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돈이 없어진다는 것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두려운, 비참한, 살아날
구멍 없는 지옥 같다는 걸 태어나 처음으로 깨닫고는 가슴에서 뜨거움이 복받친다. 속이 꽉 메어와 울고
싶어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쓴맛이란 이런 느낌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천장을 향한 채 빳빳이 굳어 나는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157
‘사랑’이라 썼더니, 그 뒤엔, 아무
말도 쓸 수 없게 됐다. 164
요즘엔
이미 황족도, 화족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차피
영락해갈 존재라면, 화려하게 사라지고 싶다. 172
음산하게
비가 내려,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마음이 착잡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은 방 앞 툇마루에 등나무 의자를 가지고 나와, 봄부터 뜨기 시작했다가 만 스웨터를
다시 떠보기로 했다.
옅은
자주색 바랜 듯한 실털에다 코발트 블루색 실을 섞어 스웨터를 뜰 생각이었다. 그 옅은 자주색 털실은
벌써 20년 전, 그러니까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어머니가 내 목도리를 떠주신 털실이었다. 목도리 끝이 두건처럼 되어 있어서, 장난삼아 그걸 머리에 쓰고 거울에 비춰보았는데, 꼭 꼬마 도깨비
같았다. 게다가 그 색깔이 다른 친구들이 두른 목도리와는 전혀 달라서 난 너무 싫었다. 어느 날, 간사이 지방의 부잣집 자식인 동급생이 “멋진 목도리를 하고 있네”하고 어른스런 말투로 칭찬해주었는데, 그 소릴 들으니 더 부끄러워서 그 이후론 한번도 이 목도리를 한 적이 없었고,
그냥 궤짝 속에 집어넣어두었던 것이다. 그것을 올 봄. ‘재활용’이란 명목으로 꺼내서 한줄 한줄 풀어 내 스웨터를 만들 생각으로 다시 뜨기 시작했다가, 아무래도 이 바랜 듯한 색 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풀어버렸는데, 오늘은
별로 다른 일을 할 기분이 나지 않아, 다시 그걸 끄집어내 천천히 떠보는 것이다. 그런데 뜨개질을 하는 동안, 나는 이 옅은 자주색 털실과 비를 머금은
잿빛 하늘이 한데 어울려,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하고 마일드한 배합을 만들어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몰랐다. 옷은 하늘색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조화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인지, 새삼
놀라 잠시 멍했다. 비를 머금은 잿빛 하늘과 옅은 자주색 털실, 이
두 가지를 조합하니 두 색이 동시에 생생하게 살아나 신기하기까지 하다. 손에 쥐고 있는 털실이 갑자기
아주 따뜻하고, 차가운 하늘색도 벨벳처럼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색깔은 모네가 그린 안개 속 사원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이 털실 색깔 덕분에 비로소 ‘좋은 취향’이라는 게 뭔지 알게 된 것 같다. 좋은 취향. 189,190
하지만
난 살아나가야 한다. 어린애일지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아아, 어머니처럼,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증오도 원망도 없이 아름답고 가련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우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남는 다는 것. 그건 너무나 추잡하고, 생피 냄새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일이란 생각도 든다. 255
날이
밝아오네. 긴 얘기 읽느라 고생했지,
그럼, 안녕.
어젯밤의
술기운은 이제 싹 가셨네. 난 맨 얼굴로 죽어.
다시
한번, 안녕히.
누나.
난
귀족이야. 296
첫댓글 모든 불화의 경계에는 화해의 가능성이 얼룩덜룩 잠입해 있고, 모든 갈등에는 이미 극복의 단초가 담겨 있다. 단, 그것이 '취향'의 문제가 아닐 한에서만 그러하다. 취향, 그것(곳)에 궁극의 진실이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