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깊이
--이국형의 시세계
전 해 수
이국형의 시를 읽은 후 영화 『버닝』이 떠오른 것은 무슨 연유일까. 『버닝』은 기억의 파편이 불러일으키는 ‘관계’의 오해와 진실을 오고간다. ‘혜미’라는 여성은 이야기 전개의 중심부에 있는 인물이다. 종수와 벤이 여러 차례 주고받는 대화에서 등장하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는 중요한 모티프지만 실제로는 현현되지 않는다. 종수가 불태우는 벤의 자동차가 에필로그를 대신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버닝burning’을 기다리는 독자는 ‘버닝burning’이란 어떤 상징에 불과한 것인가 여기다가 이 뜻밖의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의 ‘버닝’을 확인하게 된다.
이국형의 시에서 어머니와 아내는 『버닝』의 등장인물 ‘혜미’와 교차되는 느낌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공통점 때문만이 아니라 촉발되는 사건의 대상인 ‘혜미’처럼 시인에게는 어머니나 아내가 있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시상(詩想)은 종종 어머니거나 아내로 출발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차츰 이들의 바깥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국형의 등단 시 「짐」은 아내의 자개장을 버리는 과정에서 시상이 펼쳐지지만 기억의 흔적들이 자개장에 새겨진 “해와 달, 산, 구름, 소나무, 거북, 사슴”의 시선으로 이동한다. 세월이 흘러 일부분이 낡아 떨어져나간 자개장의 문양들은 무용(無用)한 것이 아니라 오랜 결혼 생활에서 겪은 “불면의 밤”을 온전히 지켜본 ‘세월의 증인(證人)’들로 화(化)한다. 마치 영화『버닝』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고 수시로 떠올리면서 불태워진 비닐하우스의 흔적을 찾는 종수의 행동처럼, 시인에게 세월의 증인으로 강력한 믿음을 주는 대상이 자개장에 새겨진 “해와 달, 산, 구름, 소나무, 거북, 사슴”의 이미지인 것이다. 무릇 시「짐」에서 시인이 드러내고자 한 것은 세월의 무심함 속에 무능한 가장으로 지내 온 나의 아픈 심정을 아내와 함께 했던 인고의 시간 속 ‘자개장’을 통해 “닳고 닳”은 세월의 흔적이 이입되면서 이제는 그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담담한 시간과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신작시에서는 그러한 기억의 깊이가「풍경」으로 그려진다. “오후 세시에 열린” “회의실”의 모습은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의견으로 부딪히며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다가 이내 묵인되고 합의되는 회의의 과정이 현대사회의 신랄한 풍경으로 제시된다. 시인의 일상적 체험에서 비롯되었을 시 「풍경」은 회의의 과정이 밀착되어 드러나는데, 회의 소집을 알리는 신호로부터 시작하여 “생각이 많은 이”가 먼저 도착하는 순서에 이르기까지 은유적으로 묘사된 인간 군상들이 하나둘씩 모이는 과정을 추적하며, “사람들”의 특징을 분석하는가 하면, 회의 중에 이견(異見)이 “좌우로 튀다가/ 진보의 햇빛과 보수의 눈빛”으로 엇갈리며 교차되는 순간마저 집요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회의실의 ‘오후 세시’는 이처럼 활기차지만 열띤 논쟁이 오가는 치열한 시간이자 탈피하고 싶은 일상의 갑갑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낮의 뜨거운 욕망의 시간’으로 비친다.
그런데 오후 세시는 “별일 없었다고 수습”되는 결말의 지점까지를 모두 기억하는 ‘하루의 정점’이 일상의 시간이라는 (독자와의) 공유되는 감정으로 끌어올려진다. 시인이 제시한 분주하고 긴장된 오후 세시는 한편으로는 나른하고 지루한 한낮의 햇빛으로 달리 각인된다. 이 점은 영화『버닝』의 비닐하우스와 불타는 자동차의 낙차처럼 독자의 상상에서는 충돌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된 결말에 도달한다.
이국형 시인은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는 과거 시간을 은유하면서 특히 ‘현재’를 이루고 있는 유의미한 시간에게 더욱 예민한 촉수를 내민다. 이른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유인(誘因)되는 추억의 과거 시간은 현재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성찰의 단초로 작용하여 이국형 시의 특징을 띤다.
