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놓아버림」
나는 심리치료 전문가 겸 정신과 의사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의식 수준으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항복 기제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익히고 수백명의 가족, 친구, 환자들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 가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평화는 가장 높은 에너지의 단계이다. 평화 수준의 전형적인 특징은 욕망이 없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의지를 갖거나 애를 쓰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현실로 나타나기에 아무것도 원할 필요가 없다.
이 수준에서 마음에 품는 생각은 에너지가 매우 강력하며 신속하게 현실로 나타난다. 동시성 현상이 계속 이어지고 현실이 생겨나는 기반 자체를 목격하고 있어서 인과의 메커니즘과 우주의 내적 작동이 명백히 드러나 보인다.
이런 고도의 자각 상태는 자연발생적으로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데 계속 되풀이 되며 갈수록 오래 지속된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의 의도는 저절로 평화 상태를 영구화 하려는 쪽으로 기운다. 평화의 상태가 자리잡으면 평범한 인간적 고통을 겪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취약성이 생기는 기반 자체를 전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 내가 3년 반 동안 끊임없이 항복한 뒤 벌어진 일을 통해 알아보자.
당시 나는 성공한 전문직 남성으로서 정신분석과 수많은 양식의 요법도 거쳤으면서 왜 이렇게 많은 병을 안고 있는지가 의아했다. 영적인 삶에도 적극적이어서 매일 두 시간씩 명상을 했으며 자연식, 확언과 유체 이탈, 바디워크 요법 등도 체험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각종 질병에 따른 통증을 안고 있었다. 그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공적인 활동이 가능했을까? 그 답은 대단히 강력한 의지에 있었다. 진료 현장에서 환자와 가족이 겪는 고통은 끝이 없어 보였고, 깊은 연민으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다 보니 감정 억제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억제한 감정에서 오는 압력이 삶의 모든 면에서 커졌고 이로 인해 병이 다양해지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나는 감정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 감정 자체를 혐오한 나머지 감정 다루는 일에 큰 두려움을 겪는 기간도 있었다.
감정이란 여자나 예술가 타입에게나 어울리는 연약한 것이라는 남성 우월주의적인 발상까지 겹쳐 있었다. 놓아버림 기법에서 유일한 탈출법이 감정을 인정하고 느껴주는 것인데 몸 상태가 좋아지면서 놓아버림을 하기도 수월해졌다.
기법을 사용한지 며칠 만에 위장관 끝부분의 상태가 저절로 호전되어 수술이 취소되었고 몇 달이 지나면서 수년 내지 수십년간 존재했던 증상들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치며 감정 압박이 심해졌다.
출혈과 함께 게실염이 심각한 형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꼬박 4시간 동안 감각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끝에 출혈이 멈추고 게실염이 치유되었다. 나중에 몇 번 가볍게 재발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같은 식으로 다루면 결국에는 발작이 가라앉으면서 사라졌다.
요컨대 회복의 소망을 내려놓고 가슴속이 조이고 기침하는 육체적 감각을 그저 느끼며 관찰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앎의 경험이 생각을 대체했다. 앎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얻어진다. 앎은 우리가 알아보게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자 옻나무 알러지가 나았다는 앎이 있었다. 옻나무에 면역성이 있다는 앎이 있고 나서는 더 이상 옻나무를 만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람은 마음에 품은 것에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중년기 증후군 또한 신념체계였다. 이 신념 체계를 항복히니 손발이 찬 증상이 없어졌다. 위중하던 증상은 끝을 보았으므로 가벼운 질환 몇 가지에 의식적으로 손을 댔다. 비행기를 타며 오른쪽 귀가 막혀 심하게 아프곤 했는데 이를 바로잡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증상에 대한 모든 생각과 감정을 끊임없이 놓아 버렸고, 이때 처음으로 시각화를 사용했다. 한편 목 통증도 사라져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내면의 척추 지압사가 척추를 맞추어 주는 것 같았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정신 분석의 시절을 포함해 이전에 도달한 적이 없는 의식 수준에서 열하루 동안 계속해서 항복이 이어졌다.
에고가 생존하는 기반 자체와 관련이 있는 항복이었고 에고가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는 항복이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항복 과정은 끝이 없어 보였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떠올랐다.
