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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徙家忘妻
(집을 옮기며 아내를 잊어버린다. 精神이 나간 사람처럼 所重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卽 매우 重要한 일을 놓쳐버리는 것을 比喩)
● 孔子家語 賢君篇 에.
中國 春秋時代 魯나라의 王 哀公 (在位 BC 494∼BC 468)은
'移徙를 할 境遇 아내를 잊어버리는 (徙家忘妻)' 사람도 있다고 한 孔子 (BC 552∼BC 479)의 말처럼 그만큼 얼빠진 사람이 있는지 孔子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孔子는 "夏王朝의 마지막 王인 桀王과 殷나라 最後의 王인 紂王 (BC 1154∼BC 1111)은 暴惡한 政治를 한 임금의 典型으로 淫蕩한 짓을 함부로 하고 不道德하였으며 百姓들의 生活과 國家의 重大한 일을 돌보지 않고 惡毒한 行爲를 일삼았다.
百姓들을 抑壓하였으며 賢臣들의 諫言을 듣지 않고 그들을 追放하였다.
暴君이었던 桀王과 紂王은 繼續 惡行을 저질러 나라를 亡치고 나라와 百姓, 自己 自身도 잊어버렸다"라고 對答했다.
🍎 死孔明能 走生仲達
(죽은 孔明이 산 仲達을 逃亡하게 했다)
蜀나라에 諸葛孔明이 있다면, 魏나라에는 司馬懿가 있었다.
그들은 軍師로서 뛰어난 智略을 지닌者들이었다.
司馬懿의 字가 仲達이다. 司馬懿도 뛰어났지만, 諸葛孔明에게는 相對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늘 戰爭에서 敗하고 물러나기만 했다. 그렇기에 司馬懿는 諸葛孔明에 對하여 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司馬懿 仲達도 天文을 아는 者 이기에, 天氣로서 諸葛孔明이 죽을 걸 알았다.
그래서 孔明이 죽으면 戰爭을 벌일려고 모든 準備를 갖추었다.
天氣로 孔明이 죽었음을 알아낸 仲達이 後退의 길에 서있는 蜀을 攻擊했다.
그런데 仲達의 軍士가 攻擊하는 가운데, 저 멀리 蜀나라 陣營에서 孔明이 四輪車에 앉아 指揮하며 달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에 氣怯을 한 司馬懿는 앞뒤도 재보지 않고 自身의 軍士陣營으로 逃走하였다.
魏 나라 軍士들은 仲達을 보면서 그만 鎭靜하라고 하고, 仲達은 自身의 머리가 있는냐고 물어보았다. 蜀 나라는 이를 契機로 安全하게 後退하였고, 몇日 後 仲達은 孔明이 죽었고 自身이 본 것은
孔明이 死前에 計策으로 만든 木人이라는것은 알고 歎息했다.
以後 蜀에서는 "죽은 孔明이 산 仲達을 逃亡치게 했다(死孔明能 走生仲達)는 말이 생겼다.
여기서 由來된 말이 死孔明能 走生仲達이다.
● 三國志 에.
🍎 舍己從人 , 舍己从人
(自己를 버리고 남을 따르다. 自身의 以前 行爲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착한 行實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禹의 德을 想考하여 이르되
“文明을 四海에 펴시고 帝를 이으시다”. 禹가 舜에게 말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서는 사람은 그 임금됨을 어렵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되며, 臣下된 者는 그 臣下됨을 어렵게 생각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政事는 잘 다스려지고 百姓들은 德을 崇尙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그러자 舜임금이 말했다.
“그렇소. 眞實로 그렇게 하면 좋은 말이 숨겨질 리가 없고, 어진 이가 草野에 묻혀 지내지 않게 되어 온 나라가 다 平安하게 될 것이오. 여러 사람에게 議論하여 나를 버리고 남을 좇으며, 依支할 곳 없는 이를 虐待하지 않고 困窮한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 일들은 오직 임금된 사람만이 할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帝曰, 兪. 允若玆, 嘉言罔攸伏, 野無遺賢, 萬邦咸寧. 稽於衆, 舍己從人, 不虐無告, 不廢困窮, 惟帝時克.)」
이 이야기는 《書經 大禹謨》에 나온다. ‘舍己從人’은 孟子의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孟子가 말했다. “子路는 사람들이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일러 주면 기뻐하였고, 禹임금은 옳은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 偉大한 舜임금께서는 더 훌륭하셨으니, 남과 더불어 善을 行했다. 自己를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에게서 取하여 善을 行하기를 즐겼다. 農事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 잡는 일에서부터 帝王이 되기까지 남에게서 取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남에게서 取하여 善을 行하는 것, 이것이 남과 더불어 善을 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君子에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善을 行하는 것보다 더 重要한 일은 없다.”
(孟子曰, 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 禹聞善言則拜. 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 樂取於人以爲善. 自耕稼陶漁以至爲帝, 無非取於人者. 取諸人以爲善, 是與人爲善者也. 故君子莫大乎與人爲善.)」
● 孟子 公孫丑上에.
이 成語는 우리나라의 典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李滉 先生이 말했다. “能히 自身을 버리고서 남을 좇지 못하는 것은 學者의 큰 病이라. 天下의 義理는 끝이 없으니 어찌 可히 自己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리오. 사람의 質問이 있으면 얕고 가까운 말이라도 반드시 마음에 두고서 조금 있다가 이를 對答하고, 묻는 말에 바로 應對하지 말지니라.
”(先生曰, 不能舍己從人, 學者之大病. 天下之義理無窮, 豈可是己而非人. 人有質問, 則淺近說, 必留意, 少間而答之, 未嘗應聲而對.) ● 退溪集에.
🍎 駟馬難追
(말이란 한 番 뱉으면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程度로 빠른 것이니, 입操心을 하라는 뜻이다)
【類似語】
● 駟不及舌~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所聞은 빨리 퍼지니 말을 삼가하라는 뜻.
● 言飛千里~발 없는 말이 千 里 간다는 뜻.
● 耳屬于垣~담에도 귀가 달려 있으니 말을 삼가라는 뜻.
● 牆有耳~담墻에 귀가 있다는 말로, 말을 操心하라는 뜻.
● 五燈會 古尊宿語錄에
中國 俗談에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한 番 입을 떠나면 네 匹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 (一言旣出, 駟馬難追)라는 말이 있다.
'駟馬'는 말 네 匹이 끄는 수레로써 엄청나게 빠른 것을 比喩한다.
'駟馬難追'는 이런 駟馬가 따라갈 수 없을 程度(難追)로 빠른 것이니, '입操心을 하라'는 뜻이다.
駟馬難追는 五燈會元, 古尊宿語錄, 琵琶記, 醒世恒言, 增廣賢文 等에 引用되어 널리 膾炙하는 成語이다.
韓國 俗談에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여, 말操心, 입操心을 警戒하고 있다. 잘못 쓴 글은 지우면 그만이지만 말이란 한 番 내뱉으면 주어 담을 수 없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明心寶鑑에도 '입과 혀는 禍와 근심을 불러들이는 門이고, 몸을 亡치는 도끼와 같다(口舌者禍患之門 滅身之斧也)' 라느니, '입은 사람을 傷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 될 것이니, 입을 다물고 혀를 감추면, 몸이 便安하고 어디에 있든지 安穩할 것이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라 하여, 亦是 늘 말操心을 해야 한다고 强調하고 있다.
※牢는 여기서는 韻字上 本音인 '로'로 읽어야 하고, 뜻은 '便安하고 조용하다' '安穩하다'
한 便, 鄧析子를 典據로 말하는 이도 있는데
(鄧柝子說:一言而非,駟馬難追;一言而急,駟馬不能及.)
事實은 表現이 조금 다르다. 鄧析子에는 '一聲而非,駟馬勿追。一言而急,駟馬不及.'로 되어 있다.
🍎 四端七情
(四端은 人間의 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卽 先天的 · 道德的 能力을 말하며, 七情은 人間의 本性이 事物을 接하면서 表現되는 人間의 自然的인 感情을 말한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실마리라 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義로움의 실마리라 하며, 辭讓하는 마음을 禮의 실마리라 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智慧의 실마리라 한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이 말은 《孟子 公孫丑 上》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四端’이 由來했다. ‘七情’은 《禮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을 일러 사람의 感情이라고 하는가. 기뻐하고(喜), 怒여워하며(怒), 슬퍼하고(哀), 두려워하며(懼), 사랑하고(愛), 미워하며(惡), 하고자 하는 마음(欲)을 말한다.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하게 된다.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不學而能.)」
● 禮記 禮運에.
四端은 仁 · 義 · 禮 · 智의 德目과 關聯된 倫理的 範疇에 屬하고, 七情은 人間의 感情을 總稱하는 人性論의 範疇에 屬한 것으로, 元來는 서로 다른 脈絡에서 使用되던 말이었다. 그러다가 宋나라 때 性理學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槪念은 各各 人間 心性이 發現되는 過程에서 道德的 性格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相反되는 意味를 가지는 것으로 認識되어 對照의 槪念으로 쓰이게 되었다. 곧, 性理學에서는 하늘의 理致와 사람의 心性이 一致한다고 하는 天人合一의 命題 아래 宇宙 自然의 生成과 變化를 說明하기 爲한 理論的 바탕으로 理氣論을 發達시켰고, 다시 이를 根據로 하여 人間 心性의 發生 過程과 그 作用을 探究함으로써 人間의 道德的 實踐의 哲學的 根據를 解明하고자 하였는데, 이 過程에서 四端七情의 問題가 自然스럽게 浮刻되었다.
四端七情論은 中國에서는 그다지 比重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朝鮮에서는 四端과 七情의 發生 過程을 二氣論的으로 解明하는 問題가 重要한 關心事로 떠올라 大規模 論爭으로 展開되었다. 이 論爭은 李滉과 奇大升 사이에서 처음 發生하였고, 나중에 李珥와 成渾 사이에서 다시 論議됨으로써 새로운 局面으로 展開되었다. 이 過程에서 主된 爭點이 되었던 것은 四端이 理에 屬하는가 아니면 氣에 屬하는가 하는 問題와, 理가 果然 發動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두 가지 問題였다. 16世紀 末에 發生하였던 이 論爭은 當代의 著名한 性理學者들에 依해 主導되었을 뿐 아니라, 以後 學界 全體의 問題로 擴大되어 19世紀 末에서 20世紀 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性理學者가 이 問題를 다루었을 程度로 朝鮮 儒敎의 發展 過程에 큰 影響을 미쳤다.
🍎 四面楚歌
(四面이 敵兵으로 둘러쌓인 境遇나 無援孤立된 境遇)
秦나라(BC 221~BC 206)末葉 政治가 腐敗해 民生苦가 날로 深刻해 지자 뛰어난 人物들이 곳곳에서 出現했다. 有名 人物로는 劉邦, 項羽, 吳廣, 陳勝 等이다.
秦의 滅亡 뒤엔 漢王인 劉邦 (BC247~BC195)과 楚覇王인 項羽 (BC232~BC202)의 勢力만이 가장 컸고 서로 天下 覇權을 노렸기에 끊임없는 楚漢相爭 時代가 열렸다.
進退를 거듭하던 戰爭은 漢高祖 5年에 이르러 劉邦의 勢力이 優位를 占하고 項羽 部隊를 垓下로 몰아 包圍했다.
8年間 70如回 싸움을 치룬 楚覇王 項羽는 威風이 無雙한 젊은 將帥였으나 이때만은 劉邦의 數十萬 大軍에 겹겹이 包圍된 身世였다.
(韓信30萬, 劉邦20萬. 黥布와 劉賈의 7萬, 彭越의 3萬 等 60萬 大軍 : 項羽의 10萬 軍士의 싸움)
劉邦은 敵軍을 얕잡아 强攻策을 쓰는 代身에 張良과 陳平의 計策을 받아들여 心理戰으로 兵士들에게 밤마다 楚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軍糧米마저 끊긴 가운데 項羽의 兵士들의 士氣는 끝없이 墜落해 脫營兵이 增加하고 戰意를 喪失해 갔다. 項羽도 楚나라 땅이 이리도 빨리 占領되다니 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項王軍壁垓下, 兵少食盡, 漢軍及諸侯兵圍之數量, 夜聞漢軍四面皆楚歌, 項王乃大驚曰, 漢皆已得楚乎, 是何楚人多也)
一世英雄인 그도 戰意가 꺾기어 술로 괴로움을 달랬다. 傾國之色의 愛妾 虞姬를 옆에두고 義憤을 卽興詩로 슬피 노래한다.
"力拔山氣蓋世도 끝이 났구나. 駿馬도 멈추었다. 어찌할꼬! 虞 美人이여! 아! 虞 美人이여! 이를 어찌한담!"
帳幕은 슬픔에 쌓이고, 愛妾도 答歌로 "이미 勝北는 끝나고 四面엔 楚歌이거늘 어찌 苟且히 살길 바라리오. 將軍과 함께하리다"
項羽는 暫時 생각에 잠겼다. 8千의 軍士를 이끌고 江東에서 西쪽으로 건널때는 士氣도 衝天하여 곧장 天下를 휘어잡고도 남을만 하였는데 只今 이게 무슨 꼴이람... 悲憤慷慨하며 三枝槍을 비껴들고 800如 軍士를 指揮해 밤새 激戰을 벌이며 包圍網을 뚫고 南으로 逃亡쳤다. 그러나 捲土重來를 抛棄하고 끝내 和縣 烏江浦에서 自決하고 말았다.
🍎 斯文亂賊 , 斯文乱贼
(儒敎를 어지럽히는 盜賊. 敎理에 어긋나는 言動으로 儒敎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孔子가 匡땅에서 危殆로운 處地에 빠졌을 때 말하였다. “文王이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文化가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 萬一 하늘이 將次 이 文化를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은 사람이 이 文化에 參與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文化를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匡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이 이야기는 《論語 子罕》에 나온다. 孔子가 弟子들과 함께 匡 地域을 지날 때 사람들이 孔子를 陽虎로 誤認하고 害치려고 했다. 孔子는 이런 危機 속에서도 文王과 周公이 남긴 學問과 思想을 自身이 이어받아 天命이 自己에게 있으므로 決코 危險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確信했는데, 여기에서 ‘斯文’이 由來했다.
‘亂賊’은 叛亂을 일으키는 臣下와 父母에게 悖逆한 子息이란 뜻의 ‘亂臣賊子’를 말한다.
宋나라 때 나타난 朱子學, 性理學이 高麗 末에 韓半島에 傳來되어 朝鮮의 建國理念이 된 後, 朱子學은 朝鮮의 文化, 思想, 政治 等 社會 全般을 支配하게 되었다. 當時 明나라 때에 大陸에서는 朱子學의 지나친 哲理主義에 反對하여 知行合一을 强調하는 陽明學이 登場했다. 이 陽明學이 朝鮮에 들어와 當時 江華島에 流配되어 있던 一部 沒落한 宗親들에게 받아들여져 江華學派가 形成되었고, 그들의 學風은 朱子學에 挑戰하는 새로운 學問으로 浮上하게 된다. 性理學者들은 이런 陽明學者들을 儒學을 어지럽히는 무리들로 規定했는데, 여기에서 ‘斯文亂賊’이 由來했다. 이 말은 中國에서는 使用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使用된다.
🍎 四分五裂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찢어지다. 意見이나 地域이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갈라지거나 勢力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弱化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戰國時代 中期, 秦나라의 勢力이 漸次로 커지면서 나머지 여섯 나라를 壓迫하기 始作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꼈던 나머지 여섯 나라는 秦나라에 對抗하기 爲해 相互 間에 外交的인 同盟 關係를 맺으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를 主導한 것이 바로 合從策을 主張했던 蘇秦이었다. 蘇秦은 六國을 돌면서 遊說를 하고 다녔는데, 그 中 魏나라의 哀王에게는 다음과 같은 理由를 들어 合縱을 主張하였다.
“魏나라는 그다지 넓지도 않고, 兵士도 30萬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地勢도 便便하여 四方에서 諸侯들이 쳐들어오면 이를 막을 만한 山이나 要塞도 없는, 그야말로 戰爭터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東쪽에는 齊나라, 南쪽에는 楚나라, 北쪽에는 趙나라, 西쪽에는 韓나라가 있어 虎視眈眈 魏나라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魏나라가 南쪽으로 楚나라와 聯合하고 齊나라와는 聯合하지 않으면 齊나라가 東쪽을 치고, 東쪽으로 齊나라와 聯合하고 趙나라와는 聯合하지 않으면 趙나라가 北쪽을 치며, 韓나라와 聯合하지 않으면 韓나라가 西쪽을 치고, 楚나라와 親하지 않으면 楚나라가 南쪽을 攻擊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四分五裂의 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魏南與楚而不與齊, 齊攻其東. 東與齊而不與趙, 則趙攻其北. 不合於韓, 是韓攻其西. 不親於楚, 則楚攻其南. 此所謂四分五裂之道也.)」”
《戰國策 魏策》에 나온다. 《戰國策》은 前漢 時代 劉向이 編纂한 것으로, 周나라의 元王부터 秦나라의 始皇帝에 이르기까지 여러 人事들의 策謀와 辨論을 國家別로 모은 冊이다.
蘇秦은 여섯 나라를 돌면서 各國이 處한 狀況과 王들의 性格을 完全히 把握한 것을 바탕으로 論理的으로 遊說를 進行하여 結局 六國을 合縱으로 하나로 묶는 데 成功했다. 蘇秦의 合縱策으로 六國이 聯合하게 되자 秦나라는 무려 15年 동안 函谷關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四分五裂’은 春秋時代에 使用했던 軍士戰術 中의 하나로, 여러 記錄에 나온다.
● 六韜 奇兵에 →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찢긴 것은 圓을 치고 네모를 부수었기 때문이다. (四分五裂者, 所以擊圓破方也)
● 史記 張儀列傳에 → 天下가 四分五裂되었다. (天下四分五裂)
● 三國志 · 魏志 司馬朗傳에 → 四分五裂이 되어 戰爭을 하는 땅이 되었다.(乃四分五裂, 戰爭之地)
● 北史 周法尙傳에 → 마침내 防備가 없어지니 四分五裂되었다. (卒有不虞, 四分五裂)
🍎 駟不及舌 , 驷不及舌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도 사람의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한 番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 말을 할 때는 愼重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比喩)
「衛나라 大夫 棘子成이 말했다. “君子는 質樸하기만 하면 된다. 文彩가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子貢이 말했다. “안타깝도다. 그대가 이런 式으로 君子를 말하는 것이 퍼져 나가면 네 마리 말이 모는 수레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오. 文彩(敎養)가 바로 質朴(根本) 함이고 質朴함이 바로 文彩라고 말하는 것은, 털을 다 뽑아 버린 호랑이나 豹범의 가죽이 털을 다 뽑아 버린 개나 羊의 가죽과 같다는 것이오.”
(棘子成曰, 君子質而已矣. 何以文爲. 子貢曰, 惜乎. 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文猶質也, 質猶文也, 虎豹之鞟, 猶犬羊之鞟.)」
이 이야기는 《論語 顔淵》에 나온다. 말은 한 番 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므로 말을 할 때에는 愼重하게 생각하라는 뜻이다. ‘駟不及舌’은 ‘駟馬難追’라고도 하는데, 이는 元來 ‘한마디의 말이라도 한 番 입을 떠나면 네 匹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一言旣出, 駟馬難追.)’는 말에서 나왔다.
🍎 邪不犯正
(바르지 못하고 妖邪스러운 것은 바른 것을 犯하지 못함. 곧, 正義는 반드시 이긴다는 뜻)
唐나라 때의 隋唐嘉話는 劉餗이라는 사람이 編纂한 一種의 逸話集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由來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唐나라 貞觀 (唐 太宗의 年號) 年間에 西域에서 어떤 중이 왔는데, 呪術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하였다. 太宗이 날랜 騎兵 가운데서 建壯하고 勇敢한 者를 뽑아서 試驗해 보게 하였는 바, 말과 같이 죽기도 하고, 말대로 살아나기도 하였다.
太宗이 太常卿 傅奕에게 이런 事情을 말하자, 傅奕이 말하였다.
"이는 邪異한 術法입니다. 臣이 듣건대 邪惡한 것은 올바른 것을 侵犯할 수 없다고 하오니, 臣에게 呪術을 걸게 하오면 決코 通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에 太宗이 중을 불러 傅奕에게 呪術을 걸게 하였는데, 傅奕은 그것을 對하고도 처음부터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았다. 아주 짧은 時間이 흐르고, 그 중이 갑자기 스스로 넘어졌는데, 마치 무엇에 얻어맞은 것 같았으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 似而非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實際로는 그렇지 않다. 元語는 ‘옳은 것 같은데 틀리다.’라는 뜻의 ‘似是而非’다)
孟子와 그의 弟子인 萬章의 對話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孔子가 말했다.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實際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穀食의 싹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妄靈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正義를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鄭나라의 淫亂한 音樂을 미워하는 理由는 雅樂을 더럽힐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색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고, 鄕原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德을 混亂시킬까 두려워서이다. 君子는 常道로 돌아갈 뿐이다. 常道가 바로잡히면 庶民들도 또한 感化되어 일어날 것이고, 庶民들이 모두 感化되어서 일어날 것 같으면 邪慝한 것이 없어질 것이다.”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君子反經而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이 이야기는 《孟子 盡心 下》에 나온다. 鄕原이란 마을에서 마음이 厚하고 틀림없는 사람으로 行勢하지만 實際로는 世俗과 迎合하는 僞善者를 말한다.
🍎 蛇足 (畵蛇添足)
(뱀을 그리면서 발 까지 그렸다는 故事에서 由來한 말로 쓸대없는 군더더기)
楚나라의 懷王6年. 楚나라에서 令尹(楚의 官名으로 宰相) 昭陽에게 軍士를 주어 魏나라를 치게했다.
그는 魏를 친 後 齊나라를 攻擊하려 했다.
齊나라엔 마침 秦나라 使臣인 陳軫이 와 있었는데. 齊나라 王이 크게 걱정을하며 對備策을 묻자 그는 戰爭을 事前에 막아주겠다고 다짐한 後 昭陽의 陣營을 찾아가 談判을 지었다.
"貴國의 法에는 敵軍을 擊破하고 敵將을 꺾으면 어떤 報恩이 따름니까?"
"令尹입니다"
"그렇습니다. 將軍께선 이미 最高官職인 令尹이 아니십니까? 魏를 擊破하고 敵將을 벤 功만도 큰데 어찌 또 齊까지 치려하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勝利를 하시면 몰라도, 그렇치 아니하다면 名譽도, 목숨까지도 危殆롭고 또한 숱한 非難을 받을 것입니다. 어떻던 國力이 弱化되면 虎視眈眈 機會를 노리는 漢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下人들에게 酒煎子에 술을 내리자, 下人들이 한 사람이 먹기에 足한 量이라 누구든 뱀을 먼저 그린 사람이 마시기로 하고선 땅에 뱀을 그렸는데, 가장 먼저 그린 者가 酒煎子을 잡고 보니 남들은 아직도 未完成인지라 自身은 발 까지 보태 그려도 되리라 해서 畵蛇添足을 하고 酒煎子를 다시 잡자 다음 畵蛇를 完成 시킨 者가 이를 빼앗으며, 世上에 蛇足이 어딨어? 라는 말에 뒤늦은 어리석을 嘆했다' 합니다. 將軍께서는 戰意를 거두시고 齊에 恩澤을 내리신다면 외려 稱頌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는 잃을것이 없는 術입니다".
이를 받아드린 昭陽이 軍士를 거두어 떠났다.
'史記' '楚世家' 等에 실려있고 蛇足의 由來라 한다.
(楚有祀者, 賜其舍人卮酒, 舍人相謂曰, 數人飮之不足, 一人飮之有餘, 謂畵地爲蛇, 先成者飮酒, 一人蛇先成, 引酒且飮之, 乃左手持卮, 右手畵蛇曰, 我能爲之足, 未成, 一人之蛇成奪取卮曰, 蛇固無足, 子安能爲之足, 遂飮其酒, 爲蛇足者, 終亡其酒)
🍎 私淑
(直接 가르침을 받진 않았으나 맘 속으로 그를 本받아 배우거나 따름)
一世代를 30年이라면 5世代는 150年으로 君子나 小人의 끼친 恩澤도 5世代면 끝난다고 한다.
孟子 (BC372~289BC)는 孔子 (BC551~BC479)보다 107年 뒤의 사람이나 孔子가 끼친 德을 思慕하여 그의 弟者가 아니였어도 그를 標本으로 삼아 自己의 人格을 修養함에 힘썼고 여러사람에 私淑토록 했다.
(君子之澤, 五世而斬, 小人之澤, 五世而斬, 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
🍎 死灰復燃 , 死灰复燃
(사그라진 재에 다시 불이 붙다. 잃었던 勢力을 다시 찾거나 어려움에 處했던 사람이 이를 克復하고 다시 일어남을 比喩)
「漢나라 文帝의 둘째 아들인 梁나라 孝王의 臣下 韓安國이 法을 어겨 監獄에 갇혔는데, 蒙縣의 獄吏 田甲이 韓安國을 侮辱하자 韓安國이 말했다. “다 타 버린 재에서도 다시 불길이 살아나지 않는가?” 그러자 田甲이 말했다. “다시 불이 타오르면 거기에다 오줌을 싸겠다.” 얼마 後에 梁나라의 內史 자리가 비었다. 漢나라에서 使者를 보내 韓安國을 梁나라의 內史에 除授하자, 韓安國은 罪人의 몸에서 2,000石의 俸祿을 받는 高官이 되었다. 田甲은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韓安國이 말했다. “田甲아, 돌아와 職責을 지키지 않으면 너의 집안을 滅族해 버리겠다.” 田甲이 웃옷을 벗고 謝罪하자, 韓安國은 웃으면서 “오줌을 누어 보라구. 너 같은 것들을 굳이 다스릴 것까지야 있겠느냐.”고 말하고는 田甲을 厚待해 주었다.
