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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국총 지국총 어와....
보길도에 다녀오다
남녘의 봄소식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 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여진다. 관련된 책자를 이리저리 넘기다가 인터넷을 누비며 여기다 하는 곳에 눈을 멈춘다.
2010년 2월 28일과 3월 1일은 대학 동창 4쌍의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한 날이다. 남녘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며 다녀왔다.
◇. 해남에는 천일식당이 있다.
동마산 톨게이트에서 대구, 경주, 부산, 창원서 온 4쌍의 부부가 2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탄 후 광양을 지나 순천 톨게이트에서 남해안 고속도로를 벗어나 순천 시내-벌교-보성-장흥-강진, …… 등을 거쳐 해남으로 향했다.
인터넷이 사람 잡는다더니, 인터넷의 홍보 효과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인터넷 덕분으로 초행이지만 네비게이션에 이끌려 무사히 해남 천일식당에 도착했다. 해남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순례지처럼 들르는 곳이 바로 해남읍내의 천일식당이라고 하니 나라고 안 들를 수 없었다, 동마산 톨게이트에서 3여 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은 해남읍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해남시장 입구의 천일식당 부근이었다. 네비게이션은 더 가자고 하는데 운전석에서 보니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차를 멈췄다. 네비게이션에 나타난 천일식당과의 거리를 보니 불과 수십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차를 멈춘 곳이 마침 커다란 주차장이기에, 그리고 무료 주차장이라고 하기에 차를 주차하고 천일식당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하고 두리번거렸더니, 바로 눈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는가? 우리 일행도 그곳으로 갔다. 그 곳이 다름 아닌 바로 천일식당이었다. 조그마한 한옥집이었다.
그 때의 시간이 11시 50분경, 벌써 많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은행에서처럼 대기표를 빼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번호표가 순식간에 빠져 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서둘러 번호표를 뺐다.
<천일식당 ☎(061) 536-4001 / 535-1001>
이 식당은 1924년부터 해남읍 읍내리 34번지에 터를 잡고 86년 동안 한정 식당을 경영해온 터라 해남을 들러 가면서 천일식당을 그냥 지나친 사람은 식도락을 모르는 사람 축에 들 정도로 해남의 영빈관(迎賓館)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고 한다. 특히 ‘돈배 젓(창젓), 토화젓, 게젓, 멸치젓, 어리굴젓, 명란젓, 갈치젓, 석화젓, 전어밤젓, 밴댕이젓’ 등이 별미로 유명하며, 모든 젓갈의 재료는 제철일 때 구입해서 사용한다고 했다. 또한 천일염으로 잘 삭힌 후 필요할 때마다 직접 양념을 해 손님상에 올린다. 여기에 동치미, 배추김치, 시금치, 깍두기, 명태무침, 미역튀김, 도토리묵, 갈치조림, 꼬막, 마늘장아찌가 곁들어지고 불고기, 잘 다져낸 떡갈비가 나온다. 이집의 떡갈비는 배 즙, 참 다래, 참기름, 마늘, 생강, 파다짐 등 20여 가지의 양념을 넣어 한나절쯤 재운 뒤 다시 뼈 위에 살을 원위치 시켜 약한 숯불 위에서 석쇠로 구운 것이라 했다.
“하루에 갈비 160근 정도가 나가요. 쫀득함의 비결이 뭔지 아세요? 갈비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가로, 세로 수십 번, 수백 번 칼질을 하는 거예요. 기계로 갈면 뭉쳤을 때 공간이 좁아 맛이 없어요. 그 다음 직접 담근 조선간장과 나주배로 맛을 내고 하루 정도 숙성을 시킵니다.”
천일식당이 떡갈비와 젓갈로 전문화되고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박성순 씨의 며느리 이정례 씨부터였다고 한다. 떡갈비를 주 메뉴로 한 고급 한정식의 모습도 이때 갖추었다고 한다. 현재는 3대째 오현화 씨(52)로 이어진 젓갈 맛은 해남의 전설이 되었다.
“봄이면 간장, 된장 담그고 겨울엔 김치, 제철마다 젓갈 삭히고, 매일매일 반찬 20여 가지 만들고 그렇게 21년을 보냈네요.”
대학을 나올 당시 오현화 대표는 '캠퍼스 퀸'이라 불릴 정도로 멋쟁이였다. 게다가 교장인 할아버지와 교수 아버지를 둬 교육자 집안이라는 후광도 있었다.
