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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은 바이칼 호의 알혼 섬을 떠나 광활한 시베리아들판을 지나 치우의 전설을 만들고 고조선을 세워 한민족의 맥을 지금까지 이어왔다. 설화와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고 바이칼 호에 대한 동경이 생기고 설레임이 시작됨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바이칼은 어디에 있으며, 누가 살고, 무엇이 있을까? 세계 최대의 담수호, 깊은 곳에서도 바닥이 훤히 보인다는 맑은 물, 앙가라라는 딸과의 슬픈 사랑의 전설 등 이런저런 궁금증이 마음을 콩닥거리게 했다.
전남대총동창회 창립 60주년의 유라시아 탐방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0은 우리 동양에서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자는 60을 이순(耳順)이라 하여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나이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갑자에 의하면 60은 한 생을 순환하는 시기이니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달파 했던 바이칼에 대한 그리움을 풀 계기로는 아주 어울리는 여행이다. 여기에 연해주의 독립운동현장 답사와 ‘지구상의 최후의 모험’이라는 시베리아횡단열차 탑승까지 함께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여행’이 되었다
8월 20일(토) 새벽 04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부스스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대절버스에 몸을 맡긴 채 깊은 잠에 빠졌다.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고 서울에서 오신 분들과 수인사도 마치고 출국수속을 했는데 알혼 섬 후지르 마을에 세울 솟대를 부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쇼핑할 겨를도 없었다.
10시10분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서해를 거쳐 중국의 단둥, 푸순, 장춘 상공 등을 지나 2시간 40분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1860년 러시아 군사기지로 세워져 항구와 해군기지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1880년 시가 되었다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연결되면서 태평양의 관문으로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더욱 커졌는데 ‘동방을 지배하다’는 뜻을 지닌 도시다.
공항을 나와 단체사진을 찍고 시내로 이동했다. 처음 들린 곳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는 독수리전망대다. 버스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니 뚜껑을 열면 계속 작은 인형이 튀어나오는 마뜨로시카 인형이 우리를 반기고 앞으로는 항구를 낀 시내풍경과 아름다운 금각교가, 뒤쪽 언덕에는 러시아 키릴문자를 만들었다는 키릴형제의 동상이 서있다. 이어 들린 혁명(중앙)광장에는 토요일이면 시장이 열린다는데 생선과 과일, 버터와 빵 등등 농수산물을 트럭에 담아와 팔고 있었다. 저녁을 하기에는 아직 빠른 시간이라 모스크바에도 있는 젊음의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를 지나 해양공원까지 산책을 했다.
21일(2일째)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출발시간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쉼 없이 내려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여행에서 비는 달갑지 않는 손님이지만 올 여름 무더위와 가뭄으로 비가 그리웠던 터라 싫은 표정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연해주에 한인이 처음 이주하기 시작한 게 1863년 이다. 초기에는 러시아의 우호적인 태도에 힘입어 이주가 계속 늘었으나 이주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러시아는 제한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병탄으로 연해주로의 이주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개척리라는 한인마을이 생기고, 홍범도, 유인석, 이범윤 등 항일무장운동가들이 활약하면서 해조신문, 대동공보 등 한인신문도 발행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연해주의 항일거점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강화했고, 마침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정부는 시 외곽으로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곳이 신개척리 바로 신한촌이다. 이후 신한촌은 3.1운동의 시발점이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이 창립된 곳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가 된다. 그러다 1920년 4월, 지난달 한인이 포함된 러시아 빨치산부대에게 큰 참패를 했던 일본은 복수를 위해 일본헌병대를 투입 수많은 한인들이 체포 피살하는 참변을 일으킨다. 특히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최재형 같은 이는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학살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때의 신한촌 사건으로 인해 연해주지역 항일운동은 쇠퇴하게 되었고, 1937년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애국지사들의 억울한 죽음이 서려있는 신한촌 자리에는 기념비만 외롭게 서있다. 평소에는 문까지 잠겨있어 참배마저도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는 미리 관리인과 연락하여 헌화와 참배를 할 수 있었다. 관리하는 고려인을 만나 격려금을 전달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안중근 의사를 닮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을 청와대에 초청했던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아파트 한 구석에 자리한 기념비를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신한촌에 남아있는 서울거리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러시아참전용사를 기리는 영원의 불꽃과 개선문 그리고 잠수함박물관을 관람하고 오전일정을 마쳤다.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거리는 하수구가 없어 물이 넘쳐 신발까지 다 젖을 정도였다. 열차를 타는 시간에 가면 밤이 되어