(其後安國坐法抵罪, 蒙獄吏田甲辱安國. 安國曰, 死灰獨不復然乎. 田甲曰, 然卽溺之. 居無何, 梁內史缺, 漢使使者拜安國爲梁內史, 起徒中爲二千石. 田甲亡走. 安國曰, 甲不就官, 我滅而宗. 甲因肉袒謝. 安國笑曰, 可溺矣. 公等足與治乎. 卒善遇之)」
이 이야기는 《史記 韓長孺列傳》에 나오는데, 韓安國의 말에서 ‘死灰復燃’이 由來되었다.
🍎 山戰水戰 , 山战水战
(山에서 싸우고, 물에서 싸우다. 온갖 苦生과 試鍊을 겪어 經驗이 많은 것을 比喩)
「무릇 敵과 싸울 때는 山林에 있든 平地에 있든 반드시 높은 언덕을 차지함으로써 有利한 地形에 依支하여야 치기에 有利하고, 敵을 쳐들어가기에 有利하여 싸워 이길 수가 있다. 兵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山에서 싸울 때는 높은 곳에 있는 敵을 攻擊하지 말라.”
(凡與敵戰, 或居山林, 或在平陸, 須居高阜, 恃於形勢, 順於擊刺, 便於奔衝, 以戰則勝. 法曰, 山陵之戰, 不仰其高.)」
● 劉基의 百戰奇略 山戰에.
「무릇 敵과 싸울 때는 或은 江 언덕 가에 陣을 치고 或은 물 위에 배를 停泊 시키는데, 이를 모두 水戰이라고 한다. 물에 가까운 언덕에서 싸울 때는 반드시 물에서 若干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이는 한便으로는 敵이 渡河를 하도록 誘引하는 것이고 한便으로는 敵이 疑心을 하지 않도록 하기 爲함이다. 반드시 敵과 싸우려 한다면 물 가까이에서 敵을 맞이하지 말라. 敵이 渡河를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萬若 敵과 싸우지 않겠다면 언덕에 依支하여 敵을 막아 敵이 渡河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라. 萬若 敵이 軍士를 이끌고 渡河하여 攻擊하면 물가에서 敵이 折半쯤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攻擊하면 利로울 것이다. 兵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半쯤 건넜을 때 攻擊하라.”
(凡與敵戰, 或岸邊爲陣, 或水上泊舟, 皆爲之水戰. 若近水爲戰, 須去水稍遠, 一則誘敵使渡, 一則示敵無疑. 我欲必戰, 勿近水迎敵, 恐其不得渡. 我欲不戰, 則拒水阻之, 使敵不能濟. 若敵率兵渡水來戰, 可於水邊伺其半濟而擊之, 則利. 法曰, 涉水半渡可擊.)」
● 劉基 百戰奇略 水戰에.
元來 ‘山戰水戰’은 이처럼 戰術的인 測面에서 나왔지만, 나중에는 모든 風波를 다 겪거나 經驗이 豊富한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劉基의 《百戰奇略》은 歷代의 兵法書를 參考하여 100가지의 戰爭을 收錄한 兵書이다.
🍎 殺身成仁 , 杀身成仁
(몸을 죽여 仁을 이루다. 옳은 일을 爲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孔子가 말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爲하여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自身의 목숨을 바쳐 仁을 行할 뿐이다.”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 論語 衛靈公에.
‘志士’는 道德과 義理에 뜻을 둔 사람을 말하고, ‘仁人’은 어진 德性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孔子도 ‘殺身成仁’을 接近하기 어려운 以上으로 보았던지 〈衛靈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百姓들의 仁에 對한 必要는 물과 불보다 切實하다. 물과 불을 건드리고 죽는 사람은 내가 보았지만, 仁을 實踐하면서 죽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子曰,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
🍎 三顧草廬 , 三顾草庐
(草家를 세 番 돌아보다. 有能한 人才를 맞아들이기 爲하여 참을性 있게 努力하는 것을 比喩)
後漢 末葉, 劉備는 關羽, 張飛와 義兄弟를 맺고 漢室의 復興을 爲해 軍士를 일으켰다. 하지만 能力을 發揮할 機會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轉輾하며 歲月을 虛送하다가 마지막에는 荊州刺史 劉表에게 몸을 맡기는 身世가 되었다. 有能한 參謀의 必要性을 切感한 劉備는 여러 사람들을 通해 南陽에 隱居하는 諸葛亮의 存在를 알게 되었고, 關羽, 張飛와 함께 禮物을 싣고 襄陽에 있는 그의 草家를 세 番이나 訪問한 끝에 그를 軍師로 모실 수가 있었다. 이때 諸葛亮은 27歲, 劉備는 47歲였다.
이렇게 劉備가 諸葛亮을 세 番 訪問한 것을 이르러 ‘三顧草廬’, 或은 ‘三顧茅廬’라고 하는데, 實際로 이 말은 諸葛亮이 첫 番째 北伐을 나서기 前, 後周 劉禪에게 바친 出師表에서 찾아볼 수 있다.
「臣下 亮은 말씀드립니다. 先帝의 創業이 半도 끝나지 않아 中途에 돌아가시고, 只今 天下는 셋으로 나뉘어 益州는 疲弊하니 이는 眞實로 存屬하느냐 亡하느냐의 危機의 때입니다. 그러나 옆에서 모시는 臣下들이 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忠義의 軍士들이 밖에서 自身의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모두 先帝의 特別한 待遇를 追念하여 陛下에게 그에 對한 報答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陛下의 聖스러운 귀를 여시어(臣下들의 忠諫을 받아들이시어) 先帝의 遺德을 밝히시고 뜻있는 선비들의 氣槪를 펼쳐 주는 것이 眞實로 마땅합니다. 亡靈되이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거나, 義에 符合하지 않은 것을 끌어들이거나 比喩하여 忠諫의 길을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宮中과 府中은 모두 한 몸이 되는 것이니 功 있는 者를 올리고, 罪를 罰하며, 善한 것은 稱讚하고, 惡한 것을 버림에 다름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萬若 奸邪한 짓을 하거나 過誤를 犯하거나, 忠誠과 善行을 한 者가 있으면 官吏에 부쳐 그 刑罰과 賞을 論하여 陛下의 公平하고 밝은 理致를 밝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私的인 일에 치우쳐 안과 밖에 法을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侍中, 侍郞인 郭攸之, 費褘, 董允 等, 이들은 모두 善良하고 誠實하고, 뜻과 생각이 忠誠스럽고 純粹합니다. 이런 까닭에 先帝께서 拔擢하시어 陛下에게 남겨 주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宮中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 없이 모두 그들에게 咨問하신 後에 施行하면 반드시 不足한 點을 補充하고 넓게 더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將軍 向寵은 性品과 行實이 善하고 變함없으며, 軍事 業務에 밝고 能通하여, 옛날 試驗 삼아 써 보고 先帝께서 能力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모두의 議論이 寵을 指揮官으로 薦擧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軍營의 일은 일의 크고 작음 없이 모두 그에게 咨問하시면 部隊가 和睦하게 되고 優秀한 사람과 좀 못한 사람이 各各 쓰이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진 臣下를 가까이하고 小人을 멀리한 것, 이것이 先漢이 興하고 隆盛했던 까닭입니다. 小人을 가까이하고 어진 臣下를 멀리한 것, 이것이 後漢이 기울고 시들었던 까닭입니다. 先帝께서 계실 때, 每番 臣과 더불어 이 일을 論하면서 桓帝와 靈帝를 歎息하고 痛恨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侍中, 尙書, 長史, 參軍, 이들은 모두 곧고 眞實된 죽음으로 節操를 지키는 臣下들입니다. 願컨대 陛下께서 이들과 親하게 하고 이들을 信賴하시면, 漢나라 王室의 隆盛함은 날을 세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臣은 本來 平民으로 몸소 南陽에서 耕作을 하면서 亂世에 苟且히 姓名을 保全하면서 諸侯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顯達하기를 求하지 아니하였는데, 先帝께서 臣을 낮고 賤하다 여기시지 아니하시고 猥濫되이 스스로 몸을 굽히어 臣의 草家집으로 세 番 찾아오시어 臣에게 當世의 일을 咨問하셨습니다. 이로 因해 感激하여 드디어 先帝를 爲해 熱心히 뛰어다닐 것을 許諾했던 것입니다.
後에 敗北를 當하여 軍隊가 敗한 狀況에서 任務를 받고, 危急하고 어려운 가운데 命을 받들어 只今까지 21年이 지났습니다. 先帝께서는 臣이 삼가고 愼重함을 아신 까닭에 돌아가심에 臨해 臣에게 大事를 付託하셨습니다. 命을 받은 以來, 이른 아침과 늦은 밤으로 근심하며, 付託하신 것이 效果가 나타나지 않아 先帝의 밝음을 傷하게 할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月에 瀘를 건너 不毛地에 깊이 들어갔습니다. 只今 南方이 이미 平定되어 兵甲이(軍費가) 이미 充分하므로, 三軍을 거느리고 北으로 中原을 平定해야 할 때를 當해, 魯鈍한 能力을 다해 奸邪하고 凶惡한 무리들을 물리치고 除去하여 漢나라 王室을 復興시키고 옛 首都로 돌아가기를 願합니다. 이것이 臣이 先帝에게 報答하고 陛下의 職分에 忠誠을 하는 바입니다.
損益을 斟酌하고 나아가 忠言을 다하는 것은 攸之, 褘, 允의 任務입니다. 陛下께서 臣에게 敵을 討伐하고 漢室을 復興시키는 效力을(任務를) 맡기기를 願합니다. 效力이 나지 않으면 臣의 罪를 다스리시어 先帝의 英靈에 告하소서. 萬若 德을 曾進시키는 말이 없다면 攸之, 褘, 允 等의 怠慢이니 그 허물을 밝히시옵소서. 陛下께서도 스스로 꾀하시어 善한 道理를 묻고 꾀하시고, 좋은 말을 살펴 받아들여 先帝의 遺詔를 깊이 좇으소서. 臣은 받은 恩惠에 感激을 이기지 못하여 只今 멀리 떠남에 있어 表를 쓰면서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臣亮言.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侍衛之臣不懈於內, 忠志之士忘身於外者,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宮中府中, 俱爲一体. 陟罰臧否, 不宜異同. 若有作奸犯科及爲忠善者, 宜付有司論其刑賞, 以昭陛下平明之理. 不宜偏私, 使內外異法也. 侍中侍郎郭攸之, 費褘, 董允等, 此皆良實, 志慮忠純. 是以先帝簡拔以遺陛下. 愚以爲宮中之事, 事無大小, 悉以咨之, 然後施行, 必能裨補闕漏, 有所廣益. 將軍向寵, 性行淑均, 曉暢軍事, 試用於昔日, 先帝稱之曰能. 是以衆議擧寵爲督. 愚以爲營中之事, 悉以咨之, 必能使行陣和睦, 優劣得所. 親賢臣, 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 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每與臣論此事, 未嘗不嘆息痛恨於桓靈也. 侍中, 尙書, 長史, 參軍, 此悉貞良死節之臣. 願陛下親之信之, 則漢室之隆, 可計日而待也.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嘆, 恐托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奸凶, 興復漢室, 還於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 褘, 允之任也. 願陛下托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 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若無興德之言, 則責攸之, 褘, 允等之慢, 以彰其咎. 陛下亦宜自謀, 以咨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零, 不知所言.)
🍎 三年不飛又不鳴 , 三年不飞又不鸣
(3年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뒷날 雄飛할 機會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比喩)
「楚나라 莊王이 卽位 3年이 되도록 令을 내리지 않고 밤낮으로 즐기기만 했다. 그러고는 나라 사람들에게 令을 내렸다. “敢히 寡人에게 諫하는 者는 死刑에 處할 것이오.”
伍擧가 (죽음을 覺悟하고) 諫言을 하기 爲해 들어갔다. 莊王은 왼쪽에 鄭姬를, 오른쪽에 越女를 품고 鐘과 북(鼓) 사이에 앉아 있었다. 伍擧가 말했다. “殿下, 臣이 수수께끼를 하나 내겠습니다. 언덕 위에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3年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이 새는 무슨 새겠습니까?” 莊王이 對答했다. “3年이나 날지 않았으니 날면 將次 하늘까지 차고 오를 것이오. 3年이나 울지 않았으니 한 番 울면 世上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伍擧는 물러가 있으시오. 내 알고 있소.”
몇 달이 지났으나 莊王의 亂行은 더욱 甚해졌다. 그러자 大夫 蘇從이 (죽음을 覺悟하고) 直諫했다. 莊王이 말했다. “卿은 내 令을 듣지 못했소?” “죽음으로써 君主를 밝게 하는 것이 臣이 願하는 바입니다.” 莊王은 그날부터 酒色을 멀리하고 國政에 全念하여 誅殺한 者가 數百 名이고 進人(들인)者가 數百 名이었다. 그리고 伍擧와 蘇從에게 政事를 맡겼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해에 庸나라를 滅亡시켰다.
(莊王卽位三年, 不出號令, 日夜爲樂, 令國中曰, 有敢諫者死無赦. 伍擧入諫, 莊王左抱鄭姬, 右抱越女, 坐鐘鼓之間. 伍擧曰, 願有進隱. 曰, 有鳥在於阜, 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 莊王曰, 三年不蜚, 蜚將衝天. 三年不鳴, 鳴將驚人. 擧退矣. 吾知之矣. 居數月, 淫益甚. 大夫蘇從乃入諫. 王曰, 若不聞令乎. 對曰, 殺身以明君, 臣之願也. 於是罷淫樂, 聽政, 所誅者數百人, 所進者數百人, 任伍擧蘇從以政. 國人大悅. 是歲滅庸.)」
이 이야기는 《史記 楚世家》와 《呂氏春秋 審應覽》에 나오는데, 伍擧가 莊王에게 한 말에서 ‘三年不飛又不鳴’이 由來했다. 莊王이 3年 동안 淫樂에 빠져 酒色을 가까이했던 것은 忠臣과 姦臣을 選別하기 爲한 事前 工作이었던 것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史記 滑稽列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楚莊王보다 約 250年 後의 사람인 齊威王 때 淳于髡이 威王에게 한 말로 記錄되어 있다.(一鳴驚人)
🍎 三房荀彧
曹操가 懇切히 賢士를 찾는다고 하자, 泰山의 老僧이 그에게 緋緞 주머니를 하나 주면서 말했다.「누구든 當身을 指目해 辱을 하는 사람이 있거든, 當身은 이 緋緞 주머니를 열어본 뒤 그를 찾아가십시오.」
曹操가 許昌에 到着하자, 同生 曹仁이 每日 兵士를 거느리고 나가서 盜賊질을 하며 百姓들을 괴롭혔다. 사흘이 지나자, 四大門에는 大門마다 榜文이 나붙었는데, 그 內容은 이러했다.
• 曹操到許昌, 百姓遭了殃
(曹操가 許昌에 이르렀으니, 百姓들은 災殃을 만났구나)
그 아래에는 「許昌 荀彧」이라는 이름이 남겨져 있었다. 曹操는 이 事實을 알고 火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처음에 곧바로 荀彧을 붙잡아오려 했으나, 갑자기 老僧의 말이 생각나서 緋緞 주머니를 열어 보니, 안에는 한 行의 文章이 적혀 있었다.
• 許昌荀彧, 才過子房
(許昌에 살고 있는 荀彧은, 才주가 張子房을 凌可하네)
曹操는 크게 기뻐하며 曹仁에게 그를 請해 오라고 命했다. 元來 荀彧은 曹操가 才주 있는 사람이라는 所聞을 듣고 依託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먼저 넌지시 榜文을 한 張 써 붙여 그를 試驗해 본 것이었다.
荀彧은 曹仁이 自身을 데리러 온 것을 알고 일부러 門을 열지 않았다. 曹仁이 돌아가 報告하자, 曹操는 반드시 親히 나서야 한다는 事實을 깨달았다. 그는 동짓달 내린 큰 눈을 무릅쓰고 聚奎街에 있는 荀彧의 邸宅으로 찾아갔으나, 大門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鬚髥에 얼음이 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다음 날 또 갔으나, 執事가 主人은 許田으로 사냥을 갔다고 했다. 세 番째는 荀彧이 祖上의 墓에서 伐草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禮를 갖추어 찾아갔다.
墓地에 到着하자, 스물 몇 살쯤 되어 보이는 한 靑年이 한창 孫子兵法을 熱心히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曹操가 그 옆으로 가서 섰지만, 荀彧은 고개도 한 番 들지 않았다. 갑자기 한 차례 바람이 불더니, 荀彧의 손에 있던 冊이 바람에 날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曹操가 急히 몸을 굽혀 주워 올린 뒤, 恭遜하게 바치며 말했다.
"荀公, 曹操가 問安 여쭙니다."
荀彧이 말했다.
"저는 普通 百姓인데, 先生께서 어찌 問安을 여쭙니까?"
曹操가 다시 말했다.
"荀公은 子房의 才주와 子牙의 智謀를 갖추고 있으니, 제가 함께 大事를 圖謀하려고 모시러 왔습니다."
"當身은 제가 當身을 辱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曹操가 웃음을 띄며 말했다.
"辱하는 데에 一理가 있다면 많이 辱할수록 좋지요."
荀彧은 辭讓을 하며 발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다고 하자, 曹操는 곧장 앞으로 가서 荀彧을 부축해 말에 오르게 했다. 이때부터 荀彧은 曹操의 謀士가 되어 數많은 策略들을 내 놓았다.
🍎 三十六計 , 三十六计
(서른여섯 番째 計策. 더 以上 해볼 方法이 없는 困難한 狀況에 處했을 때는 卽時 避하는 것이 가장 좋은 方法이라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三十六計, 走爲上’, 卽 서른여섯 番째 計策, 달아나는 것이 上策이다. 의 준말이다)
南北朝時代 南朝의 宋나라 將軍 蕭道成은 部將 王敬則을 시켜 暴君인 後廢帝 劉煜을 殺害하고 劉準(順帝)을 皇帝로 세운 다음, 順帝에게 禪讓을 받는 形式으로 帝位에 오르고 國名을 齊라고 했는데, 그가 바로 齊나라 高帝이다. 高帝 蕭道成은 在位 3年 만에 죽었는데, 臨終 때 子孫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骨肉相殘이 되풀이된 宋나라의 滅亡을 거울삼아 서로 和睦하고 協助하여 宋나라의 歷史를 되풀이하지 말 것을 遺言으로 남겼다. 太子 蕭蹟이 蕭道成의 뒤를 이었는데, 그가 武帝이다. 그리고 蕭昭業과 蕭昭文이 그 뒤를 이었다가, 武帝 蕭道成의 四寸인 蕭鸞이 다시 뒤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明帝이다.
明帝는 皇帝에 卽位한 以後 反亂과 報復이 두려워 武帝의 아들 17名, 兄弟 12名, 그리고 여러 名의 孫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開國功臣인 會稽 太守 王敬則이 生命의 危脅을 느껴 反亂을 일으켰다. 王敬則은 軍士 1萬을 이끌고 首都 健康을 向해 進擊했는데, 明帝의 虐政에 不滿을 품은 農民들이 中途에 可勢하여 軍士가 10萬으로 불어났다.
「當時 明帝는 病이 危篤한 狀態였는데, 王敬則이 倉卒之間에 東쪽에서 들고일어나자 朝廷이 모두 두려워 했다. 明帝의 둘째 아들 蕭寶卷은 東宮에서 叛亂 鎭壓을 論議하면서 사람을 시켜 지붕에 올라 살펴보게 했는데, 征虜亭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王敬則이 이르렀다고 말하자 蕭寶卷은 急히 行裝을 꾸려 逃亡갈 準備를 했다. 누군가가 王敬則에게 이를 報告하자 王敬則이 말했다. “그들 父子에게 뾰족한 手가 있을 수 없겠지. 檀公의 서른여섯 가지 計策 가운데 逃亡이 最高의 計策이라 했거늘, 너희 父子는 서둘러 逃亡하는 게 좋겠지.” 王敬則이 처음 攻擊해 올 때는 그 勢가 아주 대단했으나 며칠 만에 敗하고 말았는데, 이때 王敬則은 70如 歲였다. (是時上疾已篤, 敬則倉卒東起, 朝廷震懼. 東昏侯在東宮議欲叛, 使人上屋望, 見征虜亭失火, 謂敬則至, 急裝欲走. 有告敬則者, 敬則曰, 檀公三十六策, 走爲上計. 汝父子唯應急走耳. 敬則之來, 聲勢甚盛, 裁少日而敗, 時年七十餘.)」
《南史 王敬則傳》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三十六計’라는 말이 처음 言及되었다. 王敬則이 말한 ‘檀公’은 南北朝 宋 武帝의 開國功臣 檀道濟를 말한다.
武帝가 죽자 그 뒤를 이은 文帝는 檀道濟를 征南大將軍으로 封했다. 檀道濟는 北魏와의 戰鬪에서 무려 30如 차례를 連戰連勝했다. 그런데 한 番은 宋나라 軍隊가 歷城 一帶까지 쳐들어갔다가 軍糧이 不足하게 되었다. 檀道濟는 退却을 決定했다. 北魏의 軍隊는 宋나라 軍隊의 事情을 把握하기 爲해 密偵을 派遣하여 宋軍의 陣營을 偵察했다. 檀道濟는 軍糧을 配給하는 척하며 일부러 食糧을 땅에 흘렸다. 北魏는 宋나라 軍隊가 軍糧이 넉넉한 것으로 생각하고 敢히 攻擊하지 못하고 防備만 했다. 檀道濟는 그 틈을 타 無事히 撤收했다. 훗날 사람들은 그가 計策이 많았음에도 不拘하고 結局 敗走하였다고 비웃었다.
蕭寶卷은 明帝 騷亂의 둘째 아들로, 明帝가 죽은 後, 16歲의 나이에 그 뒤를 이어 南齊의 여섯 番째 皇帝가 되었다. 蕭寶卷은 暴惡하고 紊亂한 生活을 했는데 502年 雍州刺史 蕭衍이 軍士를 이끌고 南京을 攻略하여 暴惡한 皇帝 蕭寶卷을 죽이고 蕭寶卷의 同生 蕭寶融, (在位 501∼502)을 세운 後, 그로부터 禪讓을 받아 帝位에 오르고 國號를 梁이라 했다. 이이가 바로 梁의 開祖인 武帝, (在位 502∼549)이다. 蕭衍은 蕭寶卷을 東昏侯로 追封했다.
● 歷史 · 文化 資料 上 三十六計
‘三十六計’란 말이 처음 言及된 것은 《南齊書》의 (王敬則傳)이다. 그러다가 明末淸初에 한 無名學者가 이 口傳된 內容들을 가지고 《三十六計秘本兵法》이라는 冊으로 엮었는데, 이것이 筆寫本으로 傳承되다가 1941年 陝西省 咸陽市 彬縣에서 發見되어 비로소 書籍으로 出版되기 始作했다. 勿論, 檀道濟가 말한 ‘三十六計’와 《三十六計秘本兵法》의 36計가 直接的인 聯關性이 있는지 與否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檀道濟의 三十六計가 어떤 內容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36計는 古代 中國의 軍士 古典 中에서 戰略 戰術의 하나로, 속임수에 强調點을 두었다는 點에서 좀 異色的인 것이다. 大部分의 다른 兵書들은 接戰 時의 策略에 關한 것들인데, 이런 類形의 冊들과는 달리 三十六計는 戰略的 目的을 達成하기 爲한 속임수의 使用, 때에 따라서는 挾雜, 避身 方法 等에 焦點을 맞추고 있다. 이런 까닭에 그 題目이 《三十六計秘本兵法》인 것이다. 이 冊은 36個의 戰略을 여섯 個의 章으로 分類하고 있다. 1∼3章의 18個 戰略은 狀況이 優勢할 때 이를 活用하여 利得을 얻고자 使用하는 戰略이고, 4∼6章의 18個 戰略은 狀況이 劣勢일 때 劣勢에서 벗어나 損失을 最小化하고자 하는 戰略이다.
🍎 三十六計 (36가지 計策)
第 1 章 (勝戰計) : 我軍이 勝利할 수 있는 條件이 充分히 具備되었을 때 取하는 作戰이다. (1 ~ 6)
1. 瞞天過海 : 隱密하게 來日을 圖謀하라.
2. 圍魏救趙 : 正面攻擊보다 迂廻하라.
3. 借刀殺人 : 直接 나서는 것은 初步者의 方法이다.
4. 以逸待勞 :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5. 趁火打劫 : 機會가 왔을 때는 벌떼처럼 攻擊하라.
6. 聲東擊西 : 相對方의 注意를 다른 곳으로 誘導하라.
第 2 章 (敵戰計) : 我軍과 敵軍의 勢力이 비슷할 때 奇妙한 計略으로 敵軍을 迷惑시켜 勝利를 이끄는 作戰이다.
(7 ~ 12)
7. 無中生有 :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라.
8. 暗渡陳倉 : 虛僞 情報를 漏洩하여 逆으로 利用하라.
9. 隔岸觀火 : 相對方에 內紛이 일어나면 觀望하라.
10. 笑裏藏刀 : 秘藏의 武器는 웃음으로 감추어라.
11. 李代桃僵 : 작은 損失로 決定的인 勝利를 誘導하라.
12. 順手牽羊 : 아무리 작은 利得이라도 默過하지 말라.
第 3 章 (攻戰計) : 自身을 알고 敵을 안 다음 計策을 謀議하여 敵을 攻擊하는 戰略이다. (13 ~ 18)
13. 打草驚蛇 : 相對方의 本心을 드러내도록 하라.
14. 借屍還魂 : 對策없는 冒險은 避하라.
15. 調虎離山 : 어려운 相對는 끌어내라.
16. 欲擒故縱 : 相對方의 마음을 잡아라.
17. 抛磚引玉 : 작은 미끼로 큰 利得을 圖謀하라.
18. 擒賊擒王 : 勝負는 最後의 一刻까지
第 4 章 (混戰計) : 敵이 混亂한 渦中을 틈타 勝機를 잡는 戰略이다.
(19 ~ 24)
19. 釜底抽薪 : 힘으로 안되면 相對方의 김을 빼라.
20. 混水摸漁 : 混亂을 일으켜 決定打를 加하라.
