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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55. [역경의 열매] 여운학 (1-23) 자녀교육 유일한 대안 ‘말씀암송’ 전수 47년
말씀암송 태교로 태어난 아이들 하나님 성품 닮는다는 믿음으로 한국교회 부흥의 불씨 퍼트려
규장문화사 설립자로 한국 기독 출판의 산증인인 여운학 장로가 지난달 30일 서울 동작구 동광교회에서 개최된 ‘303비전 성경암송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 47년간 말씀암송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안에서 자녀양육을 고민하는 엄마들에게 말씀암송의 중요성을 전수해왔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의 비전은 간단하다.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엄마가 말씀을 암송하는 말씀암송 태교로 태어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성품이 온순하고 총명하다는 것이다. 말씀암송태교를 받지 못하고 태어나도 서너 살부터 엄마가 즐겁게 암송하는 것을 본 아이들은 엄마보다 더 쉽게 암송하곤 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엄마의 성경암송교육만이 미래의 교회 교육과 자녀 교육의 유일한 대안임을 확신하게 됐다. 나는 1200절 이상의 성경말씀을 암송하는 가운데 1999년 ‘이슬비성경암송학교’를 개설했다. 2005년에는 30년을 1세대로 해 3세대 이후를 바라보는 ‘303비전’을 선포하면서 ‘303비전성경암송학교’로 개명했다. 이 303비전은 지금까지 교육받은 1만명 이상의 엄마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엄마가 동참했던 것은 말씀암송과 말씀암송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자녀의 성품까지 만지시고 훈련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녀들은 세상을 이끌고 섬길 줄 아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자녀에게 말씀사랑을 심어주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의 불씨를 퍼뜨리게 된 스토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1933년 4월 충북 영동군 학산면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영동이 포도와 인삼으로 유명하지만, 당시는 감이 유명했다. 살목이라는 동네엔 우리 집 소유의 감나무가 많았다. 늦가을만 되면 동네 사람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해서 감을 각자 자기 집에 가져가 정성 들여 깎아왔다. 우리 집은 곶감 말리는 일로 바빴다.
나는 8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자랐다. 동네 유지였던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갈망이 컸다. 첫째 부인이 마흔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둘째 부인을 들였다. 또 딸을 낳자 셋째 부인으로 나의 어머니를 맞아들였다. 당시만 해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대를 잇지 못하고 가문이 망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강했다.
아버지는 해방 후 미군정 아래서 치러진 선거에서 초대 군수가 될 정도로 지역에서 신망을 얻던 분이었다. 부동산 등기와 관련된 대서소를 운영했는데, 토지 관련 행정에 어둡고 글자를 모르는 주민들을 대신해 등기업무를 정직하게 대행해 신망이 높았다.
개화기에 아버지는 동네 서당에서 배운 한학과 독학한 일본어로 대서소를 차렸고, 거기서 모은 돈으로 양조장을 운영했다. 집이 대궐 같지는 않아도 동네에서는 제일 좋은 함석집이었다. 앞마당에 반석을 뚫고 깊이 판 우물에서 도르래로 길어 올린 물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아버지의 존함은 학산초등학교 교실 입구에 걸린 설립 기부자 명단 맨 앞자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39세에 나를 낳은 후 심한 하혈로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셨다. 남편의 사랑은 많이 받았으나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로부터 가혹한 시집살이를 했다. 그 어려움을 조용히 이겨내면서 아버지를 돕던 현숙한 여인이었다. 하루는 어린 내게 조용히 말했다.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 제일 먼저 냉수 세 모금을 마시면 머리가 좋아진단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여운학 (1) 자녀교육 유일한 대안 '말씀암송' 전수 47년
* [역경의 열매] 여운학 (2) 이웃 돌보기와 정직함을 실천하신 어머니
* [역경의 열매] 여운학 (3) 하루아침에 부친 잃고, 형 있는 부산으로 피난
* [역경의 열매] 여운학 (4) 꿈에 부푼 대학 생활… 학비 마련하려 출판사 입사
* [역경의 열매] 여운학 (5) 산더미 같은 출판사 업무에 결국 휴학
* [역경의 열매] 여운학 (6) 유학의 꿈으로 주경야독… 발목 잡힌 5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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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여운학 (23·끝) 문서선교보다 훨씬 넓은 신앙인격 향상 새 사명
약력=1933년 충북 영동 출생. 서울대 사범대 물리과 중퇴, 연세대 산업대학원 졸업. 규장문화사 설립자, 지하철 사랑의편지 발행인, 303비전성경암송학교 교장, '이슬비전도편지' 집필자. '말씀이 너무너무 좋아서' '말씀암송 자녀교육' '자녀사랑은 말씀암송이다' 등 저술.
