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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익숙하게 하는 말 중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들이 많습니다.
최근에, 어느 초신 자인데 성도님이 그 게시판에 글을 올려 주셨는데 제가 그 글을 읽고 이게 목회에 많은 생각을 제공한다 그래서 이걸 제가 프린트를 해 가지고 여러번 이제 읽고 또 밑줄도 끊고 그러면서 이 글을 읽었었습니다. 앞부분에 이거를 제가 좀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내용이 이렇습니다.
앞부분에 이거를 제가 좀 소개해 드리려고 하는데요. 내용이 이렇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교회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교회에서 결혼을 하고 집사님 장로님이신 시부모님 의견을 따라 개종도 하고 교회에서 결혼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라는 곳이 정말 불편하였고 교회의 언어나 분위기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사실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 아주 많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나 주변 지인들이 기도해 줄게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아 소위 말하는 것을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고 그 기도나 은혜라는 것은 그냥 그들의 입에 발린 말이구나고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시부모님들의 교회에서도 전도니, 통성 기도니, 은혜니, 복음이니 하는 것도 모두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었고 사람 모으기 같은 활동 같은 느낌도 많이 받아서 늘 교회의 예배 시간이 불편했고 어떻게든지 시부모님들 아니면 피해가고 싶은 순간들이었습니다.
교회 어른들이 목사님이나 서로를 정죄하는 모습도 많이 보이고 여러 팔을 이루어 서로를 하다가도 만나면 울면서 스로 중보 기도해 주시는 것을 보고 참 교회라는 것이 이중적이고 기도라는 주문으로 퉁칠 수 있는 곳은 아닌가!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그 시집 와 가지고 이제 개신교로 바꾸었더니 거부감만 막 계속 쌓이는 겁니다. 또 그 다음 한번 들어보십시오.
유산을 경험하여 울고 있는 저에게 한 교회 분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고난을 주시는 거예요. 기도하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하는 순간도 마음을 닿게 만들었습니다. 그죠 얼마나 마음이 아프니! 라고 물어주길 원했지만 고난을 이기는 것은 기도라고 말해 주는 것이 다 헛소리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늘 듣던 기도의 말이 라고 생각하고 귀를 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 이렇게 이제 부정적인 생각이 점점 쌓여 가다가 이제 이분이 결정적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그런 이제 계기가 있는데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다니던 교회 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그 제가 들어보니까 그냥 뭐 조금 시달린 정도가 아니고요. 이 아이가 얼마나 상처와 충격을 받았던지 그 일 때문에 1년 가까이 심리 치료를 받을 정도로 아이가 힘든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저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시부모님께도 결혼하고 처음으로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교회 안 다녀서 죄 받으면 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런 거 가지고 죄를 주시는 분이라면 믿어서 뭐 하겠냐고 모진 말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 일에, 남편 회사 일에 예수 믿으면 평강이 넘친다더니 평강은 무슨! 이런 말을 만나는 사람마다. 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 눈에서 밤마다. 고통의 눈물이 쏟아지는데 제 마음속에는 정말 화가 가득 차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3년간 나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가라고 하실까 봐 시댁도 잘 나가지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참 가슴 아픈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교회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난 지가 3년이 됐는데 대반전이 일어나는 내용이 그 다음부터 펼쳐지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첫째 딸이 저보고 “엄마! 내가 기도하고 싶은데 교회에 나가면 안 될까? 내가 기도하고 싶고 교회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교회는 무슨 교회에 교체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구만!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 그 말이 며칠이고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교회 교회 교회 그래서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딸 기도 한번 한다는데 뭐 하고 00에서 제일 유명한 교회가 어디냐고 누구에게 물었더니 00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하대요. 그래서 한번 가봤습니다.
아이 기다리는 동안 잠깐 기다리는 거지 뭐 하면서요.
저는 000 목사님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고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고,
교회에서 모든 단어가 불편했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 전 찬양 하나를 듣고 그 다음 찬양 하나를 더 듣는데 마치 막힌 하수구가 뚫리는 기분처럼 목에 있는 불편한 가시가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의 눈물이 몇 십분 동안 펑펑 쏟아졌습니다.