21. 金蟬脫殼 : 陣營을 그대로 두고 主力을 딴곳으로.
22. 關門捉賊 : 弱한 敵을 包圍 攻擊하라.
23. 遠交近攻 : 가까운 敵부터 相對하라.
24. 假道伐虢 : 弱한 相對는 名分만으로 取할 수 있다.
第 5 章 (倂戰計) : 狀況의 推移에 따라 언제든지 敵이 될 수 있는 友軍을 背叛, 利用하는 戰略이다. (25 ~30)
25. 偸梁換柱 : 故意로 敗하게 하여 自身의 勢力으로 吸收한다.
26. 指桑罵槐 : 迂廻的인 方法으로 怯을 주어라.
27. 假痴不癲 : 어리석은 行動으로 相對를 安心시켜라.
28. 上屋抽梯 : 나무에 오르게 하고 사다리를 치운다.
29. 樹上開花 : 虛張聖勢. 虛風도 때에 따라서는 큰 힘이 된다.
30. 反客爲主 :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
第 6 章 (敗戰計) : 狀況이 가장 不利한 境遇 劣勢를 優勢로 바꾸어 敗北를 勝利로 이끄는 戰略이다.(31 ~ 36)
31. 美人計 : 美貌를 兼備한 女人을 앞세워 眩惑시키고 判斷 未熟으로 誘導.
32. 空城計 : 徹底히 비워 둠으로써 敵을 두렵게 하라.
33. 反間計 : 敵의 諜者를 逆으로 利用하라.
34. 苦肉計 : 죽는것 보다 팔 하나 없는 것이 낫다.
35. 連環計 : 相對方의 足鎖를 채우고 攻擊하라.
36. 走爲上 : 如意치 않으면 避하라.
🍎 三十六計策
★ 第 1 章 (勝戰의 計)
1. 第 1 計 ~ 瞞天過海 (하늘을 欺瞞하고 바다를 건너간다)
● 太史慈는 每日 아침마다 城에서 나와 敵이 보는 앞에서 悠悠히 활쏘는 演習을 하고는 다시 城안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反復했다.
처음엔 이를 警戒하던 敵軍의 偵察兵들도 每日 反復되풀이되는 太史慈의 모습에 나중에는 無心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平素처럼 城에서 활을 들고 나온 太史慈는 갑자기 잽싸게 말을 타고 달려 敵陣을 빠져 나간 것이다.
2. 第 2 計 ~ 圍魏救趙 (强한 敵을 分散시켜 처부수다)
● 戰國時代에 魏나라 大軍에게 攻擊을 받아 都邑인 邯鄲을 包圍當한 趙나라는 이웃의 齊나라에게 救援을 要請했다.
齊나라 將帥 田忌가 急히 邯鄲을 進擊하려 들자, 齊나라의 軍士인 孫臏이 다음과 같이 提案하였다.
"魏나라 軍士와의 正面勝負는 우리 쪽에 不利합니다. 이런 때는 守備가 相對的으로 허술한 魏나라의 首都를 攻擊합시다. 그러면 魏나라는 邯鄲의 包圍를 풀어버리고 서둘러 撤收할 것입니다.
그때를 노려서 攻擊하면 어떻겠습니까?"
結局 齊나라는 大勝을 거두었고 아울러 趙나라도 救하게 되었다.
3. 第 3 計 ~ 借刀殺人 (칼을 빌려서 殺人 한다)
● 相對를 攻擊할 때 자기가 直接 攻擊하지 않고 다른 相對의 힘을 가지고 攻擊하는 戰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元理에 立脚한 中國人다운 戰略이라고 할 수 있다.
4. 第 4 計 ~ 以逸待勞
● '逸'이란 餘裕있는 狀態이며 '勞'는 疲勞한 狀態로, 相對에 對해 餘裕를 가지고 守備에 臨하여 相對가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기다린다는 것이 하늘에 運을 맡긴다는 意味는 아니다.
敵에게 攻擊의 틈을 주지 않으면서 戰列을 가다듬고 準備를 단단히 하며 기다려야 한다.
5. 第 5 計 ~ 趁火打劫 (불난 틈을 利用하여 盜賊질 한다)
● 이는 第4計 와는 反對인 攻擊作戰이다. 攻擊을 할 것이냐, 守備를 할 것이냐 하는 判斷은 敵의 情勢에 따라 달라진다. 卽 敵의 勢力이 强할 때는 그들이 지치도록 기다려야 하며,
敵의 힘이 弱化되었을 때는 기다림없이 單숨에 攻擊을 하는 것이 이 計略의 要點이다. 다시말해, 相對의 弱點을 發見하면 遲滯없이 攻擊하여 相對를 無力하게 만드는 것이다.
6. 第 6 計 ~ 聲東擊西 (東쪽을 向해 소리치고 西쪽을 攻擊한다)
● 西쪽을 攻擊하기 爲해 敵의 兵力을 分散시켜 힘을 弱化시키는 策略으로,
예부터 이 戰法이 利用되어 왔다. 그러나 잘못 使用하면 오히려 敵으로부터
큰 被害를 받을 수 있으므로 特히 愼重해야 한다. 相對의 指揮 系統을 混亂시키는 것이 이 策略을 成功시키는 秘訣이다.
★ 第 2 章 (敵戰의 計)
7. 第 7 計 ~ 無中生有 (아무도 모르게 지나간다)
● 唐나라 安祿山이 叛亂을 일으켜 雍丘城이 包圍를 當했다. 이때 城內에 張巡이라는 將帥가 城을 지키고 있었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城이 陷落黨하기 一步直前이었을 때, 張巡은 한 가지 計策을 생각해냈다. 그는 部下들을 시켜 千 個의 허수아비에 軍服을 입혀 眞짜 兵士인 양 꾸몄다.
이어서 허수아비 千 個를 밧줄처럼 새끼줄에 달아 캄캄한 밤中 城 밖으로 내려 보냈다.
이것을 본 敵軍은 眞짜 兵士인 줄 알고 수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張巡의 計略에 完全히 말려든 것이다.
張巡은 人形에 꽂힌 數萬 個의 화살을 敵에게 내보이며 自身의 計略을 誇示했다. 그러나 이 計略은 다음 作戰의 前奏曲에 不過했다.
張巡은 이番에는 볏집 人形 代身에 眞짜 兵士들을 城 밖으로 내려보냈다.
前에 한 番 속은 敵軍의 兵士들은 이番에는 속지 않으려고 한 個의 화살도 쏘지 않았다. 城 밖으로 내려간 兵士들은 叛亂軍을 急襲하여 크게 무찔러 버렸다.
속임수를 利用하여 相對方을 混亂시킨 後, 逆으로 放心한 틈을 노린것이다.
虛와 實을 巧妙히 엇바꾸어 敵을 混亂에 빠뜨리고 쳐부는 策略이다.
8. 第 8 計 ~ 暗渡陳倉 (아무도 모르게 陳倉을 건너간다)
● 劉邦의 部下였던 名將 韓信이 關中을 쳐들어 갈 때 正面에서 攻擊하는 척하다가 몰래 陳倉이라는 城을 攻擊한 事實에서 由來한다. 이 發想은 第6計인 聲東擊西와 비슷하다.
世界 歷史上 最大의 作戰인 1944年 6月, 노르망디(Normandie) 上陸作戰이 바로 이 境遇이다. 聯合軍 側은 일찍이 노르망디를 上陸 目標로 定했으나,
作戰上 獨逸軍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칼레 上陸을 거짓으로 流布하고 그쪽으로 繼續 爆擊을 加하여 上陸이 臨迫한 것처럼 僞裝했다.
獨逸軍은 칼레가 補給이나 作戰遂行 面에서 上陸地로 가장 有力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僞裝戰術에 넘어가고 말았다.
結局 聯合軍은 이러한 虛点을 노려 노르망디에 上陸, 勝利를 이끌어냈다.
9. 第 9 計 ~ 隔岸觀火 (기슭을 사이에 두고 불을 쳐다본다)
● 여기서 불이란 內紛을 意味한다. 卽 집안싸움을 일으키라는 말이다.
內紛狀態에 있는 相對를 奇襲하면 오히려 敵이 團結하게 되어 거꾸로 我軍이 損害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程度 時間을 가지고 敵의 自滅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幸運은 자면서 기다려라'는 俗談이 있다. 이 또한 '隔岸觀火'의 策略이다.
10. 第 10 計 ~ 笑裏藏刀 (가슴에 匕首를 숨기도 겉으로는 상냥하게 相對方을 對하는 戰略이다.)
● 宋나라 曹瑋에 關한 逸話로 어느 날 戰場에서 曹瑋는 自己 쪽 兵士들이 敵軍 쪽으로 逃亡쳤다는 報告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動搖함이 없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말게, 그들은 모두 내가 指示한 대로 行動한 것뿐일세" 이 이야기를 들은
敵軍은 逃亡쳐 온 兵士들을 疑心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것이 逃亡兵을 없애기 爲한 高度의 '笑裏藏刀'의 한 例이다.
11. 第 11 計 ~ 李代桃僵 (작은 損害를 보는 代身 큰 勝利를 爭取하는 戰略)
● 戰爭이든 事業이든 어느 程度의 損失은 따르게 마련이다. 問題는 그 損失이 將來의 利益과 어떻게 結付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작은 損害에 執着하면 오히려 損失은 커지게 마련이다.
이에 對해 孫子兵法을 쓴 孫武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智慧로운 사람은 利益과 損失의 兩面을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일을 順調롭게 處理할 수 있다. 비록 損失을 입었다 할지라도 賢明한 사람은 損失로 因한 뒤의 利益을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걱정할 것이 없게 된다.」
12. 第 12 計 ~ 順手牽羊 (손에 잡히는 데로 取한다)
● 쉽게 손에 들어오는 利益이라면 念慮하지 말고 取하되, 그러나 確實한 目標가 세워져 있고 狀況에 따라 柔軟하게 對處하는 것이 必要하다.
高度成長 時代라면 모르지만 低成長 時代에서는 조그만 利益이라도 着實히
쌓아나가는 '順手牽羊'의 姿勢가 무엇보다도 重要하다.
★ 第 3 章 (攻戰의 計)
13. 第 13 計 ~ 打草驚蛇 (풀을 막대기로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 相對의 動靜을 살펴보는 策略 이다. 아울러 풀을 쳐서 뱀을 誘引 한다는 意味도 있다. 卽 巨物을 잡기 爲해서 周邊의 조무래기부터 차례로 잡아들여 確實한 證據를 만들어 가는 作戰이다.
14. 第 14 計 ~ 借屍還魂 (屍體에 힘입어 魂을 돌아오게 한다)
● 世上에서 價値없다고 버려진 것들을 다시 利用하에 價値있는 것으로 만든다. 例를들면 三國志의 曹操는 權謀術數에 아주 能한 사람으로 不遇한 處地에 있던 허수아비 皇帝를 自身의 本거지로 맞아들여 勢力 擴大 手段으로 利用하였다.
15. 第 15 計 ~ 調虎離山 (山中의 호랑이를 山에서 떠나게 하는 策略)
● 山속에선 범이 무섭지만 莫上 平地에 내려오면 훨씬 處置하기에 容易한 法이다. 이처럼 要塞에 버티고 있는 敵도 밖으로 誘引하면 치기 쉽다는 것이다.
16. 第 16 計 ~ 欲擒故縱 (窮地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 退路를 完全히 封鎖하면 相對方은 죽기를 무릅쓰고 反擊한다.
故로 외려 退路를 조금 열어주면 敵은 勢力이 弱해져 쉽게 處置할수 있게 된다. 完全히 잡기 爲해서는 暫時동안 내버려 둔다는 意味다.
ㅅ ~ 8 (2 ~2)
17. 第 17 計 ~ 抛磚引玉 (벽돌을 던져서 구슬을 얻는다)
● 미끼를 던져서 相對를 誘惑하는 計略이다. 이 作戰의 成功 與否는 미끼같지 않은 미끼를 使用해야 한다는 것이다.
反對로 相對方 쪽에서 볼 때는 미끼에 걸리지 않도록 冷情한 判斷力을 해야한다.
荀子도 '利로움만 보고 그 害로움을 돌보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는데,
當場 目前의 利益보다는 그 裏面에 숨겨진 損害를 생각할 만큼 마음의
餘裕를 恒常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18. 第 18 計 ~ 擒賊擒王 (盜賊을 사로잡으려면 우두머리를 잡아라)
● 相對方의 中樞를 攻擊하여 敵의 中心을 壞滅시키는 戰略이다. 모든 事物은 必히 弱點이 있기 마련, 그러니 그 弱点을 利用하면 交涉이나 說得이 意外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 第 4 章 (混戰의 計)
19. 第 19 計 ~ 釜底抽薪 (가마솥의 長斫을 치우는 策略이다)
● 具體的으로 보면 敵의 補給을 遮斷하는 것, 敵의 士氣를 꺾는 것으로,
三國時代 魏나라 曹操는 官渡 戰鬪에서 袁紹의 大軍과 싸운 일이 있었다.
그런데 劣勢에 몰렸던 曹操가 袁紹의 補給基地를 밤에 몰래 襲擊하는 바람에 大勝하였고, 이 氣勢를 몰아 單숨에 中國 北部를 支配하는 實力者로 登場하였다.
20. 第 20 計 ~ 混水摸漁 (물을 휘둘러서 고기를 찾아낸다)
● 敵의 內部와 指揮本部를 混亂시켜 戰力을 弱化시킨 다음 我軍이 願하는 方向으로 戰勢를 이끌게 된다.
1944年 12月 히틀러는 프랑스 國境 아르텐느 언덕에서 數十 萬 兵士와
2千 臺의 戰車로 最後의 總反擊을 可했다. 그때 그는 英語에 能通한 兵士들 2千 名을 뽑아 美軍服裝을 입혀 美國 後方에 浸透시켰다. 이러한 攪亂作戰은 그대로 適中되어 美軍의 指揮本部를 混亂케 하였다.
비록 主力軍의 進出이 막힌 탓으로 作戰은 成功하지 못했지만, 이는 典型的인 '混水摸漁'作戰 이었다.
21. 第 21 計 ~ 金蟬脫殼 (매미가 남몰래 허물을 벗고 날아가는 모습)
● 겉으로는 陣地 構築을 强化하며 끝까지 戰鬪 姿勢를 보이면서 相對가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利用하여 隱密히 主力部隊를 移動시키는 戰略이다.
22. 第 22 計 ~ 關門捉賊 (門을 닫아 버리고 盜賊을 잡는다)
● 앞의 16計(欲擒故縱)와는 正反對의 策略이다. 얼핏 보면 矛盾된 策略 같지만 힘이 弱한 敵은 包圍해서 殲滅하라는
註釋이 있듯이 狀況에 따라 强하게 또는 弱하게 가려서 判斷하여 實行하라는 뜻으로 解釋된다. 例를 들어 相對의 兵力이 後에 큰 禍根이 될 憂慮가 있을 境遇에는 '關門捉賊'의 計略이 必要하다.
要컨대 相對가 弱할 땐 人情事情없이 徹底하게 殲滅하라는 것이다.
23. 第 23 計 ~ 遠交近攻 (멀리 있는 나라와는 손잡고 가까이 있는 나라는 攻擊하라는 뜻)
● 諸國이 서로 對立 恒爭하고 있는 狀況에서는 언제나 有效한 策略으로 여겼다. 理由는 遠征에는 德보다 失이 많기 때문이다. 遠國과 同盟하여 近國을 攻擊하는 策略은 近에서 遠으로 攻擊키 爲한 漸次的 勢力을 擴張함에 있다.
24. 第 24 計 ~ 假道伐虢 (길을 빌려 虢나라를 친다)
● 小國의 어려움을 틈타 이를 征伐하는 策略이다. 例로 虢은 春秋時代의 한 小國이다. 大國인 秦이 小國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나라를 滅하고 歸路에 虞나라마저 滅亡시킨 事實에서 由來되었다.
★ 第 5 章 (倂戰의 計)
25. 第 25 計 ~ 偸梁換柱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바꾼다)
● 秦始皇帝는 '遠交近攻'의 戰略으로 近國 부터 차례로 侵攻한 後 마지막 齊나라를 滅亡시킬 때 齊나라의 臣下 后勝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買收하였기에 戰爭도 始作 前에 齊나라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戰略을 말한다.
26. 第 26 計 ~ 指桑罵槐 (뽕나무를 가리키면서 회화나무를 꾸짖는다)
● 迂廻的이고 間接的인 方法으로 相對를 批判하는 것이다.
이는 三十六計 戰略 中에서 近親 國家나 部下를 다루는 方法으로 많이 섰다.
近親國에 對하여 正面으로 批判을 加하거나 部下를 面前에서 辱하면 背叛 當할 危險이 있어 相對가 알아차릴 만하게 다른 사람을 間接的으로
꾸짖으면 더욱 效果的이라는 말이다.
27. 第 27 計 ~ 假痴不癲 (잘 떠들면서 輕擧妄動한 行動 보다는 바보인 양 行動을 삼가는 便이 낫다)
● 心的으로 緻密한 計算을 하면서도 外的으론 감춤이다. 結局 이는 바보같이 行動하면서 相對의 放心을 誘導하는 策略이다. 뛰어난 指導者는 自己의 才能을 誇示하지 않는다.
老子는 '指導者는 智謀를 깊숙이 감추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바보같이 보인다. 이것이 指導者의 理想的인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指導者의 모습을 하나의 策略으로 使用하는 것을 말한다.
28. 第 28 計 ~ 上屋抽梯 (지붕위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운다)
● '허술하게 보여 적을 끌어들인 後 先後發 部隊의 허리를 짤라 包圍 殲滅하는 策略이다. 强한 相對를 誘引할 때는 이 手法으로, 相對를 誘引함에는 智慧와 달콤한 미끼와 周到綿密한 準備가 없으면 成功하지 못한다.
29. 第 29 計 ~ 樹上開花 (나무 위에 꽃을 피운다)
● 깃발이나 槍 ,劍 ,鼓 ,꾕과리 等으로 이쪽의 兵力이 많은 것처럼 꾸미는 策略이다. 敵은 勿論이고 同盟國 들에게도 信賴感을 주기 때문에 主導權을 잡기 爲한 手段으로 兵力이 小數이거나 弱勢일 때 자주 使用되는 手法이다.
30. 第 30 界 ~ 反客爲主 (손님의 立場으로부터 차츰 主人의 자리를 차지하는 策略이다)
● 이러한 策略을 成功시키려면 차근차근 段階를 밟아서 한 걸음씩 實行하지 않으면 안 된다.
燥急하게 설침은 失敗하기 十常八九다.
★ 第 6 章 (敗戰의 計)
31. 第 31 計 ~ 美人計 (勢力이 强한 敵將의 마음을 美人을 利用해 巧妙히 꾀어내는 手法이다)
● 萬一 相對가 英特한 사람이면 計策을 세워 意欲을 喪失케 한다.
將軍과 部下들의 意欲을 꺾으면 相對는 저절로 破壞된다. 이 策略의 核心은 相對의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있다.
相對의 마음을 빼앗으려면 絶世佳人이라야 可能하다.
32. 第 32 計 ~ 空成計 (城을 비우는 策略)
● 三國志에 諸葛孔明이 '空城計'를 利用하여 司馬仲達의 大軍을 退却시킨 場面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仲達의 大軍이 攻擊해 왔을 때 孔明은 城門을 모두 열어 놓고 自身은 道士 차림으로 樓閣에 올라 閑暇롭게 거문고를 타면서 敵軍이 오길 기다렸다.
이것을 본 仲達은 '저 꾀많은 孔明이 어딘가에 伏兵을 숨겨놓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判斷해 軍士를 撤收시켰다.
일부러 無防備 狀態인 양 보여 敵의 判斷을 흐리게 하는 戰略인데, 29計인 '樹上開花'와는 反對 心理를 利用한다.
敵에게 露出되면 돌이킬 수 없이 목숨을 犧牲시키는 計策 中의 計策이다.
그렇기 때문에 相對도 얼떨결에 그 術策에 넘어가고 만다.
33. 第 33 計 ~ 反間計 (敵의 諜者를 逆利用하는 策略이다)
● 相對方 諜者에게 逆情報를 흘려서 相對를 混亂케하는 手法으로 두 가지 方法이 있다. 하나는 諜者를 買收하거나, 다른 하나는 모른척 故意로 거짓情報를 흘리는 方法이다.
어느 方法을 選擇하든지 힘들이지 않고는 勝利를 거둘 수 없다.
34. 第 34 計 ~ 苦肉計 (自己 몸을 傷處내는 策略)
● 三國志에 赤壁大戰은 너무도 有名 하다.
曹操와 周瑜의 對決에서 周瑜가 쓴 戰略으로 大將 黃蓋와 秘密裏 苦肉策을 쓰기로 謀議하고 黃蓋는 周瑜와 사이가 나쁜 것처럼 所聞을 냈고, 作戰會議에서 黃蓋가 降伏을 强하게 主張하다 大怒한 周瑜의 命으로 棍杖 一百대를 맞고 살점이 터지는 等 큰 傷處를 입었다. 그는 治療를 받던 中 어느날 夜陰을 틈타 曹操에게 歸順하였다. 黃蓋는 周瑜와 約束한데로 風向이 바뀌는 날에 먼저 曹操의 戰鬪艦隊에 불을 질렀다. 이를 信號로 周瑜의 軍士들이 火攻을 퍼붓자 曹操의 軍士는 큰 混亂에 빠졌고 曹操는 겨우 목숨만 건져 逃亡가는 慘敗를 當했다.
여기서 黃蓋가 曹操를 감쪽같이 속이기 爲해 自己 몸을 傷處내는 策略이 바로 '苦肉計'이다.
이와 같은 策略은 옛날부터 戰爭 中에 使用된 적이 많았고, 그 中에는 妻子며 寵愛하는 臣下를 犧牲시킨 例도 가끔 있을 만큼 勝負에 對한 執念이 대단했다.
35.第 35 計 ~ 連環計이다.
● 赤壁大戰에서 曹操가 大敗한 理由는 魏나라의 배들이 쇠사슬 고리에 連結되어 있어 自由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策略은 蜀나라의 軍師 龐統이 생각해 낸 것인데 먼저 敵의 起動을 制壓한 後, 第2, 3의 計略을 驅使하여 强한 敵을 擊破하는 策略이다.
이는 한 番의 勝利를 넘어 두 가지 以上의 策略을 混合하여 敵을 滅하는 것이다.
36. 第 36 計 ~ 走爲上 (도망가는 것을 上策으로 삼는다)
● 이는 '三十六計 줄行廊이 第一이다.'는 말을 낳은 最終 計略이다. 兵法에서는 狀況에 따라서 일부러 後退하는 것도 不辭한다고 나와 있는데 이 또한 兵法의 鐵則이다.
孫子에도 '兵力이 劣勢이면 물러나고, 勝算이 없으면 싸우지 않는다'고 쓰여져 있다. 사람이 죽으면 勝利도 敗北도 없는 것이다. 不利할 때 一旦 退却하면 戰力을 補完하여 다시 싸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意味에서 보면 勇氣있게 後退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勇氣를지닌 指導者라고 할 수 있겠다.
🍎 三餘讀書 , 三余读书
(冊을 읽기에 좋은 세 가지 餘暇. 餘裕 있는 時間을 잘 活用하여 讀書하는 것을 말한다)
董遇는 後漢 末 사람으로 가난한 生活을 하면서도 工夫에 熱中하여 黃門侍廊 벼슬에 올라 獻帝의 글工夫 相對가 되었다. 한때는 丞相이었던 曹操의 疑心을 받아 寒職으로 쫓겨난 적도 있었지만, 魏나라 明帝 때에는 侍中, 大司農 等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는 老子와 左傳에 注를 달았는데, 特히 左傳에 對한 그의 註釋은 唐나라 時代까지 幅넓게 읽혔다고 한다. 董遇의 名聲이 높아지자 많은 사람이 그에게 글을 배우겠다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마땅히 먼저 百 番을 읽어야 한다. 百 番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董遇를 좇아 배우려는 者가 힘들게 사느라 冊 읽을 겨를이 없다고 하자, 董遇는 “세 가지 餘暇만 있으면 冊을 充分히 읽을 수 있다.”고 對答했다. 어떤 사람이 세 가지 여가의 뜻을 묻자 董遇가 對答했다. “겨울은 한 해의 餘暇이고, 밤은 하루의 餘暇이고, 내리는 비는 한때의 餘暇이다.”
(從學者云, 苦渴無日. 遇言, 當以三餘. 或問三餘之意. 遇言, 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也.)」
이 이야기는 《三國志 · 魏書 王肅傳》에 《魏略》을 引用한 裵松之 注에 있다.
🍎 三人成虎 (曾參殺人)
(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든다. 虛爲라도 여럿이 反復해 옳다고 主張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음을 比喩)
● 戰國策 魏策 魏二 및
● 韓非子 內儲說上에.
中國 戰國時代(紀元前 403~221)에
魏나라 大臣 龐蔥이 趙나라 邯鄲에 人質로 가는 太子를 隨行하게 되었다(龐蔥與太子質於邯鄲).
出發하면서 龐蔥은 魏나라 王인 惠王에게 이렇게 말했다(謂魏王曰).
“只今 한 사람이 달려와 ‘市場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임금께서는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今一人言市有虎 王信之乎)”
惠王이 말했다(王曰).
“믿지 않는다(否).”
이에 龐蔥이 다시 말했다(龐蔥曰).
“그렇다면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함께
‘市場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믿으시겠습니까?(二人言市有虎 王信之乎)”
(惠王)이 말했다(王曰).
“寡人은 그것을 疑心할 것이네(寡人疑之矣).”
龐蔥이 다시 말했다(龐蔥曰).
“다시 세 사람이 와서 異口同聲으로
‘市場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외치면 임금께서는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三人言市有虎 王信之乎)”
그러자 惠王이 對答했다(王曰).
“그렇다면 寡人은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겠지(寡人信之矣).”
이 말을 들은 龐蔥이 말했다(龐蔥曰).
“市場에 호랑이가 나타날 리가 없음은 世上 사람이 다 아는 事實입니다(夫市之無虎明矣).