***[역경의 열매] 여운학 (2) 이웃 돌보기와 정직함을 실천하신 어머니
춘궁기에 굶어 죽는 사람들 많아 봄 되면 나락을 가져온 나물만큼 내줘…형 덕에 세계동화·위인 전집 읽어
규장문화사 설립자인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이 1983년 노모와 함께 서울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아침 공복에 냉수를 마시고 있다. 덕분에 80평생 설사나 변비를 모르고 산다.
어머니는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는 분이지만 정직한 삶과 이웃을 돌보는 삶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당시 일제에 나락을 공출하다 보니 춘궁기만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어머니는 내 키만 한 큰 독 3개를 뜨락에 놓고 가을마다 잘 말린 나락을 가득 채웠다. 봄이 되면 면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 가난한 이들이 산나물과 들나물을 뜯어 우리 집으로 이고 왔다.
어머니는 공짜로 나락을 주지 않았다. 대신 나물에 비례해 나락을 내줬다. 집안에 쌓인 나물은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골고루 나눠줬다. 지금도 생생한 것은 어머니가 준 나락을 받아 머리에 이고 가던 아낙네들의 얼굴에 번진 환한 미소다.
영동 학산초등학교에 다닐 때 세계동화전집, 세계위인전집 등 일본어 양장본 시리즈를 제법 많이 읽었다. 서울 휘문중학교에 다녔던 형 덕분이었다.
형은 공부보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늦둥이로 얻은 아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총각 선생님을 사랑방에 모셔놓고 개인 가정교사로 삼았다. 그러나 가르치고자 하는 아들은 놀기를 좋아했고 또래 친척들과 동네 친구들만 그 혜택을 입었다.
형은 중학교 때 애국적인 훌륭한 선생님들 밑에서 학교수업보다 나라사랑 정신교육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아우인 나를 끔찍이 사랑했다. 방학 때면 좋은 어린이전집을 선물로 가져왔다.
“운학아, 여기 세계위인전집 좀 읽어봐라. 너한테 도움이 될 것이다.” “와, 형 고마워.” 형의 보살핌 덕에 서점 하나 없는 촌동네에서 세계위인전집과 세계동화전집을 섭렵할 수 있었다.
매주 월요일 500여명의 전교생 앞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각 반에서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나가서 발표했는데, 다들 시골 사랑방이나 할머니한테 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는 이야기, 소금장수 이야기만 했다. 반면 나는 서투른 표현이긴 했지만, 세계적인 동화나 위인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 보니 반을 대표해서 제법 많이 발표자로 섰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8·15광복을 맞았다. 나는 무엇보다 학생 각자에게 의무적으로 할당된 퇴비용 칡넝쿨과 산풀 채집에서 해방된 게 좋았다. 매주 두 번 있는 검도 시간이 없어진 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목검을 들고 마주 보고 섰던 내 짝이 원숭이를 닮은 데다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웃기곤 했다. “네 이놈, 딱!” 그 바람에 일본인 선생한테 목검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고통이 사라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충북의 명문인 청주중학교에 원서를 냈다. 당시는 미군정의 영향으로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고 7월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이었다. 마침 그때 무릎을 다쳤던 나는 걸음 걷기가 힘들었고 큰 장마로 조치원에서 청주까지 경부선 철로가 떠내려가 부득이 걸어서 가야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영동농업중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원하지 않는 학교에 진학해 1학년부터 ‘인생이 무엇이냐’며 나름 심각한 니힐리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자존심을 살리려고 손문의 ‘중국혁명사’를 읽었다. 담임선생님이 국사를 가르치셨는데 선생님을 테스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한편으론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오기였다. “운학아, 네가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니. 아주 훌륭하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나를 칭찬하셨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3) 하루아침에 부친 잃고, 형 있는 부산으로 피난
일하면서 대학진학 준비하던 중 졸업증 구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담임이름도 없는 엉터리서류 내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뒷줄 왼쪽)이 1963년 모친, 아내, 처남, 세 자녀와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당시 영동읍 중심가에는 서점이 한 곳 있었다. 서점 문 앞에는 서울신문 정기구독자의 이름과 함께 신문꽂이가 있었다. 신문을 개인함에 꽂아놓으면 본인이 찾아가도록 해놓은 것이다. 거기엔 중학교 1학년생인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런 것으로 자존감을 찾으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중학교 3학년 때 데일 카네기의 ‘인간처세학’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송재형 교장선생님이 아침 훈화를 하시면서 인용한 중국 고전의 사자성어 ‘타산지석’ ‘전화위복’ ‘새옹지마’ 등에도 감동됐다. 그동안의 부정적 사고방식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확 바뀌었다.
물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접한 기독교에서 깨달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확신의 신앙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바뀐 것은 나의 일차적 중생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집에서 철봉 평행봉 역도 아령 줄넘기 등의 운동을 하며 역삼각형 몸을 가꾸는 등 나름대로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비극이 찾아왔다. 특수작물 농사에 전념하던 부친이 어느 날 아침 영문도 모른 채 동네 지서에 불려갔다. 이어 영동경찰서로 끌려간 뒤 무자비한 단체학살의 희생제물이 됐다.