의심하는 목적 자체가 방어기제임이 분명했다. 의심은 사라졌고 항복은 대단한 깊이로 계속되었다. 이전의 항복 과정으로 보아 계속 놓아버림만 하면 조만간 느낌이 바닥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춥고 비오는 일요일 오후의 어느날 레스토랑에 들어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데 별안간 세상이 기적적으로 변형되었다.
내면에서 깊은 정적과 평화를 느꼈고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대단한 느낌이었다. 시간을 넘어서는 경험이었고 사실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공간도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감정과 신념을 더욱 항복하면서 마침내 나는 마음과 감정, 몸이 아니라 이를 목격하고 경험하는 어떤 것이라고 자각했다. 모든 활동과 느낌과 생각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말 없는 자각 상태는 시간을 벗어난 평화의 차원임이 밝혀지고 이 자각이 동일시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세상이나 몸과 마음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모든 감정과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잠재력이 자연스럽게 움직임과 성장으로 나타나듯 각 사물이 그 내적 본질을 현실로 드러내고 있기에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진정한 큰 나는 보이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데 이전까지 자신을 한정된 육체와 동일시했다는 점이 이상하고 터무니 없어 보였다.
더 이상 분리된 자아의 느낌이 없었으며 나라는 대명사는 사라져 의미를 잃었다. 대신에 모든 것임을 자각했고 육체가 지상에 머무는 기간은 찰나처럼 보였다. 그 기간 동안 작은 자아에 눈이 가려진 탓에 나라는 것의 참모습은 시간을 초월해 있음을 잊고 있었다.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려고 실험삼아 생각 하나를 찰나 동안 품었더니 즉시 물질세게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버터나 커피를 생각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웨이터가 즉시 갖고 왔다. 아무 말도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과도 무언의 수준에서 의사 소통이 일어났다.
육체가 차를 몰고 가서 그날 저녁에 있었던 회의에 참석했다. 모든 사람의 살아있는 상태가 그들의 존재하는 상태로부터 보였고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것인 큰 나가 그들의 눈을 통해 보였다. 육체는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거는 등 평소처럼 행동했다.
육체는 마치 카르마적 태엽을 감아놓은 장난감이 자체의 모든 익숙한 패턴과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대화와 상호작용은 현상으로 목격되었을 뿐 지시를 받아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은 자아가 육체가 하는 행동의 창작자라는 믿음은 이상한 허영심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육체는 우주 전체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행동하는 행위자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마음이 일으키는 진동으로써 현상이 존재할 뿐이었고 마음은 분리된 존재나 분리된 현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인 상태 하나인 상태 뿐이었다. 모든 생명체를 통해 하나의 큰 나로 표출되고 있는 하나의 생명만이 존재했다. 그러고 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가 드러났다. 분리된 존재를 느끼기를 소망하는 생각이 존재하자 이 생각이 개별 인간으로 나타났으며 각 인간은 개별적인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어울리는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만물은 완벽하기에 소망하거나 창조할 것이 없었고 어떻게 되어야 할 것도 없었다. 존재가 생겨나는 존재하는 상태의 본질인 그것만이 있었다. 그 존재하는 상태가 존재가 생겨나는 근원이며 이상하기는 하지만 존재를 생기게 하는 원인은 아니다.
우주 만물은 인간의 마음을 포함한 다른 만물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처와 첨단 이론 물리학이 묘사했듯 우주의 본질은 3차원 입체 사진을 보여주는 홀로그램 같은 것이었다. 우주 만물은 인간의 마음을 포함한 다른 만물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홀로그램에서는 각 부분에 전체가 들어 있다. 그 결과 개별적인 마음은 전 우주를 반영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또 다른 차원에서 오는 주파수를 해석함으로써 구체적 현실을 수학적으로 구축하는데 그 다른 차원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패턴을 형성하는 최초 현실의 영역이다.
즉 뇌는 일종의 홀로그램으로 홀로그램적인 우주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산의 정상에 이르는 중요한 경로는 바로 놓아버림, 항복 기제를 통하는 것이다. 놓아버림은 주로 감정과 관계가 있으며 감정은 우리의 생각과 신념체계에 깊은 영향을 준다.
