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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추억] 안창 마을은 하나의 마을에 진구와 동구로 행정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 예전부터 이를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는 더욱 쉽지 않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학군은 같아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는 거의 대부분 같은 학교를 다녔다. 안창 마을의 학생들은 모두 범일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도 학교는 변함이 없어 자신의 자녀들도 모두 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한다. 졸업을 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기회를 유지할 만큼 돈독한 사이가 가능한 것도 어찌 보면 안창 마을 출신은 모두 선·후배로 이어져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미군들이 주는 우유 급식이 가장 즐거운 추억이라고 회상한다. 그는 다섯 되짜리 주전자에 우유를 받아와서 난롯불에 얹어 놓고 점심시간이면 그 우유와 함께 받은 빵을 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지 빙긋 웃는다. “옛날에 여 연못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는데...봄 되면 깨구리 소리 듣고... 태영택시 뒤에는 옛날에 전부다 논이었습니다. 밭이고...그래가 인자 벼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고, 우리 집 뒤에는 돼지들도 키았어요. 그래가 시장에서 짬통 그걸 가져와가 믹이고...” 예전에는 절이 많았다. 여기저기 굿도 많이 했다. 어디선가 징소리가 들리고 굿을 하는 것 같으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곳에는 돈이며 먹을 것이 가득했다. 잘 먹어보지 못하는 고기가 항상 있었다. 동생들을 데리고 가서 음식들을 먹였다. 산에 있는 대나무를 꺾어다 장에 팔기도 했다. 대나무를 가지고 구포에 가면 하나에 500원을 받았다. 추운 겨울에 500원을 벌기 위해 구포까지 대나무를 가지고 걸어갔다. 가끔은 연탄을 절까지 날라주고 돈을 받았다. 자그마한 어린 몸으로 연탄 지게를 메고 비탈길을 오르내렸다. 유년 시절을 회상하던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유년 시절은 이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먹을 것은 많지 않았고, 어린 나이지만 집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던 시절. 그저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논에서 뛰어 놀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간 추억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이씨의 집은 가게를 하면서 땅도 조금 가지고 있어서 마을에서는 여유가 있는 편이었는데도 유년 시절은 항상 배가 고픈 기억뿐이다. 철이 들어갈수록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이씨는 당시 약대가 ‘비율이 세고 공부도 잘하고 알아줬다’는 이유로 중학교까지 장래 희망이 약사였다고 한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던 현실은 이씨가 전혀 다른 길을 가도록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