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시켜놓고 뭣이 어째?” 요미우리 사장에 호통친 JP (29)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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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지만 한·일 회담에서 거론되지 않았다. 1951년부터 65년까지 벌인 14년간의 회담에서 위안부는 단 한 번도 의제가 된 적이 없었다. 62년 11월 내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청구권 담판을 벌일 때도 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 문제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일본의 잘못을 덮어주자는 뜻도 아니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암묵적 분위기였다.
당시 위안부들은 참담한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인간 이하의 최저 나락에 빠졌다가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다. 온몸과 마음에 상처뿐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아직 3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젊었다. 처참한 고생을 겪은 뒤 겨우 고국에 돌아와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들의 과거사와 상처를 꺼내는 것은 2중·3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싫건 좋건 연결돼 있다. 일본 식민제국주의 치하의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치와 경제·사회·문화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21세기 지구촌에서 일본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일본은 역사의 아픔을 준 한국·중국 등 이웃 나라들을 이해하고 서로 공존·공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만 한다. 이제 살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은 몇 분 안 된다. 그분들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
“나라 팔아먹은 제2 이완용” 들끓는 캠퍼스에 들어간 JP (30)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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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1월 ‘김-오히라 메모’를 이끌어낸 후에도 한·일 회담 최종 타결까지 3년 가까이 산통을 겪어야 했다. 협상 자체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양국 내부에 수교(修交)를 반대하는 세력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64년 3월 20일 나는 공화당 의장 신분으로 다시 도쿄를 방문했다. 61년 한·일 회담 재개를 위해 이케다 총리와 비밀회담을 한 이래 일곱 번째 일본 방문이었다. 밤 9시가 넘어 하네다공항에 도착했는데 일본 사회당계 전학련(全學聯) 소속 학생 200여 명이 나타나 나의 방일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느라 시끄러웠다. 이튿날 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자민당 부총재, 23일 오히라 외상, 24일 이케다 총리를 각각 만나 4월 초에 양국 외무회담을 열어 회담을 마무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 인물 소사전: 오노 반보쿠(大野伴睦·1890~1964)
1960년대 자유민주당 부총재를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 정치인. 8개 파벌로 분열돼 있던 자민당을 통솔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건설·농림상 등을 지낸 고노 이치로(河野一郞) 중의원 의원과 함께 한·일 회담을 반대한 대표적 인사였지만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난 뒤 입장을 바꿨다. 62년 대규모 방한단을 이끌고 서울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한·일 수교 회담의 막후에서 결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 상황은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3월 24일 서울대 교정에선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학생 3000여 명이 모여 소위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벌였다. ‘굴욕적 한·일 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도쿄에 체류 중인 매국 정상배(政商輩)는 즉각 귀국하라’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학생들은 나에게 ‘나라 팔아먹는 제2의 이완용이다’라는 등 별의별 말을 다했다.
25일 오후 내가 묵고 있는 도쿄 힐튼호텔도 소란스러웠다. 일본 경시청 경찰들이 방으로 올라왔다. 조총련계 대학생 400여 명이 쳐들어와 “매국노는 물러가라”며 시위를 하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전했다. 경찰은 단도를 갖고 있는 놈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서울의 학생 데모를 지원하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학생 대표 20~30명을 뽑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들 중 한 학생이 자리에 앉자마자 일본말로 “매판자본을 들여다가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고 하는 교섭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다.
당장 그만두라”고 주장했다. 게이오(慶應)와 와세다(早稻田)대에 다니는 엘리트들이었지만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