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imes Table
More than halfway up the pass
Was a spring with a broken drinking glass,
And whether the farmer drank or not
His mare was sure to observe the spot
By cramping the wheel on a water bar,
Turning her forehead with a star,
And straining her ribs for a monster sigh;
To which the farmer would make reply,
"A sigh for every so many breath,
And for every so many sigh a death.
That's what I always tell my wife
Is the multiplication table of life."
The saying may be ever so true;
But it's just the kind of a thing that you
Nor I nor nobody else may say,
Unless our purpose is doing harm,
And then I know of no better way
To close a road, abandon a farm,
Reduce the births of the human race,
And bring back nature in people's place.
cramp : 경련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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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법(九九法)
고갯길 중턱을 조금 더 오르면
깨진 물잔 하나 있는 샘이 있었으니,
농부가 물을 마시건 마시지 않건
그의 암말은 샘 입구에서 바퀴를 멈추곤,
별 장식을 단 그녀의 이마를 돌리고,
늑골을 당기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농부는 이렇게 응답했다.
“그토록 많은 호흡마다 한숨이고,
그토록 많은 한숨마다 죽음이로다.
이게 바로 내가 늘 아내에게 말하는
인생의 구구법(九九法)이로다.”
그런 말은 언제나 진리일 것이나,
우리의 목적이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당신 또는 나 또는 다른 누구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건 도로를 폐쇄하고, 농장을 포기하고,
인류의 출산을 줄이고,
사람의 자리를 자연에 되돌려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말 아닌가 말이다.
-신재실 옮김-
단상(斷想): 삶의 종착역은 죽음이다. 삶은 죽음의 종착역에 이르는 고갯길의 연속이다. 길마다 가파르니, 쉬엄쉬엄 오를 수밖에 없다.
농부는 오늘도 마차에 짐을 싣고 고갯길을 오른다. 젊은이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고 이젠 늙은이들이 지키는 농촌의 고갯길이다. 중턱에 샘물이 하나 있다. 한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던 샘이었지만, 이젠 깨진 물잔 하나밖에 없다. 농경사회도 사양길이다.
샘물에 이르면 말은 습관대로 걸음을 멈춘다. 농부는 물을 마실 때도 있고 마시지 않을 때도 있지만, 말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니, 말 또한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말은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다. 한바탕 기지개를 켠다. 그리곤 깊은 한숨을 쉰다. 말 또한 힘든 삶에 나오느니 한숨뿐인가?
농부는, 아내의 한숨에 대꾸하던 것처럼, 똑같이 말에게 대꾸한다. “그토록 많은 호흡마다 한숨이고,/ 그토록 많은 한숨마다 죽음이로다./ 이게 인생의 구구법(九九法)이로다.” 고갯길을 오르는 거친 호흡은 다름 아닌 한숨이고, 늘어가는 한숨은 점점 죽음의 종착역으로 인도한다. 이게 “인생의 구구법”이다.
하지만 개인은 가도 인류는 남고, 농부는 사라져도 농촌은 남아야 하지 않을까? 죽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고 “도로를 폐쇄하고, 농장을 포기하고,/ 인류의 출산을 줄이고,/ 사람들의 자리를 자연에 되돌려주고” 만다면 인류와 문명도 영원히 자연에 묻혀버리고 말 것 아닌가?
내가 고갯길을 하나 넘고 나면 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고갯길을 넘을 것이니, 인류와 문명이 이어지는 것 아닌가? 비록 나의 죽음이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주자(走者)에게 인류와 문명의 바통을 넘겨주는 아주 의미 있는 삶이 아니겠는가? 죽음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 아닐까?
-신재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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