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사진다워야 한다
사진 본질은 기록성이다. 그게 사진의 ‘밥’이다.
강운구
강운구 (姜運求. 1942~ ) 6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사진 장르를 개척해온 대표적 작가 姜運求(강운구.57). 그의 작업성격과 사람됨을 읽을 수 있는 실마리 하나가 대학 출강때 사진학도들에게 잊지않고 던지는 주문이다. 수강생들이 당혹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카메라는 어떤 기종을 사용하고, 현상, 인화나 트리밍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강의내용…. 강단에 선 사람들이나 학생 역시 그런 테크니컬한 쪽으로 훈련이 된 상황에서 ‘작가의 인문적 소양과 정서, 가치관이 앵글을 결정한다’는 강운구의 주문은 엉뚱하다. 하지만 그 주문은 작가적 신념과 관련이 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사진행위는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들을 위한 작업도 아니다. 따라서 자기가 사는 곳의 체질과 무관한 사진은 正體性(정체성)을 갖춘 작품이 못된다. 표현의 매체(카메라)와 방식은 서양의 것이지만,한국사진작가 작품에서 서양냄새가 난다면 것은 잘못이다.” 서울 광화문의 그의 사무실. 83년이후 사용해온 크지 않은 그 공간의 풍경도 매한가지다. 고대의 와당과 토기가 보이는가 하면, 여기저기 쌓아놓은 책에는 ‘삼국유사’(솔), 황동규의 시집 ‘風葬(풍장)’(문학과 지성사), 임우기의 문학평론집 ‘그늘에 대하여’(솔) 등도 보인다. 60년대 이론무장 첫 세대 강운구는 주명덕과 함께 사진사적 위상으로는 ‘60년대 중반 이론무장 첫세대’ 작가다. 주명덕과는 절친한 친구사이이기도 하다. “혼자서라면 10리길밖에 못갔을 길을 동료가 있어 30리까지 갈 수 있었다”고 서로 말한다. 두 사람은 ‘사진 道伴(도반)’이지만 걷는 길은 다르다. 구체적으로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제1세대이기도 하다. 포토저널리즘의 위력있는 매체였던 ‘라이프’‘룩’등이 미국에서 1930년대에 창간됐던 것과 유사하게 우리나라는 60년대 이후 현재까지가 전달매체로서의 포토저널리즘 이식-정착기에 해당한다. 사진가 육명심은 그를 가리켜 “포토저널리즘 정착기에 주체적인 시각에서 다큐사진을 자리매김하는 작업의 맨 앞줄에 서 있었던 작가”라고 평가한다. 강운구의 사진작가로서의 개인사 30년도 그런 평가와 일치한다. 경북 문경 태생. 경북대 영문과 졸업.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1966∼69). 중앙일보,동아일보 출판국사진부 근무(69∼75년). 해직기자 공백기를 거쳐 83년 프리랜서 선언. 월간 ‘샘이 깊은 물’에 잡지사상 최장기(11년)연재물로 기록될 다큐멘터리 ‘이 마을 이 식구’를 연재(84∼95년)하며 포토저널리즘 시도. ‘사진사·출판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대형사진집 ‘경주 남산’출간(87년 열화당). 잡지에 발표하는 사진작업에서 벗어나 개인전 ‘우연과 필연’개최(94년 학고재). 이 중 강운구의 고집스러움과 사진에 대한 헌신을 증언하는 것이 사진집 ‘경주 남산’이다. 그가 젊었을 적에 ‘알만큼 안다’고 자부해온 경주 남산이었지만 프리랜서를 선언한 83년 경이로움과 함께 재발견한 이 ‘신들의 고향’을 렌즈에 담으려는 착상을 했다. 상업적 이익과 무관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열화당대표 이기웅과 어렵지않게 의기투합, 1년안에 촬영을 마치기로 합의했다. 순조롭게 1년동안 촬영을 마치고 필름전체를 훑는 순간 강운구는 경악했고, 출판사에 필름을 넘길 수 없다는 최종 판단을 했다. “사진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이래도 모두들 내 사진 잘 찍었다고 말하지 않을건가’하는 우격다짐이 한눈에 보였고, 돌부처와 정면대결하려는 치기가 있었다. 고민끝에 필름을 넘길수 없다고 출판사에 통보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기웅사장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1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내겐 너무도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생각끝에 그가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라고 물었다. ‘내가 사진을 잘못 찍었다’고 겨우 대답했다.” 우여곡절 끝에 강운구의 ‘한소식 깨침을 얻은 사진’은 특급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편집으로 ‘문화적 사건’(문학평론가 故 김현의 표현)으로서의 사진집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경주 남산’은 강운구 작업의 곁가지다. 소설가 조세희는 이 사진집을 보고 “산소(창작자유)가 없었던 시기에 누구보다도 단단한 세계를 지켜낸 아름다운 영혼의 예술가”라고 강운구에게 헌사를 했다. 예를들어 강운구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4장이 연속사진을 이룬 ‘연탄배달부’를 보자. 강운구를 넘어서는 후배작가들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 때문에 그가 남긴 작업이 더욱 커보인다. 