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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예술가> 가을호에 실린 계간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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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방위方位
이영숙
최초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직립원인이 방금 ‘앞발’에서 차원변화를 일으킨 ‘손’을 모두고 앞을 내다본다. 단숨에 뒤와 양옆이, 위와 아래가 생겨난다. 네 발로 땅을 딛고 있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공간이 그/그녀를 에워쌌으며, 그/그녀로부터 확산되어 나간다. 그/그녀를 중심축으로 하는 전ㆍ후ㆍ좌ㆍ우ㆍ상ㆍ하의 방위가 최초로 경험되는 순간이었다.
경험은 인식을 낳고 인식은 개념으로 추상화된다고 했을 때, 방위라는 개념은 중심축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발생하는 공간의 구조화된 방향성을 갖는다. 넓거나 좁다는 의미의 지각적 공간이나 장소와 결부된 실재적 공간, 혹은 동서남북 등으로 분할되는 추상적 공간과는 달리 방위를 비실용적 측면에서 인식한 역사는 오히려 유구하다. 해 뜨는 동방이라는 이미지가 동쪽이라는 방위를 뜻하면서도 일면 신비를 덧입힌 오리엔탈리즘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방위를 상징적 공간으로 적극 활용한 예이다.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화와 주술이 그 공간을 채운다. 태양신을 섬기는 행위는 동쪽이라는 방위에 대한 숭배이기도 했다.
방위의 중심축을 자처하며 인간은 세계를 자신 안으로 응축시키거나 자신을 세계 속으로 확산시켜왔다. 직립인간이 뒤로 돌아서거나 거꾸로 서서 볼 때 전ㆍ후ㆍ좌ㆍ우ㆍ상ㆍ하의 공간적 배치가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위의 결정 조건은 중심축에 자리한 존재의 바라봄과 관계한다. 존재들은 바라봄을 통해 매순간 방위와 결부되었다. 사람마다 문화마다 민족마다 다른 방위를 갖는 것이 다양성을 유지하는 세계의 운행 방식이었고, 공동체 안에서 개별성을 유지하는 삶의 조건이었다. 한 개인이 세계관이니 종교관이니 개성이니 하면서 자신만의 주된 방위를 갖는 것처럼,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진 시인이나 시인과는 별개의 인격을 가진 시의 주체 역시 시의 주된 방위를 갖고 있다. 주된 방위란 주된 방향성에 다름 아니니 시의 주체가 줄곧 바라보는 정면이 곧 그것이다. 존재를 중심축으로 가진 각각의 정면들은 시의 방위이자 시의 한 세계를 품은 시로 매 편 새롭게 탄생한다.
한편 정면에서 비켜나 있는 현상과 사물들은 자신들을 스쳐지나가는 존재의 시선을 붙잡지 못한 채 주체의 시야 밖으로 미끄러진다. 그러나 미끄러진 사유와 언어들이 기왓장처럼 부스러져 시 바깥을 폐허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흐르는 강물을 지켜보다 문득 시선을 놓았을 때 역으로 내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 들거나, 옆 차선에서 다른 차가 전진할 때 멈춰 있는 내 차가 후진하는 것 같은 느낌들이 시에는 끼어들기 마련이고, 이런 요소들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관점이나 시각이라는 일방향보다 방위라는 입체적 측면에서 발견되어질 여지가 더 많다. 다만 시의 안팎에 널브러진 그 ‘미끄러진 사유와 언어’들까지 평문이 다 찾아낼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지면의 제한이라는 단서를 달지만, 결국 평자의 주관성과 능력부족이라는 한계가 주된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시의 방위라는 입체적 프레임을 통해 전경화되지 않은 시의 이면들이 발견되어질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지구