“남편이 좋아 결혼했죠. 식당으로 시집을 오니 시부모님을 안 도울 수가 있나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몸빼바지'를 입고 주방으로 갔죠.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때는 식당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고개만 넘으면 날아갈 것 같았어요.”
호되게 배운 공부가 오래도록 남는다고 했던가. 최고의 대박 비결은 직접 담근 ‘조선간장!’ 시어머니에게 전수받은 간장은 ‘천일식당’ 맛의 비결이다.
“식당들이 주로 달달한 맛 때문에 왜간장을 쓰는데 그러면 깊은 맛이 안나요. 저희는 직접 담근 조선간장을 사용해요. 그래야 음식 맛이 살아나죠.”
휴가철에는 위치를 묻는 전화에 답하다 목소리마저 쉴 정도며, 예약을 한 손님들도 한참을 기다려야 떡갈비를 먹을 수 있지만 기다리는 동안도 불편해 하지 않고 먹고 나서는 ‘역시! 해남의 천일식당 떡갈비가 최고’라는 말 한마디가 천일식당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장갑차를 타고 오셨죠.”
‘천일식당’의 지배인 박남수 씨(57)는 그 날을 회상했다. 1960년대 어느 날 식당 앞이 시끄러웠다. 갑자기 장갑차와 군인들이 몰려 온 것이다. 박 씨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식당 사람들의 몸수색을 철저히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별 4개가 달린 모자를 쓴 군인이 들어왔어요. 그 분이 박정희 전 대통령님이었어요.”
20여 가지가 넘는 맛깔스런 반찬과 한우로 만든 떡갈비. 거기에 직접 담근 깔깔한 다섯 가지 젓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가실 때 ‘맛있게 잘 먹어서 기분이 좋다.’며 팁까지 주셨습니다.”
단골손님으로 총리는 기본, 대통령은 배달까지 주문한다.
김종필·고건·이수성, ……, 등의 전 국무총리는 물론이고 한류스타 배용준 등 각계각층의 손님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했다. 특히 미식가로 소문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별히 배달주문까지 한 적이 있다.
“신민당 총재 시절에 해남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수행원이 너무 많다고. 배달을 좀 해줄 수 없냐고 전화가 왔죠. ‘천일식당’이 떡갈비를 배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미어터지는 손님들 덕분에 오현화 대표는 행복하다. 하지만 고민도 많다.
“저희 집에 오시는 분들은 조미료를 쓰지 않는 '옛날 밥상'을 원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자연산 식재료가 귀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때가 가장 가슴 아파요.”
거의 30여 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우리 차례가 되었다. 화려하지 않고 시골 그대로의 정성과 손맛이 담긴 음식, 총 29가지 음식이 나왔다. 장정 2 사람이 큰 상을 끙끙거리며 마주 들고 나왔다.
과연 매스컴이 극찬한 맛 집으로 수차례 방영될 만했고,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 명소다웠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옥에도 티가 있다 할까? 1인분에 20,000원 가량이나 되는 가격에 떡갈비의 양은 너무 적었고, 친절 면에서도 아쉬움이 있었다. 어느 식당에 가도 후식으로 커피 한 잔은 기꺼이 손님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천일식당에서는 대문 밖의 자판기에서 빼먹으란다. 그것도 1 잔에 300원이나 주고. 또 식사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해야 음식 맛도 음미하고 소화도 잘 되어 식도락의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먹는다라기보다 퍼 넣듯이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 등의 일로 인해 개운한 기분만은 아니었다.
◇. 한반도를 휘돌아 온 기세가 마침내 정점(頂点)을 이루는 곳. 땅끝!
점심 식사 후 곧 바로 땅 끝 마을로 향했다.
전라남도 해남 땅, 반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이 땅끝은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힘든 곳이다.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사실 그래야 땅끝이라는 곳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여길 찾는 이들은 이 동네를 갈두리, 혹은 갈두마을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저 땅끝 하면 다 통한다.
<땅끝 마을 안내비>
해남읍에서 13번-77번 국도를 이용했다. 땅끝에 이르는 바닷길 드라이브는 즐길 만했다. 거의 한 시간가량 걸려 상상의 나래를 접은 땅끝마을!
땅끝마을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다. 방방곡곡을 다니다보면 두 번째, 세 번째 가보는 곳도 있고, 시간이 쌓여갈수록 여행지에 대한 새로운 설렘보다는 추억의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차피 여행이라는 건 또 다른 기억을 켜켜이 쌓아가는 행위니까.
