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없는 사랑은 없다 2 - 20240319 정호승 대구문학관에서 강의한 내용
시인
혹한이 몰아닥친 겨울 아침에 보았다무심코 추어탕집 앞을 지나가다가출입문 앞에 내어놓은 고무함지 속에꽁꽁 얼어붙어 있는 미꾸라지들결빙이 되는 순간까지 온몸으로시를 쓰고 죽은 모습을꼬리지느러미를 흔들고 허리를 구부리며길게 수염이 난 머리를 꼿꼿이 치켜든 채기역자로 혹은 이응자로 문자를 이루어결빙의 순간까지 온몸으로진흙을 토해내며 투명한 얼음 속에절명시를 쓰고 죽은 겨울의시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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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아니다. 시는 살아가는 데는 식량이 되지 못해도 죽어가는 데는 위안이 된다.’ 내가 경희대 국문과에 다닐 때 뵈었던 시인 조병화 스승의 말씀이다. 시가 죽어가는 데에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된다는 것,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도 이제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스승의 말씀처럼 죽어가는 데에 조금 위안을 얻기 위하여 시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일이 무엇을 이루는 일이 아니듯, 시 또한 무엇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로서 현실적인 무엇을 이룰 생각은 없다. 그래서 가능한 한 시를 '잘 써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시가 잘 써지지 않고 시를 망칠 때가 많다. 더구나 인생을 잘 살지도 못하면서 시만 잘 쓸 생각을 하면 그것 잘못이다. 시인이 죽으면 대표작 한 편이 남는다고들 한다. 언젠가 '대표작을 남을 시만 먼저 써버리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아도 될 텐데'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평생을 바쳐야만 대표작 한 편이 겨우 남는다. 내게 시를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평생을 바쳐야 한다는 것만은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차나 한잔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눈을 없애고찻잔에서 우러나는 작은 새 한마리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지금까지 곡우를 몇십 년 지나는 동안찻잎 한번 파본 적 없고지금까지 우전을 몇 천 년 만드는 동안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마침내 귀를 없애고지상에서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홀로 잠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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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를 들면서 화를 내본 적이 없다. 어떤 일로 화가 나있더라도 차를 드는 동안에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아버린다. 내가 드는 한잔의 차가 남에 대한 미움과 세상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없애버린다. 차를 즐긴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긍정의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차는 침묵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차를 들면서 말을 하지 않게 되는 내가 참 좋다. 시는 침묵으로 이루어지고, 침묵은 나를 시인답게 만들어준다. 결국 차는 나를 홀로 있게 해준다. 홀로 있어야 시를 생각할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다. 시는 홀로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차를 드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다.
나는 요즘 차를 들면서 지난날의 실패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지금 현재를 생각하려고 해도 과거로 돌아갈 때가 많다. 그럴 때 굳이 과거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속 차를 들고 있으면 내가 끌려갔던 그 과거의 분노와 상처에 대해 그만 무덤덤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차는 내 마음속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듯 내 과거를 현재의 세계와 중화시킨다. 강물이 바닷물을 만나면 결국 바닷물이 되어버리듯 차를 드는 동안 나는 과거에 있는듯하지만 늘 현재에 있다. 미움도 중오도 상처도 분노도 없는 현재의 세계로 인도하는 차 한 잔의 손길이 어찌 고맙지 아니하랴.
수의(壽衣)
내 수의를 내가 입기로 했다평소에 내 옷을 내가 입었듯이수의도 나 스스로 입기로 했다도대체 남이 입혀주는 것은마음에 들지도 않고 믿을 수가 없다평소 즐겨 입던 감색 양복에검붉은 넥타이를 단정히 매면수의를 입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을 것이다만일 평소 입던 양복을 입지 못한다면안동포로 만든 수의를 입어야 한다면나는 수의를 두번 이상 입기로 했다수의를 두번 입는 사람은 없지만누구나 일생에 오직 단 한번만 입지만애써 마련한 수의를 단 한번만 입는다면그 비싼 옷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수의도 주머니가 달린 수의를 입을 것이다.원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만그동안 내가 받은 사랑을양쪽 주머니에 듬뿍 넣어 갈 것이다.내가 용서하지 못한 용서는 물론이고나를 용서해야 할 사람이용서하지 못한 용서도 넣어갈 것이다-----------------
망자(亡者)의 옷이다. 죽음을 맞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드레스 코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지켲주는 소중한 옷이다.수의를 두 번 입는 사람은 없다. 일생에 단 한 번, 단 한 번 만든다. 그것도 스스로 입지 못하고 남이 입혀주어야 한다. 비록 삼베로 만든 수의라 하더라도 평소처럼 입고**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수의는 한번 입으면 입은 채로 그 속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어야 한다. 비록 화장장 화구 속으로 들어가 한순간에 타버릴 옷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까지 인간은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떤 수의를 입고 갈 것인가?