하루아침에 부친을 잃은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1·4 후퇴 때 혼자서 무턱대고 형이 요양하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피난민들에 휩싸여 지붕 없는 화물열차를 타고 이틀 걸려 부산에 도착했다.
전국에서 피난민들이 모여든 부산은 모든 것이 무질서와 혼란의 상태였다. 형이 창설멤버였던 사회사업기관 명덕육영회의 학생으로 합숙하면서 이런저런 배달도 하고 부두에서 점검원으로도 일했다. 때론 미군 부대 노무자로, 3등통역자로도 일하면서 대학진학을 준비했다.
고교 졸업증을 받기 위해 명덕학사 친한 동료의 알선으로 J사립고교의 늙은 교장을 찾아가서 1년분 수업료를 지급했다. 그러나 실무자인 교감에게 알리지 않고 교장이 단독으로 처리하면서 졸업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오르지 못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발견하고 교장 집에 찾아가서 추궁했다. “아무 이름이나 지우고 자네 이름을 쓰게.” 그래서 엉터리 증빙서류를 갖췄다. 마감 날 부산 동대신동에 피난와 있던 서울대 사범대학 물리과에 입학원서를 냈다.
1951년 여름 불볕 아래 텐트 속에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험답안지 상단엔 졸업학교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당황스러웠다. 모른 체하고 빈칸으로 뒀다. 마침 시험문제는 고교 1학년 수준이었기에 무난히 썼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시험지를 간추리던 교수님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운학이 누구냐.” “접니다.” “담임 선생님 이름이 뭐냐.”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수험생들이 텐트가 떠나도록 웃었다. 교수님은 웃으며 “미친 놈” 하더니 시험지를 주섬주섬 챙겨 나갔다.
문제는 구두시험이었다. 각오는 돼 있었다. 이실직고하리라는 생각이었다. 다른 수험생들이 텐트 속으로 불려들어갔다가 금세 나왔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내 입학원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여운학, 왜 졸업반 명단에 네 이름만 수정이 됐는가.”
***[역경의 열매] 여운학 (4) 꿈에 부푼 대학 생활… 학비 마련하려 출판사 입사
엉터리 서류에 선처해 달라 호소… 긴 면접 끝에 합격자 명단에 올라
1955년 민교사 편집자로 근무하면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 때의 여운학 장로.
나는 엉터리로 대학에 지원한 사연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충북 영동농고 2학년 때 6·25사변이 터져 학교수업을 받지 못한 채 부산으로 피난 왔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고등학교 졸업증을 사서 사대 물리과에 지원했습니다. 필기시험 성적을 보시고 선처해주시면 장학생으로 졸업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나의 당돌한 이실직고에 황득현 물리과 주임교수는 미소로 응답했다. “자, 그러면 이걸 풀어볼까.” 미적분방정식 문제였다. 1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문제를 풀었다.
밖에 나오자 대기 중이던 수험생들이 몰려왔다. “형씨는 왜 그렇게 면접시간이 길었소?” “나도 잘 모르겠소.” 합격자 발표날에 대여섯 명의 명덕학사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긴 한지에 붓으로 쓴 합격자 명단이 과별로 길게 붙어있었다. 사회과 국문과 생물과 화학과 체육과 등 모든 과는 32명의 합격자 이름이 붙어 있었다. 물리과만은 두 사람뿐이었다. 내 이름이 거기에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현직 교사였다. 황 교수는 의과대학에서 독어도 가르쳤다. 나머지 30명은 의과대학 낙방자 중 물리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실력파들로 보충됐다.
1951년 9월 전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지만 꿈에 부푼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당시는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됐다. 부산 동대신동 운동장에 임시강의실로 세워진 천막 교실 안에서 강의가 진행됐다. 학생들은 폭이 15㎝ 정도 되는 긴 나무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아 수업을 들었다.
물리시간에 황 교수님 혼자서 칠판에 썼다 지웠다 하면서 열심히 강의했다. 수업이 어렵다 보니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딴전 피우기가 일쑤였다. 황 교수님을 돕고 싶었다. 황 교수님 댁에 놀러 갔을 때 이런 말씀을 드렸다. “교수님, 강의시간에 수업 태도가 불성실한 학생을 수시로 지목해 질문하시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후 물리 시간은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
1952년 대학 2학년 초였다. 학비조달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신문을 보다가 광고 하나가 눈에 띄었다. ‘출판사 편집사원 모집. 인원: O명, 자격요건: 대학 졸업자, 민교사(民敎社).’ 입사원서에 대학 재학생이라 쓰면 필기시험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다. 서울대 사대 2학년 중퇴라고 썼다.