한 십년 전 쯤, 땅끝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동료 선배 부부와 왔다. 그 때는 여름이었다. 강진, 해남 등지를 떠돌다 땅끝마을까지 왔을 때는 더 이상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지금은 곳곳에 음식점이요, 모텔이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개발이 덜 되었고 정비도 덜 되어 어수선했다. 모텔도 몇 군 데 없었다. 그래서 방 때문에 고생할까봐 급히 방을 얻어 여장을 푼 기억이 난다. 저녁으로 회를 먹었는데 진짜 자연산회라고 여겨지는 회였다. 너무 맛있었다. 그 맛에 취해 우리는 평소와는 달리 모두 진탕 먹고 취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 때 어떤 사정으로 인해 우린 보길도행 배를 타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이후 항상 ‘보길도’, ‘보길도’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던 터였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 다시 땅끝마을을 찾고 보길도로 향하게 한 것이다.
실질적인 우리나라 육지의 땅끝, 거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법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곳이다. 그러다 막상 현장에 가보면 ‘이게 뭐야……’ 하면서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사실 ‘땅끝’이라는 의미와 이미지를 갖고 가는 곳이지, 신기하고 멋진 볼거리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가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땅끝에서 실망하지 않을 곳이 있다. 천지(天池)에서부터 치달려온 백두대간(白頭大竿)의 숨찬 호흡을 길게 내쉬며 발을 멈추고 화룡점정(畵龍点晴)하듯 마지막 획을 찍는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을 찾을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이곳, 하지만 땅끝은 단순한 끝이라는 의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곳은 바로 대륙문화(大陸文化)가 유입된 길목이다. 또한 땅끝권은 한반도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장엄한 일출과 아름다운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송호해수욕장과 사구미 해수욕장 및 드라마 허준 촬영지로도 관광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로 마을 뒷산 사자봉의 전망은 무어라 표현 할 수 없이 장관을 이룬다. 땅끝마을에 가서 이 사자봉에 오르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선언을 하고 싶을 만큼 이 사자봉의 전망은 땅끝마을의 거의 모든 것이다. 사자봉 정상 부에 세워진 땅끝전망대, 이 동네 뒷산 사자봉(해발 156.2m) 중턱의 주차장에서 약 400m를 걸어가면 바로 전망대에 닿는다. 그런데 요즘은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기도 하고 나무다리 또는 나무계단을 밟으며 전망대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 운치를 더 했다. 우리는 나무 계단을 밟으며, 계단 곳곳에 설치해 둔 각 시도의 안내판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지리 공부를 하면서 전망대에 올랐다.
예전에 왔을 때에 있었던 당시의 작고 초라한 전망대는 사라지고 봉화의 불꽃을 연상시키는 높이 약 40m의 멋들어진 전망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이는 2001년 12월 31일에 새롭게 단장하여 준공했다고 한다. 지하 1층, 지상 9층의 이 전망대는 지하에 레스토랑 ‘토말’이 있고, 2층과 5층, 7층, 9층 모두 전망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중 2층은 야외전망대이다. 이 전망대의 전망은 이곳이 땅끝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더욱 장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2002년 1월 1일, 새해의 첫날, 첫손님을 맞았다는 것을 새로운 전망대의 설립 의의 중의 하나로 자랑하기도 했다.
<멀리 사자봉과 전망대가 보인다>
그리고 요즘엔 땅끝전망대 한 장소에서 해돋이 해넘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저녁의 사자봉은 서쪽으로 지는 해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어둠속으로 침몰하고, 아침의 사자봉은 감추어진 해가 동쪽에서 다시 나타나며 함께 빛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장소에서 일출과 일몰이 가능한 곳이 참으로 드문 데도 땅끝전망대는 이를 모두 갖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전망대 아래에 세워 둔 ‘토말비’에선 이렇게 이야기한다.
"태초에 땅이 생성되었고 인류가 생겨났으며 한겨레가 국토를 그어 국가를 세웠으니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봉이니라…."
얼마나 시원스럽고 호기 넘치는 선언인가. 하나의 산줄기로 이어진 하나의 민족임을 당당히 선언하는 말이다. 비록 반도에 국한된 개념이기는 하지만 바로 이곳의 시원스런 전망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말인지 이곳 전망대에 섰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로지 북쪽을 제외하고 동, 서, 남쪽이 모두 바다로 트인 사자봉 정상, 30여 개에 가까운 섬들이 발치에서 멀리까지 조망되는 곳, 옛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호연지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인 것이다.