그렇다고 강운구의 작업에 빈틈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워커 에번스’라고 불릴 만하고, 강운구도 그런 표현에 만족해하는 눈치다. 그러나 그에게 비평의 메스가 들어가는 대목은 바로 이 지점이다. 막상 강운구는 덤덤하게 말한다. “나는 내 작업에 대해서는 확신범이다. 남의 평가에 상관하지 않는다.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는 지적을 하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작품세계를 바꾸고 싶지 않다. 흔히 전위작업을 한다는 사람들이 머리로 작업을 하지만, 나는 같은 것이라도 연륜에 따라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표현방식과 눈높이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趙祐奭기자>(98년 03월 19일) 모든 앙금 / 강운구 사진전 월간미술 / 이건수 편집장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기는 작가. 외국 사진 이론의 잣대를 걷어내고 우리의 시각언어로써 포토저널리즘과 작가주의적 앵글을 개척한 사진가 강운구. 최근 그의 초기작업 《내설악 너와집》 복간 작업을 구상하고 있는 그를 여름빛 스러지는 광화문 작업실에서 만났다. 흑백 다큐멘터리 사진 속에서 삶의 진실을 펼쳐놓는 강운구를 만나 그의 근황과 육성을 들어본다. 이것은 인간의 손인가, 짐승의 발인가, 아니면 신의 손인가. 화면 밖으로 울컥 자신의 이력을 숨기지 못하고 내놓는 손. 막걸리를 휘저을 때 가장 멋져보일 것 같은 손. 거친 낫질에 수없이 베어졌을 굵은 손가락. 너와집처럼 딱정으로 남은 손등. 깊은 주름과 뭉툭한 손톱의 때. 보이지 않는 한 모금의 담배연기로 위로받는 그 사내의 지친 영혼. 하나의 손이 이렇게 많은 얘기를 담고 있었던가. 용대리 조씨라는 산골 농부의 이 손 사진은 하나의 손 이미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깊은 고요와 침묵 속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본질을 감추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고, 예술작품은 이 존재의 본질적 목소리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는 하이데거의‘탈은폐성’ 개념을 떠오르게 만드는 한 장의 흑백사진. 우리가 이 손에서 느끼는 울림은, 하이데거가 반 고흐의<구두>에서 느낀 것 같은 이성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그런 깊이의 동일한 비장함이 아닐까. 그것은 사진으로만 가능한 빛깔과 질감의 내용이며, 만약 그것을 그림으로 모사했을 때는 느끼지 못할 사진 고유의 풍크툼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진의 정체성, 사물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렌즈의 치열한 시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 사진계의 대표적 지성. 한국 작가주의 사진가 1세대인 강운구는 지난 30여 년 동안 오직 세상의 모든 진실과 사물의 속뜻을 해석하기 위한 눈을 분주히 번뜩여왔다. 살롱사진 언저리에 머물던 사진풍토 속에서 다큐멘터리를 정착시키면서 렌즈의 기록성을 통한 사진적 진실성, 포토리얼리즘을 추구해왔다. 다큐멘터리의 보편성을 주목하고 소재주의를 부정하는 강운구의 사진 속에는 그래서 현실의 정확한 기록이면서도 따뜻함과 애틋함의 그 무언가가 서려있다. 이와 같은 작품의 고유색을 강운구는 “서정적 리얼리즘”이라고 말한다.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첫째가 사실적인 기록성, 둘째가 신속한 재현과 복제 가능성입니다. 매체로서의 가장 독특한 속성입니다. 회화에 있어서도 포토리얼리즘이니, 렌즈가 보는 눈을 이용한 작업이 늘어나고 있지만,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광학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내용적 리얼리즘의 본질인 겁니다. 살고 있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문학이나 그림은 과거나 미래를 그릴 수 있지만 사진은 현재만 그릴 수 있습니다. 현재를 맹목적으로 기록하기보다는 시대적 내용과 핵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회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번역하는 데에 비해 사진은 그것을 인용한다”는 존 버거의 말이나, ‘사진으로서의 예술’과 ‘예술로서의 사진’을 구별지은 발터 벤야민의 시도도 있듯이, 지금 우리의 이미지 제국에서는 회화와 사진의 정체성과 자리매김이 또 한 번 요구되고 있다. 게다가 디지털시대의 사진 테크놀러지는 과거의 사진 하면 떠오르는 은염사진의 틀을 벗어나 전통적인 사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영화라고도 할 수도 없는, 유령 같은 이미지의 망상들이 창조되고 출산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이때 과연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사진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강운구는 이 화두를 붙잡고 그의 길을 걸어왔다. 