민교사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험은 국어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리 국사 세계사 사회 일본어 영어 작문 등을 온종일 치렀다. 출판사 편집사원 지망생은 32명이었고 출신성분도 다양했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안정적인 일자리여서 대학 강사뿐만 아니라 서울대 사대 3~4학년 선배들도 눈에 띄었다.
며칠 후 면접통지서가 날아왔다. 입사원서에는 거짓말을 했지만, 면접 시에는 이실직고하리라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냉정한 인상의 민교사 전무가 면접관이었다.
“전무님, 저는 서울대 물리과 2학년 재학생입니다. 면접에 불러주시면 그때 말씀드릴 각오로 이력서에는 서울대 중퇴자라고 썼습니다. 만일 저를 합격시켜 주신다면 월급은 절반만 받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대신 매주 하루는 종일 대학강의를 듣고, 다른 날은 하루에 한 강의만 들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에게 맡겨진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며칠 후 입사통지서를 받았다. 입사자는 두 사람이었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5) 산더미 같은 출판사 업무에 결국 휴학
365일 휴일 없이 일만 하다보니 대학생활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해… 유일한 야간대학 영문과로 전학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이 1972년 경기도 고양 백운대에서 다섯 자녀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아직 기독교 신앙을 갖기 전이다.
민교사에서 맡은 업무는 검인정도서와 자습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중학교 1~3학년 영어자습서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당시 다른 경쟁사의 영어책보다 월등히 많이 채택됐던 김선기 교수의 ‘내셔널 잉글리쉬’(National English)였다.
초교지는 복자(伏字)부터 잡아냈다. 납활자를 사용할 때라 조판소에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글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호, 복자가 찍혀 나왔다. 이게 너무 많아서 교정지에 빨간 잉크로 표시하다 보면 종이가 온통 새빨개졌다. 이 작업을 ‘초교’라 불렀다. 지금은 컴퓨터 타이핑으로 판을 짜기 때문에 그때 교정작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쉽고 빨라졌다. 이런 일을 저녁 10시까지 하고 퇴근했다.
원래는 오전 9시 정각부터 일을 시작해 오후 8시까지 교정을 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8시 직전에 회사에 나타나 전무 상무와 좁은 공간에 모여 있다가 밤 10시가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잡담하고 노는 동안에도 나는 눈이 감길 정도로 초교 재교 삼교 작업을 했다. 특히 고교 수학자습서는 깨알 같은 숫자가 많아서 교정에 땀을 뺐다. 5의 4제곱, 2와 2분의 1처럼 작은 글자를 찾아내는 게 특히 어려웠다.
그 산더미 같은 일거리를 두고 부산역 앞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동대신동 종점까지 전차로 가서 사범대학 강의까지 듣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회사는 1년 365일 휴일도 없었다. 설날도 주일도 추석도 방학도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또 있었다. 여러 곳에 자리한 조판소 인쇄소 제본소를 오가며 작업 진행을 관리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입사 전 약속했던 강의 출석은 어느새 멀어져갔다. 대학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고 월급은 내가 제안한대로 여전히 반액만 받았다.
어느 날 전무가 나를 불렀다. “미스터 여, 서울이 수복됐으니 출판사를 서울로 옮기기로 했네. 예약되었으니 빌린 화물열차에 사무실 짐을 싣고 갈 수 있겠지?” 물론 그것은 나의 몫이었다. 마냥 느린 열차는 중간에 김천에서 하루를 쉬고 이틀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사무실은 회현동 큰길가에 있었다. 나는 사무실 뒤편에 방을 잡아 사무실 지킴이 역할까지 했다. 석유곤로로 밥을 지었다. 당시엔 쌀에 돌이 많았다. 냄비에 조심스럽게 물을 넣고 잘 흔들었다. 밥이 다 지어지면 냄비 바닥에서 2~3㎝ 위까지만 밥을 걷어내 먹었다. 이렇게 하면 밑바닥에 깔린 돌을 먹지 않을 수 있었다.
반찬은 이북에서 피난을 와 사무실 입구에서 장사하던 할머니가 주셨다. “총각, 밥은 먹고 사오?” “네, 자취하고 있습니다.” “고레, 글면 내레 장사할 수 있도록 총각이 허락해 준 것에 고맙다는 뜻에서 김치를 담가 줄 테니 배춧값만 주시라우요. 김치는 내레 집에서 담아다 주겄시다.”
반찬은 고추장뿐이었다. 계란도 귀하던 시절인데 밥과 김치, 고추장을 넣고 계란을 하나 깨서 비벼 먹었다. 나중엔 일거리가 쏟아져 밥 차리는 시간을 줄이려고 남산에서 계란가루를 사와 물을 넣고 곤로에 끓여 먹였다.
동대문에 있던 서울대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휴학을 했다. 유일한 야간대학인 한국대학 영문학과 3학년으로 전학했다.