토말비에 새겨진 땅끝 내력이 전망대와 토말비, 그리고 토말비에서 약 500m를 내려가면 역시 2001년 12월 31일에 준공한 바다를 바라보는 삼각탑의 모양을 한 땅끝탑이 서로 잘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이 사자봉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토말비’도 이젠 땅끝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제안해 본다. 내겐 ‘토말’이라는 한자어가 왠지 낯설고 거슬린다. 그건 아마 땅끝이라는 말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땅끝이라면 바로 그 의미가 머리에 떠오르는데 반해 토말이라고 하면 어감부터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땅끝마을 앞바다의 분재바위와 장구바위>
<사자봉의 전망대에 바라본 탕끝 마을 앞바다>
끝은 끝이되 다시 바다로 열려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게 되는 땅끝마을과 사자봉, 해돋이와 해넘이가 같은 장소에서 가능한 곳, 한눈에 들어오는 삼면의 호쾌한 전망, 바로 이 땅끝 관광을 마치고 고산 윤선도 선생께서 18번이나 머무르셨다고 하는 보길도로 향했다.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가는 선착장이다. 보길도(甫吉島)는 완도에서 32km, 해남 반도의 땅끝에서 12km 떨어져 있는 섬이다. 땅끝마을(갈두리)에서 노화 신양진항, 보길도로 가는 선편은 카페리로서 하루에 십 수 차례 오갔다. 배삯은 1인당 5,300원, 승용차는 10,000여 원(매표소:061-533-4269)이었다.
우리는 타고 온 차를 배에 실었다. 그리고 보길도 관광 후에는 보길도에서는 완도 화흥포로 나와 완도로 해서 부산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보길도에 가는 카페리호>
◇. 특별한 이름이 없는 길가나 해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곳, 보길도!
보길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속한 섬으로, 완도 남서쪽에 있는 노화도에서 약 3.8㎞ 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노화도·소안도를 비롯한 큰 섬과 예작도·장사도 등의 작은 섬들이 있다. 면적은 19.32㎢, 해안선 길이 41㎞이고, 2004년 통계에 의하면 인구는 2,978명, 가구수는 1,113호이다. 섬의 명칭은 섬 내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뜻(十用十一口[甫吉])으로 보길도라 했다고 한다.
유물·유적으로 부용동정원(芙蓉洞庭園: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을 비롯하여 윤선도가 세운 세연정(洗然亭), 선백도 바위에 새겨진 송시열비(宋時烈碑), 보길나루에서 발견된 조개더미, 예송리에서 채집된 유경역자식석촉(有莖逆刺式石鏃) 등이 있다.
<보길도 및 그 주변 안내도-주위에는 노화도·넙도·소안도를 비롯한 큰 섬과 예작도·장사도 등 작은 섬들이 있다>
뱃전에서 무청처럼 푸른 바닷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포말을 일으키며 힘차게 달려가는 거선의 기관에 한없는 박수를 보낸다. 2월 바다의 찬 기운에 몸을 오싹 움츠린다. 고산 선생께서 보길도를 찾았을 때는 노젓는 돛단배에 몸을 맡겼으리라. 돛단배를 타고 가는 고산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거기에 비하면 거선의 기관에 의해 미끄러지듯 가는 배를 타고 안락하게 여행하는 내가 비록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지만 옛 양반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문명의 혜택으로 임금도 누리지 못한, 아니 상상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노화도와 보길도의 모습, 저 멀리 연륙교인 보길대교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어느덧 배는 노화도의 신양진항에 도착했다. 땅끝 마을에서 30여 분 간 달려 왔는가 보다. 배에서 차를 하차 시킨 후 어디로 먼저 갈까하고 고민했다. 노화도에는 둘러볼 만한 곳이 거의 없다고 하여 바로 보길도로 향했다. 노화읍을 지나자마자 보길도를 이어주는 대교가 있었다. 소위 연륙교인 보길대교였다. 그 모습이 아주 견고하면서도 아름답게 보였다.
♧. 먼저 윤선도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일찍이 고산 윤선도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이곳 동명(洞名)을 부용동이라고 명명하고 머물 것을 결심했던 곳이다. 10여년을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재 등 건물 25동을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그의 유명한 작품 ‘어부사시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보길도 여행은 크게 3 가지 코스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세 개의 코스를 먼저 소개하면,
1코스 : 보길도 청별항-통리해수욕장-중리해수욕장-우암 송시열 글씐바위-예송리 해수욕장
2코스 : 보길도 청별항-세연정-고산문학체험공원-동천석실-낙서재, 곡수당
3코스 : 보길도 청별항 망끝 전망대-뾰족산-보옥리 공룡알 해변이다.