그렇지만 繼續해서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호랑이는 나타난 것입니다(然而三人言而成虎).
只今 제가 太子를 모시고 가려는 趙나라 首都 邯鄲은 魏나라 大梁에서 市場과 떨어져 있는 것과 比較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곳입니다(今邯鄲去大梁也遠於市).
게다가 제가 朝廷을 비운 사이 저에 對해 이런저런 말을 할 사람은 셋 程度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而議臣者過於三人矣).
모쪼록 임금께서는 그것을 잘 判斷하시기 바랍니다.(愿王察之矣)”
惠王은 答辯을 하였다(王曰).
寡人은 그 뜻이 무언지를 알았소 (寡人自爲知).
그러나 오랜 時間이 지난 後 太子가 人質에서 풀려나서 龐蔥이 歸國하자 (後太子罷質)
魏王인 惠王은 側近들의 말에 眩惑되어 龐蔥을 만나 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結局 龐蔥은 朝廷에 復歸하지 못했다(果不得見).
이로부터 三人成虎는 아무리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番 反復으로 듣게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가리키는 表現이 되었다.
★ 曾參殺人
(曾參殺人했다)
-戰國策에
孔子의 弟子 가운데 46歲 年下인 曾參(曾子)이란 어진 사람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무척 가난해 어머니가 베틀을 돌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曾參의 어머니는 아들을 굳게 믿어 疑心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베를 짜고 있을 때에 이웃 어떤 사람이 와서 아들 曾參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서
"어서 避하십시오" 라고 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어머니는 곧이듣지 않고
“우리 아들이 그럴 리 없습니다.”하며 泰然히 베틀을 돌렸다. 暫時 後 다른 사람이 또 와서 “當身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오.” 라고 했다. 어머니는 亦是 “그럴 리가 없소.” 하며 如前히 베틀을 돌리고 있었다. 세 番째 사람이 달려와서 “曾參이 사람을 죽였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는 卽時 일어나 베틀을 자르고 담을 넘어 逃亡갔다고 한다. 이로부터 曾參殺人은 三人成虎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 三從之道 , 三从之道
(세 가지 따라야 할 道理. 옛날에 女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媤집을 가면 男便을 따르며, 男便이 죽으면 子息을 따르라는 뜻으로 하던 말이다)
「婦人에게는 세 가지 따라야 할 義가 있으며, 自己 마음대로 할 수 있는 道는 없다. 그러므로 媤집가기 前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媤집을 간 後에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
(婦人有三從之義, 無專用之道. 故未嫁從父, 旣嫁從夫, 夫死從子.)」
● 儀禮 喪服傳에
(三從之德, 三從之禮라고도 한다)
🍎 三尺童子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 철이 없는 어리석은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다)
文治主義를 標榜한 宋나라 때에는 敎育과 商業이 發達하고 學問과 文化가 꽃을 피웠다. 하지만 文人 官僚制로 因한 軍士力의 弱化와 外交上의 失策으로 王朝 내내 危機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고, 異民族인 契丹族의 遼나라, 黨項族 西夏, 女眞族의 金나라, 그리고 蒙古族의 元나라에 차례로 屈辱을 當했다. 結局 以夷制夷의 手法으로 遼나라에 對抗하기 爲하여 金나라와 聯合을 하였으나, 遼나라가 亡한 後 金나라에 시달리다가 結局 降服하여 皇帝는 金나라로 連行되고 北宋은 門을 닫고 말았다.
北宋이 金나라에 滅亡을 當하고, 抗州의 南宋 時代가 막을 올렸지만, 文弱한 南宋의 皇帝와 强化派 大臣들은 如前히 金나라와 强化 交涉을 推進하는 데에만 汲汲했다. 1138年, 金나라가 使者를 派遣하여 南宋이 稱臣하는 條件으로 强和를 要請했다. 秦檜는 이 條件을 받아들일 것을 積極的으로 檢討했다.
撫州軍事判官 胡銓이 反對 上書를 올렸다.
「키가 석 자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그에게 개와 돼지를 가리키며 절을 하도록 시키면 바로 발끈 성을 냅니다. 只今, 醜虜는 개나 돼지입니다.
(夫三尺童子至無知也, 指犬豕而使之拜則然怒. 今醜虜則犬豕也.)」
이 이야기는 呼銓의 上高宗封事에 나온다. ‘醜虜’는 더러운 오랑캐라는 뜻으로 敵軍을 蔑視하여 부르는 號稱이다. 南宋은 後에 새로 일어난 勢力인 蒙古族을 끌어들여 金나라를 滅亡시켰지만, 結局 蒙古族에 國土를 모두 내어 주고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 喪家之狗 , 丧家之狗
(喪家집 개. 초라한 모습으로 떠돌아다니며 賤待받는 사람을 比喩)
孔子는 魯나라 定公 때 大司寇 (法務部長官)가 되었지만 王族 三桓에게 排斥當해 魯나라를 떠났다. 三桓은 當時 魯나라를 左之右之했던 季孫氏, 孟孫氏, 叔孫氏의 세 貴族 家門을 말한다. 以後 孔子는 自身의 理想을 實現시키기 爲해 十數 年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어떤 君主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孔子는 56歲에 鄭나라에 갔는데, 弟子들과 길이 어긋나 東門에서 弟子들이 찾아오기만을 莫然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어떤 鄭나라 사람이 스승을 찾아다니고 있는 子貢에게 自身이 본 孔子의 모습을 말했다. “東門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堯임금과 같았고 목은 皐陶와 같았으며 어깨는 子産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허리 밑으로는 禹임금보다 세 치나 짧았고, 그 憔悴한 모습은 마치 喪家집 개와 같았습니다.” 子貢은 다른 弟子들과 함께 孔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自身이 들은 이야기를 孔子에게 들려주니 孔子는 웃으면서 嘆息했다. “外貌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喪갓집 개와 같다는 말은 맞는구나, 맞아.”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顙似堯, 其項類皐陶, 其肩類子産. 然自要以下不及禹三寸, 累累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 末也. 而謂似喪家之狗, 然哉, 然哉.)」
이 이야기는 《史記 孔子世家》와 《孔子家語》에 나온다. 皐陶는 堯舜 때의 臣下로 法理에 밝아 法을 만들고 刑罰制度를 制定한 사람이며, 子産은 春秋時代 鄭나라 大夫였다. 喪갓집 개는 主人이 죽어 누구도 돌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굶주려 瘦瘠해지고, 남의 눈치를 보며 避해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오랫동안 떠돌아다닌 데다 政治的으로 失意에 빠진 孔子의 凄凉한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喪갓집 개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 傷弓之鳥 , 伤弓之鸟
(활에 다친 새. 어떤 일로 크게 놀라 그 뒤로는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고 警戒하는 것을 比喩)
戰國時代 末葉 楚 · 趙 · 燕 · 齊 · 韓 · 魏 等 六國이 合縱의 盟約을 맺고 秦나라와 對峙했다. 이 時期 趙나라 王이 魏加를 楚나라에 보내 楚나라 丞相 春申君과 軍士同盟 問題를 協議하게 했다. 春申君을 만난 魏加가 물었다. “맡길 만한 將軍이 있습니까?” “있고말고요. 우리는 臨武君을 將軍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魏加가 말했다. “臣이 어릴 때부터 활쏘기를 좋아했는데, 활쏘기를 比喩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옛날에 更羸이 魏王과 京臺 아래에서 對話를 나누다가 새가 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大王, 저는 빈 활을 쏘아 새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暫時 後 기러기가 東쪽에서 날아왔습니다. 更羸이 빈 활의 시위를 당기자 기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魏王이 놀라 그 까닭을 묻자 更羸이 對答했습니다. ‘이 기러기는 傷處 입고 외로운 놈입니다.’ ‘先生은 어떻게 알았소?’ ‘나는 速度가 느리고 울음소리가 凄凉했습니다. 천천히 나는 것은 다쳤기 때문이고, 울음이 슬픈 것은 무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傷處가 아직 아물지 않고 놀란 마음도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 소리만 듣고도 높이 날려고 하다가 (傷處가 도져)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臨武君은 일찍이 秦나라와 싸워서 졌으므로 秦나라를 막는 將軍이 될 수 없습니다.”
(魏加曰, 臣少之時好射, 臣願以射譬之, 可乎. 春申君曰, 可. 加曰, 異日者, 更羸與魏王處京臺之下, 仰見飛鳥, 更羸謂魏王曰, 臣爲王引弓虛發而下鳥. 魏王曰, 然則射可至此乎. 更羸曰, 可. 有閒, 鴈從東方來, 更羸以虛發而下之. 魏王曰, 然則射可至此乎. 更羸曰, 此孽也. 王曰, 先生何以知之. 對曰, 其飛徐而鳴悲. 飛徐者, 故瘡痛也. 鳴悲者, 久失群也. 故瘡未息而驚心未至也, 聞弦音引而高飛, 故瘡隕也. 今臨武君嘗爲秦孽, 不可爲拒秦之將也.)」
이 이야기는 《戰國策 楚策》에 나오는데, 魏加가 春申君에게 해 준, 다치고 무리를 잃은 기러기가 빈 활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에서 由來했다. 驚弓之鳥라고도 한다.
🍎 相思病
(서로 생각하는 病. 男女 間에 못 잊어 그리워한 나머지 생기는 病을 말한다)
春秋時代 宋나라 康王이 絶世美人인 韓憑의 夫人 何氏를 빼앗았다. 韓憑이 이를 怨望하자 그를 가두고 城旦의 刑罸에 處했다. 韓憑의 아내는 男便을 못 잊어 다음과 같은 便紙를 보냈다. “비가 많이 내려 江은 넓어지고 물은 깊어졌는데, 해가 뜨면 마음을 먹을 것입니다.
(其雨淫淫, 河大水深, 日出當心.)”
그런데 이 便紙는 傳達되지 못하고 王의 손에 들어갔다. 王이 左右에 便紙의 뜻을 묻자, 蘇賀가 對答했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말은 근심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이고, 江이 넓어지고 물이 깊어졌다는 말은 서로 來往을 할 수가 없다는 뜻이며, 해가 뜨면 마음을 먹는다는 말은 죽을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其雨淫淫, 言愁且思也. 河大水深, 不得往來也, 日出當心, 心有死志也.)”
얼마 後 韓憑이 自殺했다. 何氏는 隱密히 自己 옷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서, 王과 함께 樓臺에 올랐을 때 아래로 몸을 던졌다. 左右에서 急히 붙잡았으나 옷자락만 끊어지고 사람은 아래로 떨어졌다. 띠에는 다음과 같은 遺言이 적혀 있었다. ‘王은 사는 것을 幸福으로 여기지만 妾은 죽는 것을 幸福으로 여깁니다. 屍身을 (韓憑과)合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火가 난 王은 사람을 시켜 무덤을 서로 바라보도록 만들게 하고 말했다. “너희 夫婦의 사랑이 끝이 없다면 무덤을 하나로 合쳐 보아라. 그것까지는 내가 막지 않겠다.”
「그날 밤 두 그루의 개梧桐나무가 各各의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 되어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몸體가 구부러져 서로에게 다가가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雙의 鴛鴦새가 앉아 하루 終日 떠나지 않고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宋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며 그 나무를 相思樹라고 이름 지었다. ‘相思’라는 말은 여기에서 由來하였다. 南人들은 이 새가 바로 韓憑 夫婦의 넋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수양(睢陽)에는 韓憑城이 있고, 그 노래도 如前히 存在하고 있다.
(宿昔之間, 便有大梓木, 生於二冢之端, 旬日而大盈抱, 屈体相就, 根交於下, 枝錯於上. 又有鴛鴦, 雌雄各一, 恒栖樹上, 晨夕不去, 交頸悲鳴, 音聲感人. 宋人哀之, 遂號其木曰相思樹. 相思之名, 起於此也. 南人謂, 此禽卽韓憑夫婦之精魂. 今睢陽有韓憑城, 其歌謠至今猶存.)」
● 東晉의 干寶가 지은 搜神記에.
‘想思樹’는 紅豆樹라고도 한다. 이 나무의 열매인 紅豆는 相思子라고도 하며, 中國의 古代 文學作品에서 男女가 서로 그리워하거나 親舊 間에 보고 싶어하는 情을 表現하는 데 많이 쓰였다. 이의 代表的인 作品으로는 唐나라 王維의 詩 相思를 들 수 있다.
紅豆는 南쪽 나라에서 자라는데
봄이 오니 가지들이 새로 돋았네
그대 이 열매를 많이 따 가져가시게
이것이 그리움을 가장 돋우는 物件이라오
紅豆生南國 春來發幾枝
願君多采擷 此物最相思
🍎 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變하다. 世上이 몰라볼 程度로 바뀐 것을 比喩)
漢나라 桓帝 때, 字를 方平이라 하는 神仙 王遠이 蔡經의 집에 降臨했다. ······ (方平은) 蔡經의 父母, 兄弟와 서로 人事한 後, 오랫동안 홀로 앉아 있다가 사람을 시켜 麻姑를 오게 했다. 얼마 後에 麻姑가 오자 蔡經의 全 家族이 그女를 맞이했다. 麻姑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나이는 18, 19歲 程度였고 머리에 쪽을 쪘는데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옷에는 彩色의 무늬가 있었는데 緋緞은 아니었지만 光彩가 눈부셨으며, 그女의 形態를 形容하기가 어려웠다. 麻姑는 들어와 王方平에게 절을 했고, 王方平은 일어나 그女를 맞이했다. 자리에 앉은 다음 麻姑는 지니고 온 飮食物을 가져오게 했는데, 金 錚盤에 玉으로 만든 盞이었고, 飮食은 모두 果實 種類로 그 香氣가 室內에 가득 퍼졌다. 그 女는 고기 말린 것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면서 麒麟의 脯라고 했는데, 마치 側柏나무 열매 같았다.
「麻姑가 말했다. “제가 神仙님을 모신 이래로 東海가 세 番이나 뽕나무 밭으로 變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番에 蓬萊에 갔더니 바다가 以前의 半 程度로 얕아져 있었습니다. 다시 陸地가 되려는 것일까요?” 王方平이 말했다. “東海는 다시 흙먼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聖人들이 말씀하셨소.”
(麻姑謂王方平曰, 自接待以來, 見東海三變爲桑田. 向到蓬萊, 水乃淺於往者略半也. 豈復爲陵乎. 王方平曰, 聖人皆言, 東海行復揚塵耳.)」
이 이야기는 葛洪의 《神仙傳》에 나오는데, 東海가 여러 番 뽕나무 밭으로 變했다는 麻姑의 말에서 ‘桑田碧海’가 由來했다.
‘桑田碧海’는 劉希夷, 一名 劉庭芝의 詩 代悲白頭翁 (老人을 代身하여 白髮을 슬퍼하는 노래)에도 나온다.
洛陽城 東쪽에 핀 복사꽃 오얏꽃
바람에 흩날려 뉘 집에 떨어지는가
洛陽의 女子들 고운 얼굴 아까운지
만나는 女子마다 長嘆息을 하누나
올해 꽃이 지면 얼굴빛 바뀌리니
明年에 꽃이 피면 누가 또 남아 있으려나
松栢 꺾여 땔나무 되는 것 보았고
뽕나무 밭이 變해 푸른 바다 된다고 들었네
옛사람 자취 洛陽 東쪽에 없는데
사람들은 如前히 꽃잎 떨어뜨리는 바람을 맞네
해마다 피는 꽃 다를 게 없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가 않네
잘나가는 젊은이들 付託 하나 하세
黃昏의 흰머리 늙은이 가엽게 여기시게
늙은이의 센머리 可憐하지만
이래 봬도 옛날엔 紅顔의 美少年
香氣로운 나무 아래 貴公子들은
떨어지는 꽃 아래 노래하고 춤추네
光祿大夫의 樓臺엔 繡놓은 緋緞 걸고
將軍의 樓閣엔 神仙 그림 걸렸네
하루아침 病들면 알 길 없고
九十春光 즐거움은 누구 옆에 있는가
고운 얼굴 몇 날이나 되겠는가
瞬息間에 흰머리 흐트러진 실이 된다네
예부터 춤추고 노래하던 땅에
저녁 되자 새들만 서럽게 우네
洛陽城東桃李花 飛來飛去落誰家
洛陽女兒惜顔色 行逢落花長歎息
今年落花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已見松栢摧爲薪 更聞桑田變成海
古人無復洛城東 今人還對落花風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寄言全盛紅顔子 應憐半死白頭翁
此翁白頭眞可憐 伊昔紅顔美少年
公子王孫芳樹下 淸歌妙舞落花前
光祿池臺開錦繡 將軍樓閣畵神仙
一朝臥病無相識 三春行樂在誰邊
宛轉蛾眉能幾時 須臾鶴髮亂如絲
但看古來歌舞地 惟有黃昏鳥雀悲
‘桑田碧海’는 滄海桑田, 滄桑之變, 桑滄之變이라고도 하며, 丘陵이 溪谷으로 變했다는 뜻의 ‘陵谷之變’, 높은 언덕이 깊은 골짜기로 變했다는 뜻의 ‘高岸深谷’ 等으로도 쓴다.
🍎 上下其手
(손을 위와 아래로 하다. 손을 위와 아래로 들어 信號를 해 준다는 것으로, 權勢에 阿附하려거나 私事로운 情에 얽매여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잘잘못을 뒤바뀌게 만드는 것을 比喩)
BC547年, 楚나라가 鄭나라를 쳤다. 鄭나라에서는 皇頡이 出戰했다가 楚나라의 穿封戍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를 본 楚康王의 同生 公子 圍가 捕虜를 빼앗아 自己 功으로 삼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太宰 伯州犁에게 判決을 받기로 했다.
「伯州犁는 捕虜에게 물어보자고 말하고는, 捕虜를 세워 놓고 손을 위로 들면서 말했다. “이분은 公子 圍로, 우리 大王의 貴한 아우님이시오.” 그리고 손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이 사람은 穿封戌이라 하는데, 우리 方城 郊外의 縣監이오. 누가 그대를 사로잡았소?”
(乃立囚, 伯州犁上其手, 曰, 夫子爲王子圍, 寡君之貴介弟也. 下其手, 曰, 此子爲穿封戌, 方城外之縣尹也. 誰獲子.)」
皇詰이 對答했다. “나는 이 公子를 만나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穿封戌은 옆에 서 있다가 대로하여 武器를 걸어 놓은 顯盤에서 槍을 꺼내어 들고 公子 圍를 찔러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公子 圍가 놀라 달아나자 穿封戌은 繼續해서 그 뒤를 쫓아갔으나 잡지 못했다. 伯州犁가 다시 그들의 뒤를 따라가서 두 사람을 달래어 다시 뜰 안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康王에게 報告하고 그 功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주고 다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和解를 하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는 《左傳 襄公 26年》에 나오는데, 伯州犁가 公子 圍를 가리킬 때는 손을 위로 하고 穿封戌을 가리킬 때는 손을 밑으로 하여 信號를 해 준 데서 由來하여, 私事로운 情에 얽매여 사람의 잘잘못을 歪曲하여 庇護한다는 뜻의 ‘上下其手’라는 말이 나왔다.
🍎 塞翁之馬 , 塞翁之马
(邊方 늙은이의 말. 禍가 福이 되고, 福이 禍가 되는 等, 吉兇禍福의 變化가 잦은 것을 比喩)
「邊方 近處에 占을 잘 치는 한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그의 말이 까닭도 없이 오랑캐 땅으로 逃亡쳐 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慰勞하자 老人이 말했다. “이것이 무슨 福이 될는지 어찌 알겠소?” 몇 달이 지난 後, 말이 오랑캐의 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祝賀하였다. 그러자 老人이 말했다. “그것이 무슨 禍가 될는지 어찌 알겠소?”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말타기를 좋아하던 老人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이를 慰勞했다. 老人이 말했다. “이것이 或是 福이 될는지 어찌 알겠소?” 1年이 지난 後, 오랑캐들이 大巨 要塞에 쳐들어오자 壯丁들이 활을 들고 싸움터에 나갔다. 邊方 近處의 사람들은 열에 아홉이 죽었는데, 이 사람은 다리가 病身인 까닭에 父子가 모두 無事할 수 있었다.
(近塞上之人, 有善術者. 馬無故亡而入胡.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數月, 其馬將胡駿馬而歸. 人皆賀之, 其父曰, 此何遽不能爲禍乎. 家富良馬, 其子好騎, 墮而折其脾. 人皆弔之, 其父曰, 此何遽不爲福乎. 居一年, 胡人大入塞, 丁壯者引弦而戰. 近塞之人, 死者十九, 此獨以跛之故, 父子相保.)」
《淮南子 人生訓》에 나오는데, 이로부터 邊方 老人의 말이란 뜻의 ‘塞翁之馬’가 由來했다. 이 이야기는 다른 板本도 있는데, 內容은 大同小異하며 末尾에 다음과 같은 內容이 덧붙어 있다.
「故로 福이 禍가 되고 禍가 福이 되는 等, 變化는 끝이 없고 그 깊이는 豫測할 수가 없는 것이다.(故福之爲禍, 禍之爲福, 化不可極, 深不可測也.)」
🍎生而知之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알다. 之는 代名詞로, ‘그 어떤 것’을 가리킨다)
「孔子가 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最上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며, 막힘이 있어 배우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막힘이 있어도 배우지 아니하는 것은 最下이다.”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이 이야기는 《論語 季氏》에 나오는데, 孔子의 말에서 ‘生而知之’ 外에도 배워서 안다는 뜻의 學而知之, 막힌 다음에야 비로소 배운다는 뜻의 困而學之等의 成語가 由來했다. ‘生而知之’는 韓愈의 師說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옛날의 工夫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라는 사람은 이로써 道를 傳해 주고, 學業을 傳授해 주며, 疑惑을 풀어 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없으니 누가 疑惑이 없을 수 있겠는가? 疑惑이 있으면서도 스승을 좇지 아니하면 그 疑惑됨이 끝내 풀리지 않는다. 내 앞에 태어나서 道를 들음이 眞實로 나보다 먼저이면 나는 그를 좇아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내 뒤에 태어났어도 道를 들음이 亦是 나보다 먼저이면 나는 그를 좇아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道를 스승으로 삼으니 어찌 그 나이의 나보다 先後에 태어남을 알아야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貴함도 없고, 賤함도 없으며, 나이 많음도 없고 나이 적음도 없으며, 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다.
嗚呼라! 師道가 傳해지지 않음이 오래되었으니, 사람의 疑惑이 없고자 함이 어렵구나. 옛 聖人은 그 다른 사람보다 뛰어남이 멀었지만(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오히려 또한 스승을 좇아 물었다. 只今의 많은 사람들은 聖人보다 못함이 亦是 멀지만(聖人보다 훨씬 못하지만) 스승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이런 까닭에 聖人은 더욱 聖人이 되고, 어리석은 者는 더욱 어리석게 된다. 聖人이 聖人이 되는 까닭, 어리석은 者가 어리석은 者가 되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 것인가!
自己 子息을 사랑하면 스승을 選擇하여 子息을 가르치지만, 自己 몸에 對해서는 스승을 모시는 것을 부끄러워 하니 疑問이로다. 저 아이의 스승은 그에게 글을 傳授하고 글 句節을 解讀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내가 말한 바 그 道를 傳授하고 그 疑惑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다. 文章 解讀을 못하거나 疑惑을 풀지 못하면 或은 스승을 좇기도 하고 或은 그러지 않기도 하는데, 이는 작은 것을 배우고 큰 것을 버리는 것으로 나는 아직 그런 사람들의 밝음을(賢明함을) 보지 못했다.
무당이나 醫師, 藥師, 온갖 工業에 從事하는 사람들은 서로 스승 삼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士大夫 族屬들은 스승이라 말하고 弟子라 말하는 사람을(서로 스승이니 弟子니 하면) 모여서 비웃는다. 그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면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같다. 道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地位가 낮으면 부끄럽고, 官職이 높으면 가까이 다가가 阿諂한다고 여긴다.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 階級이 낮으면 배우는 내가 부끄럽고, 官職이 높으면 가까이하고 阿諂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嗚呼라! 師道가 다시 回復되지 못할 것을 알 수 있겠구나. 무당이나 醫師, 藥師, 온갖 工業에 從事하는 사람들을 君子는 蔑視하지만, 只今 그 智慧는 오히려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傀異하도다.
聖人은 一定한 스승이 없다. 孔子는 郯子, 萇弘, 師襄, 老聃에게 배웠다. 郯子의 무리들은 그 賢明함이 孔子에 미치지 못했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가면 (그中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이런 까닭에 弟子가 스승과 같지 않을 必要가 없고(스승보다 못해야 할 必要가 없고), 스승이 반드시 弟子보다 賢明해야 할 必要가 없는 것이다. 道를 들음에는 先後가 있고, 技術과 學業에는 傳攻이 있으니, 이와 같을 뿐이다. 李氏의 아들 蟠은 나이가 17歲인데 古文을 좋아하여 六藝와 經典을 모두 다 工夫했으며, 世態에 拘碍받지 않고 나에게 배웠다. 나는 그가 能히 옛 道를 行하는 것을 嘉尙히 여겨 師說을 지어 그에게 준다.