당시는 미국 대학 수십 곳에 편지를 써서 유학 기회를 얻어내는 게 학구열이 강한 대학생들의 유행이었다. 나도 선배들의 도움으로 장문의 영문 편지를 써서 20통을 보냈다. 어느 날 영문으로 된 편지 한 통이 왔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6) 유학의 꿈으로 주경야독… 발목 잡힌 50만원
전액 장학 조건의 좋은 유학 기회 연이은 악재로 미국행 물거품… 홀로 일 도맡아 하다 편집부장 돼
1954년 인쇄소 직원들이 교과서를 점검하고 있다. 여운학 장로는 1955년 민교사 편집부장으로서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를 만들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편지는 미국 앨마칼리지 학장이 보낸 친서였다. 등록금을 전액 면제하고 자기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통학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어머니와 4살 아래 여동생의 생계문제가 걸렸다.
그때 외사촌 형이 찾아왔다. “50만원만 마련해주면 1년 안에 원금을 상환하고 네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올 때까지 어머니를 잘 보양해드리마.” 한국대학 동급생 중에 YMCA에서 일하던 위성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내 사정을 듣더니 자진해서 50만원 수표 한 장을 끊어줬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서 밝고 현명했다. “여형, 이 돈은 하나님께서 도와주라 하셔서 주는 것이오.” 나는 당시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거짓 없는 진실임을 믿었다.
그는 1953년 단행된 화폐개혁 때 환금관계 일을 담당하면서 거금을 마련했다고 했다. 나는 당장 외사촌 형에게 그 수표를 전해줬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추산하면 1억원이 넘는 거금이었던 것 같다.
미국 유학의 꿈으로 황홀한 나날을 보내며 주경야독했다. 낮에는 민교사의 편집업무에 바빴고 밤에는 대학 영문과에 나가 열심히 배웠다.
그런데 갑자기 어두운 구름이 내 인생에 몰려왔다. 외사촌 형이 대전에서 사업을 하다 원금까지 날려 먹었다고 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위성만씨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나를 찾아 왔다. “홍콩의 국제 사기꾼에게 너무나 큰돈을 사기당했소. 내가 빌려줬던 돈을 당장 갚으시오.” 그는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미국 유학은 고사하고 친구가 조건 없이 영수증도 받지 않고 빌려준 거금을 돌려주는 문제로 천릿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피가 말랐다. 내가 애태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민교사 영업부 김모 차장은 나보다 연장자였다. 자기 일같이 생각하고 민교사와 거래하던 지업사, 인쇄소, 제본소의 대표자들을 설득해 그 큰돈을 조건 없이 빌려왔다.
큰 어려움은 해결됐으나 어머니를 보살피는 문제로 미국행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마침 교과과정 개정이라는 큰 과제를 앞두고 민교사의 전무와 상무 2명이 동시에 사표를 냈다. 사장을 골탕 먹일 작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장은 그들의 사표를 일괄 수리해버리고 모든 책임을 내게 맡겼다. 1955년 당시 22세 때의 일이다.
3년 동안 많은 일을 도맡아 하며 민교사의 편집부장이라는 직책을 받게 됐다. 전무, 상무가 하던 일을 홀로 감당하며 중·고등학교 교육개편에 따라 전과목에 걸쳐 새 검인정교과서 저자 발굴, 계약, 집필 추진작업에 몰두했다.
서울 종로2가 계림빌딩 4층 민교사 사옥에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많은 아르바이트생이 회사 뒤편의 여관에 합숙하며 수시로 사무실을 왕래했다.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는 50~60개가 있었다. 그들은 단합이 잘 돼 큰 수익을 챙겼다. 당시 민중서관 을유문화사 같은 주식회사 규모의 출판사는 오랜 전통이 있어 투자 규모도 큰 편이었다.
그런 곳에 비하면 민교사는 작았다. 나 혼자 실무를 책임지고 모든 과목의 검인정교과서에 도전했다.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나 정직과 성실, 부지런과 열중에 대한 긍지는 컸다.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검인정 합격 여부를 발표하는 날 희비가 엇갈렸다. 민교사처럼 검인정 합격도서 숫자가 많고 영어 수학 지리부도 같은 실속 있는 과목이 전부 합격한 출판사는 많지 않았다. 민교사는 단숨에 민중서관과 함께 교과서 출판에서 쌍벽을 이루는 출판사가 됐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7) 출판시장의 큰 변화 예상하고 독립할 준비
교과서 채택 둘러싸고 잦은 비리… 문교부서 검인정교과서 바꾸자 내 이름으로 된 출판사 낼 결심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60년 서울 영등포의 교과서 인쇄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여운학 장로는 당시 민교사 출판부장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고 있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0년대만 해도 한국출판계는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를 발행하는 회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젊은 출판업자들이 발행하는 단행본과 각종 월간 잡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출판협회 회원들 가운데 세계적인 수준에 이를 정도로 창의적인 편집 인쇄 제책 기술을 갖춘 이들도 나왔다. 인쇄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제지기술도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섰다.
