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방향성을 감지하는 나침반으로서의 시조
임영석 시인의 시조집 『입꼬리 방정식』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임영석 시인은 1985년 『현대시조』로 등단 이후 시집과 시조집, 시론집, 산문집 등 깊고 폭 넓은 문학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시조집은 정형의 율격과 안정된 시상을 담아 우리 문학의 적통을 오롯이 잇고 있는데 다양하고 섬세한 감각을 통해 전통과 현대가 교섭하며 창출하는 시 세계를 잘 보여준다.
■ 시인의 말
나의 어머니는 생전(生前),
의심에 의심을 더하면서도
알곡을 털고 난 뒤
빈껍데기를 까불러?
한 줌 낟알을 얻었다
하늘아!
할아버지로 너를 맞는 마음 꿈 같고
네가 자라 나의 시를 읽을 때
내 시도
빈껍데기 속의 낟알이고 싶다
2022년 5월
임영석
목차
시인의 말·05
제1부
점(點)·13
맹꽁이 소리·14
수첩·15
수륙도(水陸圖)·16
세월 앞에서·17
황태덕장에서·18
별을 보며·19
내가 가장 잘한 일·20
어느 날 문득 나도·22
맛·23
다짐·24
무반주 첼로 곡을 들으며·25
내 삶의 목록·26
유리창·28
빈자일등(貧者一燈)·29
세월을 걷어내면·30
살구나무와 새, 그리고·31?
제2부
서운암·35
입꼬리 방정식·36
천 살 먹은 아이·38
새소리를 듣다가·39
반송(返送)·40
악장(樂章)·42
촛불·44
비행기?소리·45
지하 1층, 지상 4층·46
탁발행(托鉢行)·47
해가 쓰는 해답들·48
내 마음이 가난하여·49
동방삭(東方朔) 설화·50
치악산 유람기·52
독버섯, 이라는 말·54
서로서로·55
제3부
슬픔이 빠지면 너무 싱겁다·59
명적(鳴鏑)·60
꽃이 펴도 문제다·61
가을 산에서·62
왜 자꾸만 슬플까·64
꿈의 이동 통로·65
하늘·66
종이학을 보며·67
입춘지절(立春之節)에·68
칼바람·69
혼맞이의 노래·70
백담계곡에 쌓인 돌은 탑인가 뿔인가·72
슬픔을 꺼내다·74
내 삶의 온도·76
제4부
새소리 한 묶음·81
성당 종탑을 보며·82
밤바다 풍경·83
낮달, 혹은 반달·84
이미 봄이 와 있는데·85
월하독백(月下獨白)·86
어느 산골 이야기·88
누에·89
7월, 부론강에서·90
화엄(華嚴)·91
달과 등대·92
숲에서·93
봄꽃·94
찰랑찰랑·95
시인의 산문·97
추천사
임영석의 시조는 자기 발화를 기본으로 삼은 것 같다. 즉, 자기 예언적 화두가 그것이다. 생은 일과적이나 다차원의 방정식처럼 질문과 물음표를 감추고 있다. 그러니 삶 혹은 시의 구도는 ‘탁발행’이다. 길가에 모여 있는 사물과 사람들에서 촉발된 내력들이 깊이와 모순과 착종(錯綜)을 가로지른다. ‘명적(鳴鏑)’으로 내부를 관통하거나, “당연히 있어야 할 턱을 턱! 버”린 ‘입꼬리’에 냉소와 풍문을 걸어둔다. 누군가 지나갔으나 언급되지 못했는데, 그건 또 사무친 것이어서 새삼 어루만져 보는 사연과 악기와 유리창에 비친 얼굴들이 있다.
