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막:
최후의 막
누군가 불타는 건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 안에 갇힌 아이를 구하는 장면이 있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소방관들도 모든 특수 장비를 갖춘다 해도 극도의 열 속에선 몇 분밖에 버티지 못한다. 누구도 불을 견디지 못한다. 촛불 위에 손가락을 몇 초만 올려놓기만 해봐도 당신은 다시는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는 불이 우리를 상하게 할 걱정을 안 해도 된다면 좋지 않겠는가? 이제 지구의 마지막 영화에서 불에 대한 놀라운 진실을 볼 시간이다.
천국은 불의 장소이다. 하나님 자신이 소멸하는 불이시다 (히브리서 12:29). 그분의 천사들은 “불꽃의 사역자들”이다 (히브리서 1:7). 불에 섞인 유리바다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빛난다 (계시록 15:2). 의인들이 그 바닷가에 서있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의 보좌는 불꽃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니엘 7:9). 이 모든 것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염원하는 자들이 불을 견딜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인기 있는 교리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겁주려고 그분 자신을 불로 나타내 보이시진 않으신다. 솔로몬의 노래(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불꽃같은 임재에 대한 통찰을 준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무덤)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 8:6, 7).
성경에서의 불은 사랑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분의 임재가 불로 묘사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면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타오르는 정열”과 같은 말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그와 같이 모든 사람 하나하나가 죽음보다 생명을 택하길 바라는 불꽃같은 정열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의 불꽃같은 임재는 그들에게 환영 받았다. 그들은 그분의 임재 속에 있으면서도 불에 의해 멸망 받지 않았다. 그들은 완전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한 때 그들을 향해 불타오르는 사랑을 나타냈던 불꽃같은 임재는 이제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다 (창세기 3:8).
그리고 그 후로부터, 하나님의 불꽃같은 임재는 우리가 도망쳐야만 할 것 같은 것으로 잘못 해석되어왔다. 우리가 얘기해왔던 GPS인 구원의 계획은 사람들을 다시금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이끌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청사진은 인류를 완전하게 만들어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 앞에 서고도 소멸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소의 각 기물들은 사람에 불을 붙여서 하나님의 불꽃같은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기를 준비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번제단은 (출애굽기 30:28) 자기희생적 사랑의 불을 인간의 마음에 놓기 위해 만들어졌다. 물두멍은 물에 의한 침례를 상징했을 뿐 아니라, 침례요한이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침례를 줄 것을 상징했다 (마태복음 3:11). 구워진 진설병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뼈에 사무친 타오르는 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예레미야 20:9). 기도를 상징하며 연기가 피어 오르는 분향단은 (출애굽기 30:1) 마음속에 하늘 아버지와 소통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곱-가지 촛대는 (마태복음 5:14) 그분의 증인으로써 불꽃같은 열정을 밝히도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언약궤 안에 있던 율법은 의(righteousness)의 불을 우리의 삶 속에 지피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다 (신명기 33:2).
이 모든 것들은 지성소에서 보여졌던 셰키나 영광으로 상징된 불꽃같은 하나님의 임재, 그분의 보좌 앞에 들어가도록 우릴 준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길에 있던 각 기물들은 한 개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재창조되어 그분의 불꽃같은 임재를 견딜 수 있게끔 불을 더해주기 위한 것들이었다.
청사진의 패턴을 따라온 의인들은 이제 불을 견딜 수 있다.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불을 견딜 수도 없을뿐더러 거룩한 불의 도성에 들어갈 준비도 되지 않았다.
모세의 경험은 출애굽기 3장에서 이를 잘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세에게 보이셨을 때, 그분은 불타고 있지만 소멸되지 않은 나무로 나타나셨다. 모세가 봤던 것은 구원의 계획의 이상적인 비유였다.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서고도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이 이상은 또한 느부갓네살이 만든 우상에 절하기를 거절한 세 히브리인의 이야기에서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니엘 3장을 보라). 거절하는 모든 자들에게 사형 명령이 내려졌다. 참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하기를 거절했고 타오르는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다. 성경은 신비롭게 “인자(사람의 아들)”가 불 가운데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설명하고, 그들은 소멸되지 않았다 (25절). 반면, 그들을 불에 던졌던 사람은 그 불의 열기만으로 죽게 되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은 불은 다른 부류를 멸망시켰다. 같은 방식으로 마지막 시대의 바벨론이 세운 우상에 절하기를 거절한 자들은 또한 불에 타지 않음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이상은 우리를 그분의 임재 속에서 영원히 살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는 그분이 우리를 불에 견딜 수 있게 만드셔야만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타오를 때, 이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우리를 문자 그대로 그분의 불꽃같은 임재를 견딜 수 있게 준비시켜준다. 하나님의 임재의 불을 마음으로 거절한 자들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말 그대로 불타는 그리스도의 임재로부터 숨을 것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시록 6:15-17).
그래서 이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멸하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지구는 새로운 천국의 중심이 될 참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 성이 막 그 위에 내려왔다 (계시록 21:2). 그러나 악인들이 현재 온 지구를 가득 메웠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천국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는 그들에게 영원한 고문이 될 것을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영원히 고문시키시기 보다는 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청사진, 그리스도의 의로 정결케 되지 못했으므로, 그들이 고수한 그들의 죄들이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이는 주님을 슬프게 한다. 심지어 그분께서는 이렇게 물으신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 18:23).