시베리아횡단열차 시발점 기념비를 사진에 담을 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고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시베리아 황단열차 기념비(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m)
가는 도중 1937년 고 려인강제 이주의 시발역인 라즈돌리예 역에 들렸다. 영문도 모르고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한과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서있는 역의 주변 나무들에 붙어있는 접은 종이들만이 그날을 떠오르게 했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역사관과 문화센터에서 다행스럽게 고려인들에게 민족의 혼과 전통을 전해 주고 있었다. 북을 치는 청소년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운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해서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약간의 기부금도 희사했다. 곧이어 연해주지역 의병조직인 동의회 총재와 신문발행 등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최재형 선생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거주했던 거주지와 우수리스크공원의 발해유적을 돌아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도시 외곽으로 나가 수이푼 강이 보이는 곳에 자리한 이상설 선생 유허비를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했다. 독립된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화장을 하여 강에 뿌리라는 유언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 앞에서 - 앞으로 수이푼 강이 흐른다]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재산과 목숨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셨던 선열들에게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잦아지던 비가 다시 내린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이동하여 마켓에 들려 기차에서 먹을 간식과 물 등을 샀으나 비가 거칠게 내려 짐들을 옮길 일이 걱정이다. 열차를 타기위해서는 탑승 전 여권검사를 해야 하는데 비를 맞고 서있는 우리를 보면서도 서두르는 기색 조차 없이 하나하나 대조를 하는데 너무나 시간이 많이 걸려 짜증이 났다. 그러나 짜증은 우리만의 감정일 뿐 차장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겨우 출발시간 전(23시30분)에 열차에 탑승하여 4인용 객실에 들어갔는데 또 다시 여권검사를 하며 한바탕 난리를 겪어야 했다. 모두 우리 일행이니 내부적으로 누가 자는 게 무슨 문제냐며 항의를 해도 막무가내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외국 여행을 많이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화도 나고 해서 캔 맥주를 구해 화를 달래며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첫 밤을 보냈다.
사실 이번 여행은 세 가지 큰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연해주의 독립운동 현장을 살펴보는 것이요, 둘은 ‘세계 최후의 모험’이라는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광활한 시베리아의 평원을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며 보는 것이요, 셋은 우리 한민족의 시원인 바이칼 호의 알혼 섬을 찾아 솟대정원을 개원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는 일은 일생일대의 큰 사건이요, 여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첫날부터 차장의 충실한(?) 근무태도로 인하여 우리는 비에 흠뻑 젖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 다행스럽게 내가 맥주를 찾자 자기들도 한 잔하겠다고 하여 맥주에 치즈를 뇌물로 주며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 -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는 차장과의 친밀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열차 차장들과 함께 - 2인 1조로 근무한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나 된다. 꼬박 6박7일이 걸리는 거리다. - 공식적인 기차시간은 모스크바 기준시간이므로 현지 시간과는 차이가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 1883년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885년 에카테린부르크노선이 최초로 개통되었다. 1891년 시베리아철도건설위원회가 설립되면서 25년 간(1891~1916)의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9,288km의 시베리아횡단철도가 공식적으로 완성되었다. 우랄산맥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의 시베리아는 투르크어로는 ‘아름다운’이라는 뜻이며, 타타르어로는 ‘눈보라’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베리아를 동토의 땅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여름의 시베리아는 자작나무 숲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다.
이광수는 소설 ‘유정’에서 하얼빈에서 치타를 통해 이르쿠츠크를 가면서 “가도 가도 벌판. 서리 맞은 마른풀 바다. 실개천 하나 없는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갖고도 미처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 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라고 표현했다.
물론 이광수의 표현에 대해 고구려나 발해인들의 기상을 보지 못하고, 우리가 여행했던 8월의 싱싱함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비평을 할 수는 있으나 또 다른 시각의 시베리아를 느끼면 족할 뿐이다.