민교사는 중·고등학교 검인정교과서 인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교과서 채택을 놓고 무한경쟁을 벌이다가 고리채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된 것이다.
당시엔 교과서를 채택하면 교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게 관례였다. 이를테면 경기중·고나 경복중·고, 서울중·고에서 수학이나 영어교사가 은밀히 교과서 채택을 약속해주면 선불형식으로 사례하는 것이었다. 사례비는 예상되는 책값의 10분의 1이나 20분의 1 수준이었다. 서울의 명망 있는 몇몇 학교에서 검인정 교과서를 채택하면 전국 학교도 따라가는 분위기였다. 교과서를 두고 부도덕하고 치졸한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학교에선 교사들이 요령을 부렸다. 학생 500명에 해당하는 교과서 채택선수금을 여러 출판사 영업부장으로부터 미리 받았다. 그렇다 보니 같은 학년임에도 반마다 서로 다른 교과서를 사용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결과는 뻔했다. 팔린 교과서의 몇 배를 고리채로 앞당겨 지출한 출판사들은 대부분 파산에 이르게 됐다.
출판업자들은 재빠르게 뭉쳤다. 그리고 한국검인정도서 주식회사라는 사단법인체를 만들었다. 회원사들은 거기서 미리 배당을 받는 형식으로 싼 이자의 은행 돈을 빌려 고리채 빚을 갚았다. 그러는 도중 민교사는 해체됐고 나는 그들이 설립한 회사의 편집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 회사에선 전체 검인정도서를 관리하기 위해 편집부를 출판과 안에 두고 영어 수학 국어 한문 사회 지리 생물 화학 물리 체육 분야의 편집교정 멤버를 공개 모집했다. 마치 문교부 편성국 산하의 편수관실처럼 한국검인정도서 주식회사의 편집 교정실 역할을 내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문교부는 1961년 수년에 걸친 중·고등학교 교과과정 개정 심의연구 결과를 기초로 중·고검인정교과서 개정계획을 발표했다. 새로운 출판시장이 열린다는 뜻이었다. 기회였다. ‘나도 이제는 독립할 때가 됐다. 내 이름으로 출판사를 내고 새로운 교과서를 출원해야겠다.’
내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할 때 한국검인정교과서 주식회사의 대표사장이던 홍석우 사장으로부터 은밀한 제의가 왔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운영하던 탐구당엔 사장실 책상이 비어있네. 자네가 그 자리로 가서 어떤 검인정교과서든지 하고 싶은 대로 제작해서 검인정 허가신청을 내게. 재정은 내가 댈 테니. 다만, 자네는 탐구당 편집회의와 저자 상담을 책임지게.”
그는 민교사 사장과 돈독한 사이였다. 그동안 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점찍어 놓고 있었기에 이런 파격적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나의 교과서 제작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196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검인정교과서를 사임하고 탐구당의 부사장 직책을 맡게 됐다. 곧바로 개편될 검인정 교과서 집필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나도 청하각(靑廈閣)이라는 출판사 등록을 마쳤다. 중고등용 교과서 한 권씩을 내기로 결정하고 서울사대 체육과 남정식 교수와 구두계약을 맺었다. 사대 후배로 겸손하고 지혜로웠던 그는 새 교육과정 집필요령에 맞춰 양질의 원고를 일찌감치 만들어 왔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8) 마지못해 집어든 성경의 매력에 ‘흠뻑’
병상에 누워 세상만사 허탄할 때 성경 속 잠언 읽어 보라는 아내… 중국 고전과 일맥상통해 큰 흥미
한 여학생이 1969년 서울시내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추첨을 하고 있다. 여운학 장로는 당시 탐구당 부사장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었다. 국가기록원 제공
탐구당 사장은 젊은 시절 은행원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제작 일체를 맡기며 집까지 사줬다.
민교사 시절 검인정교과서 제작을 경험하며 새교육 과정의 핵심을 파악한 나는 몸을 던져 일했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각 분야의 엘리트들과 함께 여관과 회사를 오가며 교과서 제작에 집중했다.
특히 지리부도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성공했다. 경쟁사들은 제도사를 써서 가편집본을 제출했다. 반면 우리는 다른 전략을 선택했다. 고급 필경사들에게 갑절의 노임을 지불해 정식으로 인쇄된 교과서처럼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고 정확하게 지리부도 원판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이화여대 회화과 엘리트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고급 인쇄물처럼 특수 색연필로 색상을 입혔다. 특히 부록의 색인은 당대 최고의 필경사를 동원해 로마자로 직접 쓰게 했다. 한마디로 고급 인쇄물처럼 만든 것이다. 시각적으로 심사관들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도록 작전을 짠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여 출판사의 교과서 중 7개가 채택됐는데, 탐구당의 지리부도가 포함됐다. 당시 지리부도 한 권만 채택돼도 출판사 빚을 모두 청산할 정도로 큰 수익이 났다.