(古之學者必有師. 師者, 所以傳道受業解惑也. 人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 生乎吾前, 其聞道也固先乎吾, 吾從而師之. 生乎吾後, 其聞道也亦先乎吾, 吾從而師之. 吾師道也, 夫庸知其年之先後生於吾乎. 是故無貴無賤, 無長無少, 道之所存, 師之所存也. 嗟乎. 師道之不傳也久矣, 欲人之無惑也難矣. 古之聖人, 其出人也遠矣, 猶且從師而問焉. 今之衆人, 其下聖人也亦遠矣, 而耻學於師. 是故聖益聖, 愚益愚. 聖人之所以爲聖, 愚人之所以爲愚, 其皆出於此乎. 愛其子, 擇師而敎之, 於其身也, 則耻師焉, 惑矣. 彼童子之師, 授之書而習其句讀者, 非吾所謂傳其道解其惑者也. 句讀之不知, 惑之不解, 或師焉, 或不焉, 小學而大遺, 吾未見其明也. 巫醫樂師百工之人, 不耻相師. 士大夫之族, 曰師曰弟子云者, 則群聚而笑之. 問之, 則曰, 彼與彼年相若也, 道相似也. 位卑則足羞, 官盛則近諛. 嗚呼. 師道之不復可知矣. 巫醫樂師百工之人, 君子不齒, 今其智乃反不能及, 其可怪也歟. 聖人無常師. 孔子師郯子萇弘師襄老聃. 郯子之徒, 其賢不及孔子. 孔子曰, 三人行, 則必有我師. 是故弟子不必不如師, 師不必賢於弟子. 聞道有先後, 術業有專攻, 如是而已. 李氏子蟠, 年十七, 好古文, 六藝經傳, 皆通習之, 不拘於時, 學於余. 余嘉其能行古道, 作師說以貽之.)」
🍎 黍離之嘆 , 黍离之叹
(茂盛한 기장에 대한 嘆息. 나라가 亡하고 난 뒤 옛 宮殿 터에 茂盛하게 자란 기장을 보고 하는 嘆息. 卽, 世上의 榮枯盛衰와 富貴榮華가 無雙한 것을 嘆息하는 것을 말한다)
저 기장 이삭이 茂盛하고
저 피에 싹이 났다
길 가는데 더디고 느리며
마음속은 흔들린다
나를 아는 사람은
마음속에 근심이 있다고 말하고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찾는지 묻는다
아득한 저 푸른 하늘이여
누가 이렇게 하였는가
彼黍離離
彼稷之苗
行邁靡靡
中心搖搖
知我者
謂我心憂
不知我者
謂我何求
悠悠蒼天
此何人哉
● 詩經 · 王風 黍離에.
朱子는 이 詩에 對해 다음과 같이 說明했다.
「周나라가 首都를 옮기고 나서 大夫들이 賦役을 나갔다가 옛 都邑에 이르러 보니 宗廟와 宮闕은 없어지고 그곳에 기장이 茂盛하게 자라 있었다. 이를 보며 周나라 王室의 權威가 땅에 떨어진 것을 슬피 여기면서 떠나지 못하고 恨嘆하였다.」
‘黍離之嘆’은 ‘黍離之悲’라고도 한다.
🍎 噬臍莫及 , 噬脐莫及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 한 番 機會를 잃으면 아무리 後悔해도 所用없다는 것을 比喩)
「楚나라 文王이 申나라를 討伐하러 갈 때 鄧나라를 지났다. 鄧나라 祈侯는 조카가 왔다면서 楚文王을 맞이하고 宴會를 베풀어 接待했다. 雛甥, 聃甥, 養甥이 楚文王을 죽이라고 要請하였으나 鄧侯는 許諾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말했다. “鄧나라를 滅亡시킬 사람은 이 사람일 것입니다. 萬若 일찍 圖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君께서는 크게 後悔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때에 圖謀하십시오. 圖謀하려면 只今이 바로 그때입니다.” 鄧侯가 말했다. “(내가 楚文王을 죽인다면) 사람들은 내가 먹다 남긴 飮食도 먹지 않을 것이다.” 세 사람이 말했다. “萬若 저희 세 臣下의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나라가 亡하여 社稷이 祭祀를 받지 못할 것인데, 王께서 무슨 남길 飮食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鄧侯는 듣지 않았다. 申나라를 討伐하고 돌아오던 해에 楚文王은 鄧나라를 쳤고, 16年에 楚나라는 다시 鄧나라를 쳐 滅亡시켰다.
(楚文王伐申, 過鄧. 鄧祈侯曰, 吾甥也, 止而享之. 鵻甥聃甥養甥請殺楚子, 鄧侯弗許. 三甥曰, 亡鄧國者, 必此人也. 若不早圖, 後君噬臍. 其及圖之乎. 圖之, 此爲時矣. 鄧侯曰, 人將不食吾餘. 對曰, 若不從三臣, 抑社稷實不血食, 而君焉取餘. 弗從. 還年, 楚子伐鄧, 十六年, 楚復伐鄧, 滅之.)」
이 이야기는 《左傳 莊公 6年》에 나온다. ‘噬臍莫及’은 사슴이 스스로 제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말인데, 麝香노루가 붙잡히는 것은 그 배꼽 香내 때문이라 생각해 배꼽을 물어뜯었다는 데서 由來했다고 한다.
🍎 席卷
(자리를 말다. 멍석을 말듯이 領土를 取하거나 무서운 氣勢로 勢力을 펼치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며, 오늘날에는 어떤 分野를 自己 손아귀에 넣는 것을 말한다)
劉邦으로부터 關中을 接收함으로써 天下를 爭覇하게 된 項羽는 BC206年 西楚를 建國하고, 스스로 楚覇王이라 稱했다. 이로써 秦나라는 秦始皇이 天下를 統一한 지 16年 만에 完全히 막을 내렸고, 天下는 項羽의 손아귀로 떨어진 듯 보였다.
楚覇王 項羽는 謀士 范增의 計策에 따라 楚懷王을 義帝로 擁立하고 18名의 諸侯王을 封했다. 그리고 危險人物인 劉邦을 中原에서 永遠히 쫓아내기 爲해 漢王으로 封하고 巴蜀 땅으로 보냈다. 이때 魏豹는 魏王에 封해졌다. 그러나 劉邦이 陳倉을 건너 進擊해 오자 魏豹는 劉邦 便에 붙어 項羽의 首都인 彭城을 陷落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다가 劉邦이 項羽에게 彭城을 빼앗기고 守勢에 몰리자 劉邦을 背叛하고 項羽 便에 붙었다. 機會를 보아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는 魏豹의 奸邪스러운 態度에 憤慨한 劉邦은 韓信에게 魏豹를 討伐하게 하였다. 韓信에게 生捕된 魏豹는 劉邦의 命令에 依해 죽음을 當하고 말았다.
彭越은 秦나라 末期 마을 靑年들을 이끌고 蜂起했는데, 劉邦을 도와 楚覇王 項羽와 맞섰다. 彭越은 主로 치고 빠지는 遊擊作戰으로 項羽의 軍隊를 끊임없이 괴롭혔는데, 이로 因해 項羽는 큰 打擊을 입었다. 特히 劉邦이 滎陽에서 項羽에게 大敗하고 겨우 목숨을 건진 後 다시 일어나 項羽와 對等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로부터 힘의 均衡이 劉邦 쪽으로 기운 것은 純全히 彭越 德分이었다. 劉邦과 項羽의 最後의 戰鬪인 垓下의 싸움에서 彭越은 自身에게 梁나라 땅을 주겠다는 劉邦의 約束을 믿고 麾下의 軍士를 모두 이끌고 參戰하여 楚나라를 깨뜨리는 데 一益을 擔當했다.
BC202年(漢王 5年) 項羽가 滅亡한 다음 劉邦은 約束대로 彭越을 梁王에 封했다. 梁王 彭越은 漢高祖 劉邦에게 臣下로서의 忠誠을 다하며, 5年間의 平和로운 歲月을 보냈다. 그런데 彭越이 全혀 생각하지 않았던 部分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漢王 11年(BC196) 가을, 陳豨가 代에서 叛逆을 일으켰다. 漢高祖 劉邦은 親征에 나서 邯鄲으로 가, 梁王 彭越에게서 軍士를 徵拔했다.
梁王 彭越은 病을 稱하고 部下 將軍에게 軍士를 주어 邯鄲에 派遣했다. 漢高祖 劉邦은 大怒하여 사람을 보내 梁王을 問責했다. 梁王이 두려워하여 몸소 나가 皇帝에게 謝過를 하려고 하자, 將軍 扈輒이 말렸다. “처음부터 가지 않고 問責을 받은 다음에 가시려고 하나, 只今 가시면 捕虜가 될 것입니다. 軍士를 움직여 叛逆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梁王 彭越의 太僕이 梁王에게 罪를 짓고 漢나라로 逃亡하여 梁王과 扈輒이 謀叛을 꾀한다고 告해바쳤다. 漢高祖 劉邦은 不時에 梁王을 쳤다. 劉邦의 攻擊을 豫測하지 못했던 梁王은 捕虜로 잡혀 洛陽에 監禁되었다. 問招한 結果, 謀叛한 자취가 分明했다. 法에 따라 處理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劉邦은 梁王을 容恕하고 廢庶人한 後, 驛馬로 蜀의 靑衣로 보내어 그곳에 있도록 했다.
梁王이 西쪽 鄭에까지 갔을 때, 마침 長安에서 洛陽으로 가던 呂后 (漢高祖 劉邦의 皇后)를 만나게 되었다. 梁王은 울면서 自身이 罪가 없음을 呼訴하고, 故鄕 昌邑에서 살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呂后는 그렇게 해 주겠다며 그를 데리고 洛陽으로 돌아가 漢高祖 劉邦에게 말했다. “梁王은 壯士인데, 이제 蜀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일을 만들어서 두고두고 火를 남기는 일입니다. 차라리 죽여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다시 데려왔습니다.” 마침내 彭越과 그의 三族은 滅門의 禍를 입게 되었다. 彭越의 屍體는 소금에 절여졌고, 갈기갈기 찢겨 그릇에 담겨 諸侯들에게 보내졌다.
司馬遷은 魏豹와 彭越 이 두 사람을 하나의 傳에 合해 記錄했는데, 이들에 對해서 太史公曰에서 다음과 같이 評했다.
「太史公은 말한다. 魏豹와 彭越은 本디 身分이 卑賤한 집안 出身이었지만 千 里의 땅을 말아 차지하고 南쪽을 바라보며 孤라 稱했다(王 노릇을 했다). 이들은 피를 밟고 勝氣를 타서 나날이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러나 叛逆할 마음을 품었다가 失敗하자 죽지 않고 붙들려서 刑罰을 받았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中間 程度 되는 才能을 가진 者도 이러한 行爲를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王 노릇을 하던 者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기에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智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者들이지만, 오직 自己 몸을 保存하지 못하는 것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이 蒸發하여 구름이 되고 뱀이 龍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때를 만나 자신들의 뜻을 펼쳐 보려고 했기 때문에 갇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太史公曰, 魏豹彭越雖故賤, 然已席卷千里, 南面稱孤. 喋血乘勝日有聞矣. 懷畔逆之意, 及敗, 不死而虜囚, 身被刑戮, 何哉. 中材已上且羞其行, 況王者乎. 彼無異故. 智略絶人, 獨患無身耳. 得攝尺寸之柄, 其雲蒸龍變, 欲有所會其度, 以故幽囚而不辭云.)」
이 이야기는 《史記 魏豹彭越列傳》에 나오는데, 司馬遷의 이들에 對한 評에서 ‘席卷’이란 말이 由來했다
🍎 先見之明
(앞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眼目이라는 뜻으로,將來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前에 미리 앞을 내다보고 아는 智慧나 슬기로움을 말한다)
中國 漢나라의 歷史書 中 後漢의 歷史를 담은 後漢書에 나와있는 故事成語로서 그 由來는 다음과 같다.
漢나라의 將帥인 霍去病이 北쪽의 匈奴를 侵攻했을 때,김일제(金日磾)라는 匈奴族 王의 王子가 있었는데,그는 投降을 拒否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殺害當한 自身의 아버지와 달리 14歲의 나이에 싸워봤자 개죽음을 當할 戰爭이란걸 깨달은 金日磾는 降伏하여 漢武帝의 宮闕에서 말을 돌보며 살게 되었다.
보는 사람의 觀點에 따라서는 卑屈한 王子였을 지 모르지만,싸워봤자 개죽음을 當할 것을 뻔히 알면서 無謀하게 抗戰하다가 自己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部下조차 떼죽음을 當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임을 어린 나이임에도 깨달았던 것이다. 當時 匈奴族의 王은 匈奴族의 勇猛함을 强調하며 無謀한 戰爭을 敢行했으나 結局은 全滅當하고 말았던 것을 어린 王子는 알았던 것이다.
그러했기에 王子 金日磾는,14살이란 나이에 싸워봤자 개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後日을 圖謀하고자 그대로 投降하였다.王子 한 사람의 投降으로 그를 따르던 數많은 部下들까지 떼죽음을 當하지 않고 모두 목숨을 保全할 수 있었다. 敗北할 것이 뻔한 戰爭을 事前에 避하여 自身 뿐만 아니라 自身을 따르던 모든 部下들의 목숨까지 事前에 지켜낸 것은 眞正한 先見之明의 本보기이다.
三國志에서 先見之明의 第1人者를 選定한다면 觀點에 따라 다르겠지만 '三國志演義' 中心으로 본다면 旦然 諸葛亮이 아닐까? 第1次 北伐戰인 街亭 戰鬪에서 泣斬馬謖의 先鋒將 選拔 失敗가 唯一한 欠이라지만 그의 智略, 最高 司令官으로서의 統率力,天文地理에 通達한 面貌,法家를 基盤으로한 뛰어난 政治家,自身이 죽은 以後의 일까지 豫見하는 豫知에 가까운 人物로 神의 境地에 이를 만큼이다.
🍎 先公後私
戰國時代 末期 趙 나라 惠文王 時節 藺相如라는 忠臣이 있었다. 서로를 爲해서라면 목이 잘린다 해도 後悔하지 않을 程度의 가까운 親舊를 意味하는 刎頸之交 故事의 主人公으로 藺相如는 王의 信任을 얻기 前까지는 한 大臣의 食客에 지나지 않았다. 强國 秦 나라가 貪을 내는 和氏之璧을 穩全히 지킨데다 澠池라는 곳에서 秦과 趙 두 王의 會同이 있었을 때 羞恥를 當할 뻔한 惠文王을 지켜낸 後로 上卿이란 地位를 얻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나라를 爲해 피땀을 흘린 名將 廉頗는 세 치 혀로 벼락出世한 藺相如가 아니꼬웠다. 그래서 廉頗는 만나면 恥辱을 안겨 주리라 公言했고 이를 傳해들은 藺相如는 廉頗를 避해 다녔다. 그는 側近들이 不平을 늘어놓자 말했다. "내가 秦王도 맞섰는데 廉 將軍을 두려워하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있어 秦이 넘보지 못한다. 나라의 危急함을 먼저 생각하고 私事로운 怨望을 뒤로하기(以先國家之急而 後私讎也)에 避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廉頗는 부끄러워 罪를 請하며 깊이 謝罪했고 깊은 友情은 後世까지 기리게 됐다.
🍎 善事左右
(王의)左右에 있는 者를 잘 섬기다. 스스로 實力을 키우거나 能力을 發揮할 생각은 하지 않고 權力이나 힘 있는 者의 側近에게 阿附를 하거나 賂物을 써 利益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齊나라 王이 卽墨의 大夫를 불러 말했다. “그대가 卽墨에 거한 날부터 誹謗하는 말이 每日 들렸소. 그러나 내가 사람을 시켜 卽墨을 살펴보게 했더니 밭과 들은 開墾되어 넓어졌고, 百姓들도 살림이 넉넉해졌으며, 東쪽 邊境 또한 조용해졌소. 이는 그대가 나의 左右를 섬겨 도움을 求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를 萬戶에 封했다. 그러고는 阿의 大夫를 불러 말했다. “그대가 阿를 지키기 始作한 날로부터 稱讚하는 말이 每日 들렸소. 내가 사람을 시켜 阿를 살펴보게 했더니 밭과 들은 開墾되지 않고, 百姓들은 가난하고 굶주렸소. 지난날 趙나라가 견(鄄)을 侵攻했을 때 그대는 求하지도 않았소. 衛나라가 薛陵을 빼앗았는데 그대는 알지도 못했소. 이는 그대가 厚한 禮物로 나의 左右를 섬겨 稱讚을 求했기 때문이오.” 이날 阿의 大夫와 側近 中에 그를 稱讚했던 者들을 모두 삶아 죽였다. 그러자 臣下들이 甚히 두려워했으며, 敢히 꾸미거나 속이지 않고 힘써 뜻을 다했으며, 齊나라는 크게 다스려져 天下에 强國이 되었다.
(齊威王召卽墨大夫, 語之曰, 自子之居卽墨也, 毁言日至. 然吾使人視卽墨, 田野辟, 人民給, 官無事, 東方以寧. 是子不事吾左右以求助也. 封之萬家. 召阿大夫, 語之曰, 自子守阿, 譽言日至. 吾使人視阿, 田野不辟, 人民貧餒. 昔日趙攻鄄, 子不救. 衛取薛陵, 子不知. 是子厚幣事吾左右以求譽也. 是日, 烹阿大夫及左右嘗譽者. 於是群臣聳懼, 莫敢飾詐, 務盡其情, 齊國大治, 强於天下.)」
이 이야기는 《資治通鑑》에 나오는데, 阿의 大夫가 正常的으로 任務를 遂行하지 않고 王의 側近들에게 賂物을 바쳐 稱讚을 구한 데서 ‘ 善事左右’가 由來했다.
🍎 善漁夫非取
(中國 元나라 때 있었던 實話로, 바로 人間이 取해야할 ’愼其獨‘의 意味이다)
어떤 마을에 한 漁夫가 살았는데, 그는 너무나도 착하고 어질어서 法 없이도 살 수 있는 程度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信望이 두터웠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고을에 새로운 員님이 赴任했다. 그는 嫉妬心이 많고 暴惡한 性格의 所有者였다.
그는 고을에 한 착한 漁夫가 德望이 높고 고을사람들의 信任을 얻고 있다는 事實을 알고, 어떻게 하면 漁夫를 除去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妙案을 하나 짜 내게 되었다.
漁夫의 집 앞에 몰래 貴한 物件을 가져다 놓고 漁夫가 物件을 가져가면 陋名을 씌워 죽일 計劃을 이었다.
첫 番째로 員님은 漁夫의 집 앞에 쌀 한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그 漁夫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쌀가마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두 番째로 最高級 緋緞을 漁夫의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結果는 마찬가지였다. 몸이 달대로 달은 員님은 最後의 手段으로 커다란 金송아지 한 마리를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그 마저도 通하지 않았다. 漁夫는 끝내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行動에 員님은 이렇게 말 하였다. “善漁夫非取!, 착한 漁夫는 物件을 貪하지 않는구나!” 크게 感銘을 받은 員님은 그 後에 漁夫를 自身의 옆에 登用하여 厚德함과 淸廉함으로 고을을 다스렸다고 한다. 이 故事成語는 當時 中國 全域에 퍼졌고, 실크로드를 타고 書域까지 傳해졌으며, 英國과 美國 까에도 傳해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을 때일수록 삼가고 操心하라는 ‘愼其獨’의 가르침이다.
이 말은 中庸과 天命 第2章, 大學의 傳 第6章에 나온다. 앞의 冊에는 “故君子愼其獨也.”로 나오고, 뒤의 冊에는 “故君子必愼其獨也.”로 ‘必’字가 推加되어 있다. 두 冊에 쓰인 글이 新奇할 程度로 같은 理由는 두 冊의 著者가 다 孔子의 弟子 ‘子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愼獨'의 原文은 '愼其獨'이다. 가운데의 '其'字는 앞글에서는 '道'를 가리키고, 뒷글에서는 '明德'을 가리키는 代名詞이다. 이 '道'와 '明德'은 事實上 같은 뜻이다. 卽, ‘君子愼其獨’이란 '君子는 道 또는 明德에 關하여 愼重히 하라'는 뜻이며, 儒家의 가장 重要한 修養 方法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茶山 丁若鏞 (1762~1836)은 “天, 卽 上帝와 鬼神은 形像도 소리도 없는 存在이나 또한 降臨하여 恒常 人間들을 낱낱이 굽어보고 있으니, 바로 이러한 事實을 알아 어두운 房이나 혼자 있을 때에도 ‘戒慎恐懼’하는 것이 바로 ‘愼獨’인 것이다.”라고 ‘하늘과 ·鬼神’과 關聯하여 愼獨을 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愼獨의 槪念에 關하여 中國의 郭沂 敎授는 다음 세 가지로 說明하고 있다.
첫째, 왜 戒慎恐懼 하야야 하는가?
‘戒愼恐懼’는 늘 警戒하고 삼가하며 두려워하는 態度를 말한다. 儒家에서는 모든 것을 自身 속에서 찾기 때문에 自我修養과 自我實現을 强調한다. 君子는 누가 보거나 말거나, 듣거나 말거나 關係없이 언제 어디에서든지 變함없이 誠心으로 생각하고 行動한다. 그래서 君子는 戒愼恐懼할 必要性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凡夫에게 必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道는 費而隱의 特性을 지니고 있다.
이는 ‘君子의 道는 廣大하면서도 隱密하고 微細하다.’는 뜻입니다. 君子가 行하는 中庸의 道는 남의 눈에 안 띄지만 限없이 넓고 커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그 內容은 隱微하여 눈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도 모르는 部分이 있고, 實行하지 못하는 部分이 있다. 오히려 君子는 모르거나 實行하지 못하는 部分이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君子는 모르는 道에 對하여도 謙虛하게 戒愼恐懼해야 한다는 意味이다.
셋째, ‘獨’은 ‘혼자, 홀로’라는 뜻이 아니다.
독은 ‘오로지. 오직’이라는 副詞의 뜻이라고 한다. 道는 隱微한 것이기 때문에 小人은 알 수도 없고 行할 수도 없으며, 오직 君子만이 알고 行할 수 있다는 말이다.
‘君子慎其獨也’ 오직 君子만이 ‘道’ 또는 ‘明德’에 對하여 敬畏의 마음을 지닐 수 있다.
元나라의 착한 漁夫처럼 善漁夫非取하고, 愼其獨해야 한 平生 두 다리 쭉 뻗고 자며 圓滿한 一生을 마치지 않을까.
🍎 先從隗始 , 先从隗始
(먼저 郭隗부터 始作하라.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始作하라는 말이다)
戰國時代 燕나라 昭王은 안으로는 內紛으로 混亂스럽고, 밖으로는 齊나라에 많은 領土를 빼앗겨 國力이 弱해진 狀態에서 王位에 올랐다. 昭王은 宰相 곽외(郭隗)에게 失地 回復에 必要한 人才 登用 方策을 물었다. 郭隗가 對答했다. “옛날에 어떤 王이 千 金으로 千里馬를 求하려고 하였으나 3年 동안이나 求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下級 官吏 하나가 千里馬를 求해 오겠다고 했습니다. 王은 그에게 말을 사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는 석 달 뒤에 千里馬가 있는 곳을 알아냈으나 千里馬는 이미 죽고 없었습니다. 그는 죽은 말의 뼈를 五百 金을 주고 사 왔습니다. 王은 大怒해 말했습니다. ‘산 말을 사 오라고 했더니 죽은 말을 五百 金이나 주고 사다니.’ 官吏가 對答했습니다. ‘죽은 말의 뼈를 五百 金이나 주고 샀으니 千里馬를 가진 者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果然 1年도 지나지 않아 千里馬가 세 匹이나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제 王께서 선비들을 모으려 하신다면 먼저 이 외(隗)부터 始作하십시오. 제가 待遇를 받는 것을 보면 저보다 賢明한 사람들이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몰려올 것입니다.” 昭王은 새로 宮室을 짓고 郭隗를 스승으로 모셨다.
(今王誠欲致士, 先從隗始. 隗且見事, 況賢於隗者乎. 豈遠千里哉. 於是昭王爲隗築宮而師之.)
昭王은 弟子의 禮로써 郭隗를 섬기고, 親히 大廳에 꿇어앉아 가르침을 받고, 食事 때면 손수 郭隗에게 밥상을 갖다 바치고 아침저녁으로 問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昭王은 역수(易水)가에다 높은 臺를 세우고 그 위에 많은 黃金을 쌓아 두었다. 곧, 天下의 어진 人物을 求하기 爲해서라면 그 黃金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臺를 招賢臺, 或은 黃金臺라고 한다.
昭王이 어진 선비를 求한다는 所聞은 天下에 두루 퍼졌다. 魏나라에서는 名將 樂毅가, 趙나라에서 劇辛이, 周나라에서는 蘇代가, 齊나라에서는 鄒衍이 오는 等, 天下의 선비들이 燕나라로 속속 모여들었다. 昭王은 이들의 힘을 빌려 國家를 富强하게 만든 다음, 樂懿를 上將軍으로 삼고, 晉나라 楚나라 三晉과 聯合하여 齊나라를 쳐 卽墨을 除外한 70如 個 城을 陷落시키고 지난날의 怨恨을 雪辱했다.
이 이야기는 《戰國策 燕策》에 나오는데, 郭隗가 먼저 自己부터 待遇를 하라고 한 말에서 ‘先從隗始’가 由來했다. ‘先從隗始’는 ‘先始於隗’라고도 한다.
🍎 先則制人
(무슨 일이든 남보다 먼저 하면 有利하다)
先은 '먼저'라는 뜻이고 制人은 '사람을 制壓하다'라는 말이다.
秦始皇의 暴政에 시달려온 農民들과
各 地方 有力者들은 秦始皇이 죽자
各地에서 反亂을 일으켰다.
이때를 틈타 勢力을 다지려던 殷通은
有能한 項梁을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손을 쓰면 남을 制壓할 수 있고 남이 먼저 손을 쓰면 내가 制壓當한다고 하였소.나는 그대를 도움을 받아 軍士를 일으키려하오"
그러자 項梁은 조카 項羽와 함께 일을 꾸몄다. 卽 項梁이 信號를 하면
項羽가 殷通을 害치기로 한 것이다.
結局 項羽는 猛烈한 氣勢로 軍士를 일으켜 殷通을 害치웠다.
🍎 葉公好龍 , 叶公好龙
(葉公이 龍을 좋아한다. 겉으로는 좋아하는 듯하지만 實際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子張이 魯나라의 哀公을 찾아갔으나 이레가 지나도록 哀公은 子張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子張은 哀公의 臣下에게 이렇게 傳해 달라고 付託하고 떠났다.