언젠가, 어느 날 문득 만나게 될 예정된 미래는 생의 방향성을 감지하는 실존적 나침반 역할을 한다. ‘수첩’은 나비처럼 날개를 펴고, 가슴에 맺힌 기억들을 바람에 띄워 보낸다. 이때 저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빈 바랭이’에 넘나들고 있으니, ‘점(點)’과 ‘새소리’와 ‘황태’는 저쪽 세상을 예비하여 적어둔 바람의 문자이다. 그걸 신호하듯 꿰뚫고 날아오는 ‘명적’은 시와 외로움과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을 한꺼번에 과녁 삼는다. - 염창권(시인·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정형의 율격과 안정된 시상을 담아내기 적합한 시 양식이 시조이다. 그런 까닭에 낯섦과 아이러니, 긴장과 역설, 괴기와 파격의 언어가 주류를 이루는 산문화된 복합성의 시대에 시조의 미적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정형이라는 외적 강제성으로 인해 시조는 어렵고 또 재래적인 양식을 거듭한다는 부당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시조는 우리 문학의 적통을 오롯이 잇는 양식이며, 미래적 가능태를 풍부하게 품고 있는 장르이다. 임영석의 시조는 대상과의 불화와 갈등보다는 화해와 통합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주체와 대상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하고 섬세한 감각을 통해 어떻게 전통성과 현대성이 교섭하며 시 세계를 창출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이 시조집은 또 다른 잉태를 기다리는 미래적 가능태로 자리한다. - 김홍진(문학평론가·한남대학교 교수)
■ 시집 속의 시 한 편
저렇게 배 가르고 오장육부를 덜어내면
고달픈 지난 삶이 살결로 스며드는지
재갈을 입에 물고서 감은 눈을 또 감는다
죽음을 담보 삼아?수직으로 곧게 서서
하늘을 오르려는 의연한 저 질서는
만 겹의?꽃봉오리를 품에 품은?나무 같다
이 세상 어느 것이 목숨을 포기하고
뜨거운 삶의 호흡 냉기로 식혀내며
죽어서 살아가려는 외로움을 배울까
-「황태덕장에서」 전문
출판사 서평
하회탈 입꼬리는 방정맞기 그지없다
그 방정식은 희로애락이 만 갈래로 얽혀 있어
살 만큼 살아온 나도 풀지 못하는 문제다
어느 것은 촐싹대고 어느 것은 능글맞고
똥구멍에 털 나도록 울다가 웃었다가
가슴에 멍든 세월을 다 감추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놈이 그놈인데
고단한 삶의 말을 풀었다가 감는 것이
처녀가 애를 낳아도 말 못 하게 만든다
당연히 있어야 할 턱을 턱! 버리고도
억지로 웃게 하고 가슴을 쥐어짜니
하회탈 입꼬리 속엔 방정식이 너무 많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징 치고 장구 치고
별신굿을 해보지만, 산 넘고 강 건너온
풍문은 어쩌지 못해 입꼬리만 더 길어진다
-「입꼬리 방정식」 전문
생은 질문과 물음표를 감추고 있다. "하회탈 입꼬리" 속 "희로애락이 만 갈래로 얽혀 있어/풀지 못하는" 질문을 맞이한다. “자세히 바라보면 그놈이 그놈” 같은 사람들과 “하회탈 입꼬리 속”에 숨겨진 사람들의 표정은 물음표로, “그 문제를 풀기”엔 “입꼬리만 더 길어”진다. 시인이 살아온 인생이 그랬고 우리의 인생도 그러했을 것이다. 질문과 물음표로 가득한 세상을 하회탈의 입꼬리로 삶에 대한 느낌표를 찾았는지 또 다른 물음을 던져준다. 오랜 시간 관찰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시인만의 독특한 사물과의 대화법이다.
시조는 정형의 율격과 안정된 시상을 담아내기 적합한 시 양식이다. 산문화된 복합성의 시대에 시조의 미적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정형이라는 외적 강제성으로 인해 시조는 어렵고 또 재래적인 양식을 거듭한다는 부당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임영석 시인의 시조는 우리 문학의 적통을 오롯이 잇는 양식이며, 미래적 가능태를 희망으로 품고 있는 장르이다.
내 몸의 점들은 다 내 어머니의 글들이다
어머니가 글을 몰라 점자처럼 찍어놓고
평생을 어루만지며 읽으셨던 글이다
남들은 흉(凶)점이라 빼라고 말하지만
저승에 가 다시 만날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 점이 아니고서는 찾을 수가 없을 거다
내 나이 스물둘에 저승 가신 어머니가
이순(耳順)이 넘은 나를 단번에 찾으려면
이 점을 그대로 둬야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눈가에 찍힌 점과 등 뒤에 찍힌 네 점,
무엇을 말하려고 써놓았는지 모르지만
어머니 손끝 아니면 읽을 수 없는 글이다
-「점(點)」 전문
임영석 시인은 “시조라는 바다를 항해하다 보니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고립의 아픔도 겪었고, 어떻게든 살아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절명(絶命)의 순간을 겪으며” 나름의 길을 찾아간다고 「시인의 산문」에서 고백한다. 또한 그동안의 ‘시조 항해일지’를 담담하게 들려주는데 “시조라는 바다를 항해하며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는 위험을 잘 알고 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의 별빛들을 좌표로 삼으며 “부표처럼 시조집을 묶으며 점을 찍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세상의 무수한 ‘점(點)’과 ‘새소리’와 ‘살구나무’와 ‘별’과 ‘달’과 ‘황태’와 ‘맹꽁이’와 ‘슬픔’은 구만리 안갯속을 헤치며 노를 저어가는 ‘방정식’의 해답일 것이다
자료 정보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