50여명의 편집 엘리트들이 동원된 민중서관과 나와 임시편집자 10여명이 달라붙은 탐구당의 검인정교과서 합격 권수는 막상막하였다. 탐구당이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 않았는지 의심해 출판사들이 비밀리에 조사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물론 흠을 찾을 순 없었다.
그 후 탐구당은 ‘조선왕조실록’ 전 49권 번각 발행을 비롯해 승정원일기 등 한국학 연구에 도움 되는 책을 발행했다. 각종 대학교재와 ‘탐구신서’ 시리즈도 발행했다.
이렇게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던 1973년 어느 날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병원에 가보니 척추디스크라고 했다. 영락없이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40세였다. 두려울 것 없이 달리던 나의 전성기에 병마가 제동을 건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몸의 약점을 통해 영혼을 일깨우는 ‘비상벨’을 울리신 것이었다.
병상에 누워 전화로 일 처리를 하니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 나는 불교 신앙에 푹 빠져 ‘반야심경’은 통째로 암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아파 누워있으니 세상만사가 다 허탄하게만 느껴졌다.
하루는 교회에 다니던 아내가 말했다. “여기 성경 속에 잠언을 읽으면 참 재미있어요.” 아내가 건네준 성경책을 폈다. 잠언을 읽어보니 정말이었다. 재미를 넘는 매력이 있었다. 내용에 흠뻑 빠져들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와 함께 사랑방에서 즐겨 암송했던 ‘중용’ ‘대학’의 내용과 많이 통했기 때문이다.
잠언을 읽으면서 성경책 여백에 암송하던 중국 고전 문구까지 써넣었다. 이를테면,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좋은 일을 행한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고)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不善之家 必有如殃, 나쁜 일을 행한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온다)는 것도 일맥상통했다.
전도서를 읽으니 이번엔 암송하던 반야심경과 통했다.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은 반야심경의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 없다는 것은 곧 있다는 것이요 있다는 것은 곧 없다는 것이다)과 통했다.
시편 읽기에 들어갔는데, 그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야, 깊은 뜻은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성경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9) 육체의 고난 통해 잠들어 있던 영혼 눈 뜨다
동양고전 암송·묵상 좋아했지만 시편 전편 통독, 마음과 영혼 사로잡혀 반복해 읽다 평화와 기쁨 얻어
303비전암송학교장인 여운학 장로가 고 배정희 권사와 1963년 결혼 후 기념촬영을 했다. 여 장로는 허리 디스크로 고생할 때인 76년 배 권사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했다.
척추디스크의 고통은 앓아본 사람만이 안다. 겉은 멀쩡한데 뜨끔뜨끔 자지러지게 쏘아대는 아픔 때문에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만사가 귀찮았다.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선다고 했지만 거울을 보면 허리 부분이 비참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솜으로 된 푹신한 요보다 두 겹의 담요를 깔고 눕는 게 나았다. 똑바로 눕기보다 다리를 조금 굽힌 채 옆으로 누웠다.
고통 가운데 ‘시편’ 1편부터 150편까지 전편을 통독할 때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듯 그 청순한 영혼의 운율이 내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았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며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뜻도 제대로 몰랐지만, 그 시인의 부르짖음이 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선사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황홀경에 빠져 ‘시편’을 읽고 또 읽었다.
척추디스크로 눕기 전까지는 하루에 세 갑씩 담배를 피우며 편집교정과 출판기획에 몰두했다. 틈만 나면 이미 암송하던 ‘대학’ ‘중용’ ‘채근담’ ‘반야심경’ 같은 동양고전이나 불경 중 좋아하는 어구들을 반복 암송하며 묵상하는 재미를 즐겼다. 그러나 척추디스크라는 비참한 고난 속에서 만난 말씀은 깊숙이 잠들었던 영혼의 눈을 뜨게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7~8)
말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말 번역만으로는 원작자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엉뚱하게 달리 번역되지나 않았을까.’ 킹제임스 버전에 가장 가까이 현대어로 번역됐다는 NIV 영어성경을 함께 암송 묵상했다. 그런데 한글로 묵상할 때와는 달리 눈물이 나오도록 감격스러운 경험을 했다.