다소 완고함으로 비칠 수도 있는 그의 이런 외곬 인생은 뒤집어 말하면 자신의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에 대한 짙은 확신과 기나긴 고민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마다 뽐내는 사진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 피어 있습니다. 세상이 갈래가 더 많아져서 복잡해진 것처럼 사진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사진도 예술일까?’ 하고 아무도 수상쩍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는 아직도 쉽지 않습니다. 사진을 수용하는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진가들조차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만의 고유(사진)의 홈페이지를 쓰기보다는 별 고민 없이 남(회화)의 홈페이지를 빌려다가 쓰면서도 그것이 자기 자신인 줄로 잘못 알고 있는 사진가들은 없을까요?” 사진을 둘러싼 이런 경박함과 트랜드성, 비본질적인 요소를 벗어버리고 강운구는 사진 고유의 매체적·내용적 특성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인화지 위에 픽스된 것만이 사진입니까. 사진은 프린트 영상의 형태가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입니다. 사진만의 리얼리티·힘·정체성이 중요합니다. 장르의 벽이 허물어진 지금, 추상성의 회화와 사실성의 사진이라는 편을 가르고 남의 영역을 더 크게 보면서 서로 끌어쓰는 행위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사진의 본질은 기초적인 사진의 효용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진의 매체를 가지고 추상적인 회화를 하는 것 같은 작업을 통해 사진작가들이 대리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시작하려다 멈춘 것입니다. 때문에 그간 사진의 영역은 넓어졌으나 깊이는 얕아졌습니다. 사진이 아닌 예술로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추상적인 요소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본질적 주류가 건재하고 지류가 많아야 하는데 곁가지만 늘어난 겁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우리에게 만연해 있는 만드는 사진의 경향들, 그런 행위는 넓은 의미의 예술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큐멘터리와 사진의 진실성 강운구는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의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고 있는 우리의 황폐화된 국면들을 기록해왔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고발적인 외침이라기보다는 서정미가 가득한 조용한 속삭임들이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때문에 소설가 조세희는 “산소가 없었던 시기, 누구보다도 단란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지켜낸 아름다운 영혼의 예술가”라고 헌사하기까지 했다. 강운구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월간지 《샘이 깊은 물》의<이 마을 이 식구>(84~95년)라는 우리나라 잡지사상 가장 길었던 연재물에서일 것이다. 이 연재에서 그는 자신의 글과 사진을 통해 농촌의 삶을 기록하는 포토저널리즘의 전형을 이룩했다. 이후 그의 저널리즘적 작가성과 프로의식은 그의 작업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사진사적·출판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대형 사진집 《경주 남산》의 경우, 작업을 점검하다가 1년 동안의 촬영이 “돌부처와 정면대결을 시도한 치기로 가득한, 힘이 잔뜩 들어간 사진”임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폐기, 다시 4년 동안 새로 작업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우연 또는 필연의 ‘결정적 순간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강운구 작업의 실체를 읽어내기 위한 핵심적 텍스트는 《우연 또는 필연》일 것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산업사회화하는 농촌 풍경을 기록한 이 작업은 우리 민족의 삶의 원형으로서 농촌이 지닌 본래적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있다. 새재의 어느 초가와 그 집 앞에 선 무기력한 가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사진집은 수분리의 일하기 싫어 자빠진 소와 이 모습을 보고 난감해하는 농촌 부부의 에피소드를 비롯, 70년대 영화배우 찰스 브론슨의 패널사진을 팔고 있는 ‘찬손부르튼 손’의 코믹한 미소의 일치 등, 사라져갔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그때 그 시절이 담겨 있다. 