“저는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신다는 所聞을 들었기 때문에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서리와 이슬, 티끌과 먼지를 무릅쓰고 100舍 (1舍는 30里)의 먼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레가 지나도록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는 것은 마치 섭공 자고(葉公子高)가 龍을 좋아하는 것과 恰似합니다. 葉公 子高는 龍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허리띠 裝飾에도 龍을 그렸고, 연못을 파도 龍 貌樣으로 했으며, 집도 모두 龍 무늬로 새겨서 꾸몄습니다. 이에 眞짜 龍이 所聞을 듣고 내려와서 머리를 窓틀에 대고 들여다보며 꼬리는 마루로 늘어뜨렸습니다. 葉公은 이를 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나며 精神을 잃고 顔色이 파랗게 질려 버렸습니다. 葉公은 龍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龍과 비슷하지만 龍이 아닌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只今 제가 임금께서 선비를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왔는데 이레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임금께서는 선비를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비 같으나 선비는 아닌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詩經》에 ‘마음속 깊이 간직하니, 언제나 잊힐까나.’라고 하였습니다. 敢히 臣下에게 이 말을 付託하고 떠나갑니다.”
(子張見魯哀公, 七日而哀公不禮, 託僕夫而去曰, 臣聞君好士, 故不遠千里之外, 犯霜露, 冒塵垢, 百舍重趼, 不敢休息以見君, 七日而君不禮. 君之好士也, 有似葉公子高之好龍也. 葉公子高好龍, 鉤以寫龍, 鑿以寫龍, 屋室雕文以寫龍. 於是夫龍聞而下之, 窺頭於牖, 拖尾於堂. 葉公見之, 棄而還走, 失其魂魄, 五色無主, 是葉公非好龍也, 好夫似龍而非龍者也. 今臣聞君好士, 不遠千里之外以見君, 七日不禮, 君非好士也, 好夫似士而非士者也. 詩曰, 中心藏之, 何日忘之. 敢託而去.)」
이 이야기는 《新序 雜事》에 나온다. 葉公이 龍을 좋아해 龍 貌樣으로 온갖 裝飾을 했지만 정작 眞짜 龍을 만나게 되자 精神을 잃고 逃亡갔다는 말에서 ‘葉公好龍’이 由來하여, 겉으로는 좋아하는 듯하지만 實際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城下之盟
(城 아래의 盟約. 힘에 屈服하여 屈辱的인 條約을 맺는 것을 比喩)
「楚나라가 絞나라를 侵攻하여 絞나라 都城의 南門까지 肉薄해 들어갔다. 絞나라 軍士들은 城門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楚나라의 屈瑕가 意見을 내었다. “絞나라는 작고 사람들이 輕率한데, 輕率하면 知謀가 不足합니다. 그러니 나무하는 使役兵에게 護衛兵을 붙이지 말고 내보내어 저들을 誘引하십시오.” 그 말대로 實行했더니 絞나라 사람들이 城에서 나와 楚나라 사람 30如 名을 잡아갔다. 다음 날에도 兵士들을 나무꾼으로 假裝시켜 山에서 나무하는 척하게 했더니 絞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 山中으로 그들을 追擊했다. 미리 埋伏해 있던 楚나라 軍士들이 都城의 北門을 막고 絞나라 軍隊를 크게 쳐부순 다음, 都城의 城壁 아래에서 盟約을 맺고 돌아갔다.
(楚伐絞, 軍其南門, 莫敖. 屈瑕曰, 絞小而輕, 輕則寡謀. 請無閑采樵者以誘之. 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이 이야기는 《左傳 桓公 12年》에 나온다. 絞나라 사람들이 楚나라가 計略에 大敗하고 城壁 아래에서 屈辱的인 盟約을 맺은 데서 由來하여, ‘城下之盟’은 屈辱的인 條約을 맺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숨기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陰險한 생각을 품고 남을 害치는 것을 比喩하는 말이다. 古代 中國의 兵法인 三十六計秘本兵法의 10番째 計策이기도 하다)
唐나라 太宗 때 李義府는 阿附하는 才주가 뛰어나 皇帝의 깊은 歡心을 산 德分에 벼슬이 繼續 높아져 처음에는 太子舍人이었다가, 高祖 때에는 吏部尙書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中書令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李義府는 겉모습은 穩和하고 恭遜했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즐겁게 微笑를 띠었으나 속이 좁고 陰險했다. 이미 要職에 있고 權勢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自己에게 붙기를 바랐으며, 自己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謀害를 加했다. 그래서 當時 사람들은 李義府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義府貌狀溫恭, 與人語必嬉怡微笑, 而褊忌陰賊. 旣處要權, 欲人附己, 微忤意者, 輒加傾陷. 故時人言義府笑中有刀.)」
언젠가 監獄에 淳于라는 姓을 가진 美貌의 女罪囚가 있다는 말을 들은 李義府는 獄吏인 畢正義를 甘言利舌로 꾀어 그 女罪囚를 釋放하도록 한 後에, 그 女子를 自己가 차지해 버렸다. 後에 王義方이 畢正義를 告發하자, 李義府는 畢正義를 윽박질러 自殺하게 만들고 그를 告發한 王義方을 罷職시켜 먼 邊方 地域으로 流配시켜 버렸다.
이 이야기는 《舊唐書 李義府傳》에 나오는데, 李義府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는 말에서 ‘笑裏藏刀’가 由來했다. 唐玄宗 때의 權臣 李林甫의 故事에서 由來한 ‘口蜜腹劍’과 같은 意味를 가지고 있다.
🍎 小心翼翼
(마음을 細心하게 쓰고 操心하다. 每事에 操心하고 삼간다는 말이다)
仲山甫의 德은
훌륭하고 法度가 있네
아름다운 擧動에 훌륭한 모습이요
操心하고 恭敬하며
옛 가르침을 本받으며
威儀를 갖추기에 힘쓰고
天子를 따르며
밝은 命令을 펴 드리네
仲山甫之德
柔嘉維則
令儀令色
小心翼翼
古訓是式
威儀是力
天子是若
明命使賦
《詩經 · 大雅 蒸民》
이는 周나라 宣王을 잘 輔弼한 名宰相 仲山甫의 德을 讚揚하는 詩로서, 그가 王命을 받들어 齊나라에 城을 쌓으러 갈 때 尹吉甫가 餞送하면서 지은 것으로 傳해진다. ‘小心’은 慾心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翼翼’은 謹愼하고 恭敬하는 모습을 말한다. ‘小心翼翼’은 元來 每事에 恭敬하고 謹愼하는 것을 가리켰으나, 現代에 와서는 그 뜻이 邊하여 道量이 좁고 겁이 많은 것을 比喩하는 말로 使用된다.
🍎 束脩之禮 , 束修之礼
(肉脯 묶음의 禮節. 弟子가 되려고 스승을 처음 뵐 때에 드리는 禮物을 말한다. 古代에는 스승에게 가르침을 請할 때 열 조각의 肉脯를 묶어 드렸다)
「孔子가 말했다. “束脩 以上을 行한 者부터 내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子曰, 自行束脩之以上, 吾未嘗無誨焉.)」
● 論語 述而에
‘束’은 열 개 묶음 한 다발을 말하며,
‘脩’는 말린 고기 脯를 말한다. 束脩는 열 조각의 肉脯로 禮物 가운데 가장 弱小한 것이다. 當時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는 반드시 禮物을 가지고 갔다. 孔子는 모든 가르침은 禮에서 始作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弟子들에게 束脩 以上의 禮物을 가지고 오도록 함으로써 禮를 지키도록 만들었다.
🍎 宋襄之仁
(宋나라 襄公의 仁. 쓸데없는 人情을 베풀거나 不必要한 同情이나 配慮를 하는 어리석은 行動을 比喩)
春秋時代 宋나라 桓公이 世上을 떠나자 太子 玆父(襄公)가 뒤를 이어 王位에 올랐다. 襄公은 庶兄인 目夷를 宰相에 任命했다. 襄公 7年, 宋나라 땅에 隕石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이를 본 襄公은 自身이 覇者가 될 徵兆라며 野望을 품기 始作했다. 이듬해인 襄公 8年, 當時의 覇者인 齊나라 桓公이 죽었다. 襄公은 野望을 이루기 爲해 齊나라로 쳐들어가 公子 昭를 세워 追從 勢力을 만들었다. 當時 齊나라 桓公은 管仲이 죽은 後에 管仲이 推薦한 隰朋을 登用하지 않고 自身이 信任하는 內侍 竪刁를 宰相에 任命하였다. 竪刁는 宰相이 된 지 3年 만에 開方, 易牙 等과 共謀하여 亂을 일으켜 桓公을 南門에 있는 寢殿 守衛의 房에 가두어 굶어 죽게 만들었다. 桓公이 죽자 그의 다섯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기 爲해 서로 다투느라 葬禮도 치르지 못해 桓公의 屍體가 67日 동안 放置되어 屍體에서 생긴 구더기가 門밖까지 기어 나올 程度였다. 襄公은 이 틈을 타 齊나라를 친 것이다.
襄公은 漸漸 驕慢해졌다. 目夷는 “작은 나라가 覇權을 다투는 것은 禍根”이라며 諫言했으나 襄公은 듣지 않았다. 그해 가을 盂 땅에서 會盟했는데, 楚나라가 襄公을 捕虜로 잡아갔다가 겨울에 풀어 주었다. 이런 恥辱을 當하고도 襄公의 野望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襄公은 自己를 無視하고 楚나라와 通交한 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해 가을, 楚나라는 鄭나라를 救援하기 爲해 大軍을 派兵했다. 襄公이 楚나라와 싸우기로 決定하자 大夫 子魚가 不可하다고 諫했지만, 襄公은 楚나라 軍隊를 泓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宋나라 軍隊가 먼저 泓水에 到着했고, 楚나라 軍隊는 나중에 到着하여 막 江을 건너고 있었다. 目夷가 建議했다. “저쪽은 數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건너기 前에 쳐야 합니다.(彼衆我寡, 及其未濟擊之.)” 그러나 襄公은 듣지 않았다. 楚軍이 江을 건너와 戰列을 整備하고 있자 目夷가 只今 치자고 했다. 襄公은 敵軍이 陣容을 整備한 後에 치자고 했다. 楚나라 軍隊가 戰列을 가다듬은 後에 宋나라가 攻擊을 했는데 宋나라는 大敗했고, 襄公 自身도 허벅다리에 負傷을 입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襄公을 非難했다. 그러자 襄公이 말했다. “君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處해 있을 때 困難하게 만들지 않고, 戰列을 갖추지 않은 相對方을 攻擊하지 않는다고 했소.(君子不困人於阸, 不鼓不成列.)” 子魚가 嘆息했다. “싸움이란 勝利하는 것이 功을 세우는 것이다. 무슨 禮義가 必要하다는 말인가. 王의 말대로 해야 한다면 처음부터 싸울 必要도 없이 奴隸가 되었어야 하지 않은가!
(兵以勝爲功, 何常言與. 必如公言, 卽奴事之耳, 又何戰爲.)” 襄公은 이 싸움에서 입은 負傷으로 因해 다음 해에 世上을 떠났다.
● 史記 宋微子世家에 나온다.
‘宋襄之仁’의 故事에 對해 《左傳 僖公 22年》에는 다음과 같이 記錄되어 있다.
「宋襄公이 泓水에서 楚나라와 싸웠다. 宋나라 軍隊는 戰列을 갖추었고 楚나라 軍隊는 아직 江을 건너지 못했다. 司馬, (子魚)가 말했다. “저쪽은 數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아직 건너지 못했으니 只今 치도록 합시다.” 宋襄公이 말했다. “안 되오.” 楚나라 軍隊가 江을 건넜으나 아직 戰列을 갖추지 못했다. 子魚가 攻擊하자고 다시 告하자 宋襄公은 또 안 된다고 했다. 楚나라 軍隊가 戰列을 갖춘 다음에 宋나라가 攻擊을 했으나 宋나라 軍隊는 大敗했고, 宋襄公은 다리를 다쳤다. 그의 護衛武士들은 모두 殺傷을 當했다. 宋나라 사람들이 宋襄公을 허물하자 宋襄公이 말했다. “君子는 負傷當한 敵의 兵士를 다시 殺傷하면 안 되고, 나이 많은 사람을 捕虜로 잡으면 안 되는 것이오. 옛날의 軍士作戰은 地勢가 險峻한 곳에 依支하지 않았었소. 寡人은 비록 亡國(商나라. 宋나라는 옛날 商나라 땅으로, 宋人은 商나라의 後孫들이다. 그래서 宋나라를 가리킬 때 商이라고도 한다.)의 後裔지만 戰列을 갖추지 않은 敵을 攻擊할 수는 없소.” 子魚가 말했다. “戰爭을 모르시는군요. 强한 敵이 地勢가 險한 곳에서 아직 戰列을 갖추지 못한 것은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不利 한 地形에 있을 때 攻擊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두려워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只今 强한 者들은 모두 우리의 敵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捕虜로 잡아야 할 판에, 半白의 늙은이를 가엽게 여길 必要가 있겠습니까? 兵士들에게 무엇이 恥辱이라는 것을 밝히 알게 하고 作戰을 하는 것은 敵을 죽이기 爲함입니다. 負傷을 當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왜 再次 殺傷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차마 再次 殺傷을 못 한다면 그들을 애當初 殺傷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차마 半白의 늙은이를 捕虜로 잡지 못한다면 敵에게 屈伏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軍隊는 有利한 局面을 利用해 싸우는 것이고, 북과 징을 울려 士氣를 돋우는 것입니다. 有利한 局面을 利用하는 것이라면 敵이 困境에 處했을 때를 利用해야 하고, 士氣를 돋웠다면 敵이 戰列을 갖추지 않았을 때 攻擊하는 것이 當然하지 않겠습니까?” (宋公及楚人戰於泓. 宋人旣成列, 楚人未旣濟. 司馬曰, 彼衆我寡, 及其未旣濟也, 請擊之. 公曰, 不可. 旣濟而未成列. 又以告. 公曰, 未可. 旣陣而後擊之, 宋師敗績. 公傷股, 門官殲焉. 國人皆咎公. 公曰, 君子不重傷, 不擒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 子魚曰, 君未知戰. 勍敵之人, 隘而不列, 天贊我也. 阻而鼓之, 不亦可乎. 猶有懼焉. 且今之勍者, 皆我敵也. 雖及胡耇, 獲則取之, 何有於二毛. 明耻敎戰, 求殺敵也. 傷未及死, 如何勿重. 若愛重傷, 則如勿傷, 愛其二毛, 則如服焉. 三軍以利用也, 金鼓以聲氣也. 利而用之, 阻隘可也. 聲盛致志, 鼓儳可也.)」
世上 사람들은 宋襄公의 이런 行爲를 두고 ‘宋나라 襄公의 仁(宋襄之仁)’이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 十八史略에.
「宋襄公이 諸侯의 覇子가 될 慾心으로 楚나라와 戰爭을 했다. 公子 目夷가 楚나라 軍隊가 아직 陣을 形成하지 못했을 때 치자고 請했다. 襄公이 말했다. “君子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處했을 때 困難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오.” 그러다가 楚나라에 敗했다. 世上 사람들은 이를 宋나라 襄公의 仁이라고 하며 비웃었다.
(宋襄公欲霸諸侯, 與楚戰. 公子目夷, 請及其未陣擊之. 公曰, 君子不困人於厄. 遂爲楚所敗. 世笑以爲宋襄之仁.)」
● 十八史略 春秋戰國에.
그런데 ‘宋襄之仁’과 같이 理解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當時의 戰爭 方式 때문이었다. 春秋時代에는 相對國을 服屬시키는 것이 戰爭의 主된 目標였으므로 戰爭이 제법 紳士적으로 進行되었는데, 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戰爭의 元則은 다음과 같다. 農事철에는 戰爭을 일으키지 않고, 百姓들에게 疾病이 도는 때를 擇해 戰爭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自國의 百姓을 保護하기 爲함이다. 敵國이 國喪을 當하면 戰爭을 일으키지 않고, 相對方 나라의 飢饉을 틈타 戰爭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敵國의 百姓들을 保護하기 爲함이다. 한겨울과 한여름에는 戰爭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는 自國과 敵國 兩國의 百姓들을 保護하기 爲함이다.
(戰道. 不違時, 不歷民病, 所以愛吾民也. 不加喪, 不因凶, 所以愛夫其民也. 冬夏不興師, 所以兼愛民也.)」
● 司馬法 에.
「싸울 場所나 時間을 定하고, 북이 울리면 戰爭을 始作하고, 奇襲 攻擊은 絶對 안 되고 正面攻擊만 許諾되었다. (不偏戰).」
● 公羊傳 桓公 10年의 何休 注에
「半白의 늙은이를 捕虜로 잡으면 안 되고(不擒二毛), 負傷當한 敵의 兵士를 再次 殺傷하면 안 되었다 (不重傷).」
● 左傳 僖公 22年에.
그런 反面에, 戰國時代에는 春秋時代와는 달리 戰爭의 目標가 相對國의 領土를 兼倂하고 軍士力을 抹殺시키는 쪽으로 變하여 戰爭이 殘忍해지고 奇計가 百出하면서 兵法이 發達하고 더욱 巧妙하고 熾熱했다.
🍎 首丘之情
(머리를 丘陵을 向해 두는 마음. 여우는 죽을 때 여우 窟이 있던 丘陵을 向해 머리를 둔다. 自身의 根本을 잊지 않거나 或은 죽어서라도 故鄕 땅에 묻히고 싶어하는 마음을 比喩)
「姜太公은 齊나라의 營丘에 封해져 5代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周나라에 와서 葬禮를 지냈다. 君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音樂은 그 自然的으로 發生하는 바를 즐기고, 禮는 그 根本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여우가 죽을 때 언덕으로 머리를 向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仁이다.”
(太公封於營丘, 比及五世, 皆反葬於周. 君子曰, 樂, 樂其所自生, 禮, 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丘首, 仁也.)」
● 禮記 檀弓上에.
楚나라의 詩人이자 政治家인 屈原은 九章 · 涉江에서 다음과 같은 句節을 썼다.
새는 날아서 故鄕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으면 머리를 언덕으로 向한다.
(鳥飛反故鄕兮, 狐死必首丘)
‘首丘之情’은 首丘初心, 或은 狐死首丘라고도 한다.
🍎 水落石出
(물이 빠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다. 元來는 물가의 겨울 景致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後에는 어떤 事件의 眞相이 明白하게 드러나는 것을 比喩)
宋나라 神宗 때 王安石의 新法이 施行되자 舊法黨에 屬해 있었던 蘇軾은 湖北 黃州로 左遷되었다. 그는 틈나는 대로 周邊의 明勝地를 遊覽하였는데, 赤壁을 찾아 赤壁賦 2首를 지었다. 7月에 〈前赤壁賦〉를 짓고, 3個月 後인 10月에 〈後赤壁賦〉를 지었는데, 여기에서 ‘水落石出’이 나온다.
「이해 10月 보름에 雪堂으로부터 걸어서 臨皐亭으로 돌아가려 할 때에 두 客이 나를 따랐다. 黃泥재를 넘으니 서리와 이슬이 내렸고 落葉은 다 떨어져 있었다. 땅에 그림자가 비치기에 고개를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서로 돌아보고 즐거워하면서 노래를 불러 서로 和答했다. 이윽고 내가 嘆息하며 말했다. “벗이 있는데 술이 없고, 술이 있더라도 按酒가 없구나. 달은 밝고 바람 맑은데 이렇게 좋은 밤을 어이한단 말인가?” 客이 말했다. “오늘 저녁 무렵에 그물을 들어 고기를 잡았는데, 입이 크고 비늘이 가는 것이 松江의 農魚 같았습니다. 허나 어디에서 술을 求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와 아내와 相議하니 아내가 말했다. “술 한 말이 있어 當身이 不時에 必要할 때를 對備하여 保管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에 술과 고기를 가지고 다시 赤壁江 아래에서 놀았는데, 江물 흐르는 소리 들려오고 (물 빠져)끊긴 江둑은 千 길이나 되었다. 山 높으니 달은 작게 보이고 물이 줄어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歲月이 얼마나 흘렀다고 江山을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나는 옷자락을 걷어붙이고 올라가서 높은 바위를 밟고 우거진 풀 속을 헤치고, 호랑이 貌樣의 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뱀이나 龍 貌樣을 한 나무에 올라가기도 하고, 새매가 살고 있는 높은 둥지에 올라가기도 하고, 馮夷의 그윽한 宮殿(깊은 물속)을 굽어보기도 했다. 두 客은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문득 길게 소리를 외치니 草木이 振動하고 山이 울리고 골짜기가 메아리치며 바람이 일고 江물이 솟는 듯하였다. 나 또한 超然히 슬퍼지고 肅然히 두려워지며 몸이 오싹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되돌아와 배에 올라 물 흐르는 대로 내맡겨 江 가운데서 멈추게 내버려 두었다. 때는 한밤中이 되어 가는데 四方을 돌아보니 寂寞하기만 했다. 마침 외로운 鶴 한 마리가 江을 가로질러 東쪽으로 날아왔다. 날개는 수레바퀴만 하며 검은 치마에 흰옷을 입었는데 길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西쪽으로 날아갔다.
暫時 後에 客이 떠나가고 나 또한 잠이 들었다. 꿈에 道士 하나가 깃으로 만든 옷을 펄럭이면서 臨皐亭 아래를 지나다가 나에게 揖하고 말했다. “赤壁의 뱃놀이는 즐거웠소?” 姓名을 물었으나 머리를 숙인 채 對答하지 않았다. “嗚呼라! 슬프구나. 내 그대를 알겠소. 지난밤에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지나간 것이 그대가 아니오?” 이렇게 물으니 道士가 돌아보며 웃었다. 나 또한 놀라 잠에서 깨어나 窓門을 열고 내다보았으나 그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於臨皐, 二客從予. 過黃泥之坂,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 巨口細鱗, 狀如松江之鱸. 顧安所得酒乎. 歸而謀諸婦, 婦曰, 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需. 於是携酒與魚, 復遊於赤壁之下. 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 予乃攝衣而上, 履巉巖披蒙茸, 踞虎豹, 登蛇龍, 攀棲鶻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之不能從焉. 劃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悄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時夜將半, 四顧寂寥,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戛然長鳴, 掠予舟而西也. 須臾客去, 予亦就睡. 夢一道士, 羽衣翩躚, 過臨皐之下, 揖予而言曰, 赤壁之遊樂乎. 問其姓名, 俛而不答. 嗚呼噫憙. 我知之矣.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道士顧笑. 予亦驚悟, 開戶視之, 不見其處.)」
이처럼 ‘水駱石出’은 本來 물가의 景致를 描寫하는 말로 使用되었지만, 나중에는 물이 줄어들어 돌이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일의 眞相이 드러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水落石出’은 歐陽修의 醉翁亭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해가 떠 숲에 안개가 개고 구름이 돌아가 바위 굴이 어두워져 어둠과 밝음이 變化하는 것은 山속의 아침저녁이다. 들꽃이 피어 그윽한 香氣가 풍기고, 아름다운 나무가 빼어나 茂盛한 그늘이 지며, 바람과 서리 高潔하고, 水位가 떨어져 바닥의 돌이 드러나는 것은 山間의 四時이다.
(若夫日出而林霏開, 雲歸而巖穴暝, 晦明變化者, 山間之朝暮也. 野芳發而幽香, 嘉木秀而繁陰, 風霜高潔, 水落而石出者, 山間之四時也.)」
歐陽脩(1007∼1073)가 醉翁亭記를 쓴 것은 宋나라 仁宗 慶曆 6年, 卽 1046年이고, 蘇軾(1037∼1101)이 〈前赤壁賦〉와 〈後赤壁賦〉를 쓴 것은 各各 神宗 元豊 5年, 卽 1082年의 7月과 10月이다. 年代順으로 보면 ‘水落石出’의 出典은 歐陽脩의 醉翁亭記라고 해야 옳겠지만, 大部分의 出典은 蘇軾의 後赤壁賦로 召介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蘇軾의 赤壁賦가 歐陽脩의 醉翁亭記보다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 手不釋卷 , 手不释卷
(손에서 冊을 놓지 않다. 恒常 손에 冊을 들고 부지런히 工夫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江表傳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孫權이 呂蒙과 蔣欽에게 말했다. “卿들은 이제 權限을 가지고 國家 大事를 맡게 되었으니 工夫를 해서 知識을 含養해 두는 것이 어떻겠소?” 呂蒙이 대꾸했다. “軍 안에 恒常 일이 많아 冊을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卿에게 經學을 工夫하여 博士라도 되라고 하는 줄 아는 貌樣이구려. 다만 지난 일들 (先人들이 남긴 記錄)을 涉獵하라는 것이오. 卿이 할 일이 많다고는 하지만 나보다 많기야 하겠소? 나는 어릴 적에 詩經, 西經, 禮記, 左傳, 國語를 읽었고 周易만을 읽지 못했다오. 業務를 統率한 이래 三史와 모든 兵書를 살펴보았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큰 利益이 되는 것 같소. 두 분 卿들은 性情이 聰明하고 理解力이 있어 工夫하면 반드시 얻게 될 것인데 어찌 하려고 하지 않는 거요?
當場 孫子, 六韜, 左戰, 國語와 三史를 읽어야 할 것이오. 일찍이 孔子께서도 ‘하루 終日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생각만 했는데 얻은 것이 없었다. 차라리 冊을 읽는 便이 낫다.’고 말씀하셨소. 그리고 後漢의 光武帝는 軍務에 바쁜 中에도 손에서 冊을 놓지 않았다고 하고, 孟德(曹操) 亦是 늙어서까지도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스스로 말했소. 卿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努力하지 않는단 말이오.” 呂蒙은 工夫를 하기 始作하여 뜻을 敦篤히 하고 게으르지 않아 두루 본 冊이 옛 儒學者들보다도 많았다.