놓아버림 기제의 쉽고 빠른 접근법은 문제 이면의 감정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문제 이면의 감정을 완전히 항복하면 문제의 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감정을 놓아버리는 방법은 감정을 수정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놓아두고 바라보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면 감정을 빨리 통과할 수 있다. 감정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감정을 가지고 도덕을 따지지 않는다. 슬픈 감정에 완전히 항복해 10분에서 20분 쯤 지나면 감정이 줄어들어 없어진다. 그 후 감정이 멎어 있는 시간은 일정치 않지만 슬픔이 생길 때마다 저항하지 않으면 감정 이면의 에너지가 점점 사라지면서 슬픔이 바닥난다.
모든 부정적 감정은 공포가 형태를 달리한 것이다.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공포, 생존에 대한 공포, 앞날에 대한 공포 등이다. 감정을 포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감정의 진정한 의도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공포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공포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자체가 두려워하는 바를 현실로 나타나게 한다.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발생할 법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불러일으킬 감정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계속 감추고 그 많은 공포를 억재하려면 에너지가 온통 방어하는데 소모된다. 일단 자신의 내면에 그런 생각과 충동이 존재함을 인정하면 그림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
인식해 항복할 감정이 더 있을 경우 감정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우리 각자가 저장해 놓은 부정적 감정은 그 양에 한계가 있다. 감정을 놓아버리고 나면 미묘하고 가벼운 기분이 따라온다는 점에 주목하라. 항복이 일어날 때면 황홀경과 같은 경쾌한 느낌이 즉시 따르고 감정을 포기한 덕분에 원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내가 나의 재능과 능력을 얼마나 현실화할 수 있을지, 내가 얼마나 성공하거나 실패할지는 나의 생각이 결정하지만 그 생각의 방향은 결국 감정이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감정 하나를 놓아버리면 그 감정이 일으킨 수천, 수만 가지의 생각도 사라진다.
특정 신념 하나를 취소해 신념에 부여된 에너지를 물리칠 수도 있지만 생각 자체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보다 감정을 다루는 것이 훨씬 빠르다. 생각의 힘이 강력한 것은 진동 주파수가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에 에너지를 불어 넣을수록 생각 스스로 물리적 현실이 되어 나타나려는 힘이 강해진다.
놓아버림을 시작하면 우리는 감정을 갖는 것 자체를 두렵고 죄스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어떤 감정을 항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감정이 있으면 안된다는 죄책감이나 감정의 기저에 깔린 동정과 같은 보상도 모두 놓아버려야 한다.
의식적으로는 치유를 원한다고 믿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병이 주는 이득에 집착할 수도 있다. 여러 기간에 걸쳐 꾸준히 항복한 사람들은 사랑과 평화라는 궁극적 목표가 다른 것 전부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상태로 올라갈수록 더욱 이타적이 되고 의식이 성장하면서 사랑을 담아 타인에게 봉사하면 자동적으로 자신의 욕구도 충족된다.
봉사는 희생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모두가 이기는 상황에서 온다. 결국 자신의 욕구는 우주가 자연스럽게 충족시켜 준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모든 행위가 자동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된다. 놓아버림은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그 궁극적 효과는 강력하다.
때로는 건성으로 빠르고 가볍게 항복하기만 해도 삶에 중대한 변화가 오기도 한다. 이제 생각을 가지면 결과가 더 잘 나오고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이 성취한다. 부정성을 놓아버려 의심과 두려움과 억제가 없어진 덕에 의도가 강력해지고 한때는 불가능했던 꿈들이 이제는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우리가 살면서 기적을 겪는 것은 어떤 부정적 감정이 상위 감정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계속해서 항복하면 이런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나고 항복할수록 삶에 힘을 덜 들이게 된다. 무의식은 우리 스스로 가질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갖게 한다.
자신의 부정성과 이로 인한 왜소한 자기 이미지가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줄어들게 하고 남에게는 쉽게 흘러드는 풍요를 무의식 중에 거부한다. 죄책감이 쌓여 내가 나를 보는 관점이 좁고 한정되어 있다면 무의식은 그에 맞는 경제적 상황을 안겨준다.