22일(3일째) 이른 아침인데도 밖이 약간 소란스럽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알람이 필요 없는 잠꾸러기들의 천국인데 왜 벌써들 일어나셨나하며 밖으로 나갔다. 늦둥이 진영이와 집사람은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고 나는 혼자 먹을 아침을 준비했다. 출발 전부터 아침과 저녁은 직접 해먹고 점심만을 식당차를 이용하기로 해서 누룽지와 떡국, 곰탕, 라면 등과 반찬을 준비했기에 열차 내에 비치된 온수기(사모바르)에서 뜨거운 물만 받으면 되었다. 열차는 4인 1실로 부부로 오신 분들은 4인실에 두 분만 쓸 수 있도록 티켓을 끊었고, 혼자 오신 분들은 4인씩 조를 편성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샤워는 할 수가 없다. 화장실 사용이 도착역 기준 30분 전후로 사용이 제한되고, 세면장에 물을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없어 골프공이나 작은 바가지를 지참해야 한다. ‘사실 여행은 불편해야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너무 편하면 쉽게 기억에 지워져 나중에 무엇을 했는지 필름을 되돌릴 수 없다’며 자위할 수밖에 없다.
하바롭스크는 새벽에 지나고 오브루치예 역에 기차가 정차하여 내렸더니 주민들이 연여 알과 꿀 등을 팔고 있어 나는 반찬 겸 안주로 연어 알을 그리고 진영이는 꿀을 샀다. 철길 옆으로는 베로쟈(자작나무)의 끝없는 행렬이 따르고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녹색의 평원과 가끔씩 나타나는 세차게 흐르는 강, 그리고 노랑, 빨강, 파란색의 선연한 들꽃들이 인가대신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5~6시간을 달리다 가끔씩 멈추는 정차역에 내려 자유스럽게 역전으로 나가 구경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점심에는 참가들의 이야기도 듣고 저녁에는 모여서 보드카에 정담을 나누는 사이, 해도 지친 듯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도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가 이용했던 열차]
23일(4일째) 오늘도 하루 종일 기차를 탔다. 차창 밖의 풍경도 비슷하니 게으름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하릴없이 이방 저방 다니며 쓸데없는 간섭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도 피운다. 한가한 틈을 내 나는 출발 전 부탁받은 원고를 써서 카톡으로 보내고 부담을 덜었다. 사실 러시아가서 써서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책을 읽으라고 해도 게으름을 피우던 집사람도 얼마나 할 일이 없는지 책을 읽고, 진영이만 심심하다며 ‘같이 놀아주라’며 조른다. 얼마만의 게으름인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나는 적응이 안 된다. 그렇지만 시간은 잡을 수 없는 것, 저녁식사 후의 보드카 한잔에 또 하루해가 진다.
24일(5일째) 오늘은 집사람의 생일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생일을 축하했다. 벌써 소문이 났는지 축하의 인사들이 오간다. 점심 때 모두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샴페인으로 축배를 했다. 기차가 정차하자 김영술 교수는 밖으로 나가 어딘가에서 케익을 구해왔다. 다시 식당차에 모여 축하파티를 했다. 브랴트자치공화국이 주도인 울란우데를 지나 두세 시간여를 가자 시베리아횡단열차 구간에서 가장 멋지다는 바이칼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평선 너머로 얕은 산들이 우리를 따라 달리고 세계 최후의 청정호수라는 명성대로 오염되지 않은 맑고 투명한 물이 차창너머 그대로 보였다. 오물(바이칼에서만 산다는 생선)을 잡는 여유로운 어부들의 모습과 간간히 나타난 캠핑족들의 텐트가 바이칼이 우리 곁에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바이칼 호의 석양]
사실 환바이칼 철도가 처음부터 바이칼호수 연안을 따라 개설된 건 아니었다. 초창기의 기술력으로는 이러한 지형에 철도를 부설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앙가라 강 연안을 따라 이르쿠츠크에서 포트 바이칼 역까지는 선로를 연결하고, 호수는 열차 페리를 통해 건넌 후, 반대편 미소바야 역에서 하선시켜 다시 육지로 연결하는 방법을 썼다. 열차 페리는 ‘바이칼’과 ‘앙가라’ 두 척이 운행되었다고 하는데 겨울을 위해 장착했던 쇄빙기가 막상 운행을 해보니 바이칼의 두꺼운 얼음을 뚫기에는 역부족이라 새로운 대안으로 눈썰매를 잠시 이용하기도 했고, 급기야는 두꺼운 얼음 위에 직접 선로를 깔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로는 효율을 높일 수 없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84km의 짧은 구간에 424개의 구조물과 39개의 터널을 뚫고 그 후 복선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환바이칼철도를 두고 ‘러시아의 철제 혁대에 물린 황금 버클’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23시가 다 되어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시베리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이르쿠츠크는 350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르쿠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릴 만큼 유럽 수준의 문화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데카브리스트의 영향이었다. 데카브리스트란 프`러 전쟁 후 혁명을 모의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젊은 장교 121명을 말한다. 러시아는 ‘제1차 조국전쟁’에서 승리했는데 당시 프랑스까지 진격하여 발전된 선진 문화의 현장을 보고 온 이들 엘리트 귀족들은 낙후된 러시아를 개혁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황실에 맞서 1825년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패하고 다섯 명은 처형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이들을 따라나선 부인들과 함께 문화도시의 기틀을 닦은 것이다.