성경에 따르면, 영원한 불에 사는 것은 악인들이 아닌 의인들이다.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이사야 33:14-17).
악인들은 그들의 죄에 끝까지 매달렸으므로, 그들은 불을 견뎌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멸하실 때, 그들은 재로 불타버릴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불”에 의해 (유다 7, 마태복음 25:41) 소멸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 불이기 때문이다. 악인들에겐 영생이 없으므로 영원히 불 탈 수 없다. 다시 말해, 악인들은 영원히 불타기 위해 영원히 살아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에겐 영원한 생명이 없고, 불멸의 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꽃은 그들을 사를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 4:1-3).
악인들이 그들의 죄 값을 불로 치른 후엔 연기와 재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악인들은 영원히 고문 받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것이다 (계시록 14:11). 그들은 완전히 그리고 마침내 연기로 살라질 때까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시편의 기자가 표현하듯이: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 (시편 37:20). 다시 말해, 고난은 그것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며 연기밖에 남지 않게 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10, 11).
심지어 사단 자신도 그 불에 소멸될 것이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시록 20:10). 여기 “세세토록 밤낮”이라는 표현은 오직 영원을 의미하기 위해 나타난다. “세세토록"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면 말 그대로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것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월절은 “영원히” 지켜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희생되신 이후로, 우린 더 이상 절기(축제)를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문맥에서 “영원히”는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계속”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21:6에서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이 그의 주인의 노예로 계속 남아 있기로 결정했을 때, 주인은 “영원히” 섬긴다는 의미로 그의 귀를 뚫었다. 그 말인즉슨,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레위기 6:18, 22에서, 아론의 아들들은 특정한 책임이 “영원히” 주어졌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기에 아론의 제사장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같은 장의 13절은 이렇게 말한다.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구약의 성전이 서 있는 한, 번제단의 불은 계속해서 타올라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성소의 장막은 하나님에 의해 둘로 찢겨졌고, “영원히” 타올라야 했던 것에 끝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사단과 악인들은 그들의 형벌이 성취될 때까지 “계속해서” 타오를 것이고, 그 후엔 불이 그칠 것이다. 그곳엔 재와 연기 밖에는 남은 게 없을 것이다. 성경이 어떻게 사단의 종말을 분명히 기록하는지 보라: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에스겔 28:18, 19).
사단은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지구의 마지막 영화에 악인들이 멸망 받는 장면이 도래했다. 악인들이 ‘하나님은 공정하시다’라고 고백한 후, 행정판결이 시작된다. 주님의 임재는 퇴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분의 영광이 온 지구를 덮을 것을 미리 말씀해두셨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민수기 14:21).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그 때가 이제 왔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영광이 이제 비처럼 악인들의 위로 내린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 불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불꽃 같은 팔로 악인들을 끌어안으신다. 번제단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절했기에, 그들 자신이 반드시 번제단 위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제단 위의 희생물이 죄의 삯을 드러내며 재로 타버렸듯이, 악인들도 그들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절했기 때문에 재가 되고 만다. 온 지구는 불못이 된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시록 20:14).
성경에 따르면, 악인들은 “첫째” 사망 때에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첫째 사망에 그들은 단순히 무덤 속에서 최종 심판을 기다리며 잠에 드는 것이다. 1,000년 후의 둘째 사망 이전까지는 악인이 “사망과 지옥”에서 (“지옥”은 말 그대로 “무덤”을 의미한다) 부름 받아 불못에 던져지지 않는다.
경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가장 빨리 소멸될 것이다. 인류에 대해 중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그 불에서 더욱 오래 타오를 것이다. 모든 자들이 “자기의 행위에 따라” (계시록 20:13) 심판을 받는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가장 오래 고통 받는다. 그리곤 불바다가 꺼질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시록 21:1).
악인들은 더 이상 없다. 죄와 죄인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우주 한 구석 어딘가 사단이 관장하는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대적하며 저주하고 죄를 지으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악인들과 사단 자신 조차도 주님의 방법이 의롭고 진실되다는 것을 인정했고, 다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나훔 1:9).
이제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태초 때와 같이 재창조하신다. 그리고 주께서 아주 특별한 날을 세우신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사야 66:22, 23).
매 안식일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모여 그분께 경배드릴 것이다. 무수한 행성들 간의 여행과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누는 기쁨을 향유하며, 구원 받은 무리와 천사들은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의 기초가 되는 하늘 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죄와 고통과 고난이 없는 삶을 축하하기 위해 만날 것이다.
11막 끝-새로운 시작으로 열림
호소:
작전명 청사진
1800년대 동안 지하철로는 노예들을 속박에서 자유로 벗어나게 해주는 도구였다. “안내원”들이 남북으로 왔다 갔다 움직이며 이전의 노예들을 “정거장”에서 “정거장”으로 이끌어 자유가 될 때까지 이끌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나와 정거장에서 정거장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이끌어줄 안내원들이 필요하다. 성소의 각 여섯 기물들은 구원의 패턴을 이루는 여섯 정거장과도 같다. 만일 당신이 이 종이들로 자유를 얻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정거장마다 안내하여 “지성소의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평화를 얻기까지 인도해주도록 당신을 부르신다.
이는 하나님의 남은 무리 운동에 동참하고 다른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빛에 들어가도록 도와달라는 당신을 향한 호소이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배우고, 나눔으로써(혹은 이 책을 누군가와 나눔으로) 당신은 청사진을 선포하는 일원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청사진
PO Box 4272
Paso Robles CA 93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