나는 보잘 것 없고 존경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타인에게서 그에 맞는 반응을 끌어낸다. 모든 차원의 가난은 내면의 가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확언의 힘이 제약을 받는 것 또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확언에 정반대 되는 부정적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왜소한 측면을 초월하는 길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에고를 부족한 것으로 볼 뿐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항복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내적 왜소함과 낮은 자존감에서 자유롭고 항상 충분하고 넉넉할 것임을 알기에 내면에 안도감이 있다.
이는 자신의 힘을 얻는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공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해야 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일에 매여 있다. 내면의 한계를 내려놓으면 창조성과 재능 표출의 길이 완전히 새롭게 열린다.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지만 경제적 이유로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여성의 예를 들어보자.
그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은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감이 없는 탓에 남들 앞에서 연주하는 일은 드물었다.
내면의 한계를 가로막는 낮은 에너지의 감정 전체를 놓아 버리면서 이 여상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연주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음악 일을 직업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어떤 방면애서든 이런 부정적 감정을 포기하면 용기의 수준으로 올라가고 인식이 바뀌면서 목표를 저절로 상향 조정하게 된다.
용기의 수준에서도 이전과 똑같은 활동을 하고 있을 수 있지만 이제는 의무감이 아닌 즐기기 위해서 한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필요한 에너지도 훨씬 적고 사랑을 베푸는 능력이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는 기분 좋은 발견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심리 치료는 신경증 패턴의 개선, 즉 적응 잘하는 에고가 목적이지만 놓아버림은 모든 괴로움과 아픔의 근원인 에고 자체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다. 놓아 버리거나 항복하는 궁극적 목적은 전적인 자유다. 부정적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포기할 때 부정적 감정은 상위 감정으로 저절로 대체된다.
사랑하는 상태가 우리 내면의 본질이며 장애물을 없애면 사랑은 저절로 드러난다. 순진하게도 발전을 가로막는 생각과 부정적 신념을 진실이라고 여겼지만 이런 감정을 놓아버리면 사고방식이 '못해' 에서 '기쁘게 하겠다' 로 바뀌고 삶의 모든 면에서 가능성이 열린다.
사랑 에너지는 여건만 적절하면 육체를 치유하는 힘이 있을 정도로 감정 에너지 진동 가운대 가장 강력하다. 어떤 병들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치우되고, 나머지 병들은 의식 기법을 사용하면 대개 차도(差度)를 보인다.
항복했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해 격한 감정이 없음을 뜻한다. 그런 일이 생겨도 괜찮고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 일이 되든 안 되든, 병이 낫든 낫지 않든,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면, 정말로 항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부정적 감정이 생길 때마다 항복하겠다는 의도를 변함 없이 유지하라.
하루를 마칠 때면 그날 활동에서 남은 부정적 감정을 놓아버리는 시간을 가져라. '삶이 당신보다 더 잘 안다' 에서 마이클 싱어는 가슴 차크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막힘이 제거되고 에너지가 상승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우리의 목표는 이미 저장된 막힌 에너지 패턴인 삼스카라를 풀어내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인 샥티(Shakti:우주적 창조에너지), 기(氣), 혹은 영(靈)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언제나 해방되어 상승하고 싶어한다.
샥티(Shakti)는 시냇물과 같다. 다만 시냇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반대로 샥티는 위로 상승하려 한다. 감정이란 샥티가 분출하면서 갇혀 있던 에너지를 풀어줄 때 생긴다. 장애물이 제거되면 당신은 끊임없이 상승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할 일은 정화의 과정이 일어나도록 저항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 뿐이다. 그 대가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과 기쁨과 영감이다. 장애물을 모두 놓아 보내면 에너지는 당신을 더욱 더 높은 상태로 데려간다. 차크라란 'T자로 연결된 관' 과도 같다.
에너지가 들어오는 입구는 아래쪽에 있는데 에너지가 네 번째 차크라인 가슴을 돌파하고 나면 인간의 사랑보다 훨씬 높은 경지의 에너지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 지복감은 당신의 머리 위를 감돌고 당신은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이 아름다운 평화 속으로 돌아가 자리잡는다.
이것이 당신의 영적 가슴이 주는 선물이다. 삶의 모든 것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훨씬 더 높은 에너지 중추들이 있지만 가슴 중추의 수행을 마치지 못하면 그보다 높은 중추는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당신이 오랜 세월 모아 놓은 삼스카라를 쓸어내는 작업은 가슴이 한다.