우리는 이 세 코스를 모두 탐방했다.
<보길도 관광 안내도 2>
보길도에 들러 꼭 가보아야 할 윤선도 유적지, 그런 곳이기에 우리들이 제일 먼저 들린 곳이다. 그 중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을 교묘히 접합시킨 조원(造園)으로, 자연못(세연지)과 인공못(회수담)을 태극무늬로 휘감아 돌리고 복판에 정자를 열십자각으로 지었다. 세연정 북쪽으로 네모난 인공 못인 회수담을 판 것은 못의 물을 오랫동안 가두기 위한 한 방책이기도 하다고 했다. 판속보에 막힌 물길이 세연정 북쪽 배수구를 지나 회수담을 감돈 다음 조그만 인공 도랑으로 빠지며 태극무늬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마련된 네모난 섬 위에 십자각으로 정자를 지어 두었다. 세연정 북쪽에 동대와 서대라는 두개의 무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기녀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관람하였다고 한다.
<세연정 조감도>
지금은 그 자리에 구불구불 가지를 드리운 여러 그루 나무들이 무희를 대신하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수량이 많지만 겨울에는 비교적 수량이 적은 세연지에는 칠암이라고 부르는 큰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이름들이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 거리로 손색이 없다.
<세연정>
<혹약암(或躍巖)>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혹약암(或躍巖)'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하다하여 혹약암이라 불리는데, 그 자세를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세연정에 오르게 만들었다는 비홍교>
세연정을 나와 동천석실로 향하는 길목에는 고산문학체험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고산 선생의 문학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어부사시사 돌길을 비롯해 죽림욕장, 고향사랑 돌탑전 등 8개의 체험코스로 꾸며져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읽어가며 손질 안 된 주변을 청결하게 하기도 하며 새싹을 틔운 쑥을 캐기도 했다.
동천석실과 낙선재, 곡수당으로 가는 길이 낯설고 시간이 없어 저기 있다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곳에 관련된 이야기만을 서로 나누었다.
<동천석실에서 내려다본 마을전경>
산 중턱 바위산에 조그맣게 지어져 있는 것이 동천석실이라 했다. 동천석실의 정자는 단칸집으로서 기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관상용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동천석실은 이름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하늘이 바라다 보이는 돌로 만든 집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동천석실 바로 아래쪽 석담은 바위를 쪼아서 석간수를 저장하도록 하였는데, 수량이 많아지면 이곳에서 화사하게 연꽃이 피어오른다고 했다. 그 옛날 윤선도는 동천석실에 도르래를 설치하여 이곳에서 먹을 수 있도록 음식 등을 날랐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며 음식과 차를 즐겼다면, 그것이야말로 가히 신선의 생활이라 할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낙서재로 가는 길가에 동백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보통 동백은 겨울이 한창이지만 이곳 동백은 3-4월경에 가장 아름답게 핀다고 한다. 낙서재는 이름의 의미대로 독서를 즐기는(樂書) 곳이다. 16 ~17세기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마을과 떨어져서 책을 읽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낙서재와 동천석실은 서로 마주보고 있어, 유생들이 책을 읽다가 잠시 피로해지면, 산책삼아 동천석실에 오르면 적절한 운동도 되어 제격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곡수당은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낙서재와 곡수당 모두 아직은 터만 남아있다. 수 년 내에 복원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한다.
♧.곡수당의 이야기를 끝으로 제 3코스인 망끝전망대로 향했다,
공룡알만큼 소담하고 큼직한 돌들이 깔린 공룡알해변으로 가는 길에 망끝전망대가 있다고 했다.
<망끝전망대에서 바라본 일몰>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는 망끝전망대!
마침 해가 지려는 시간이라 보길도 석양의 아름다움에 맘껏 취하고 싶어 열심히 차를 몰았다. 그런데 그곳 전망대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하여 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보길도의 석양을 못 보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가득 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보옥리 공룡알 해변을 찾았다.