①
어머니의 낡은 사진첩에는 아버지 군대시절 사진이 있다 네 귀퉁이가 닳은 사진 속 아버지는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한껏 폼을 잡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귀퉁이에 흘려 쓴 ‘그대를 그리며…’라는 글귀는 아직 뜨겁다 아마도 동봉했던 편지는 ‘그리운 일순씨’로 시작했을 것이다 아버지 휴가 중 선을 보고 결혼한 어머니는 한 장의 사진이 생활의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이별은 기별 없이 오고 아픈 그리움이 자식 눈에 띌까 깊디깊은 당신의 가슴에 묻은 지 오래인데 아직 텃밭에 잔설이 여전한 오늘 아침 선산에 무슨 봄풀이 벌써 났을까 출근하는 큰 아들 어깨에 대고 혼잣말처럼 ‘산에 한 번 가봐야지 않겠냐’ 하신다 때 늦은 답장을 쓰시려는가 보다
-「그리운 일순 씨」전문
②
아버지는 늘그막에 농사일을 배웠다
아픈 어깨를 두고 농사 탓을 했지만 농사를 모르는 내 어깨가 아픈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진단은 틀렸었다
나는 석양의 목덜미가 물속으로 빠질 무렵이면 고향 저수지에서 낚시를 던졌다
반원을 그리던 별이 찌를 건드리면 잔물결이 일었다
먼 조상이 물고기 모양이었다고 했다
내 몸에는 비늘에서 미늘로 생존방식을 바꾼 이유가 남았을 것이다
다음 조상은 물고기 낚는 기술을 전했을 것이다
검은 산 그림자가 물에 떠서 흔들리다 말없이 물 아래로 내려가곤 했다
밤새 낚시를 들어 올렸다
미끼를 따먹고 달아나는 붕어가 쓰다가 밀쳐 둔 글줄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물에 뜬 별이 지워질 때까지 나는 낚시의 기억을 살려내지 못했다
내일은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는 날이다
-「낚시의 기억」부분
인용시①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시상(詩想)이 움튼 시이다. 「그리운 일순 씨」는 앞서 인용한 시「짐」과 함께 이국형 시인의 등단작인데, 그리움의 대상(아버지)이 그리워하는 대상(어머니)과 상호견인하며 ‘그리움’이라는 상대적이면서도 미완(未完)의 안타까운 사랑을 적시하며 드러낸다. 그런데 1연과 2연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출근하는 큰 아들”의 성장한 모습에서 젊은 아버지가 연상된 어머니는 “오늘 아침 선산에 무슨 봄풀이 벌써 났을까” “산에 한 번 가봐야지 않겠냐”는 돌연한 표현으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표출한다. 늘상 어머니의 언어는 그리움을 희석시키려는 마음과의 거리를 둔다.
인용시②「낚시의 기억」은 아버지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드러낸다.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는 날” “밤새 낚시를” 하는 화자의 심경이 과거의 아버지를 호명해내고 있다. “아버지는 늘그막에 농사일을 배웠다”는 첫 문장은 연(聯)을 이동하면서 다음의 문장 “아픈 어깨를 두고 농사 탓을 했지만 농사를 모르는 내 어깨가 아픈 것을 보면 아버지의 진단은 틀렸었다”로 성큼 나아가며, 연과 연 사이에 감정의 이동(간극)을 보인다. 독자의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면서 기억의 깊이를 성글게 드러내고 메워가는 이국형의 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 시간의 차이를 활용하여 시인의 내면에 깃든 기억의 깊이를 전개시켜 나아간다. 아버지의 서툰 농사일처럼 ‘나’는 늘 도시에서의 삶이 고되고, 몸(‘어깨’)이 아팠으며, 특히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는” 반복되는 힘겨운 노동의 나날에 지쳐 간다. 그럴 때면, 고향집에 내려와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도돌이표처럼 아버지의 모습과도 닮아가는 아들은 그렇게 고향집과 마주하며 과거의 아버지와 동일시되는 ‘나’의 모습을 대면(對面)한다.
거두어들인 기억이 스스로 익을 때까지
참아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동안거에 들 듯 입을 다문 채
목련은 몸을 열고 하얀 겨울이 스미도록 허락하고 있다
-「문득」부분
「그리운 일순 씨」와 「낚시의 기억」은 시인의 처마에 몸을 피하고 있는 ‘시간’의 저물녘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반면에 위의 시 「문득」은 겨울을 기억하는 ‘봄’의 시간을 주목하고 있다. 겨울이 존재하는 것은 봄을 알리는 전령사 ‘목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인은 늦은 김장을 하는 오후에 지난봄의 백목련을 떠올린다. 꽃샘추위에 떨어져 내린 목련의 잎들이 쏟아지던 마당에서 절인 배추로 겨울을 준비하며 “하얀 겨울의 흰 피를 가득 모으”는 목련의 꽃잎을 회상한다. 시인에게 “거두어들인 기억”이란 “참아내기” 어려운 겨울과 관련된다. 동안거에 김장김치가 익어갈 시간에 “문득” 떠오른 “백목련”은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겨울이 있기 전에 지나간 봄과 앞으로 다가 올 봄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면서 ‘무량한 시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후배와 내가 땅속줄기로 이어진 지 오래니만큼
염치없지만 부탁을 좀 해야겠네
철없는 이월 햇살이 여물다고해도 얼마나 여물 수 있겠는가
그 햇살에 더러 언 땅이 녹더라도 내 몸을 천천히 좀 밀어주게
겨우내 움츠렸다 줄기까지 마른지 오래지만
꽃을 피워내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남아
밀리는 그 끝이 아프고 아프다네
-「구절초가 구절초에게」부분
시인에게는 만물은 모두 생명력을 지닌 “구절초”(야생화)에 다름 아니다. “후배와 내가 땅 속 줄기로 이어진” 것처럼, 시「구절초가 구절초에게」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드러낸다. 구절초는 야생국화(들국화)를 이른다. 너나없이 귀한 생명력을 지닌 살아있는 것들은 구절초가 구절초에게 기대듯이 야생(野生)의 삶에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며, 서로의 기운으로, 언 땅을 녹여 천천히 제 몸을 밀어 올리는 세계 밖의 아름다운 생명들이다. 혼자 서 있기 어려운 고단한 현실을 되뇌며 후배에게 “땅 속 뿌리로 이어진” 몸을 서로 밀어 올리자고 선배(시인)가 먼저 손 내밀고 있는 것이다. 위 시는 세상과의 협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힘을 보태고자 하는 ‘협력’을 구하는 시이다.