밤마다 지붕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일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 몰래 후원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시를 쓰거나, 폭약을 제조하거나, 자위, 자해, 자살을 하는…… 그러나 밤은 이미 패색이 짙습니다. 저들은 패색을 밤의 색깔, 지구의 기분이라고 부릅니다. 저희들의 패색왕이여,
낮이 연장, 연장되었습니다. 낮이 1시간이라면 밤은 1초. 밤의 정신은 퇴각, 퇴각…… 퇴각의 초침 속에 깃들어 있어요. 심야택시 한 대가 밤의 퇴로를 빠져나갔습니다. 지구는 뿌리 없는 나무예요. 동지여, 무사히 도착하면 그곳 사정을 알려 줘요. 그곳에도 밤마다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밤의 지붕에 오두카니 앉아서……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다면,
가슴팍에 칼을 꽂듯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공포를 깨우쳤다면, 새로운 신입당원이여, 지붕 위로 쫓겨난 개여, 아직도 자기 믿음이 부족한 자여, 그대는 비밀을 파헤친 자, 더 많이 알게 된 자예요. 지구는 날개 없는 거대한 새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얼굴은 뺨을 맞은 자의 얼굴과 닮았습니다. 지금 뺨을 맞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김행숙, 「지구를 지켜라」 전문(『시와 반시』 2019년 가을)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남미의 ‘불개미 뗏목’은 잦은 홍수를 이겨내기 위한 불개미의 생존 전략이 진화한 결과물이다. 적게는 수백 마리에서 많게는 수백만 마리가 서로의 입과 다리를 물어 거대한 뗏목을 형성하는데, 마른 땅을 만날 때까지 물 위에서 최대 3주를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이 여왕개미와 알들을 안전하게 둘러싸면서 대오를 구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분 이내라는 사실은 존속위기타이머를 생존의 방향으로 돌리는 데 필요한 유효시간의 긴박함을 말해준다. 1년 남짓 산다는 불개미와 기대수명으로 80년을 넘겨 사는 인간을 놓고 봤을 때, 이미 10여 년 전에 지구의 환경위기시계가 가리킨 21시 33분은 익사냐 생존이냐를 가름하는 불개미의 2분에 해당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개미와 달리 인간 세계에서는 소수만이 ‘뗏목’의 필요성을 인지할 뿐 대다수가 ‘2분’의 긴박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위기의식에 대한 외마디 절규와 같다.
충분히 긴 지렛대와 그것이 놓일 한 점만 주어진다면 지구라도 들어 올리겠다던 것은 아르키메데스였다. ‘아르키메데스의 점’의 관점을 떠올리면서 지구에서 발사된 최초의 인공위성(1957년)에 주목한 것은 한나 아렌트였다. 그때부터 인간이 “지구 밖에서 지구에 묶여 있는 자연을 생각하고 다루었다”(『인간의 조건』)는 것인데, 인공위성 발사가 자신을 신격화한 인간이 지구와 지구의 생물을 대상화하게 된 상징적 사건의 시초였음을 역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밤마다 지붕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이제 겨우 ‘2분’ 남았다고 “비명을 질러야”하는 단계가 “패색이 짙”은 지구의 현 상태이며, 이것이 “뿌리 없는 나무”이며, “날개 없는 거대한 새”인 “지구”를 지키는 길인 것이다. 누구로부터? “패색을 밤의 색깔, 지구의 기분이라고 부”르는 ‘저들’로부터. 마치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지렛대와 그것을 작동시킬 무한대의 우주적 공간을 소유한 듯 지구를 유린한 “저희들의 패색왕”으로부터.
사실을 말하자면 “연장, 연장”되는 “낮”은 거짓의 표면이고, “퇴각, 퇴각”하는 “밤”은 진실의 내면이다.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자와 “공포를 깨우”친 자를 향해 시의 주체가 촉구하는 것은 아르키메데스의 반어적 어법과 한나 아렌트의 제안적 어법보다 더욱 날카롭고 초조하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았던 기원전 3세기의 과학자에게는 농담이 섞여있었고, 20세기의 정치사상가에게는 아직 인간에 대한 기대가 섞여있었으나, 21세기의 시인에게는 “초침” 소리만이 째깍거린다.