남편이 창피해 할 정도로 었으니까요.
얼마나 눈물이 나든지 내가 왜 울고 있지 하는데 정말 그 찬양 목사님의 말씀 마지막 축도 몸에 쏟아 부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로부터 이제 1년이 되어가네요.
전에 부정적으로 여겼던 기도해 줄게라고 했던 교회 다니던 친구들의 마음이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은 것과 같은 마음이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화면에 비춰지는 울고 계신 성도님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주님! 저 사람도 울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우는 마음일까요. 저 눈물에 함께 그저 계시기만 해 주세요. 저분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생각을 예배당에서 하고 주님도 그래 주시지 않을까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설교에서 말씀하셨던 주변 사람들도 모두 나를 위해 기도해 같은 느낌 저도 매주 받는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믿고 또 그 믿음이 저에게 힘을 줍니다.
1년 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찬양대의 찬양을 듣고 울고 하며 교회 분들이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고 예배는 사건이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예배드리고 펑펑 울고 돌아 나오는 길에 이렇게 내가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 정말 꼭 누군가 여기로 나를 불러준 기분이 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답니다.
제가 왜 이 글을 프린트해 가지고 여러 번 읽고 밑줄을 꺾고 그랬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익숙해서 하는 한마디 하나 우리는 익숙해서 뭐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그러면서 뒷다마 하는 그 하나에도 한 영혼이 실족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는 거 이게 저에게 무겁게 들렸기 때문이에요.
너무 쉽게 우리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 유산한 자매에게 아 하나님이 고난도 주시는 거예요. 우린 쉽게든지 그 말이지만 그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거 그니까 이런 것들이 저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프린트해 가지고 여러 번 반복에서 읽었는데 여러분 제가 그렇게 읽으면서 내린 결론이 뭔지 아십니까?
교회는 결국 영적인 공동체라는 겁니다. 교회는 결국 하나님이 일하셔야 상처도 치유를 받고 회복도 일어나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 그 어린 딸이 교회에서 왕따 당해 가지고 안 그래도 그 교회가 싫든 차에 세상에 그 1년 가까이 심리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딸이 상처받아 밤마다 울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울분이 쌓여가는 이 성도, 이 자매님을 어떤 사람이 어떤 인간이 그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겠냐고요!
아 그랬는데 여러분 단번에 그 목에 가시가 나오는 것 같은, 또 막힌 하수구가 뻥 뚫린 것 같은 그래서 몇 십 분을이 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그 진한 상처가 치유가 되게 하는 이 일을 도대체 누가 어느 인간이 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한번 그 잠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니까 그 3년 동안 마음에 쌓여 있던 그 뻥 뚫려 있는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면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 저는 창립 15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 모두가 외쳐야 될 구호가 있다면 다시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 미문의 구걸하는 그 장애인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서 본인 힘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성전 미문 구걸하며 생계를 연명하던 그 가련한 그 불쌍한 한 인생을 누가 그토록 기쁨이 넘치는 인생으로 바꾸어 줄 수 있겠냐고요!
사도행전 3장 8절에 보니까 뛰어서 그으며 그들과 함께 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가련한 한 인생이 너무너무 기뻐 춤을 추며 그렇게 행복해 겨워 기뻐 뛰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면서 10절에 보니까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을 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이런 관경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또 왜 오늘 교회 안에 이런 기쁨의 장면이 왜 잘 나타나지 않을까요. 결국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장애인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그 장애인에게 그렇게 기뻐 춤을 추게 만드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15주년을 맞은 오늘 00 우리 교회는 다시 회복해야 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을 제가 이런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오늘 본문으로 택했는데요. 오늘 본문은 이름이 베데스다 라고 하는이 베데스다는 이름을 가진 한 연못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그 베데스다는 연못 주변으로 이런저런 병을 가진 환자들이 막 원근 각처에서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에요. 왜 몰려 드느냐 하니까 아 소문이 들려지는 천사가 한 번씩 그 베데스다 연못을 이렇게 그냥 동하게 하면은 그때 제일 먼저 연못으로 뛰어드는 병자는 어떤 병이든지 다~ 낳는다 그러더라.
