 그 마음처럼 죽어
서는 돌꽃이 되어 피어난 듯하다.
비의 전면에는 有明朝鮮國宣武功臣 贈 資憲大夫兵曹判書 知義禁府事 行星州牧使 謚忠壯 諸公之墓라 새겨
놓았고, 측면에 萬歷 奉四丁酉 十二月 日立이라 새겨져 있어 선조 30년(1597)에 세웠던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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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看山地 고려조 회원군(檜原君) 공소(孔紹) 墓는 마산함포구 예곡동 높은 산 중 턱에 있다.
시조 공소(孔紹)는 고려의 문신으로 처음 이름은 소(昭), 공자(孔子)의 53세손, 완(浣)의 아들이며. 조진경
(曺晋慶)의 딸과 결혼하여 여를 낳아 그 후예가 은성(殷盛)하여 우리나라 孔氏의 始祖가 되었다.
공소(孔紹)는 본래 중국사람으로 원나라 순제(順帝)때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공민왕 초 왕비 노국공주
(魯國公主)를 시종하여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어 창원백(昌原伯 = 檜原君)으로
봉해지고, 제4대 왕 광종의 이름을 피하여 이름을 소(紹)로 고쳤다.
(재실- 追遠齋)
(공소(孔紹) ㅡ 문하시중(門下侍中 平章事) 墓)
`丁卯譜'에 보면, 공(孔) 씨의 선조(先祖)는 공자(孔子)로 세록(世錄)에도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를 시조로
기세(起世)를 펼치면서 곡부공씨(曲阜孔氏) 중국종통(中國宗統)편에 엮고 있다.
그리고 동국파(東國派)편으로 공소(孔紹)를 1세로 계서(系序)를 시작하면서 한국 공(孔)씨의 시조라 하였다.
관향(貫鄕)을 중국의 곡부(曲阜)로 하는 것은 공소(孔紹)가 회원(檜原. 昌原의 옛 이름)군에 봉해지고 창원(昌原)
으로 사적(賜籍)을 받았지만, 중국 노(魯)나라의 공(孔) 씨와 동원(同源)이므로 창원(昌原)으로 위관(爲貫)할 수 없다
하여 정조 18년, 문선왕(文宣王)의 고향인 곡부(曲阜)로 개관(改貫)한 데에 있다.
風水란 좋은 터 잡기가 아닌가?.
'朱子`는, 눈에 보이고 접촉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을 精이라 부르고, 눈에 보이지 않고 접촉할 수 없는 것을
神이라 하며, 精과 神의 중간을 중재하고 우주를 유지하고 구성하는 근본적인 힘을 氣라 했다.
진나라 시대 `갈홍(葛洪)`이라는 사람이 지은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에는 인간은 氣 안에 있고 天地 만물에
이르기까지 氣를 갖고 生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오늘도 그 氣를 찾아 활용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風水地理라 생각하니 가는 해가 못내 아쉽기만 하다.
회원님들 수고 많았습니다.
2015년 4원12일. 淸虛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