<공룡알 해변>
망끝전망대에서 차로 한 5분 달렸을까? 조그마한 마을이 나오고 그 마을의 안길 좁은 도로로 따라 갔더니 해산물을 말리는 넓은 광장이 나왔다. 그 광장을 따라 바다를 향해 계속 갔다. 드디어 망망대해를 앞마당으로 삼아 펼쳐진 공룡알 해변이 눈을 유혹했다. 여름에는 해수욕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잘 갖춰 두었다. 그리고 자갈돌들이 정말 공룡알만하니 큼직하고 소담하다. 통리, 중리 해수욕장의 모래사장과 예송리 해변의 작은 돌들과 공룡알해변의 공룡알만한 돌들이 한 섬, 보길도 안에 그득하니, 이것이 보길도의 보물이요, 자랑이라 싶었다.
<이름 그대로 뾰족한 모양인 보죽산>
공룡알해변에서 잠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른편에 뾰족하게 서있는 산이 있었다. 이 산을 뾰죽산이라고도 하고, 보죽산이라고도 한다 했다. 누구를 위협하려고 저렇게 뽀족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지? 아마 이기심에 눈이 어두운 우리 인간에게 경계하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 뽀족히 서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미리 예약해 둔 보길도의 전남 완도군 보길면 청별리 1-32번지 보길면 소재지에 있는 ‘보길도의 아침(061-554-1199)’이라는 상호를 단 모텔로 향했다. 이름이 아름다워 예약했더니 이름만큼이나 주인도 예쁘고 친절했다.
저녁으로 보길도의 자연산 회를 주문했다.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여행지의 특산물을 맛본다는 것이다. 비록 호주머니가 비어도 그 지방의 특산물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 항상 나의 지론이다. 사실은 나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의 성정이겠지. 자연산 회(膾)와 여러 가지 다양한 요리로 소주 한 잔 하면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남녀로 나누어 각자의 방으로 가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던 중 보길도의 전복 양식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관광했던 곳곳에 보이는 앙식장의 대부분이 전복 양식장이라 했다. 수 년 전부터 전복 양식을 시작했는데, 이제 이 보길도의 주된 소득원이라 했다.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보길도에 전복 양식하는 친구가 있는데, 혹시 보길도에 가면 자기에게 연락해라.’는 말이 전복 양식 이야기 중에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즉시 연락했다. 바로 가르쳐 주는 전화번호대로 전화했더니, 친구의 친구, 즉 전복 양식업을 하는 친구가 바로 달려왔다. 초면인데도 죽마고우처럼 반가이 대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이 늦어 내일 그 친구의 전복양식장으로 가기로 하고 잠을 청했다. 출렁거리는 파도 소리가 자장가 되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 오늘은 3월 1일 , 1박 2일의 마지막,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나, 모두들 일찍 잠에서 깨었다. 이제 나이가 들고 여수(旅愁)까지 겹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어제 저녁에 미리 주문해 둔 ‘전복죽’이 모두 준비되었다고 식당에서 연락이 왔다. 식당 주인이 입맛에 맞게 제법 잘 끓였다. 밤새 술을 먹어 입안이 껄끄러운데도 맛있었다. 모두들 한 그릇 먹고도 더 먹었다.
어제 저녁에 약속한 대로 전복 양식하는 친구 집으로 가려 했더니, 그 친구가 우리를 안내한다며 먼저 숙소에 왔다. 여장을 챙기고 우리 모두는 따라 나섰다. 전복 양식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하며, 그런데 그는 우리가 상상한 곳인 전복 양식장이 아닌 별로 멀지 않은 전복을 파는 상점으로 안내했다. 아쉽지만 상점의 수족관에 있는 전복만 구경하고 마리 당 몇 천 원부터 만 원 이상이 되는 전복이지만 다른 어느 상점보다 쌀 거라고 믿으면서 싸다고 하면서 각각 1상자씩 샀다.
그리고 그 친구와 작별 인사한 후, 이곳 보길도의 마지막 관광 코스인 통리해수욕장-중리해수욕장-우암 송시열 글씐바위-예송리 해수욕장을 향해 떠났다.