세상 모든 옷에는 대부분 주머니가 있다. 그러나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망자의 옷이기에 무엇을 넣고 갈 주머니가 필요하지 않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돈이나 재물을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수의에 주머니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수의에 주머니가 있어 꼭 넣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살아오면서 내가 남에게 준 사랑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받은 사랑, 그 사랑은 죽어서도 고이 가지고 갈 필요가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도 부모의 사랑에 의해 태어나지만 죽을 때도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죽는다. 특히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받은 한없는 사랑, 그 귀한 것을 두고 가는 것보다는 수의 주머니에 가득 넣어 가는 것이 좋겠다.
또 하나 수의에 넣어 갈 것은 용서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못한 용서는 물론이고 내가 남한테 청하지 못한 용서를 수의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가야 한다. 특히 남이 나를 용서하지 못한 용서를 수의 주머니에 담아 감으로써 남이 편안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저승에 가서도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남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혹시 내 생각에 긍정하시는 분은 수의에 주머니를 꼭 달아달라고 청해보면 어떨까? 그래야 살아 있을 때의 사랑과 용서를 지니고 천국에 갈 수 있다.사랑을 넣는 주머니, 그게 바로 수의 주머니다.
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묵묵히 무릎을 꿇고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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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자고상(苦像)을 좋아한다. 사는 일이 어렵고 힘들 때 묵묵히 십자고상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신앙을 지녀서가 아니라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큰 위안을 받게 되고 마음이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집 안방이나 거실뿐만 아니라 책상 위에도 십자고상은 항상 놓여있다.
"호승 군, 자네의 고통이 아무리 견디기 어렵다 한들 어디 나만큼이나 하겠는가?“
십자고상을 바라보면 예수는 늘 내게 그렇게 말한다. 어떤 때는 슬며시 십자가에서 내려와 내 어깨를 몇 번 툭툭 치거나, 아버지처럼 나를 안아주고는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떨군다.
나는 한때 그를 미워한 적이 있다. 언제나 완전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너도 나와 같이 하라고 억압하는 것 같아 싫었다. 용서와 사랑의 구체적 표상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아 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힘껏 도망쳐 봐야 돌아보면 늘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내 가장 가까운 이웃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 또한 그들로부터 사랑받고 용서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는 한심한 존재였다. 예수가 내게 보여준 사랑의 가르침을 당의정처럼 포장만 하고 있었을 뿐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없었다. 가슴속에 타오르는 미움과 증오의 불길을 꺼버릴 수 없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게 바라는 것을 내어주지 못했다.
