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한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가 통계역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학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이었다. 빈에서 태어난 볼츠만은 1866년 빈 대학의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3) 밑에서 기체 운동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볼츠만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역마살'이 아주 강하게 낀 사람으로 기질상 어느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25세의 나이로 그라츠 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가 된 볼츠만은 그 뒤 그라츠(186973; 187679), 빈(187376; 18941900; 190206), 뮌헨(188993), 라이프치히(190002) 등 아주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학 및 물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렇게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볼츠만은 기체 운동론에 대한 자신의 연구만은 항상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볼츠만이 맥스웰의 기체 운동론을 처음으로 접한 증거는 1868년에 출판한 열평형에 관한 논문에서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맥스웰이 논의한 분자의 속도 분포에 관한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 오늘날 우리가 맥스웰-볼츠만 속도 분포함수이라고 부르는 식과 모든 통계역학의 계산에서 기본이 되는 '볼츠만 인수'를 얻어냈다.
맥스웰과 볼츠만은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가는 과정도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평형 상태의 분포 법칙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스웰의 작업을 더욱 확장시키려던 볼츠만은 수송 방정식(transport equation)으로 알려지게 되는 보다 일반적인 해법을 찾아나갔다. 우선 그는 열역학적 엔트로피를 분자 짜임새(configuration)의 통계적 분포와 연결시켜 엔트로피의 증가가 분자 수준의 무질서도 증가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열역학 제2법칙을 해석하는 것으로 '볼츠만의 최소 정리' 혹은 '볼츠만의 H-정리'로 알려지는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법칙을 역학의 법칙과 확률의 방법을 사용해서 유도해 낸 것이었다.
1872년 볼츠만은 기체 분자가 열 평형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체 내의 일반적인 수송 과정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기체 운동론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업적 중에 하나인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일반적인 수송 방정식으로부터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 계수를 계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볼츠만의 수송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해를 구하는 것은 특별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 볼츠만은 비평형 상태에서도 엔트로피의 정의를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볼츠만의 H-함수에 관한 논의도 전개했다. 1872년 논문에서는 H-함수는 E-함수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1890년대에 와서 E는 H로 표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리하여 비평형 상태에서 H-함수는 항상 감소한다는 볼츠만의 H-정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H-정리로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적인 처리가 어느 정도 해결한 듯이 보였으나, 1876년 빈 대학에서 볼츠만과 함께 연구하던 요제프 로슈미트(Joseph Loschmitt, 18211895)가 볼츠만의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슈미트는 가역적인 뉴턴 역학의 법칙으로는 비가역적인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유도해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뉴턴 역학으로 비가역적인 열역학 제2법칙을 유도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윌리엄 톰슨에 의해서도 지적된 사항이었다.
로슈미트의 반론에 대해 볼츠만은 처음에는 실제 세계 내에서 과정의 비가역성은 운동 방정식이나 분자 사이의 힘의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조건의 문제 때문에 야기된다고 대응했다. 로슈미트와의 논쟁을 통해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확률적인 것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논쟁 과정을 통해 1877년 볼츠만은 열역학 제 2법칙과 열 평형 상태에 관한 확률 계산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통계역학의 대체적인 골격을 완성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엔트로피와 확률 사이의 관계인 S=k log W라는 유명한 관계식에 해당되는 식을 확률 방법을 써서 유도했다. 여기서 W는 체계의 주어진 거시 상태에 상응하는 미시상태의 가능한 분자의 배열수이고, S는 엔트로피를 말하며, k는 볼츠만 상수이다.
1890년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 1912)는 삼체 문제를 다루는 현상 논문에서 일정한 전체 에너지를 갖고 유한한 부피 내에서 움직이도록 제한된 임의의 역학 체계는 종국적으로 특정한 초기 짜임새로 되돌아온다는 정리를 발표했다. 영원 회귀의 원리는 이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예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적도 있었다. 이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무한정 증가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초기 값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이 회귀 정리를 볼츠만의 통계역학에 적용할 경우 볼츠만의 H-정리는 항상 유효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1895년 12월 베를린의 젊은 수학자로서 당시 플랑크의 학생이었던 체를레모(Ernst Zerlemo, 18711953)는 이 회귀 정리를 이용하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역학 모형을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이 경험적으로 유효한 것이라면 결정론적인 역학적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를레모의 주장은 1896년 『물리학 연보』에 발표되었고, 이어 볼츠만과 체르레모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명한 것이지만, 제를레모는 그것을 열 이론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신의 H-정리에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완전히 조화될 수 있으며,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 평형 상태는 단일한 짜임새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가능한 짜임새의 집단이다. 특정한 초기 상태가 회귀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나타나는 하나의 요동으로서 이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하는 자신의 H-정리의 유효성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기체론 강론』(Vorlesungen ber Gastheorie)을 출판하면서 기체 운동 이론을 포함한 통계물리학의 일반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볼츠만의 통계 역학이 수용되는 과정은 현대 양자론이 등장하는 과정과 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새로운 복사이론을 제기하면서 볼츠만의 논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그 이후 과학자들 사이에서 볼츠만의 통계 역학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자의 실재를 부정하던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와 그의 추종자들은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원자론에 대해 계속 끈질기게 비판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볼츠만은 심각한 학문적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06년 여름 볼츠만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였으며 아드리아 해 북동부에 위치한 트리에스테 근처의 아름다운 두이노 만으로 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해 9월 5일 볼츠만은 갑자기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볼츠만이 자살한 실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룩한 평생의 업적이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계속 거부되는 고립감이 그로하여금 자살로까지 이르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볼츠만이 세상을 떠난 때를 전후에서 브라운 운동과 같은 요동 현상에 관한 분자 운동에 관한 비평형 통계 이론이 1905년 독일의 아인슈타인, 1906년 폴란드의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Marian von Smoluchowski, 18721917)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1908년 경 프랑스의 장 페랭(Jean Perrin, 18701942)은 브라운 운동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의 이론을 입증하는 실험을 하여 원자의 실재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와 아울러 1905년 이후 흑체복사 이론과 연관된 양자론이 점차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수용되어 갔으며, 핵 및 원자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등장했다. 이처럼 볼츠만의 사망을 전후해서 볼츠만이 이룩한 통계역학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