25일(6일째) 앙가라호텔에서 숙박했지만 새벽 일찍 출발하느라 아름답다는 앙가라 강변을 걷지 못했다. 대신 가이드는 이르쿠츠크의 중심가에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두루 보여주며 시내를 벗어났다. 알혼 섬을 가기 위해서는 이르쿠츠크에서 5시간 정도를 이동해야 하는데 시베리아벌판과 스텝지역을 감상할 수 있지만 지루한 길이었다.
바이칼의 이름은 확실치 않다고 한다. ‘풍요로운 호수’라고도 하고 ‘자연의 바다’라고도 한다. 가로 길이 636km, 폭 20~80km, 둘레 2,000여km나 되는 바다만큼 큰 호수이며, 최고수심이 1,637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기도 하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6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중 25% 정도가 바이칼에서만 서식하는 특이종이라 하며, 민물물개, 오물, 보코 플라프라는 새우모양의 작은 갑각류 등이 그들이다. 바이칼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텡그리신화’가 있는데, 이 텡그리가 단군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며, 샤머니즘과 솟대와 장승, 성황당문화가 연결되어 있으며, ‘나무꾼과 선녀’와 비슷한 ‘백조공주와 혼슈부운의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알혼 섬은 바이칼 호의 26개 섬 중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으로 동서 길이 72km, 폭이 15km이며, 면적은 730㎢이라고 하며 인구는 1,500여 명으로 대부분이 후지르 마을에 살고 있다. 브랴트 언어에 다르면 ‘건조한’, ‘메마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무가 거의 없는 스텝으로 높지 않은 언덕과 구릉지가 끊임없이 이어지다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을 볼 수 있다. 알혼 섬 선착장에서 10여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니 군용 지프인 ‘우아직’ 5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혼 섬 전체가 비포장이라 우아직이 아니면 운행이 곤란하다고 한다. 비포장에서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혼이 빠진 느낌이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점심을 먹고 숙소와 후지르 마을 사이에 있는 부르한 바위를 보러 갔다.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30m, 다른 하나는 42m 높이다. 바위절벽 서쪽에는 갈색으로 그려진 용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다고 하는데 겨울 얼음이 얼었을 때만 갈 수 있다고 한다. 부르한은 바이칼 최고의 신으로 동굴은 부르한의 거처였다고 한다. 세계에서 기가 가장 센 바위라고 하며, 칭기즈 칸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부르한 바위 앞에는 우리의 솟대와 같은 13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으며, 기를 수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알혼 섬의 솟대]
[부르한 바위]
부르한 바위 다음으로 하란츠이의 동물원을 간다고 하여 의아했는데 물개와 사자모양의 바위가 바다에 떠있어 웃음을 자아냈다. 다음 목적지는 빼씨안카라는 사구였다. 1934년부터 1957년까지 수용소가 있었다고 하며 선착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이칼호수에 손이나 발을 담그면 행운이 따른다고 하여 모두들 손을 담그고 소년소녀처럼 좋아한다. 빼씨안카에서 북부지역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가 숲을 이룬 아름다운 곳이지만 길은 마치 롤러코스트를 탄 것처럼 곳곳이 패어 있었다. 북부지역에 있는 사간후슌의 삼형제바위와 사랑의 언덕을 보고 후지르 마을로 돌아와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김영술 교수와 인부들이 만들어 놓은 니키타 하우스 앞의 ‘한국 솟대정원’ 개원식에 참석했다. 21개의 솟대가 니키타 하우스와 어우러져 멋진 모습으로 태어났다. 알혼 섬 정부를 대표하여 국제문화담당관인 ‘니키타 밴차로프’씨가 참석하여 “이번 솟대정원 개원을 계기로 문화교류를 확대해 나가자”는 취지의 환영사를 하였고 우리 측에서는 박승현 단장(전남대총동창회 수석상임부회장)께서 ‘전남대총동창회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한민족의 시원이라는 알혼 섬에 한국 솟대정원을 개원하게 되어 그 의미가 크다”며 “문화적 동질감을 바탕으로 우호와 협력, 교류의 활성화로 아시아 평화와 남북통일에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개원인사를 했다.