< 한적하고 깨끗한 중리해수욕장 >
통리, 중리 해수욕장 역시 깨끗하고 한적한 해변이었다. 모두 모래사장 뒤편으로 길게 방풍림이 조성 되어 있었다. 송시열 글씐바위는 우암이 숙종 5년(1689)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귀향을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이를 피하려고 보길도에 내려서 며칠 머무는 동안에 새겼다고 한다. 얼마 전만해도 망게풀들 사이로 난 좁은 바위길을 따라 갔는데 이제 넓고 깨끗하게 단장한 길로 갈 수 있었다. 해안에 닿으니 송시열 글씐바위를 안내하는 비석이 보였는데, 막상 우암이 새겼다는 글씨는 조금 떨어져 있어 이것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찾는 자체가 보물찾기 놀이처럼 한 가지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깎아지른 석벽에 새긴 시는 탁본 자국이 아니면 찾기 힘들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한 숨 돌리기엔 뭐랄까, 너무 망망대해다. 송시열이 이 시를 새길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여든 셋 늙은 몸이 멀고 찬
푸른 바다 한 가운데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세 번이나 쫓겨나니 궁한 운수로다.
북녘 끝 부질없이 임을 우러르며
남녘 바다 바람 잦기만 기다리네
담비 갗옷 내리신 옛 은혜에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송시열 글씐바위와 탁본 자국>
글씐바위 가는 길에는 푸른 바다가, 글씐바위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얀 억새의 물결이 겨울인데도 출렁이고 있었다. 보길도를 윤선도의 유적지로만 알았는데, 우암 송시열의 흔적이 있어서 더욱 흥미를 더 했다.
예송리 해수욕장은 활시위처럼 휘어진 약 1km의 해변에 타조알 크기에서부터 바둑알 정도 크기의 까만 깻돌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었으며 해안선을 따라 많은 종류의 난대림 수종이 분포하여 자연 그대로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 난대림은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수령 약 300년을 자랑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드리워준다고 했다.
<예송리해변-까만 몽돌해변. 날 맑을 때는 추자도, 제주도가 보인다는 해변>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知者)는 요수(樂水)라 했지만, 나는 요산(樂山)하고 요수(樂水)하여 산에 오면 산이 좋고 물에 가면 물이 좋아 인자(仁者)인지? 지자(知者)인지? 알 수가 없구나. 그저 여행이 즐거울 따름이다.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곳은 보길도를 벗어나 노화도이다. 완도 화홍포항으로 나가기 위해 노화 동천항(문의 061-553-5635)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10시 40분이면 이곳 노화도를 또 다른 추억의 여행지로서 남겨 두고 완도로 떠나야 한다.
<전복 양식으로 유명한 노화도>
노화도!
노화도는 제2 목포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한 곳이다. 완도군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동으로는 소안도, 남으로는 보길도와 마주하고 있으며 42개의 자연부락과 38개(유인도 13, 무인도 25)의 섬으로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400여 년 전 염등리에 전주이씨가 입도하여 제염(소금생산)을 하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노화란 지명은 지금은 농경지와 염전으로 변한 염등리와 등산리 앞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어 노화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읍 소재지인 이포리에는 천주교 공소가 있으며 초등학교 4개소, 고등학교와 중학교가 각 1개소 있다. 노화도에도 신비의 바닷길이 있는데 사리 때면 당산리와 노록도를 잇는 1km의 바닷길이 열려 장관을 이룬다. 바닷길이 열리면 바지락과 꼬막, 낚지 등을 잡을 수 있다. 특산품으로는 전복과 김이 유명하며 특히 전복은 우리나라 생산량의 20%정도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저 멀리 여객선 한 척이 얼음 위에 미끄러지듯 양식장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며 달려온다. 우리를 태우고 완도로 나갈 배다. 운임이 해남 땅끝 마을에서 보길도로 올 때와 똑 같다. 완도까지 소요되는 시간도 거의 같은 35분 가량이었다.
<노화도 동천항에서>
화홍포항에서 완도로 나오니 좌측에 청해진 촬영 세트장과 완도 군청 소재지 근처의 장보고 기념관 등 장보고 유적지가 있었으나 다음 기회에 들리기로 하고 벌교로 곧장 달렸다. 지금은 벌교 꼬막의 전성기로, 그 꼬막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싶었다.
전에 친구들이랑 간 적이 있는 벌교 원조꼬막식당(061- 857- 7675)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손님이 넘쳐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란다. 잠시가 아니라 한참을 기다렸다. 어떤 집은 이렇게 손님이 넘쳐나고 어떤 집은 파리 날리고 있으니, 참으로 세상살이가 희한하다고 말해야 하리. 8명이 함께 앉아 먹을 자리가 없어 4명씩 앉으라고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주인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일단 자리에 앉아 두리번거렸더니, 마침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손님들이 일어선다. 재빨리 합석을 했다.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은 통꼬막이었다. 참꼬막은 주름이 20개 정도, 다른 유사 종류의 꼬막은 30~50개 정도로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먹고 있는 꼬막이 참꼬막이 확실했다. 피를 만든다는 참꼬막! 까기도 어려웠고 좀 짰지만 기꺼이 다 먹어 치웠다.