인류
자신을 감당할 길 없어요 시체가
툭툭
시체 위에 시체가 툭툭
시체가 툭툭
원통 가운데를 지나 시체가 툭툭
항아리처럼 부풀어 올라
시체가 툭툭
하늘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시체가 툭툭 시체 위에 시체가 툭툭
얼굴 붉히게 하는 表現
시체가 툭툭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하늘을 감당할 수 없어요
시체가 툭툭
얼굴 붉히게 하는 표현
시체가 툭툭
시체 위에 시체가 툭툭
존재가 투두둑,
自身을 감당할 수 없어요
가재가 툭툭
가재 위에 가재가 툭툭
―박찬일, 「첨성대의 발달」 전문(『문학사상』 2019년 6월)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인간은 미의식을 느끼는 외에도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별을 관찰해왔다. 나라의 길흉을 점치면서는 점성학이, 역법曆法을 연구하면서는 천문학이 발달하였고, 별과 별 사이에 상상의 선을 그어 신화적 동물이나 인물을 구현하면서는 무수한 별자리가 생겨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신보다는 과학 쪽으로 인간의 관심사가 바뀌었다. 별을 관찰하는 목표나 방식이 변모하였고, 그 장소도 경주 첨성대에서 각 지역의 천체관측소 등으로 현대화되었지만, 새로운 별을 발견하거나 지구 역시 우주 속 하나의 별이라는 측면에서 대안적 지구를 찾는 일도 꾸준히 진행되는 중이다. ‘하늘을 감당하라’고 만든 것이 ‘첨성대’의 기원이며 현재 역시 그 기능과 역할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첨성대’가 “하늘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할 때 「첨성대의 발달」은 오히려 반어적으로 삐끗한다. “하늘을 감당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감당할 길 없어요”라고까지 말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중심 이미지는 “시체가 툭툭/ 얼굴 붉히게 하는 표현”이다. 인간(“시체”)에 대해 말함으로써 별이 얘기되어지고, 별에 대해 말함으로써 인간이 얘기되어지는 방식이다. ‘시체’는 유성에 다름 아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유성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 군상, 곧 존중 받지 못하고 ‘툭툭’ 던져지는 인간들에 다름 아니다. 죽은 사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숫자를 점쳐보아도, 죽은 별로 살아 있는 별을 점쳐보아도 아직 사람도 별도 너무 많다. 과잉된 것들의 하나인 내가 너무 많다. 무덤(“항아리처럼 부풀어 올라”)이 너무 많다. 별과 인간은 유비관계에 있으므로, 이 시에서 무수한 천체는 곧 인류다. ‘첨성대’가 ‘발달’하는 것은 산 자들을 위한 것인바,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린 도치관계로 인해 ‘첨성대의 발달’은 비극적이다. “시체가 툭툭”이란 현상이 “얼굴 붉히게 하는 표현”이 되는 이유다.
시인은 ‘시작노트’에서 “별은 극단이다. 별자리가 극단 중의 극단이다. 많음으로서의 별이 (혹은 별자리가) 인류의 삶을 정당화시킨다. 인류의 몰락을 정당화시킨다. ‘많음으로서 별’의 몰락이 인류의 몰락을 정당화시킨다.”라고 했다. ‘많음으로서의 별’과 ‘인류’가 정면에 서자 시의 방위들이 생겨났다. ‘시체:별:천체’와 ‘시체:인간:인류’가 유비관계라면, ‘많음:툭툭’과 ‘감당하지 못함:얼굴 붉히게 하는 표현’은 현존에 관한 것이고, ‘첨성대의 발달:쌓이는 죽음’은 아이러니를 형성함으로써 존재의 비극성이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그러나 “가재가” “툭툭/ 가재 위에 가제가 툭툭” 떨어진다 해도 ‘가제자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존재가 투두둑” ‘몰락’해도 존재들의 세계는 영속된다. 이것이 죽음의 역설이고 존재의 비애이며 더불어 ‘첨성대’가 거느린 방위의 속성이다.