[한국 솟대정원 - 후지르 마을에 전남대총동창회 창립 60주년을 가념하여 만든 정원]
솟대는 민속신앙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과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입구 등에 세우는 긴 나무장대를 말한다. 솟대의 끝에는 오리나 새 등을 조각하였는데 하늘과 인간을 연결한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이번 솟대는 한국 솟대작가협회장인 전남대 출신 윤정귀 작가의 작품 25점을 한국에서 제작하여 가지고 가서 알혼 섬의 소나무를 장대로 하여 세운 것이다 - 처음에는 알혼 섬의 자작나무를 쓸 계획이었으나 알혼 섬이 국립공원이라 벌채가 되지 않아 가지고 잇던 소나무를 사용 - 이어 개원을 기념하는 음악회에서는 브랴트공화국, 사하공화국, 몽골 등의 민족 악기공연과 노래가 있었다. 공연에 참가한 ‘알탄삭’그룹의 리더인 잠발로프와 알렉, 예브게니 등 단원들은 기타와 모린 호르, 톱슈르, 호무스 등 독특한 악기로 새소리, 동물소리, 바람소리를 내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표현했다. 특히 사얀산맥에 사는 최고신이 가장 귀한 손님에게 부르는 ‘셀렌거’라는 노래로 우리 탐방단을 최고의 손님으로 대접해 주어 감동을 자아냈다. 우리는 정석우 공대동창회장과 조창현 부회장이 출연하여 ‘딜라일라’와 ‘진도아리랑’으로 흥을 돋우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이어진 연회는 정석우 회장과 니키타 담당관의 협찬으로 분에 넘치는 호화로운 잔치가 되었다.
[솟대정원 조성 축하 음악회]
26일(7일째) 일찍 일어나 부르한 바위가 잇는 해변으로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 기를 받고 있었다. 바닥이 훤히 비치는 푸른 물에 맑고 신선한 공기가 부러웠다. 태고의 자연이 살아 숨쉬고, 동심이 발동하는 곳, 천국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을 왜 우리는 먼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까?
아침에 다시 솟대정원을 찾아 어두워서 촬영하지 못한 사진을 마음껏 찍고 도선장으로 향했다. 하루 만에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곳이다.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난 소떼들인지 바이칼호수의 물을 맘껏 마시며 유유히 사라졌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 이르쿠츠크로 돌아와 모처럼 한식으로 푸지게 먹고 리스트 비얀카로 향했다. 바이칼 선상투어를 하면서 오물을 안주삼아 보드카를 마시며 인생을 논하고, 바이칼의 정취에도 취했다. 배에서 내려 전통시장에 들려 기념품 등을 쇼핑하고, 되돌아오는 도중 앙가라 강 인근에 위치한 자임카에서 러시아전통 사우나(반야) 체험과 러시아 꼬치구이인 샤슬릭으로 러시아의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이르쿠츠크공항으로 갔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이르쿠츠크를 떠나며 34명의 단원들과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되새기며 꿈나라에 들어간다. 바이칼에서 새가 되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며 한국으로 돌아와 60년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 행사를 위해 애써준 김영술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바이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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