(江表傳曰, 初, 權謂蒙及蔣欽曰, 卿今竝當塗掌事, 宜學問以自開益. 蒙曰, 在軍中常苦多務, 恐不容復讀書. 權曰, 孤豈欲卿治經爲博士邪. 但當令涉獵見往事耳. 卿言多務孰若孤. 孤少時歷詩, 書, 禮記, 左傳, 國語, 惟不讀易. 至統事以來, 省三史, 諸家兵書, 自以爲大有所益. 如卿二人, 意性朗悟, 學必得之, 寧當不爲乎. 宜急讀孫子, 六韜, 左傳, 國語及三史. 孔子言, 終日不食, 終夜不寢以思, 無益, 不如學也. 光武當兵馬之務, 手不釋卷. 孟德亦自謂老而好學. 卿何獨不自勉勖邪. 蒙始就學, 篤志不倦, 其所覽見, 舊儒不勝.)」
이 이야기는 《三國志 · 吳書 呂蒙傳》의 〈江表傳〉을 引用한 裴松之의 注에 나오는데, 光武帝가 軍務에 바쁜 中에도 손에서 冊을 놓지 않았다는 말에서 ‘手不釋卷’이 由來했다. 〈江表傳〉은 現在 傳해지지 않는데, 《三國志》의 〈裴松之 注〉에 많이 引用되어 있다. 三史는 史記, 漢書, 後漢書를 말한다.(元來는 史記, 漢書, 東觀漢記였으나 後漢書가 나온 後에 바뀌었다.) 여기에 三國志를 더해 前四史라고 한다.
🍎 首鼠兩端 , 首鼠两端
(쥐가 머리를 내밀고 兩쪽 끝에서 망설이다. 구멍 속에서 머리를 내민 쥐가 나갈까 말까 망설인다는 뜻으로, 躊躇하면서 決斷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붙지 않고 兩다리를 걸치는 것을 比喩)
漢나라 5代 皇帝인 文帝의 皇后의 조카인 魏其侯 竇嬰과 6代 景帝의 皇后의 同生인 武安侯 田蚡은 外戚으로서 대단한 勢道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오랫동안 힘겨루기를 繼續해 왔다. 그러다가 魏其侯의 背景이었던 竇太后, (文帝의 皇后)가 죽고 武安侯의 背景인 王太后가 得勢하자 魏其侯는 勢力을 잃게 되고, 武安侯가 得勢하여 丞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過去에 魏其侯의 身勢를 졌던 사람들까지 모두 武安侯 쪽으로 붙어 魏其侯를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狀況에 이르렀다. 그런데 將軍 灌夫만은 옛情을 잊지 않고 끝까지 魏其侯와 가까이했으며, 武安侯에 對해 不平을 하고 다녔다.
여름, 武安侯가 燕王의 딸을 婦人으로 맞아들이자 太后가 詔書를 내려 宗親들과 滿朝百官이 參席해 祝賀를 하라고 指始했다. 魏其侯는 灌夫에게 가 함께 가려고 했다. 灌夫가 辭讓하며 말했다. “내가 술로 丞相에게 失手를 한 적이 있고 丞相이 只今도 나와 틈이 있습니다.” 魏其侯는 그 일은 이미 다 解決되었다고 말하면서 灌夫를 억지로 데리고 갔다. (當時의 風習에 依하면 宴會 席上에서는 主人과 손님이 番갈아 가며 술을 勸하게 되어 있었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어 武安后가 일어나 賓客들에게 술을 勸하자 모두들 避席의 禮를 올렸다. ‘避席’이란 相對方이 술盞을 勸했을 때 自己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술座席에서의 禮의였다. (中國도 北方 異民族들의 生活 風習이었던 寢床과 椅子 生活이 普遍化되었던 宋나라 時代 以前에는 바닥에서 生活을 했었다.) 다음으로 魏其侯가 賓客들에게 술을 勸하자 親한 사람들은 避席을 했지만, 折半 以上이 膝席 (무릎만 暫깐 꿇고 일어나지는 않는 것)을 했다. 이를 본 灌夫는 心氣가 뒤틀렸다.
灌夫는 일어나 武安侯에게 가서 술을 勸했다. 武安侯는 膝席을 하고 말했다. “술盞 가득 채우지 마시오.” 灌夫는 火가 났으나 웃으며 말했다. “將軍은 貴人이시니까 다 마셔야 합니다.” 武安侯는 그 술을 마시지 않았다. 灌夫는 (氣分이 傷했지만 꾹 참고) 臨汝侯 灌賢에게 가서 술을 勸했는데, 灌賢은 程不識과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고, 避席도 하지 않았다. 火를 爆發시킬 곳이 없던 灌夫는 臨汝侯 灌賢에게 辱을 해 댔다. “平素에 程不識이 一錢의 價値도 없다고 誹謗하더니, 오늘 어른이 술을 勸하는데 계집애들처럼 程不識과 귓속말이나 주고받다니!” 그러자 武安侯가 말했다. “程將君(程不識)과 李將軍(李廣)은 모두 東宮과 西宮의 警護將軍인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程將軍을 侮辱하면 李將軍의 體面을 세워 주는 게 아니잖소?” 灌夫가 소리쳤다. “오늘 내 머리를 베고 내 가슴을 가른다 해도 關係없다. 李將軍이 무슨 대수(大事)냐.” 宴會에 參席했던 賓客들은 便所에 가는 척하며 모두 자리를 떠 버렸고, 魏其侯도 밖으로 나가 灌夫에게 그만 나오라고 손짓만 할 뿐이었다. 火가 머리끝까지 난 武安侯는 長史를 불러 灌夫를 彈劾하여 死刑에 處할 수 있도록 하라고 指示했다.
灌夫는 獄에 갇혔다. 魏其侯는 灌夫를 살려 보려고 百方으로 努力했으나 方法이 없자 漢武帝에게 上疎를 올려 灌夫를 善處해 줄 것을 懇請했다. 武安侯와 魏其侯의 意見을 다 들은 漢武帝는 重臣들에게 意見을 물었다. “卿들이 判斷컨대 어느 쪽이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意見이 둘로 나뉘었으나 時間이 지남에 따라 武安侯의 追從者로 알려진 內史 鄭當時조차 曖昧한 態度를 取했다. 그러자 御史大夫 韓安國도 明確한 對答을 避했다. “陛下, 灌夫가 죽을죄까지는 짓지 않았다는 魏其侯의 말도 옳고, 함부로 날뛰면서 紀綱을 害치고 大逆罪를 저질렀다는 丞相의 말도 옳습니다. 聖上께서 決定하시는 것이 可한 줄 아옵니다.” 重臣들의 不分明한 態度에 失望한 武帝가 자리를 뜨자 朝會는 끝났다.
「武安侯 田蚡이 退闕하는 길에 韓安國을 불러 수레에 오르게 한 다음 火가 나서 責望했다. “그대와 함께 그 대머리 늙은이에게 對應했어야 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左右를 살피는 쥐처럼 망설였소?”
(武安已罷朝, 出止車門, 召韓御史大夫載, 怒曰, 與長孺共一老禿翁, 何爲首鼠兩端.)」
魏其侯의 努力에도 不拘하고 結局 灌夫와 그 一族들은 處刑을 當하고 말았다.
● 史記 魏其武安侯列傳에.
🍎 潄石枕流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는다. 失手를 認定하려 들지 않거나,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比喩)
晉나라 初 풍익(馮翊) 太守를 지낸 孫子荊 (孫楚)은 文才도 뛰어났고 臨機應變에 대단히 能한 사람이었다. 그가 活動했던 當時에는 士大夫들 사이에서 俗世의 道德이나 文名을 輕視하고 老莊의 哲理를 重히 여겨 談論하는 이른바 淸談이 流行하던 때였다.
「孫子荊이 어린 時節, 隱居하기로 작정하고 王武子(王濟)에게 枕石漱流(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漱石枕流 (흐르는 물을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하다)’라고 잘못 말했다. 그러자 王武子가 말했다. “흐르는 물로 베개 삼고 돌로 양치질을 할 수 있는 건가?” 孫子荊이 둘러댔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귀를 씻기 爲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硏磨하기 爲함이라네.”
(孫子荊年少時, 欲隱, 語王武子當枕石漱流, 誤曰漱石枕流. 王曰, 流可枕, 石可漱乎. 孫曰, 所以枕流, 欲洗其耳. 所以漱石, 欲礪其齒.)」
● 世說新語 排調에.
元來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한다는 뜻의 ‘枕石漱流’라고 해야 할 것을 失手하여 ‘漱石枕流’라고 말하고는 잘못을 끝까지 認定하지 않고 臨機應變으로 둘러댔다는 이야기에서 由來하여, ‘漱石枕流’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여 固執을 부리거나 失敗를 認定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쓰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 水魚之交 , 水鱼之交
(물과 고기의 사귐.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暫時도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아주 密接한 關係를 比喩)
後漢 末葉, 劉備는 關羽, 張飛와 義兄弟를 맺고 漢室의 復興을 爲해 軍士를 일으켰다. 하지만 能力을 發揮할 機會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轉輾하며 歲月을 虛送하다가 마지막에는 荊州刺史 劉表에게 依支하는 身勢가 되었다. 有能한 參謨의 必要性을 切感한 劉備는 여러 사람들을 通해 南陽에 隱居하는 諸葛亮의 存在를 알게 되었고, 關羽 · 張飛와 함께 禮物을 싣고 襄陽에 있는 그의 草家집을 세 番이나 訪門한 끝에 그를 軍師로 모실 수가 있었다.
諸葛亮의 智略에 힘입어 劉備는 蜀漢을 建國하였으며, 曹操, 孫權과 三國鼎立의 形勢를 이룰 수 있었다. 劉備는 諸葛亮을 매우 尊敬하였으며, 諸葛亮 또한 劉備의 두터운 待遇에 忠誠을 다했다. 두 사람의 情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劉備는 모든 일에서 諸葛亮에게 가르침을 받은 다음에 決定을 내렸다.
「그러나 劉備와 決義兄弟를 맺은 關羽와 張飛는 諸葛亮에 對한 劉備의 態度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種種 不平을 했다. 그러자 劉備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諸葛亮을 얻게 된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네. 자네들은 더 以上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關羽와 張飛는 (不平을)그쳤다.
(關羽張飛等不悅. 先主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羽飛乃止.)」
《三國志 · 蜀書 諸葛亮傳》에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水魚之交’ 外에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라는 뜻의 ‘如魚得水’도 나왔다.
🍎 羞與爲伍
(어떤 사람과 한 무리가 된 것을 羞恥스럽게 여기다)
• 羞與噲伍는 同義語다.
● 司馬遷의 史記 卷 92 淮陰侯列傳에
漢王 5年 正月, 韓信은 漢나라가 天下 統一을 하는데 큰 功을 세워 그 功勞로 楚王이 되었다. 그러나 項羽의 麾下에 있을 때 알게 된 親舊 鍾離昧가 그에게 依託하고 있었다. 劉邦은 鐘離昧가 韓信 밑에서 숨어 지낸다는 것을 알고 그를 逮捕하라는 命令을 내렸다.
漢 高祖가 韓信을 逮捕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鍾離昧는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韓信은 죽은 鍾離昧의 목을 바쳤으나 漢 高祖는 그를 逮捕하였다. 韓信은 嘆息하며 이렇게 말했다.
"果然 옛말대로구나. '꾀 많은 토끼가 죽으니 사냥개가 삶아지고, 높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은 깊이 쳐 박히게 되며, 敵國을 쳐부수고 나니 智慧로운 臣下가 죽게 되는 구나.' 天下가 이미 平定되었으니 내가 삶겨지는 것은 當然하리라.
(狡兎死走狗烹 高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漢 高祖는 韓信의 손발을 묶고 그를 捕縛하였다. 洛陽에 到着하자 高祖는 韓信의 罪를 容恕하고, 그의 地位를 楚王에서 淮陰侯로 낮추었다.
그 後 韓信은 高祖가 自身의 才能을 두려워하여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病을 핑계로 朝廷에 나가지도 않고, 高祖의 巡行에도 따라가지 않았다. 韓信은 漢 高祖를 怨望하며 周勃이나 灌嬰 等과 같은 地位에 處한 것을 羞恥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느 날, 韓信은 將軍 樊噲의 집을 訪問한 적이 있었는데, 樊噲는 무릎을 꿇고 恭遜하게 절을 하며 그를 맞았다. 暫時 머문 後, 韓信이 떠나려 하자 樊噲는 自身을 臣下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大王께서 陋醜한 곳을 찾아 주시다니 臣의 榮光입니다."
그러자 韓信은 門을 나서며 웃으며 말했다.
"내가 結局 樊噲 等과 같은 地位의 사람이 되고 말았구나"
(生乃與噲等爲伍)
🍎 守株待兎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다. 고지식<고디식,고디싁>하고 融通性이 없어 舊習과 前例만 固執하거나, 努力하지 않고 僥幸만을 期待하는 것을 比喩)
「宋나라에 한 農夫가 있었다.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토끼가 달려오더니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農夫는 쟁기를 풀어 놓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다시 얻기를 期待했지만, 토끼는 얻지 못하고 自身은 宋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只今 先王의 政治로써 現在의 人民들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은 모두 그루터기를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宋人有耕田者. 田中有株, 兎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兎, 兎不可復得, 而身爲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世之民, 皆守株之類也.)」
이 이야기는 《韓非子 五蠹》에 나온다. 韓非는 堯舜의 理想的인 王道 政治를 時代에 뒤떨어진 思想이라고 主張하면서, 그를 反對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韓非가 말한 ‘守株待兎’는 낡은 慣習만을 固執하여 지키고 새로운 時代에 順應하지 못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五蠹는 다섯 가지 (나라를 좀먹는)좀으로, 學者, 論客, 俠士, 側近, 商工人 等 다섯 部類의 사람들을 말한다.
🍎 樹欲靜而風不止 , 树欲静而风不止 ,
(나무는 조용하고 싶지만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孝道를 다하지 못한 子息의 슬픔을 比喩)
「孔子가 길을 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孔子가 말했다. “말을 달려 가 보자. 앞에 賢者가 있구나.”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皐魚가 베옷을 입고 낫을 껴안고 길가에서 울고 있었다. 孔子가 수레에서 내려와 그 까닭을 물었다. “喪을 當한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슬피 우는가?” 皐魚가 對答했다. “저에게는 세 가지 잃은 것이 있습니다. 어려서 工夫를 하여 諸侯에게 遊說하느라고 父母를 뒤로 했습니다. 이것이 잃은 첫 番째 것입니다. 내 뜻을 高尙하게 하느라 임금을 섬기는 일을 等閑視 했습니다. 이것이 잃은 두 番째 것입니다. 親舊와 사이가 두터웠으나 젊어서 멀어졌습니다. 이것이 잃은 것의 세 番째입니다.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息이 奉養을 하려 하지만 父母는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한 番 가면 쫓아갈 수 없는 것이 歲月이요, 떠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 父母님입니다. 이제 여기서 作別을 할까 합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孔子가 말했다. “弟子들이여, 이 말을 訓戒로 삼아라. 銘心할 만하지 않은가.” 弟子 中에 故鄕으로 돌아가 父母를 奉養한 者가 열에 세 名이나 되었다.
(孔子行, 聞哭聲甚悲. 孔子曰, 驅驅, 前有賢者. 至, 則皐魚也. 被褐擁镰, 哭於道傍. 孔子辟車與言曰, 子非有喪, 何哭之悲也. 皐魚曰, 吾失之三矣. 少而學, 遊諸侯, 以後吾親, 失之一也. 高尙吾志, 閑吾事君, 失之二也. 與友厚而少絶之, 失之三也.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 往而不可追者, 年也. 去而不可得見者, 親也. 吾請從此辭矣. 立槁而死. 孔子曰, 弟子誡之, 足以識矣. 於是門人辭歸而養親者十有三人.)」
이 이야기는 《韓詩外傳》에 나온다. 같은 內容의 이야기가 《孔子家語 致思》에도 나오는데, 記錄에 多小의 差異가 있다. 《孔子家語》에서는 ‘孔子가 齊나라로 갈 때’로 되어 있으며, ‘皐魚’가 아닌 ‘丘吾子’로 되어 있고, 丘吾子가 죽은 方法도 물에 뛰어들어 죽은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樹欲靜而風不止’는 風樹之嘆, 風木之悲라고도 한다.
🍎 夙興夜寐 , 夙兴夜寐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다. 責任을 다하기 爲해 애쓰고 努力하는 모습을 比喩)
三 年 동안 남의 아내 되어
房에서 苦生했네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자며
아침이 있는 줄 알지 못했네
婚姻 言約이 이루어지자
男便은 亂暴하게 나왔지
兄弟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허허 웃기만 하네
조용히 돌이켜 생각하니
나만 가여워지는구나
三歲爲婦
靡室勞矣
夙興夜寐
靡有朝矣
言旣遂矣
至於暴矣
兄弟不知
咥其笑矣
靜言思之
躬自悼矣
● 詩經· 衛風 氓에.
男便에게 버림받은 女人의 슬픔을 노래한 作品이다.
● 詩經· 小雅 小宛》에
날아가는 할미새 보니
날면서 지저귀네
나는 每日 꾸준히 나아가는데
달도 따라 나아가는구나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자며
낳아 주신 어버이 辱되지 않게 해야지
題彼脊令
載飛載鳴
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世態를 탓하면서도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마음을 그린 노래이다. 두 便의 詩에서 ‘夙興夜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比喩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 脣亡齒寒 , 唇亡齿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서로 密接한 關係에 있는 것을 比喩)
「晉獻公이 再次 虞나라에게서 길을 빌려 虢나라를 치려고 하자 宮之奇가 諫했다. “虢나라는 虞나라의 保護壁입니다. 虢나라가 亡하면 虞나라도 虢나라를 따르게 됩니다. 晉나라의 野心을 助長하면 안 되며, 外敵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한 番 길을 빌려 준 것도 甚한데 또 빌려 주다니요. 俗談에 ‘광대뼈와 잇몸은 서로 依支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했는데, 바로 虢과 虞의 關係를 말한 것입니다.” ······ 虞公은 宮之奇의 諫言을 듣지 않고 晉나라 使者의 (길을 빌려 달라는)要求를 들어주었다. 宮之奇는 家族들을 거느리고 虞나라를 떠나면서 말했다. “虞나라는 이제 年末의 祭祀를 지낼 수 없게 되겠구나. 이番에 虞나라가 滅亡하면 晉나라는 다시는 兵士들을 보낼 必要가 없게 될 것이다.” 겨울철인 12月 丙子日, 晉나라는 虢나라를 滅亡시켰다. 虢公은 京師 (天子의 首都)로 避身했다. 晉나라는 돌아오는 途中에 虞나라에 駐屯했다가 機會를 타서 虞나라를 襲擊하여 滅亡시키고 말았다. 晉나라 軍隊는 虞公과 大夫 井伯을 사로잡고 그들을 晉獻公의 딸 秦穆姬가 媤집가는 데 奴婢로 삼았다. 하지만 虞나라의 祭祀는 廢하지 않았고, 虞나라의 貢物은 周나라 王室로 돌렸다.
(晉侯復假道於虞以伐虢. 宮之奇諫曰, 虢, 虞之表也. 虢亡, 虞必從之. 晉不可啓, 寇不可玩. 一之謂甚, 其可再乎.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虢之謂也. ······ 弗聽, 許晉使. 宮之奇以其族行, 曰, 虞不솥矣. 在此行也, 晉不更擧矣. 冬十二月丙子朔, 晉滅虢. 虢公丑奔京師. 還師, 館於虞, 遂襲虞, 滅之. 執虞公及其大夫井伯, 以媵秦穆姬. 而修虞祀, 且歸其職貢於王.)」
이 이야기는 《左傳 僖公 5年》에 나오는데, 宮之奇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한 말에서 ‘脣亡齒寒’이 由來했다. 本文의 輔車相依의 輔는 수레의 덧방나무라는 뜻 外에도 광대뼈라는 뜻이 있고, 車는 수레바퀴라는 뜻 外에 잇몸이라는 뜻이 있다.
🍎 乘風破浪 , 乘风破浪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가다. 遠大한 抱負를 比喩하는 말이다)
南北朝時代 宋나라의 豫州刺史와 雍州刺史를 歷任한 宗慤은 어려서부터 武藝가 出衆하고 勇敢했다. 그의 叔父 宗炳은 高尙한 선비였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宗慤이 어렸을 때 그의 叔父 宗炳이 宗慤에게 將次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宗慤은 “거센 바람을 타고 萬 里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고 싶습니다.”라고 對答했다. 그러자 叔父가 말했다. “너는 富貴하게 되지 못하겠구나. 우리 집안의 門風을 무너뜨리다니.” 兄 宗泌이 婚禮를 치렀는데 집에 들어오는 첫날 밤에 强盜가 들이닥쳤다. 當時 宗慤은 열네 살이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勇敢하게 强盜들과 맞서 싸웠다, 强盜 十如 名은 모두 흩어져 집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慤年少時, 炳問其志. 慤曰, 願乘長風破萬里浪. 炳曰, 汝不富貴, 卽破我家矣. 兄泌娶妻, 始入門, 夜被劫. 慤年十四, 挺身拒賊, 賊十餘人皆披散, 不得入室.)」
後에 宗慤은 林邑(베트남)을 征伐하기 위한 遠征 길에 副官으로 隨行하였다. 林邑의 王이 코끼리 떼를 앞세워 攻擊하자 宋나라 軍隊는 困境에 處하게 되었다. 이때 宗慤이 妙策을 내어 兵士들을 獅子처럼 꾸며 코끼리 떼 앞에서 춤을 추게 하였다. 그러자 코끼리 떼는 놀라 달아났고 宋나라 軍隊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林邑을 攻略했다. 이처럼 宗慤은 智와 勇을 兼備한 人物이었다.
이 이야기는 《宋書 宗慤傳》과 《南史 宗慤傳》에 나온다. 宗慤의 말에서 由來하여 ‘乘風破浪’은 遠大한 抱負를 比喩하거나, 뜻한 바를 이루기 爲하여 온갖 難關을 克服하고 나아가는 것을 比喩하게 되었다. ‘長風破浪’이라고도 한다.
🍎 市道之交
(市井의 장사치와 같이 利가 있으면 모이고 利가 없으면 헤어지는 사귐.
利를 좇는, 장사를 爲한 사귐'을 이르는 말)
●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및
孟嘗君列傳, 戰國策 齊策에
戰國時代 趙나라 惠文王 때, 趙나라에는 여러 戰爭에서 나라를 救한 廉頗라는 將軍이 있었다.
惠文王이 죽고 그 아들 孝成王이 卽位했는데, 秦나라가 趙나라를 侵略하면서 諜者를 보내 '趙나라의 廉頗將軍은 늙어서 싸움을 하기 두려워하므로 두렵지 않지만 다만 血氣旺盛한 趙括이 大將이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流言蜚語를 퍼뜨렸다.
이 流言蜚語를 들은 趙의 孝成王은 藺相如의 反對를 無視하고, 名將인 廉頗 代身해 趙括을 總司令官에 任命했다.
그리고 그 結果 藺相如가 憂慮한 대로 最惡의 慘敗를 맛보았다. 實戰 經驗이 全혀 없는 趙括이 兵法理論만으로 作戰을 展開하다가 秦나라의 陷穽에 빠져 40萬이라는 大軍을 모두 죽이는 中國 歷史上 最大·最惡의 慘敗를 가져왔다.
몇 年 後 이番에는 燕나라가 趙의 勢가 弱해진 틈을 노려 軍士를 일으켜 趙를 쳤다. 그러자 趙에서는 다시 廉頗를 將軍으로 삼아 燕을 擊破하였다. 孝成王은 廉頗를 信平君에 封하고, 臨時 相國을 삼았다.
이보다 앞서서 廉頗가 罷免되어 돌아와 權勢를 잃었을 무렵 오래된 食客들이 모두 떠나 버렸었다. 그런데 다시 登用되어 將軍이 되자 食客이 다시 모여들었다.
廉頗가, "客들은 물러가라"고 소리지르자, 客이 말했다.
"아아, 當身께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뒤늦게야 理致를 깨닫게 됩니까? 天下의 사람들은 市場으로 가는 길목에 모여듭니다. 當身께서 權勢가 있으면 우리는 當身을 따를 것이고, 權勢가 없어지면 떠나갈 뿐으로
(天下以市道之交, 君有勢我則從君, 君無勢則去), 이것은 眞實로 當然한 理致로, 무슨 怨望을 가지십니까?"
한 便, 戰國策 齊策에는 孟嘗君의 逸話가 실려 있다.
孟嘗君이 齊나라에서 免職되어 쫓겨났다가 復職되어 다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때 3,000名의 食客을 거느리면서 天下에 이름을 떨쳤던 그에게도 이런 어려운 때가 있었던 것이다.
譚拾子가 國境까지 마중 나가 모시면서 물었다.
“貴君께서는 齊나라 士大夫에게 아직까지 怨恨을 품고 있소?”
孟嘗君은 “그렇소”라고 分明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꼭 죽여서 憤풀이를 하시겠습니까?”
“그렇소.”
그러자 譚拾子가 말했다.
“世上 일에는 반드시 온다는 必至라는 것이 있고 그럴만한 理由라는 必然이라는 것이 있는데 貴君께서는 그걸 아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必至라는 것은 죽음입니다. 必然이라는 것은 富貴해지면 따라다니고 貧賤하게 되면 떠나가버린다는 것이지요.
(事之必至者 死也 理之固然者 富貴則就之 貧賤則去之) 이것이 必至요 必然이라는 것입니다. 저잣거리에 比喩해 보겠습니다. 저잣거리는 아침에는 넘치지만 저녁이 되면 텅빕니다(市朝則滿 夕則虛). 그것은 아침에는 저잣거리가 좋고 저녁에는 저잣거리가 싫어지기 때문이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貴君께서도 怨恨을 덮어두셔야 합니다.”
孟嘗君은 이 말을 듣자 怨恨을 품은 500名의 名單을 적어두었던 牒을 칼로 잘라 없애버리고 다시는 말거리로 삼지 않았다.
史記 孟嘗君列傳에도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馮驩이 한 말로 記錄하고 있다.
只今 이 땅에도 달콤하던 時節에는 兄이네 아우네 하고 똘똘 뭉쳤던 사이가 벌어지다 못해 怨讐가 되었음직한 事例가 非一非再하다. 이들도 孟嘗君처럼 怨讐名單을 칼로 잘라 없애버릴 수 있을는지?