황석영의 《객지》, 신경림의 《농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사진적 재창조로 평가받는 이 사진집은 그 탁월한 문학성으로 한 편의 단편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마지막<연탄배달부>시퀀스는 작가와 피사체 간의 관계의 우연적이고 또는 필연적일 수 있는 현실과 재현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1973년 서울의 한 골목길에서 검은 연탄재, 잘려나간 검은 손, 하얀 담배연기에 가려지는 그 남자의 검은 얼굴,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 위로 휘날리며 내리고 있는 흰눈의 대비를 통해 강운구는 뜨거운 몸짓으로 보통 사람들의 생활·노동·진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1994년에서 98년까지의 작업을 결산한 《모든 앙금》은 70년대에서 80년대 이후 방치된 농어촌의 폐가가 중심이다. 삶의 한 구석에 버려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들의 시신이 자아내는 ‘어려운 풍경’들이 역설적으로 눈길을 끈다. “시간의 앙금이 쌓여진 먼 훗날에는 텔레비전들이 이 시대의 고인돌이 될 것이다.”고 말하는 강운구는 이 땅 이 시대 사람들의 인류학적인 기념비를 우화적으로 남기고 있다. 어렵고 쉬운 풍경의 반어법 또한 우리 시대의 사회적·정신적 상황의 상징이다. 우리 것이 질식당해버린 현실 속에서 과연 현실의 기록인 사진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물어보고 있다. 그래서 이 사진집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알렉산더 대왕>의 수천년을 초월하는 라스트 신을 연상시키듯 물음표를 던져주고 끝을 맺는다. 한국사진의 자생성 강운구하면 동시에 거론해야 할 작가가 그의 영원한 도반(道伴) 주명덕이다. 이들은 이론무장세대로서 치열한 작가의식으로 인문학적 취향의 다각적 앵글을 시도했던 작가들이다. “주명덕이 감성과 직관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나는 이성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일종의 주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정적인 주명덕의 사진에서 차가운 느낌이 , 주지적인 강운구의 사진에서 뜨거운 느낌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존재를 향해 넓게보다는 깊게 삼투해 들어가려는 강운구의 애틋한 눈과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주명덕은 시야에 처음 들어오는 신선한 이미지, 언뜻 보이는 가시적 풍경의 영역을 포획한다. 한번 보고 전체를 카메라로 훑는다. 때문에 프레임 전체로부터 요소로, 바깥으로부터 가운데로 시선을 이동시키는 사진이 많다. 특히 최근 주명덕의 검은 풍경 사진들을 보면 그 작은 꽃들과 이파리들 사이의 어둠 속으로 우리의 시선이 빨려들어간다. 즉 우리가 그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사진이다. 반면에 강운구의 사진은 사진 내부의 요소 인자들의 주종관계가 하나의 시와 내러티브를 엮고 있으며 이들의 이야기가 화면 밖으로 흘러나가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강운구는 한 곳을 향해 심플하게 집중사격을 한다. 포획된 그 부분은 전체의 단순한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담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은 가운데 요소들에서 화면 밖의 전체로 옮겨지게 된다. 바꿔말해 주명덕의 사진이 연역적이라면 강운구의 사진은 귀납적이라고 해야 할까. 주명덕이 존재의 공간성을 추구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작가라면, 강운구는 세계의 변화과정, 즉 시간성을 추구하는 점오돈수(漸悟頓修)의 작가일 수도 있겠다. 과거 우리의 사진사는 서구의 이론에 곁눈질하고 그것을 의식하고 번안하는 역사였다. 그러나 최근 한국사진사와 한국사진작가론이 속속 등장하는 사진계를 강운구는 주시하고 있다. “서양작가나 서양사진사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 사진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전체의 문제로서 총체적인 사진사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옛 한국인이 사진 찍혔다고, 외국사람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우리의 얼굴을 찍었다고 그것이 한국사진사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수용당한 역사이지 주체적인 사진의 역사가 아닙니다. 주체적으로 사진을 찍고 다루게 된 것부터 진정한 사진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사진계의 첫 한글세대로서 강운구는 그의 독자적인 시선으로 잊혀진 우리의 구수한 감성, 후기 산업사회에서 소멸되어가는 우리의 참 정서를 되살려왔다. 