다음에 나온 꼬막전! 꼬막전은 꼬막만 빠지면 호박전 맛이었다.
다음은 새콤 달콤한 꼬막회무침 ! 희게 보이는 것의 정체는 배가 아닌 무였다.
나름대로 맛이 있었다.
그리고 참 희한하게 맛나던 꼬막 탕이 나왔다. 야채라곤 아무 것도 안 넣었는데, 색깔은 된장찌개인데 맛은 매운탕 같고, 얼큰한 게 정말 맛있었다. 바닥에 잠수중인 꼬막 인양해서 잘 먹었다.
양념꼬막! 맛이 너무 달아서……,
끝으로 주는 비빔밥은 게장딱지랑 국물에 김가루와 참기름을 섞어, 밑반찬으로 나왔던 숙주나물도 함께 비벼…….
역시 먹는 낙이 최고의 낙(樂)이라, 저절로 ‘자 ~ 알 먹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 하늘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의 땅 순천!
점식 식사 도중에 순천만 갈대 이야기가 나왔다. 전에 가 보았지만 다시 보고 싶은 순천만, 그 넘실거리는 갈대숲! 시계를 보니 순천만에 들렸다가 집에 가더라도 그렇게 늦을 것 같지 않았다. 우리들은 서둘러 순천만을 향해 달렸다. 차창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가 갈댓잎에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에 매료되어 자동차의 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았다.
순천만을 예찬한 어떤 이는,
‘무채색 개펄을 보랏빛으로 곱게 물들인 칠면초 군락, 동그랗게 원형의 군락을 이룬 기하학적 구도의 갈대밭, S자로 휜 갯골 물길의 수면에 작은 고깃배가 만드는 유려한 무늬의 아름다운 파형, 그리고 하늘만큼 너른 바다와 땅만큼 거대한 개펄. 그 땅과 하늘을 동시에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석양. 순천만에서 자연을 노래하지 않는 자, 그 자연을 즐길 자격도 없다.’ 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아직 순천만을 보지 못한 그대여!
그대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 키 넘긴 무성한 갈대숲, 그 안에 둥지 틀고 새끼 돌보는 물새, 바람 한 숨에도 일렁대는 은빛 갈대의 유려한 물결.
혹시 석양의 황금빛에 물들라치면 무정한 남정네의 무쇠 솥 같은 무심함도 그 갈대꽃 솜털 끝에 찬란히 부서지는 햇빛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데…. 그래서 순천만 갈대숲에서는 모두가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800만 평의 광대한 개펄에 70만 평이나 되는 갈대 군락지가 있는 자연생태의 보고 순천만!
초봄인데도 아직 갈대는 금빛을 잃지 않고 있다. 갈대숲 속을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는 나무판자 길. 그 길로 걷는 이는 행복하다. 바람에 이는 갈대소리는 노래로 다가오고 하늘과 맞닿은 갈대숲 지평선이 그림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스님 두 분이 훠이훠이 갈대숲을 지난다. 운수납자의 비운 마음에도 순천만 갈대숲은 욕심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여행지의 특산물도 만끽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편 보람차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개미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이렇게 한 번쯤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것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즐거운 마련인가 보다.
♥. 이번 여행의 결산(참가 인원 8명)
2/28일 점심 169, 000원(떡갈비 정식)
도선비 67, 000원(땅끝마을-노화도, 승선료-사람, 차)
저녁식대 180, 000원(자연산회)
모텔비 70, 000원(4인 2실)
3/1일 아침 96, 000원(전복죽)
도선비 67, 000원(노화도-완도, 승선료-사람, 차)
점심값 123, 000원(참꼬막 정식)
사전준비물 8, 000원(과일, 과자 등)
계 780, 000원
---많이 썼지만 아껴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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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박2일간의 보길도 기행문이 섬세하고 자세하여 같이 여행을 한 듯합니다. 4분이 맛있는 것 드시면서 여러가지 체험을 하시면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셨을지 너무 부럽습니다. 사진을 볼 수 있으면 더욱 실감 날텐데...훌륭한 기행문 너무 감사합니다!
사진이 보이지 않는 아쉬움을 이메일 파일로 해결해 주셔서 실감나게 감상하였습니다. 재차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