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 존엄사란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에
이르는 방법을 말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된다면
단식을 통해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단식 존엄사는
스스로의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 상태이거나
긴 질병의 고통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될 때
선택할 수 있다.
43살 때 나는 긴 단식을 했었다.
그때는 몸을 정화하기 위한 수행의 수단으로 했지만
단식 존엄사는 목숨을 끊기 위한 수단이다.
단식 존엄사도 나의 단식 과정과 다르지 않다.
나는 42일간의 예비단식과 21일간의 완전단식 기간을 정했다.
10kg 정도의 잡곡을 제분사에 가서 곱게 가루로 빻았다.
처음 21일간은 두 끼의 식사를
한웅큼 정도의 곡식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산에 올라가 산책을 했다.
두 번째 21일간은 한 끼의 식사로 줄였다.
점점 기력이 떨어져 얼마못가 쉬면서 걸어야 했다.
세 번째 21일간은 물과 소금만 먹으며 모든 음식을 끊었다.
완전단식 이틀째부터 나는 화장실 말고는 힘이 없어
밖에 나가 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날 때마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저 앉아야 했다.
3~4일 정도 지나니
소금도 물도 마시고 싶지 않아 모두 끊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단식을
해야만 하는지 외로움도 느껴졌다.
단식으로 잘못되어 죽을지라도 지나온 나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너무나 원했다.
21일은 3주이다.
처음 2주일간은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하루종일 먹을 것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꿈을 꾸듯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 상상만 했다. 처음에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순대와 같은 고기를 먹는 상상이 멈추질 않았다.
고기를 먹지 않은지가 거의 10년이 됐는데도
계속 고기가 땡겼다. 근육이 계속 빠지기 때문일까.
과거의 기억속 감정 때문일까.
단식이 계속되면 우리 몸은 지방을 먼저 태우고
마지막으로 근육을 끌어다 에너지로 쓴다.
콜라색 소변이 나오기도 했다.
하루종일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어서인지
등에 욕창같은 것이 생겨 진물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지나니 신기하게 등의 증상들이 말끔히 사라졌다.
방안에는 시계도 거울도 모두 없앴다.
캄캄하면 잠들고 해가 뜨면 눈떴다.
의식은 흐려지지 않고 또렷하기만 했다.
전생의 장면들이 몇 번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나니
육식이 사라지고 떡이 먹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떡 음식을 먹는 상상에 빠졌다.
상상속에서는 하루종일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다.
단식 중 단전호흡에 집중하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단식내내 나는 먹는 상상에만 빠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누워지내야만 했다.
이불을 두껍게 깔아도 살이 빠져서 등과 엉덩이
뼈가 바닥에 닿아 계속 아파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니
이번엔 신선한 과일만 먹고 싶어졌다.
그리고 단식 마지막 며칠을 남기고 갑자기
음식에 대한 모든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 가슴에서 평화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인간적인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에 대한 깊은 사랑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어쩌면 자연사의 경우 모든 임종직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와 같을 것이다.
병원에서 호홉기와 링게르 꽂고 각종 장치들을
몸에 달고 죽으면 이러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어렵다.
의학에선 아사 직전에 혈액에 수분이 부족하고
산소가 부족해지면 우리 뇌에서 모르핀과 같은 호르몬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내 몸이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모든 단식을 마쳤다.
내가 열흘 정도 더 단식을 이어 갔다면
나는 서서히 의식이 느려지고 잠드는 시간이 늘고
호홉과 맥박이 느려지며 육체와 에너지세상을 넘나들다가
조용히 그리고 평화롭게 아무런 고통도 없이 내 육체를 벗어났을 것이다.
자연사의 과정도 이와 같다.
임종직전에는 허기와 갈증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암으로 죽는 것도 자연사의 일종이다.
병원에서 암을 치료받다가 죽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나는 암은 진단도 치료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현대의 암치료는 죽지 않을 사람을 죽게 만들고 좀 더 살 수 있는
사람을 일찍 죽게 만든다.
예전의 노인들은 죽음이 다가오면 곡기를 끊고 사나흘에서
길게는 보름 정도 지나면 아무런 고통없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노인들의 경우 단식 존엄사를 선택해도
15일에서 30일이면 죽음에 이른다. 스스로 선택했다면
질병의 고통보다 편안히 육신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