화해의 삶보다 화해의 삶보다 갈등의 삶을 주고, 그 갈등을 통해 내가 지닌 사랑의 크기를 가늠해보는 것 같아 예수에 대한 미움은 배가되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가운데 착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면 '아,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게 하셨구나' 하고 감사하게 되지만, 남을 무시하고 짓밟고 절망과 고통 가운데로 집어던지는 악한 사람들을 보면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기도를 거둬들이고 의심하였다. 하느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사랑의 절대적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의 아들을 내 삶의 표상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를 바라볼 때마다 그가 특별히 나를 사랑하는 것 같아 기쁘다. 비록 그가 내게 견딜 수없는 고통을 주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늘 나와 함께 있어주어 외롭지 않다. 만일 내 곁에 십자고상이 없다면 나는 늘 허전하고 외로울 것이다. 밥을 먹었는데도 늘 배고파 할 것이다. 물을 먹었는데도 늘 목말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가족 없는 집에 혼자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십자고상은 늘 내 책상 위에, 내 방 벽에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별밥
하늘의 우물에는 별이 많다어머니가 우물가에 앉아 쌀을 씻으시면서쌀에 아무리 돌이 많아도 쌀보다 더 많지 않다물끄러미 어린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지만나의 우물 속에는 언제나 쌀보다 별이 더 많았지금도 나는 배가 고프면하늘의 우물 속에 깊게 두레박을 내리고별을 가득 길어 밥을 해 먹는다가끔 구름도 섞어 별밥을 해 먹고그리운 어머니를 찾아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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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에 쌀보다 돌이 많으면 그것은 이미 쌀이 아니라 돌이다. 그것으로 밥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쌀밥이 아니라 돌밥이다. 그런데 누가 쌀밥을 먹지 돌밥을 먹으려 하겠는가. 그러니까 쌀에 아무리 돌이 많아도 쌀보다 돌이 더 많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삶에 쌀보다 돌이 더 많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내 삶이라는 쌀로 밥을 지으면 꼭 돌밥이 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불행과 고통이라는 돌이 행복과 기쁨이라는 쌀보다 더 많다고 내 인생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가득했던 때가 있었다. 나 자신조차 먹을 수 없는 밥을 해서 도대체 누구보고 먹으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쌀밥이 아니라 돌밥을 먹게 하느냐고 절대자를 원망하고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한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게 어떠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이제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는 일이 나한테도 어김없이 일어나는구나, 인간의 불행은 순서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일어나게 돼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남의 불행이 바로 나의 불행이며 내 삶에만 불행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릴때 어머니가 쌀을 일어 돌을 골라낸 것처럼 원래 쌀에는돌도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쌀에 돌이 많다 해도 쌀보다 돌이 더 많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쌀에 아무리 불행과 고통이라는 돌이 많아도 행복과 기쁨이라는 쌀보다 더 많을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맛있게 쌀밥을 먹을 때 실은 쌀에 원래 있었던 돌과 함께 먹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면서 평탄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지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통과 불행 속에서 한 생을 살기 마련이다. 만일 고통 없는 삶을 바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이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피하면 피할수록 더 피할 수 없는 게 고통이다.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만 주어져 있을 뿐 우리는 결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한때는 내게 고통을 주는 어떤 절대적 행위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원망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은 고통의 방법이다. 죽는 순간까지 내게 고통이라는 밥과 물이 필요하다면 거기에 마땅히 동의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꽃을 보려면
꽃씨 속에 숨어 있는꽃을 보려면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리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잎을 보려면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어머니를 만나려면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꽃을 보면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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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잎은 씨앗에서 비롯된다. 씨앗은 생명의 근원이며 본질이다. 씨앗이라는 열매 속에는 꽃과 잎과, 그 꽃과 잎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이 숨어 있다. 그런데 씨앗 속에 숨어 있는 꽃과 잎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급한 나머지 씨앗을 칼로 쪼개고 돌로 깨뜨리면 볼 수 있을까. 아니다. 씨앗을 쪼개고 깨뜨린다고 그 속에 꽃과 잎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하늘과 땅의 호흡이 하나가 되어 무심할 때, 하늘과 땅이 한마음이 되어 무심히 시간의 흐름을 인내하고 기다림을 다할 때 비로소 씨앗은 마음을 움직여 꽃과 잎으로 태어난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그 누구의 사랑이든 기다림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다릴 줄 모르면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다. 꽃씨 속에 꽃의 기다림의 비밀이 숨어 있듯이 사랑에도 인간의 기다림의 비밀이 숨어 있다. 어쩌면 그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인생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부모자식 간에 부부간에 연인 간에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 때문에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기다림의 인내를 포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을 꽃 피우고 싶은 꽃씨든, 그 꽃씨가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인간이든 서로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어떤 존재든 자신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수적 요소다. 기다림 없이 완성되는 존재는 없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라는 씨앗도 시인의 마음 밭에 뿌려져 싹트기를 기다린다. 시인도 그 씨앗이 자신의 마음밭에서 싹트고 자라 시를 쓰게 되기를 기다린다. 일상 속에 뿌려진 시의 씨앗이 발아되기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시 쓰기의 첫 단계다. 시의 씨앗이 인간의 눈물과 고통과 한데 어우러져발아되는 순간을 기다릴 줄 모른다면 시로 탄생될 수 없다. 시 역시 땅속에 있는 하나의 씨앗이 하늘과 함께 어우러져 무위의 마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