셔츠를 입을 일이 없어진 나는 단춧구멍을 잘못 꿰었다
봄날 꽃 피는 순서도 아닌데 신경 쓸 일이 없다면서 단추를 받아준 자리를 만져봤다
목에서 배꼽 방향으로 세 번째 자리, 잘못 없이도 일상에서는 죄송한 두 번째 자리, 어긋나지 않도록 길들여진 자리, 넥타이를 잠시 넣었다가 민망하게 열려있는 자리
순댓국과 소주로 실없는 저녁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셔츠를 벗으면서 내 자리가 궁금했다
맘 놓고 풀지 못하는 배꼽에서 목 방향으로 여섯 번째 자리?
눈치 없는 누구든지 매달릴 수 있는 어중간한 자리?
계속 끼우다보면 잘못 끼운 것을 마지막으로 눈치 채는 첫 번째 자리?
매달린 팔자라고 불평하는 단추라도 만나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자리, 당신 아닌 다른 이를 만나면 틀어지는 모든 것이 내 몫이 되는 자리
낡은 셔츠의 단추에 길들여진 구멍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번째 혹은 맨 아래 자리」부분
시인은 퇴직을 했거나 퇴직을 경험해 본 중년의 시간을 건넜을 것이다. “누구랑 밥 먹을지 모르는 게 퇴직이다”는 말로 시작하는 위 시는 ‘퇴직이후’ 걷잡을 수 없는 소외감에 사로잡히는 외로운 중년 남성의 모습을 포착한다. 퇴직 이후 셔츠 입을 일이 없어진 ‘나’는 연말모임에 나가기 위해 오랜만에 셔츠를 입다가 단추를 잘못 끼우는 일에서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입은 셔츠 단추의 잘못 끼워진 ‘자리’는 마치 현재의 ‘내 자리’를 상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자리는 시인 스스로가 자처한 “맨 아래 자리” 혹은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자리로 규정되고 만다. 셔츠의 단추 구멍에 잘못 끼워진 ‘첫 번째’가 아닌 ‘첫 번째 자리’로 인식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그 자리는 잘못이 없어도 늘 죄송한 ‘두 번째 자리’이거나 ‘맨 아래 자리’인 것이다. 길들여진 가장들의 두 번째 자리는 누구든지 매달릴 수 있는 어중간한 자리여서 쉽사리 잘못 끼워진다. 그러므로 “틀어지는 모든 것이 내 몫이 되는” 이 자리는 허탈하고 난감한 ‘퇴직’의 자리가 된다. 그렇지만 단추를 받아준 그 자리는 여전히 필요한 ‘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위 시 「두 번째 혹은 맨 아래 자리」는 단추에 길들여진 ‘낡은 셔츠’같은 ‘나의 자리’를 뒤돌아보고 있다. 이국형 시인은 지난 시간에서 기억의 자리를 찾아나서는 시간여행자의 모습을 이번 신작시를 통해 보여준다. 특히 이국형 시인이 더듬는 기억의 깊이는 자기성찰의 태도를 지니면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 간의 간극을 발견하며 또한 반성과 함께 하고 있다. 이국형 시인의 시상(詩想)이 머무는 일상은 ‘맨 아래 자리’를 ‘맨 위 자리’로, 혹은 ‘두 번째 자리’를 ‘첫 번째 자리’로 이끄는, 따뜻한 시선과 시적 형상화로 시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끝)
전 해 수 :
문학평론가. 2005년 《문학선》으로 평론 등단.
평론집『목어와 낙타』(2013), 『비평의 시그널』(2018)이 있음.
현재 숭실대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