결국 강운구로부터 외국사진 방법론에 주눅들지 않는 독립적인 사진이론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때 한국화의 자생성 문제가 회자되었듯이 외국사진이론의 우산을 벗고 우리 고유의 예술언어를 획득한, 한국사진의 자생성을 이룩한 작가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자기가 사는 곳의 체질과 무관한 사진은 정체성을 갖춘 작품이 못 됩니다. 작가는 자기가 사는 시대와 지역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이국적 풍경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중요합니다. 국제화란 말은 국제적 평준화를 의미할 뿐입니다. 사람·지역·온도·문화가 다 다릅니다. 이런 다양성을 무시하는 국제성은 폭력이며 허구입니다. 그것은 위험한 논리입니다. 여기 살면서 내가 가장 잘 알고 좋아하는, 그리고 좋아할 수 있는 사진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처럼 인류역사상 과거 30년이 빠르게 바뀌고 변질된 나라는 없을 겁니다. 30년 전의 현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도덕적·문화적 혼란으로 가득 차 있어요. 과정이 너무 짧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농경사회의 마지막까지 따라가 보자는 것이 나의 의도입니다. 우리 문화 예절의 모든 전통적인 것은 농경적인 것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요즘 강운구는 지난 70년대 중반 사람과 집과 마을의 관계를 고찰해본 최초의 사진집 《내설악 너와집》을 3부작 한 권으로 묶어서 복간하기 위해 분주하다. 또한 《삼국유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서, 천년 전 시간의 질감으로 광선의 때를 맞추느라 노력했던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고대적 시간의 돌 부처들이 반사하는 빛의 대서사시 《경주 남산》에 함께 이어지는<신라 왕릉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그의 심안(心眼)에 비친 우리 나라 원형의 풍경을 기대해본다. “모든 표현수단 중에서 사진만이 특정적이고 일시적인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매체적 자부심을 믿는 강운구. 그에 의해 벗겨질 천년의 앙금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감동으로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천년 전의 사물들에게 속삭일 것이다. “너는 죽어도 사진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너는 죽은 과거 속에 포착되지만,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또다른 천년의 시간 속에 열려 있을 것이다.” 사진가 강운구 인터뷰 | 사진칼럼 2004/04/18 12:49
솔직히 말해서 강운구 선생님 작업실로 향하는 나는 긴장되어 있었다. 대 선배 사진가를 취재하고 촬영하기란 그리 마음 편안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간에서 ‘어서와’하며 어깨를 두들겨주는 손길에 따뜻함과 평안함이 온몸에 퍼진다. 그의 따스한 마음이 내게 옮겨진 것일까. 광화문에 있는 스무 평쯤 되는 아파트를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작업실에 들어서자 암실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엌의 싱크대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는 전지 크기의 인화지가 들어갈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암실용 싱크대가 들어앉아 있었다. 블라인드를 완전히 닫으면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빛이 차단되어서, 말하자면 작업실 전체가 넓은 암실인 셈이다. 그리고 두 개의 방 가운데 하나는 라이트박스와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이고, 다른 하나는 서재이자 작품 보관실로 쓰이고 있었다. 수많은 필름과 서적, 자료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스피커며 앰프 등이 주인이 음악 감상을 즐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남은 공간에는 바로 얼마 전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이 기대어져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에 제법 많은 물건들이 놓여있지만, 모두가 자기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지럽지가 않다. 사무실 주인의 깔끔한 분위기만큼이나 단정한 실내 풍경이다. 며칠 전에 읽은 그의 책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사진들과, 간결하되 힘 있는 글이 나로 하여금 단숨에 읽게 만든 책이었다. 「시간의 빛」이 그 책이다. 대학교 때 이미 사진가 선생님, 「시간의 빛」 출판을 축하드려요. 선생님께서는 원래 영문학을 전공하셨지요? 그런데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나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사진작가야.