그 소문을 듣고 이제 실락 같은 희망을 가지고 병자들이 모여든 거예요. 막 여 모여들어 있는 배경이 오늘 본문인데요. 제가 이제 이 본문을 프린트해 가지고 들고 다니면서 여러 차례 읽으면서 계속 읽다가 보니까 아이 제 머릿속으로이 본문이 딱 두 그림으로 나뉘어지는 거예요.
한 그림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베데스다의 모습이고 또 다른 한 그림은 예수님이 계신 베데스다의 모습이더라고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의 모습은 어떤 상황입니까? 살벌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경쟁자에 그리고 모두가 다. 상처가 치유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서로서로가 같은 병을 앓고 있으니 참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위로해 줘야 되는데 하나도 없었을 거예요. 다! 적이에요. 다! 라이벌이에요.
저것들 때문에 내가 고침을 못 받는다. 그래서 울분이 쌓여가는 곳이에요. 여러분 참 이게 흥미로운 게요. 이 원문을 보면 베데스다는 이 이름 자체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이름은 자비의 집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린 베데스다는 무자비의 집이에요. 자비 없습니다.
나 살고 봐야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가요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때의 분위기가 어떠한가를 감지할 수 있는 구절 하나를 발견했는데 5절 6절 한번 보시겠습니까
거기 3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은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내가 낫고자 하느냐 그랬더니 이렇게 반응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은 그 병자 내면의 상태를 물으신 거예요. 네 마음이 어떠니 네가 낳기를 원하니 그랬더니 그 병자가 자기 내면의 상황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아 내가 낫기를 원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데 튀어나오는게 울분이에요. 이 병자의 대답 속에 지금 그 베데스다. 목가가 경쟁심에 지든 그리고 그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상처 이것이 무나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예수님 계시지 않는 베데스다. 못가의 풍경이에요.
여러분 오늘 교회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는 딱! 이 모습이에요. 교회가 살벌하게 짝이 없고 병원에 육신적인 연약함을 가진 분들이 받으 교회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런저런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오신 분들이 모여 있다. 보니까 그분들이 치유가 잘 안 되면은 교회만큼 복잡한 데가 없습니다.
세상에 그냥 양상이 복잡해요. 그래서 막 상처를 주고 받고 교회가 또 참 희한한 공동체데요. 교회는 상처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상처받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중에 여러분 누구에게 교회에서 상처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교회는 놀랍습니다. 이 중에서 교회에서 사람들한테 상처 받아본 적 인사 손들어 그러면 다 드실 거예요.
이 교회란 데가 참 희한한데 아닙니까? 여러분 베데스다가 이름은 자비의 집인데 예수님 계시지 않으면 무자비의 집 경쟁의 도가니! 이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의 상처를 양산하는 곳 그렇게 되는 것처럼 교회가 그래요.
뭐 얼마나 교회에서 상처를 많이 받는지 몰라요. 아까 그 편지 읽어 드렸던 자매님 보세요.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이제 창립 15주년을 맞은 오늘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베데스다가 무자비의 집이었지만 거기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대반전이 일어난 것처럼 이제 00 우리 교회 15주년을 맞이해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여러분 임 목사가 15년 동안 회를 이끌다 보니까 점점 점점 그 중요한 인물이 돼 가지고 제가 너무 중요한 인물이 돼 버렸다면 사표 내라 이런 건 말씀하지 말아 주시면 역할을 좀 줄여야 돼요.
제가 너무 중요하지 않도록 그 담니 목사가 너무 중요해지지 않도록 제 역할을 좀 줄이고 다락방을 진행하는데 그 순장님의 역할이 막 너무 강력하다. 그러면 순장님들이 좀 영향력을 줄이시고 장로님들 영향력을 좀 줄이시고 그렇게 뭐 제가 제일 많이 줄여야 될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교회 안에서의 행사는 영향력을 다 조금씩 조금씩 줄이고 그 대신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영향력을 행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베데스다를 만드는 꿈!
이게 15주년에 우리가 외쳐야 될 다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00 우리 교회가 이름만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지 무자비한 교회가 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베데스다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