따라서 가슴 차크라의 수행을 시작하려면 그것이 열리고 닫히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인 선택은 방출 아니면 억압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에너지를 가장 차원 높게 사용하는 방법은 전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너지의 전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영성의 핵심이다.
지금 당신 본인의 에너지 흐름은 삼스카라에 의해 낮은 에너지 중추들 속에 갇혀 있다. 그 에너지가 풀려나려 하면 당신은 그것을 다시 억누르거나 증기처럼 밖으로 분출되도록 내버려 둔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외적 방출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 에너지는 들어와 당신의 장애물 뒤에 쌓일 뿐이다. 에너지가 갇혀있게 하는 원인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꾸준히 놓아 보내면 당신은 마침내 영구적으로 중심 자리에 머무는 경지에 이른다. 이제 우리는 더 큰 덩어리들을 처리할 준비가 되었다.
놓아 보내다 보면 작은 덩어리들은 줄어들고 더 큰 덩어리들이 스스로 올라올 것이다. 매우 강렬한 꿈을 꾸기 시작할 수도 있고, 자동차를 운전히는 중 느닷없이 강렬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단지 샥티가 올라오려고 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럴 수 있도록 여유 공간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샥티가 이 네 번째 차크라의 위쪽 부위를 관통하여 흐르면 당신은 소위 신의 임재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성인들이 경험해 왔던 그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을 인간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에너지가 해방되고 나면 당신이 느끼는 것은 사랑과 기쁨과 열정 뿐이다. 이것들은 단지 상승하는 에너지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이 상승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감정과는 다르다. 감정은 가슴에서 방츨되어 당신을 그 진동 속으로 끌어들이지만 열정은 내부에서 위로 솟아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이 해방된 샥티다. 아무리 높이 도달해도 당신은 언제나 그보다 훨씬 더 높이 도달할 수 있다.
그 중추들 속으로 더 높이 올라가면 삶의 모든 것이 더욱 아름다워진다. 슬픔을 알지 못하면 행복도 누릴 수 없다는 말은 아직도 장애물이 막혀 있을 때의 삶이다. 장애물들이 놓여나면 당신은 갈수록 더 큰 행복감과 높아진 차원의 느낌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열리면 이재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 만큼 밀려오는 사랑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순간에는 일하러 가고 싶은 강렬한 열정이 당신을 침대에서 끌어내고 하루 종일 당신을 밀어붙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가장 높은 경지를 논하고 있다.
장애믈을 놓아 보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이 경지를 성취할 수 있다. 그저 막힌 것을 걷어내면 몇 시간이나 명상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깊은 명상 상태가 지연스레 찾아온다. 이재 당신은 외부 세계에서 느껴보기를 갈망했던 모든 것을 내면애서 경험하고 있다.
내부가 에너지 흐름으로 충만해지면 외부 삶도 평안해진다. 당신의 온 삶은 영적인 것이 되고 당신은 그 아름다운 에너지 흐름 속에서 이 여행의 매 순간을 즐기는 법을 배운다. 당신은 난생 처음으로 완전한 평화를 느낀다.
삶이 늘 두렵고 아픈 곳을 때리는 것만 같은 이유는 당신이 자신의 아픈 곳을 삶에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물이 제거되면 당신은 언제나 사랑을 느낀다. 에너지가 흐르고 있을 때 느껴지는 기분은 이와 같다.
삶이란 갈수록 커지는 긍정적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사랑과 황홀경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이 때 내면으로부터 솟아나 당신을 충전시키는 그 에너지의 흐름이 너무나 강력해서 당신은 삶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좀 제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그토록 만족스럽다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동기는 왜 생기는지가 궁금해질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사랑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하고, 열정은 창조하고 싶어한다. 당신의 모든 행위는 삶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고 당신의 온 생애는 봉사의 행위가 된다.
당신은 결과를 기대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다. 외부의 경험이 당신 내면에 그 어떤 호불호도 자극하지 않고 매 순간 그 자체로 온전하고 완전하다. 삶을 방해하던 민감한 장애물이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있을까?
이제 당신은 삶을 온전히 음미하며 온 가슴으로 삶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과 우리 모두가 바라는 전적인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