우리
나는 팥을 쒀서 밤과 낮을 만드는 사람이지요
팥은 팥이 되는 일에 교교하게 몰두 중인데요
불과 흙에서 구워져 나온 돌이면서
불구죽죽하게 햇볕과 바람과 이슬을 쬐지요
오래된 맑음을 등지고 잠을 자면서도
흐린 날이 인도하는 침묵으로 반짝거리지요
나는 팥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팥을 솥에 안치고
팥 익는 냄새로 찬연하게 음울함을 달래지요
땅 위에 사는 것들은 팥의 껍질과 붉은빛이
오장육부의 피를 틔우고 귀신을 쫓는다고 말하죠
불길한 욕망도 팥빛 앞에서는 낙천적으로 바뀌죠
가죽자루에 담긴 팥빛은 텅 빈 골짜기 하나를 파네요
거기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을라나, 죽음에 이르는 길을 허기져 돌아왔을라나
가마솥의 팥죽은 소금 한 움큼을 어여삐 만났을라나
서서히 새알 무리와 팥빛을 감고 푸는 주걱이 정좌하듯
나는 팥죽 감미롭게 스미고 퍼져 있을 질그릇이 되었죠
―이병일, 「팥」 전문(『예술가』 2019년 여름)
과거가 미래를 만나는 방식은 자기의 이야기를 흘려보내고 그 행방을 묻지 않는 것이다. 과거는 개입할 수 없음이 아니라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미래가 된다. 이 적극적 수동이 만들어낸 작품이 신화와 전설이다. 한 집단이 그것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지평이 필요하다. 역사의 뒤채임을 함께 겪는 그 집단을 우리는 민족공동체라 부른다. 서사와 운명의 ‘몽고반점’이 그들의 DNA에 공통의 무늬로 새겨져 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시의 정면을 이룰 때 시의 방위는 집단의 내부를 향해 “정좌”한다. 이를 위해 ‘팥―팥빛―팥죽’이 시적으로 연대한다.
“불과 흙에서 구워져 나온 돌”인 “팥”은 “맑음을 등”진 채 “침묵으로 반짝거리”는 “팥빛”을 띤다. “팥빛”은 “오장육부의 피를 틔우고 귀신을 쫓”을 뿐만 아니라 “음울함”과 “불길한 욕망”조차 “낙천적으로 바”꾼다. 액을 물리치기 위해 백일이나 돌에서부터 열 살이 될 때까지 아이의 생일상에 줄곧 올랐던 수수팥단지처럼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의 옛 이야기에서 최상위 포식자였던 “호랑이”를 물리친 게 “팥죽”이었음을 환기하면, 신화와 전설에 관계하는 것은 상징으로서의 “팥빛”이다. “팥빛”이 판 “텅 빈 골짜기”를 이야기가 채우는 가운데 “팥”은 쑤어져 “팥죽”이 된다. “팥죽”을 쑨다는 것과 “텅 빈 골짜기”를 경유한다는 것은 동일한 의식이다. 그 결과 “팥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팥을 솥에 안치”던 “나”는 비로소 할 일을 마친 “주걱이 정좌하듯” “팥죽”을 떠 담은 “질그릇”이 됨으로써 집단 서사를 한 ‘주걱’ 떠내 개인 서사로 완성한다.
한 그릇의 “팥죽”에는 “팥빛”을 공유하는 집단정서가 “감미롭게 스미고 퍼져 있”다. 시의 방위들은 팥이 “팥이 되는 일”이나 “팥을 쒀서 밤과 낮을 만드는” 일의 “교교”한 “몰두”와 맞물린다. ‘우리’ 안에서 갈등과 소외 없는 세계가 실로 오랜만에 현실로 소환된다.
너
잊을 수 없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 사문 사문 사문 걷던 사문진 물새들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의 참 멀고 쓸쓸한 구병산 모퉁이를 돌고 돌아서 사문 사문 사문 날아간 서쪽 하늘 외로움은 聽覺이어서 달맞이꽃 별빛 터지는 소리 곁에 혼자 서 있는 빨간 우체통
반 고흐의 잘린 귀 같다
―강현국, 「빨간 우체통」(『예술가』 2019년 가을)
‘나’가 주체의 자리에 섰을 때 대략 ‘너’는 첫째, ‘나’의 또 다른 자아로서 자기 이중화의 방위를 갖거나 둘째, 객관적 타자로서 근원적으로 분리ㆍ분할된 비상호적인 존재라는 방위를 갖거나 셋째, ‘나’와 더불어 세계를 구성하는 기초단위로서의 상호 주관적인 존재라는 방위를 갖는다. 즉 주체가 직시하는 것이 자신의 감추어진 자아이거나, 전적으로 외적 존재인 나 이외의 타인이거나, ‘나’와 직접적으로 생의 맥락을 주고받은 ‘너’가 그것이다. 이 시는 사랑이라는 맥락을 공유한 세 번째의 방위와 관련이 있다.