‘역사 서적, 그중에서도 우리 근·현대사 관련 서적을 두루 읽어라’. 교양을 넓히라는 막연한 권면이 아니어서 그는 리포트 제출도 요구한다.
‘19세기이후 20세기초까지의 서양사흐름을 파악하고, 우리 근대사 전개와 비교해 시대발전의 거리감을 확인해보라’는 식이다.
모두 지난해 신간이다. 그런가 하면 미술전시회 도록도 가지런해 그의 인문학적 소양을 말해준다. 그가 대단한 미술애호가라는 사실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본디 둘은 60년대 리얼리즘에서 출발했지만, 감성적으로 촉촉한 주명덕은 작업세계가 거듭 변화를 가져오는 스타일이라면, 원칙주의자 강운구는 다큐멘터리 장르 한길만을 지금까지 걷고 있다.
바로 이 시기에 강운구는 신문, 잡지일과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독자적인 다큐멘터리사진을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새로 찍으면 될 것이 아닌가”하는 관대한 대답에 용기를 낸 재촬영은 그로부터 무려 4년을 끌었다. 잘 찍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관조하듯 촬영한 작품들은 대형판형에 당시 출판사상 단행본 최고가(10만원)로 서점에 선보였다.
그의 본령인 다큐멘터리 사진을 검증하기 위해 개인전 당시 같이 나온 사진집 ‘우연과 필연’을 다시 보자. 사진집이 포괄하고 있는 시기인 60년대이후 80년대초까지는 개발독재의 강압적 분위기속에서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탈바꿈하고 있는 국면이다.
그가 다룬 소재는 산업사회 이행기의 모습도 상당수이지만, 무게의 중심추는 변화가 막 진행되고 있는 시골 여러 모습에 있다.
이는 상당부분 ‘문학적 이해방식’에 속하지만, 조세희는 강운구의 사진작업 기간이 황석영의 ‘객지’,신경림의 ‘農舞(농무)’,자신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이 창작된 시기와 일치한다면서, 강운구의 ‘사진 객지’‘사진 농무’이고 ‘사진 난쏘공’일 수 있다고 말했다.
70년대 밥벌이에 지친 가장의 모습이 마음저리게 다루어진 작품이다. 73년 서울의 한 골목길. 눈오는 날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가던 50대 남자가 잠시 쪼그려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한다. 광각으로 잡은이 사진에 바로 이어 작가는 망원렌즈로 바꿔 얼굴을 클로스업했다.
렌즈속의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고 깊게 담배 한모금을 빨아당기고 있다. 눈오는 날 담배연기는 낮게 깔린채 그의 얼굴을 덮는다. 순간 이 사내는 눈앞의 작가를 알아챘다. 이때 작가는 카메라를 거둔다.
“망원렌즈를 사용할때 손떨림에 주의하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허둥지둥 돌아와 암실작업을 하면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찍을 때 미처 보지 못했지만 둘째 컷에서 보이듯 그의 손가락마디가 뭉텅 잘려나간 사실을 그때 알았기 때문이다. 그 가장의 감추고 싶은 것을 찍었다는 사실에 내 가슴은 천근만근이 됐다.
”寫壇서 역량 가장 뛰어나 강운구는 역량면에서 寫壇(사단)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이다. 그를 비평한다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대상을 머리로 인식하지 않는 미덕, 삶 전체를 하나로 끌어안으려는 노력도 흔치않다.
워커 에번스(1903∼75)는 미국 현대사진이 시작되는 징검다리 작가. 포토저널리즘의 터전을 만든 대표적 작가이지만, 작품의 조형적인 공간구축과 시적인 감정이입이 탁월하다. 단순비교는 어려운 일이지만 강운구의 작품은 에번스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시적 분위기가 약하고 변화의 진폭도 거의 없다.
탄력이 덜하다는 지적이다. 본인은 자신의 컬러를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정의하지만, 그가 말하는 서정성이란 것이 상당부분 애매하다. 워커 에번스, 그 중에서도 초기 다큐멘터리 사진 한쪽면만을 추구한 한계도 있다.
학생인데도 일반인들과 함께 한 아마추어 사진 서클에 입회해서 활동했어. 그때는 지금처럼 프로페셔널이 있던 시대가 아니쟎아?
작품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다 아마추어였지.
인상사진을 하던 사진관의 사진가들만 프로페셔널이지.