🍎 食少事煩 , 食少事烦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롭다. 즉, 몸을 돌보지 않고 바쁘게 일하는 것을 比喩)
234年, 諸葛亮은 10萬 大軍을 이끌고 魏나라의 司馬仲達과 五丈原에서 對峙했다. 諸葛亮은 그때까지 여러 차례 北伐을 敢行하였으나 그 때마다 軍糧의 輸送이 끊겨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想起하여, 이番에는 軍隊를 나누어 屯田制를 實施하여 休戰 中에는 農事에 從事하도록 했다. 諸葛亮은 速戰速決을 計劃했지만 司馬仲達은 持久戰으로 나왔다. 諸葛亮은 자주 司馬 (司馬仲達)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司馬懿는 城門을 굳게 닫고 지키기만 할 뿐, 나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諸葛亮은 司馬懿를 激怒하게 만들기 爲해 女人들이 使用하는 頭巾과 머리裝飾을 보냈으나 司馬懿는 諸葛亮의 計略에 넘어가지 않았다.
「諸葛亮이 여러 차례 挑戰을 했으나 皇帝(司馬懿)가 나가지 않자, 皇帝에게 頭巾과 머리裝飾 等 婦人의 裝飾品을 보냈다. ······ 司馬懿는 오히려 蜀의 使者에게 孔明의 近況을 물었다. “孔明의 生活은 어떠하오? 하루 食事를 얼마나 하오?” “서너 되를 먹습니다.” 다음으로 業務 處理 狀況을 묻자 使者가 對答했다. “棍杖 20臺 以上의 罰은 直接 살피십니다.” 司馬懿가 周邊 사람들에게 말했다. “諸葛孔明이 어찌 오래 支撐할 수 있겠는가!”
(亮數挑戰, 帝不出, 因遺帝巾籃婦人之飾. ······ 先是, 亮使至, 帝問曰, 諸葛公起居何如, 食可幾米. 對曰, 三四升. 次問政事. 曰, 二十罰已上皆自省覽. 帝旣而告人曰, 諸葛孔明其能久乎.)」
이 이야기는 《晉書 宣帝紀》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食小事煩’의 槪念이 由來했다.
● 三國演義 第103回에.
「孔明이 몸소 軍士들을 이끌고 五丈原에 駐屯하여 數차례 軍士들을 시켜 挑戰을 했지만 魏나라 兵士들은 도무지 나오지를 않았다. 孔明은 頭巾과 婦人들의 衣服을 큰 箱子에 넣고 書信을 한 筒 써 魏나라의 城寨로 보냈다. ······ 司馬懿가 (蜀의 使者에게)물었다. “孔明의 寢食과 業務는 煩雜하오, 아니면 簡單하오?” 使資가 對答했다. “丞相은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을 주무십니다. 그리고 罰 20臺 以上은 直接 살피십니다. 먹는 것은 하루에 몇 되를 넘기지 않습니다.” 司馬懿가 諸將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諸葛孔明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煩多하니 어찌 오래 支撐할 수 있겠는가.” 使者가 五丈原으로 돌아와 孔明을 報告했다. “司馬懿는 頭巾과 女子 옷을 받고 書信을 보고도 決코 火내지 않고 丞相의 寢食과 일이 煩雜한지 簡單하지 與否를 물었으며, 決코 軍士에 代한 일은 묻지 않았습니다. 이 아무개는 이러저러하게 應對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먹는 것은 적고 일은 煩雜하니 어찌 오래가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孔明이 嘆息했다. “그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구나.”
(且說孔明自引一軍屯於五丈原, 累令人搦戰, 魏兵只不出. 孔明乃取巾籃幷婦人縞素之服, 盛於大盒之內, 修書一封, 遣人送至魏寨. ······ 懿問曰, 孔明寢食及事之煩簡若何. 使者曰, 丞相夙興夜寐, 罰二十以上皆親覽焉. 所啖之食, 日不過數升. 懿顧謂諸將曰, 孔明食少事煩, 其能久乎. 使者辭去, 回到五丈原, 見了孔明, 具說, 司馬懿受了巾籃女衣, 看了書札, 幷不嗔怒, 只問丞相寢食及事之煩簡, 絶不提起軍旅之事. 某如此應對, 彼言, 食少事煩, 豈能長久. 孔明嘆曰, 彼深知我也.)」
그 後, 諸葛亮은 身病이었던 結核이 도져 54勢의 나이로 五丈員에서 죽었다.
🍎 尸位素餐
(尸童의 자리에서 空짜 밥을 먹다. 벼슬아치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國祿을 받아먹는 것, 自己 能力이나 分數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앉아 하는 일 없이 놀고먹음을 比喩)
漢나라 때, 平陵 사람 朱雲은 큰 體軀에 豪宕한 性格을 가져 젊었을 때는 俠客들과 사귀었다. 朱雲은 40歲가 되던 해에 생각을 바꾸어 當時 博士였던 白子友에게 《周易》을 배웠고, 蕭望之에게 《論語》를 배웠다. 學問을 갖춘 朱雲은 當時 士大夫 階層의 높은 評價를 받게 되었다.
當時에 《周易》을 硏究하는 學者들이 몇 있었다. 元帝의 寵愛를 받던 臣下 五鹿充宗도 《周易》을 硏究했는데, 自身의 學問이 深奧하다 여기고 다른 사람을 눈에 두지 않았다. 그는 恒常 다른 사람들을 불러 討論을 했는데 儒學者들이 그를 當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五鹿充宗에게 朱雲을 薦據했다. 五鹿充宗은 朱雲을 招聘하여 論爭을 벌였다. 朱雲은 五鹿充宗의 물음에 모두 答辯을 하였지만, 五鹿充宗은 朱雲의 質問에 아무런 答을 하지 못하였다. 漢나라 元帝는 朱雲이 人才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博士로 招聘하였다. 그 後 朱雲은 杜陵과 槐陵 等의 縣令을 지냈다.
元帝가 죽고 成帝가 卽位하자 丞上 安昌侯(張禹)가 皇帝의 스승으로 特進을 하고 크게 尊重을 받았다. 朱雲은 上書를 올려 皇帝를 뵙기를 請했다. 朱雲은 皇帝를 謁見하게 되자 많은 臣下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只今 朝廷 大臣들은 위로는 君主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아래로는 百姓들에게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한 채 오로지 자리만을 지키며 俸祿만 縮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孔子가 말한 ‘鄙陋한 者와는 더불어 君主를 섬길 수 없다.’, ‘寵愛를 잃을까 두려워하면 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尙方斬馬劍을 下賜하시면 阿諂꾼 臣下 한 사람을 베어 그 나머지 무리를 懲戒하고자 합니다.”
(雲曰, 今朝廷大臣上不能匡主, 下亡以益民, 皆尸位素餐, 孔子所謂鄙夫不可與事君, 苟患失之亡所不至者也. 臣願賜尙方斬馬劍, 斷佞臣一人以厲其餘.)」
《 漢書 (朱雲傳)》에 나오는데, 朱雲이 皇帝에게 한 말에서 ‘尸位素餐’이 由來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折檻’도 由來했다.
朱雲이 引用한 孔子의 말은 《論語 陽貨》에 나오는데, 全文은 다음과 같다.
「孔子가 말했다. “鄙陋한 사람과 더불어 王을 섬길 수 있겠는가? 地位를 얻지 못하면 얻을 것을 근심하고, 地位를 얻으면 잃을까 봐 근심한다. 잃을까 봐 근심하면 못 하는 짓이 없다.”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尙方’은 尙方寶劍(尙方寶劍)으로, 王이 쓰던 寶劍을 말한다.
‘尸位’의 尸는 尸童을 말한다. 옛날 中國에서는 祖上의 祭祀를 지낼 때 같은 핏줄의 어린아이를 祖上의 神位에 앉혀 놓고 祭祀를 지냈는데, 이 아이를 尸童이라 한다. 尸童은 祭祀床에 차려진 飮食을 마음대로 먹으며 배를 불릴 수 있었는데, 祖上의 靈魂이 어린아이에게 接神하여 그 아이를 通해 먹고 마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尸位’는 그 尸童이 앉아 있는 자리를 말한다.
‘尸位’라는 말은 《書經 五子之歌》에서 있다.
「太康은 헛되이 王位에 올랐을 뿐, 安逸과 遊戱로 그 德을 무너뜨렸다.(太康尸位, 以逸豫, 滅厥德.)」
‘素餐’은 空짜 밥을 말하는데, 이는 《詩經 · 衛風 伐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 君子는 空밥은 먹지 않는구나.(彼君子兮, 不素餐兮.)」
‘尸位素餐’에 대해 王充은 《論衡 量知》에서 다음과 같이 定義를 내렸다.
「벼슬아치가 가슴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일러 ‘尸位素餐’이라 한다. ‘素’는 ‘空’이다. 헛되어 德도 없이 있으면서 祿俸이나 縮내고 있으니 ‘素餐’이라 한다. 道藝에 對한 能力도 없고, 政治에 參與하지 않으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朝廷에 머물며 일에 對한 말 한마디 못하니 尸童과 다를 바 없다. 그 때문에 ‘尸位’라고 한다.
(文吏空胸, 所謂尸位素餐者也. 素者空也. 空虛無德餐人祿, 故曰素餐. 無道藝之業, 不時政治, 默坐朝廷, 不能言事, 與尸無異, 故曰尸位.)」
🍎 識字憂患 , 识字忧患
(글字를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이 된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도 그만큼 많다는 말이다)
人生은 글字를 알면서 憂患이 始作되니
姓名이나 大綱 적을 수 있으면 그만둠이 좋도다
어찌하여 草書를 써 빠른 것을 자랑하여
펴 보고 놀라 근심하게 만드는가
나도 일찍이 좋아는 하였으나 每番 스스로 웃는다네.
그대도 이 病이 있으니 어찌 고치겠는가
이 속에 至極한 즐거움 있다고 스스로 말하여
氣分이 좋은 것이 悠悠自適함에 다름이 아니로다.
요즈음 지은 집을 醉墨堂이라 이름 하였으니
좋은 술 마셔 온갖 근심 사라지는 것과 같아
柳子의 말이 虛誕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
病들면 흙이나 숯이 山海珍味 같다는 것을
그대는 이 藝術에 뛰어나다 할 수 있나니
버린 붓 담장에 쌓은 것이 山처럼 많구나
興이 일어나 붓 한 番 흰 종이에 휘두르면
駿馬가 暫깐 사이에 九州 天下를 밟고 지나간 것 같아 나의 글씨 스스로 만들어 法度도 없어 마음대로 쓴 點과 劃을 번거롭게 퇴고(推敲)하고 다듬고 獨者的인 見解를 엉터리로 論하고 글씨 하나 종이 한 조각 모두를 거두어 두는가
鐘鰩와 張 아무개에 못지않은 그대는 스스로 滿足하지만 아래로는 羅 아무개와 趙 아무개보다 내가 나으리니
연못에 나가 애써 배울 必要는 없도다
글씨 쓸 緋緞 모두 가져다가 이불 속에 채우리라.
人生識字憂患始 姓名麤記可以休
何用草書誇神速 開卷惝怳令人愁
我嘗好之每自笑 君有此病何能瘳
自言其中有至樂 適意不異逍遙遊
近者作堂名醉墨 如飮美酒消百憂
乃知柳子語不妄 病嗜土炭如珍羞
君於此藝亦云至 堆牆敗筆如山丘
興來一揮百紙盡 駿馬倏忽踏九州
我書意造本無法 點畫信手煩推求
胡爲議論獨見假 隻字片紙皆藏收
不減鍾張君自足 下方羅趙我亦優
不須臨池更苦學 完取絹素充衾裯
蘇軾 (石蒼舒醉墨堂) 이 詩의 첫 句인 ‘人生은 글字를 알면서 憂患이 始作된다.’는 말에서 ‘識字憂患’이 由來했다. 鐘鰩는 書藝家이자 軍事 專門家로, 曹操가 袁紹와 官渡 戰鬪를 치를 때, 西北의 軍閥들을 說得하여 中立을 지키도록 만든 사람이다. ‘연못에 나가 애써 배울 必要는 없다.’는 말은 王羲之가 蓮못에 붓을 씻어 가며 글씨를 練習했다는 事實을 그 典故로 하고 있다.
어떤 資料에서는 ‘識字憂患’이 다음과 같이 《三國演義》에서 由來했다고 說明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劉備가 諸葛亮을 얻기 前에는 徐庶 (徐元直)가 軍師로 있었다. 曹操는 徐庶가 孝子라는 點과 徐庶의 어머니 衛夫人이 魏나라에 살고 있는 것을 利用해서 徐庶를 懷柔할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衛夫人은 아들을 불러오려 하지 않았다. 曹操는 謀士 程昱의 計策에 따라 衛夫人의 筆體를 흉내 내어 急히 魏나라로 돌아오라는 便紙를 徐庶에게 보냈다. 便紙를 본 徐庶는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衛夫人은 깜짝 놀라 까닭을 물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衛夫人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女子가 글字를 아는 게 근심거리를 부르는 原因이 되는구나.(女子識字憂患.)”」
徐庶와 그의 어머니에 對한 이야기는 《三國演義》의 第36回와 第37回에 나오는데, 徐庶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徐庶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스스로 목을 매어 自殺하고 만다. 徐庶의 어머니가 ‘識字憂患’이란 말을 했다는 事實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身言書判 , 身言书判
(風采와 言辯과 文章力과 判斷力. 선비가 지녀야 할 네 가지 美德을 말한다. 이는 元來 唐나라 때 官吏를 選拔하던 基準이었다)
「무릇 사람을 가리는 方法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身이니, 風采가 健壯한 것을 말한다. 둘째는 言이니, 言辭가 分明하고 바른 것을 말한다. 셋째는 書이니, 筆致가 힘이 있고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넷째는 判이니, 글의 理致가 뛰어난 것을 말한다. 이 네 가지를 다 갖추고 있으면 뽑을 만하다.
(凡擇人之法有四. 一曰身, 言體貌豊偉. 二曰言, 言言辭辯正. 三曰書, 言楷法遒美, 四曰判, 言文理優長. 四事皆可取.)」
● 新唐書 選擧志에.
🍎 神出鬼沒
(鬼神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다. 行動이 迅速하고 變化가 甚하여 豫測할 수 없는 것을 比喩)
「巧妙한 者의 움직임은 鬼神처럼 나타나고 鬼神처럼 다니며, 별이 빛나고 하늘이 運行하는 것 같아 進退 屈身의 兆朕도 나타나지 않고 限界도 없어 鸞새가 일어나듯, 麒麟이 떨치고 일어나듯, 鳳凰새가 날듯, 龍이 오르듯, 秋風과 같이 出發하여 놀란 龍과 같이 빠르다.
(善者之動也, 神出而鬼行, 星耀而玄逐, 進退詘伸, 不見朕掇, 鸞擧麟振, 鳳飛龍騰, 發如秋風, 疾如駭龍.)」
이 말은 《淮南子 兵略訓》에 나온다. 鬼神처럼 나타나고 鬼神처럼 다닌다는 말에서 ‘神出鬼沒’이 由來했는데, 行動 戰略을 巧妙하게 쓰고 用兵을 迅速하게 하여 敵에게 露出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 實事求是 , 实事求是
(實際에 根據하여 事實을 求하다. 事實에 討臺를 두고 眞理를 探求하는 態度, 또는 正確한 考證을 바탕으로 하는 科學的 · 客觀的인 態度를 말한다)
「孝景帝에게는 14名의 아들이 있었다. 王皇后가 孝武帝를 낳았으며, 栗姬는 臨江閔王 榮, 河間獻王 德, 臨江哀王 闕을 낳았고, 程嬉는 魯共王 餘, 江度易王 非, 膠西於王 端을 낳았다. 賈夫人은 趙敬肅王 彭祖, 中山靖王 勝을 낳았다. 唐姬는 長沙定王 發을 낳았고, 王夫人은 廣川惠王 越, 膠東康王 寄, 淸河哀王 乘, 常山憲王 舜을 낳았다.
河間獻王 德은 孝景帝 前 2年에 河間王에 封해졌는데, 學問 探求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날 冊을 좋아하며, 恒常 事實로부터 옳은 結論을 얻어 냈다. 따르는 百姓들은 좋은 冊을 얻으면 반드시 잘 筆寫를 해서 河間王에게 바치고 眞本은 남겨 두었다. 그러면 河間王은 財物을 내려 冊을 사들였다. 四方의 道術을 하는 사람들이 千 里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오거나, 或은 先祖들의 옛 冊을 가지고 있으면 獻王에게 바쳤으므로 獻王은 冊이 아주 많아 漢나라 等에 주기도 했다.
(孝景皇帝十四男. 王皇后生孝武皇帝. 栗姬生臨江閔王榮, 河間獻王德, 臨江哀王閼. 程姬生魯共王餘, 江都易王非, 膠西於王端. 賈夫人生趙敬肅王彭祖, 中山靖王勝. 唐姬生長沙定王發. 王夫人生廣川惠王越, 膠東康王寄, 淸河哀王乘, 常山憲王舜. 河間獻王德以孝景前二年立, 修學好古, 實事求是. 從民得善書, 必爲好寫與之, 留其眞, 加金帛賜以招之. 繇是四方道術之人不遠千里, 或有先祖舊書, 多奉以奏獻王者, 故得書多, 與漢朝等.)」
이 이야기는 《漢書 河間獻王傳》에 나오는데, 河間獻王 (劉德)의 學問하는 態度에서 ‘實事求是’가 由來했다. 劉德은 죽은 後에는 獻이라는 諡號를 받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河間獻王’이라 불렀다. 劉德은 古書를 蒐集하여 整理하기를 좋아하였다. 秦始皇의 焚書 以後 古書籍은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지 않은 冊들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오기도 하였다. 河間王이 學問을 좋아한다는 消息을 들은 많은 文人들은 先祖들이 물려준 秦나라 以前의 옛 冊들을 그에게 獻上하였으며, 一部 學者들은 河間王과 함께 硏究하고 整理하기도 하였다. 漢武帝가 卽位하자 劉德은 長安으로 올라와 여러 學者들과 古代의 學術에 對해 討論하고, 共同으로 學問을 硏究했다.
🍎 心腹之患
(가슴이나 배에 生긴 病. 쉽게 治療하기 어려운 疾病 또는 解決하기 어려운 근심이나 病廢를 比喩)
春秋時代에 吳나라 王 闔閭는 越나라 王 勾踐과 싸우다 입은 傷處가 도져 죽었다. 闔閭의 아들 夫差는 實力을 키워 越나라를 征伐함으로써 아버지의 怨恨을 갚았다. 싸움에 敗한 越王 勾踐은 夫差의 奴隸 노릇을 하다가 釋放되어 越나라에 돌아와 復讐의 칼을 갈았다. 當時 夫差는 覇者가 되기 爲해 齊나라를 攻擊하려고 했었는데, 勾踐이 軍士를 派遣하는 것은 勿論 自身도 吳王을 따라 從軍을 하겠다는 意思를 傳해 왔다. 吳王은 越나라의 禮物과 軍士만을 거두고 越王의 從軍은 辭讓했다. 當時의 狀況을 《左傳 哀公 11年》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心腹之患’이 由來했다.
「吳나라가 齊나라를 치려고 하자 越王이 軍士들을 거느리고 와서 謁見하고 祝賀를 올렸다. 그리고 王으로부터 모든 臣下에 이르기까지 膳物을 안겨 주었다. 吳나라 사람들은 모두들 기뻐하였지만 오직 伍子胥만은 不安해하여 말했다. “이는 吳나라를 害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吳王에게 諫言을 올렸다. “越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疾病과 같은 存在입니다. 땅이 서로 隣接해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服從하는 것은 齊나라를 치는 것을 도움으로써 우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일찌감치 滅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設令 齊나라를 쳐서 뜻을 이룬다 해도 자갈밭을 얻는 것과 같아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越나라가 亡하지 않으면 吳나라가 그 害를 입게 됩니다. 醫師에게 疾病을 없애라고 하면서 疾病을 남겨 두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吳將伐齊, 越子率其衆以朝焉. 王及列士, 皆有饋賂. 吳人皆喜, 惟子胥懼, 曰, 是豢吳也夫. 諫曰, 越在我, 心腹之疾也. 壤地同, 而有欲於我. 夫其柔服, 求齊其欲也. 不如早從事焉. 得志於齊, 猶獲石田也, 無所用之. 越不爲沼, 吳其泯矣. 使醫除疾, 而曰, 必遺類者, 未之有也.)」
夫差는 伍子胥의 諫言을 듣지 않았고, 結局 吳나라는 나중에 越나라에게 滅亡當하고 말았다.
‘心腹之患’은 心腹之疾이라고도 하는데 《後漢書 陳蕃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라 밖에 盜賊이 있는 것은 死地에 든 病과 같지만, 나라 안의 政治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가슴이나 배에 生긴 病과 같다.
(寇賊在外, 四支之疾, 內政不理, 心腹之疾也)
🍎 甚囂塵上 , 甚嚣尘上
(몹시 시끄럽고 먼지가 일어나다. 戰鬪 準備에 奔走한 兵營의 모습을 形容한 말로, 議論이나 輿論이 紛紛한 것을 比喩)
春秋時代 宋나라의 大夫 환원은 北方의 强國 晉나라와 南方의 强國 楚나라를 說得하여 두 나라가 盟約을 맺게 했다(BC579). 盟約의 主要 內容은 서로 侵犯하지 않고, 患亂이 있을 때엔 서로 도우며, 條約을 어기는 나라가 있으면 두 나라가 聯合하여 共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3年 後, 楚나라 共王이 鄭나라와 衛나라를 攻擊하면서 盟約은 깨어지고 말았다.
「이듬해인 BC575年, 晉의 厲公과 楚의 共王이 이끄는 兩國의 軍隊가 鄢陵에서 맞부딪쳤다. 楚共王은 巢車(望樓車)에 올라 晉나라 陣營을 바라보았다. 子重은 太宰 伯州犁에게 王의 뒤에 侍立하도록 했다. 共王이 물었다. “全軍이 左右로 奔走히 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伯州犁가 對答했다. “軍吏들을 부르러 다니는 것입니다. 모두 中軍으로 모였습니다.” “모여서 作戰을 짜고 있나? 帳幕을 쳤군.” 伯州犁가 말했다. “祖上에게 祭祀를 지내고 있습니다. 아, 帳幕을 거두고 있군요.” 王이 말했다. “곧 攻擊 命令을 내리겠구나. 甚히 시끄럽고 먼지가 일고 있군.” “부뚜막을 헐고 우물을 막고 陣營을 갖추었습니다.”
(六月, 晉楚遇於鄢陵. 楚子登巢車以望晉軍. 子重使大宰伯州犁侍於王後. 王曰, 騁而左右, 何也. 曰, 召軍吏也. 皆聚於中軍矣. 王曰, 合謀也, 張幕矣. 曰, 虔卜於先君也, 徹幕矣. 曰, 將發命也. 甚囂, 且塵上矣. 曰, 將塞井夷竈而爲行也.)」
楚共王과 伯州犁가 보았던 것과 같이 晉나라 軍隊는 秩序가 井然하고 士氣가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싸움이 始作되자 晉나라 軍隊는 怒濤와 같이 달려들어 楚나라 軍隊를 擊破했다. 이 싸움에서 楚나라의 共王은 눈에 화살을 맞고 敗走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左傳 成公 16年에 나오는데, 甚히 시끄럽고 먼지가 일고 있다는 楚나라의 共王의 말에서 ‘甚囂塵上’이 由來했다.
🍎 十目所視 , 十目所视
(열 사람이 지켜보는 바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기 때문에 숨길 수 없다는 말이다)
「이른바 뜻을 誠實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惡臭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며 美色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것을 일러 스스로 謙遜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君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 愼重해야 하는 것이다. 小人은 閑暇하게 있을 때면 善하지 못한 짓을 하여 이르지 않는 바가 없다가, 君子를 본 以後에야 슬그머니 그 善하지 못한 것을 감추고 善한 것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自己를 보기를 마치 肺나 肝을 뚫어 보듯이 하니, 그런즉 무슨 利益이 있겠는가? 이를 일러 안으로 誠實하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君子는 혼자 있을 때 愼重해야 하는 것이다. 曾子는 말했다. “열 사람의 눈이 보는 바요, 열 사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얼마나 嚴한가.” 富裕함은 집을 潤澤하게 하고 德은 몸을 潤澤하게 한다.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니, 그런 까닭에 君子는 반드시 그 뜻을 誠實히 해야 하는 것이다.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 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 小人閒居, 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後, 厭然揜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形於外. 故君子必愼其獨也.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必誠其意.)」
● 大學에.
朱子는 《大學章句》에서 이 句節에 對해서 다음과 같이 敷衍 說明했다.
비록 어둡고 혼자 있는 가운데라도 그 善함과 惡함은 이처럼 감출 수 없으니 두렵기 짝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言雖幽獨之中, 而其善惡之不可揜如此, 可畏之甚也.)
여기에서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便하니)몸도 불어난다는 뜻의 心廣體胖도 나왔다.
🍎 十步芳草
(열 걸음 안에 아름다운 꽃과 풀이 있다. 到處에 人才가 있다는 것을 比喩)
「열 걸음밖에 안 되는 작은 蓮못일지라도 반드시 香氣로운 풀이 있고, 열 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도 반드시 忠誠스러운 선비가 있다. 草木은 가을이 되면 죽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홀로 남아 있고, 물이 萬物을 뜨게 해도 玉과 돌은 남아 머물러 있다.
(十步之澤, 必有芳草, 十室之邑, 必有忠士. 草木秋死, 松柏獨在. 水浮萬物, 玉石留止.)」
● 說苑 談叢에.
「무릇 열 걸음의 짧은 거리에도 반드시 풀이 茂盛하고, 열 채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도 반드시 俊秀한 선비가 있다.
(夫十步之間, 必有茂草, 十室之邑, 必有俊士.)」
● 潛夫論 實貢에
「이제 宇宙가 하나로 統一되고, 文章과 軌範도 統一되었으니, 열 걸음 안에 반드시 香氣로운 풀이 있듯이 어찌 世上에 빼어난 人才가 없겠는가.
(方今宇宙平一, 文軌攸同, 十步之內, 必有芳草, 四海之中, 豈無奇秀.)」
● 隋書 煬帝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