이 시에서는 ‘사문진’의 ‘사문’이 중요한 포지션이다. 의태어(“사문 사문 사문 걷던”, “사문 사문 사문 날아간”)로 활용한 정황도 정황이거니와, “외로움은 청각이어서”에 걸쳐져 의성어의 효과를 내면서 시 전체를 채우던 “사문진 물새들”이 문득 사라진 “서쪽 하늘”을 풍경처럼 남겨 놓는다. 무엇보다 ‘沙門’과 ‘寺門’을 오가며 씻은 탈속의 귀로 “달맞이꽃 별빛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 “곁에 혼자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은 “반 고흐의 잘린 귀”에 비유되거나 동일시된다. 어찌 보면 “잊을 수 없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는 독백은 자신을 청자로 하는 자기 이중화의 첫 번째 방위로 환원될 가능성도 있다. ‘너’라는 방위는 그만큼 “멀고 쓸쓸”하며, “외로”웁고, 종교성(“沙門”, “寺門”)으로 빛난다. 사물들(“빨간 우체통”)은 모두 너의 분신(“잘린 귀”)이 된다.
혈육
아버지는, 소나 양이 벗어놓은, 구두를 팔았다,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햇빛의 무덤인, 단칸방 다락은 구두 창고, 밤새 독파 중이던, 제삼세계 문학전집 행간들은, 말밥굽들이 달그락달그락, 절뚝이며 지나가는, 시장골목이었다,
팔다 남은 말발굽들은, 다락에 차고 넘쳐서, 부엌으로, 옷장으로 내 책상 밑으로, 마구 헤집고 다녔 다, 나는 말발굽 소리를 머리에 이고, 잠이 들었고, 아버지는, 쓰라린 말발굽 신발을, 평생 벗지 못했 다, 영영, 녹슨 대문 앞 가지런히 놓인, 구두 한 켤레가 되었다
나는, 마구간을 벗어나게 되었지만, 좁은 시장 골목을 지날 때마다, 비닐에 덮인 채, 먼지를 피하던 딱딱한 말발굽이, 야야, 어디가노, 다정하게 이름 부르며, 쫒아올까 봐,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 다,
―박윤일, 「구두, 발자국」 전문(『시와 세계』 2019년 여름)
시에서 혈육은 왜 자주 남루한가. ‘소가죽ㆍ양가죽’ 구두를 팔면서도 “아버지”들 자신은 왜 자주 “쓰라린 말발굽 신발을, 평생 벗지 못”한 채 “영영, 녹슨 대문 앞 가지런히 놓인, 구두 한 켤레가 되”는가. “나”들은 왜 자주 “마구간에서 태어”나 “제삼세계문학전집 행간”같은 “시장골목”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마구간을 벗어나”고서도 “좁은 시장 골목을 지날 때마다” “딱딱 한 말발굽”으로 표상되는 “아버지”가 환기되는 걸 꺼려하거나 욕망하는 양가감정(“쫒아올까 봐”)을 어쩌지 못해 “나”들은 왜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것”인가.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삶의 조건이란 측면에서 혈육은 어느 만큼은 공동운명체이고, 삶의 여러 변수로 인해 어느 만큼은 개별운명체다.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발굽 소리를 머리에 이고, 잠이“드는 것이 전자라면, “마구간을 벗어나게 되”는 것은 후자다. 그러나 “야야, 어디가노, 다정하게 이름 부르며” “아버지”는 여전히 간섭하거나 염려하며 도처에서 생시처럼 “쫒아”온다. 도무지 벗어났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혈육이다. 혈육을 정면에 두는 순간 시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아니 벗어나지지 않는 운명에 대한 노래가 된다. 남루하지만 “다정”한 시의 방위는 동ㆍ서ㆍ남ㆍ북에서 더 세분화되어 북동이니 북서니 남서니 남동이니, 연민이니 애증이니 하면서 우리의 심장 깊숙이까지 와 닿는다.
그리고, 나
나는 고양이도 개도 키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나에게는 직업이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코끼리를
그것도 밤의 코끼리를
삐이이이 ―삐이이이―
코끼리가 코를 높이 쳐들고 우는 밤마다
나는 이성애자 남성이 아니고 서울 시민이 아니고 이장욱이라는 기괴한 이름을 잃어버렸는데
나는 코가 길어지는 것이 좋았지.
다리가 굵어지는 것이 좋았네.