우리나라 사진은 아마추어 사진으로 출발했어.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했지. 그때 나는 대학생으로서 사진작가들이 활동하는 서클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같이 전람회도 하고, 임응식 선생님께서 주도한 창작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돼서 전국 규모의 회원전 등에도 출품했거든. 그러니 명실 공히 사진작가지.
학교 다닐 때는 취미로 했던 거지만 재미가 있고, 이걸로 밥벌이를 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졸업할 때 마침 조선일보에서 견습기자를
사진가 강운구(69), 언제 봐도 깔끔하다. 20년 가까이 관찰해왔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한 여름에도 면 재킷까지 갖춰 입는다. 넥타이 없는 셔츠의 목 단추는 항상 단정하게 여며 있다. 또 다른 포인트는 청바지. 잔주름 하나 없이 가운데 살짝 줄이 서있다. 여기에 중절모까지 걸치면 완벽주의자 강운구 이미지가 완성된다. 누가 봐도 견고하다. 장정 서넛이 달려들어 민다 해도 꿈쩍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실은 다큐멘터리에 충실한 사진세계, 발군의 산문 솜씨 등 3박자가 그렇다. 그게 강운구다.
최근 그는 모종의 존재감을 더해가고 있다. 해당 장르의 좌장 급이 풍기는 어떤 분위기다. 이를 테면 단장(短杖) 짚은 노신사 서세옥(81·서울대 명예교수)선생이 예전 화랑가를 나들이할 때 잠시 보여주던 권위 혹은 무게 말이다. 모든 게 휙휙 바뀌는 요즘인지라 그 자체로 귀한데, 강운구의 새 책 『강운구 사진론』(열화당)이 그렇다. 사람을 닮아 깐깐한 사진철학으로 가득하다. 한마디로 한국사진의 원점(原點)이자, 기준을 제시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훗날에도 사람들은 “2000년대 초입에 출현한 그 책”할 것이다.
강운구는‘결정적 순간’으로 유명한 카르티에 브레송, 묵직한 휴머니즘을 전하는 유진 스미스를 합친 무게다. “요즘 세상에 다큐멘터리라니”하며 심드렁할 수도 있다. 찍는(take) 사진보다 만드는(make)사진으로 유행이 바뀐 지 오래이지만, 그럴수록 강운구가 커 보인다. 역설이다. 10여 년 전엔 낡은 듯했지만, 시간의 먼지가 가라앉은 지금 『강운구 사진론』은 ‘견고한 중심’으로 늠름하다. 책 뒤 강용석·박주석·정주하·최건수 등 50대 후배들이 강운구를 앞에 두고 벌인 팽팽한 토론은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그렇다고 미동할 그가 아니다. 외려 거꾸로다.
주로 유학파인 젊은 세대는 “사진은 사진다워야 한다”고 선포한 강운구 앞에서 떼쓰고 부딪치며 넘어서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는 말한다. “사진 본질은 기록성이다. 그게 사진의 ‘밥’이다.” 그가 보기에 사진에는 피사체를 묘사하는 기능과 작가 내면을 담는 표현능력 등 두 길이 있지만, 다큐멘터리야말로 사진의 기본이다. 그래서 ‘밥’인데, 외국에서 뭘 좀 배워왔다고 우르르 사진의 패션 쪽에 줄 서지 말고, 이 땅에서 사진하는 자세에 충실하라는 조언이다. 집요한 강운구, 고집쟁이 강운구는 옛 원로 고(故) 임응식(1912~2001)을 연상시킨다.
실은 잘 닦인 외모까지 흡사하다. 임응식은 예술사진 합네 하며 몽롱하던 1950년대에‘생활주의 사진’을 제창했던 원로다. 그 리얼리즘의 깃발을 강운구가 이어 받아 세련되게 다듬었다. 그래서 『강운구 사진론』은 보석인데, 그 같은 왕고집, 확신범 철학자가 문화의 각 장르마다 한 명씩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사진계에는 야구 모자가 썩 잘 어울리는 아방가르드 황규태(72), 헐렁한 옷차림을 즐기는 자유주의자 주명덕(70)도 있다. 셋은 스타일만큼 작품 방향이 확 갈라지는데,‘사진 트로이카’는 우리 사진의 밑천이다. 게다가 부지런도하니 사진하는 후배들이 긴장할 일이다.
조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