거대한 상아를 두 개나 가지게 되었다.
은행에 가서 계좌를 해지하고 회사에는 사직서를 발송하고 휴대전화를 밟아 부숴버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 되었다고 느꼈습니다만
대체 여긴 어디?
나는 코끼리의 커다란 꿈속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을 뿐
코끼리는 쥐 원숭이 공룡 세균보다 눈앞의 나를 사랑하면서
증오하면서
쿵쿵
코끼리답게 도착하였다.
쿵쿵
코끼리답게 떠나갔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긴 울음을 들으며 나는 밤이 새도록 코끼리를 추격하였다. 코끼리를 향해 창을 던졌다. 코끼리의 시체를 해부하였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고 뼈는 곱게 갈아서
드디어 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코끼리의 생활이라고 자각하였다.
―이장욱, 「반려」 전문(『아시아』 2019년 여름)
시에서 ‘나’는 시의 시발점이자 종착지다. 시는 ‘나’와 연루된 사물, 현상에 대한 기억과 상상 사이를 오가며 욕망의 갈피들에 대해 기술한다. 그러나 시에서 ‘나’는 현실 속의 사실적 존재가 아니다. 시에서 요구되는 것은 사적인 ‘나’가 아니라 보편적인 ‘나’이며, 일반적인 ‘나’가 아니라 특수화된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나’의 태도나 반응, 무엇과 ‘나’의 관계성 등으로 나타나지 결코 ‘나’의 독자적 의지나 강변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나’에서 시의 방위는 무수한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다양성과 ‘나’의 접목에 의해 무한히 다채로워질 수 있다. 내가 나를 “반려”로 삼는 고독한 삶도 그 중 한 갈래다.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직업이 따로 있”고, “이성애자 남성”이며, “이장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서울 시민”이었다. 그러나 “밤의 코끼리를” 반려로 들이면서 지금까지의 ‘나’의 일상은 “기괴한” 것으로 전이된 채 성적 취향도, 소속도, 신분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이름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점차 코끼리의 외형(“코”ㆍ“다리”ㆍ“상아”)을 닮아가고 생활적이고 문명적인 삶을 전복시키길 욕망(“은행에 가서 계좌를 해지하고 회사에는 사직서를 발송하고 휴대전화를 밟아 부숴버리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 되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아직 욕망에 불과할 뿐(“나는 코끼리의 커다란 꿈속/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쿵쿵/ 코끼리답게 도착하였다”가 “쿵쿵/ 코끼리답게 떠나”가는 욕망의 태도는 백일몽처럼 흔하다. “밤이 새도록 코끼리를 추격”하여 “창을 던”져 잡은 “코끼리의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그러므로 욕망을 현재화하려는 적극적인 방어라고 할 수 있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고 뼈는 곱게 갈아서” ‘나’는 “코끼리의 커다란 꿈속”을 벗어난다. 이로써 “드디어 나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코끼리의 생활이라고 자각하”게 된다. ‘나’는 ‘나’의 욕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비로소 “나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 곧 ‘나’ 자신의 “반려”가 되었다. 생활적이고 문명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나’를 통해 언제든 실현될 수 있는 ‘나’ 자신의 잠재태가 된 것이다.
인간들 간의 소통을 마다하고 자폐의 공간으로 “쿵쿵” 걸어 들어가는 저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시에서 방위의 문제를 생각나게 했다. 시의 주체가 인간이거나, 사물이거나, 관념이거나를 막론하고 그것은 대상과 함께 이동한다. “쿵쿵” 발소리에 들썩거려지는 몸을 잠시 돌려 다른 곳을 볼 때마다 새로운 시의 방위들이 죽죽 치달으며 생겨난다. 이렇게 생겨난 입체적이고 감각적이며 내면적인 시들이 유례없이 지면마다 “쿵쿵” 발자국을 찍어댄다. 현대시의 징후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운동이 이미 시작된 듯하다. ‘지구―인류―우리―너―혈연―나’로 이어진 이 글의 주제들에서 방위에 대한 조심스런 논의 속에 질문을 숨겨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글은 아직은 규명되지 않은 그 움직임을 ‘시의 방위’라는 그물로 쳐놓고 무엇이 잡힐까 지켜보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기다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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