‘요한복음’이 특히 좋았다. 대학시절 한동안 혼자서 공부한답시고 일어판 요한복음 해설집을 사서 읽다가 버려뒀는데 다시 꺼내 읽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는 놀라운 영적 일깨움을 많이 받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와 같은 크리스천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 등록하지도 않은 주제에 ‘시편’ ‘잠언’ ‘이사야서’ ‘요한복음’ ‘로마서’를 읽다가 꼭 기억하고 싶은 말씀이 눈에 띄면 당장 쪽지에 그 말씀을 베껴 써서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채근담’의 멋진 노래나 ‘반야심경’을 통째로 암송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교회에 출석하기도 전에, 누구한테 설명을 듣기 전 성경을 통해 나는 이미 말씀 마니아가 돼버렸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면 놓지 않으려는 것처럼 내 영혼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는 격이었다. 이렇게 갈급한 경지에서 만난 구원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나의 보배로 삼지 않을 수가 있었으랴. 당시 내가 겪고 있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시온의 대로를 주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처럼 느껴졌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역경의 열매] 여운학 (10) 절망 속 만난 성경말씀은 마치 꿀맛 같아
하루 세 갑 흡연으로 건강 나빠져 끊겠다 다짐, 기도하고 금연 성공… 새벽기도로 디스크 치유의 기적도
여운학 장로의 다섯 자녀가 1970년대 야외수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른쪽 첫번째가 규장출판사 여진구 대표다.
거의 절망에 빠질 만큼 극심한 고난 중에 만난 귀한 성경 말씀은 꿀맛같이 달았다. 이 귀한 말씀을 암송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생명의 말씀, 구원 약속의 말씀을 암송하고 반복해 되뇌는 묵상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이때 눈에 번쩍 띄는 말씀이 보였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맑고 깨끗한 생수의 강물이 콸콸 흘러나오는 환상이 보였다.
나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했으면서도 양심에 크게 걸리는 것이 있어 아내가 출석하던 교회에 등록할 수 없었다. 집에서는 어린 자식들에게 해가 된다고 해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직장에 나가면 줄담배를 태웠다.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 갑, 퇴근 후 저자들과 술 마시며 한 갑, 이처럼 하루에 평균 세 갑을 피웠다. 종일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았다. 접대차 술집에 가면 술은 맥주 한 잔에 얼굴이 홍당무가 될 정도였기에 담배만 피워댔다.
밤늦게 집에 들어갈 때는 어질어질할 정도로 담배 니코틴에 찌들어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담배를 끊기로 다짐하고 서투른 기도를 드렸더니 거짓말처럼 담배가 싫어졌다.
드디어 1976년 서울 돈암동 성일교회에 등록했다. ‘새벽기도는 건강의 보증’이라는 말을 듣고 이른 새벽에 미아리에서 돈암동까지 버스를 타고 열심히 다녔다. 6개월을 새벽기도에 개근했는데 허리디스크가 깨끗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신 권능으로 미천한 신자를 사망의 늪에서 건져주셨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시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1~2)
새벽기도회를 미치고 자유기도 시간이 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린 뒤 감동되는 대로 말씀암송을 했다. 초창기에는 요한복음 15장 1절부터 마지막 27절까지를 암송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부터 암송하기 시작하면 2분 만에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까지 한 장을 통째로 다 외웠다. 이어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느 날 새벽 기도를 드리다가 예수님을 뵈었다. 저 멀리 서부영화의 들판처럼 보이는 수평선 쪽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단정한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꿈이 아니고 현실이길 바라면서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다가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 그 감격적인 장면을 다시 한번 보여주시기를 원했으나 예수님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으신다. 어느 때인가는 예수님을 그 거룩하신 안전에서 뵙게 되리라 믿는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는 지금도 새신자가 그리도 사랑스럽다. 내가 늦게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교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내가 나간 교회의 경우 새신자반 운영이 마흔이 돼 교회에 처음 나간 사람의 눈에도 마음에 많이 걸렸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1) 새신자들, 하나님 말씀 큰소리 암송하며 기뻐해
사업의 흥망 하나님께 맡기고 정직한 기독교 전문출판사 열어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이 1978년 창립한 규장출판사 전경. 1996년 1월 서울 서초구 현재의 선교센터로 옮겼다.
교회에 나가자마자 많은 신기록을 세웠다. 늦깎이 새신자가 새벽예배에 개근했고 주일성수를 한 것은 물론 부사장이라는 바쁜 업무에 쫓기면서도 수요일 밤예배, 금요일 철야예배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등록 2년 만에 안수집사 투표에서 몰표를 받았고 이듬해엔 장로로 뽑혔다. 새신자부장을 맡으면서 교회 부목사님이 가르치는 새신자 교육이 마음에 걸렸다. “주님, 가능하면 제가 새신자교육을 맡게 해주십시오. 새신자의 눈높이에 맞게 섬기겠습니다.”
신실하신 주께서 역사하셨다.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을 맞아 유럽과 미국에 다녀오는 동안 부목사님은 주일설교를 하시고 새신자부 설교는 부장인 내가 맡게 됐다.
나는 기도 응답이라 믿고 감사하면서 3개월 동안 새로운 교육방법을 도입했다. 딱딱하던 새신자반 분위기가 기쁨으로 확 바뀌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르치는 교육 대신 성경 말씀을 조금씩 암송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첫날은 요한복음 15장 1절을 다 함께 암송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새신자반은 일흔이 넘은 할머니 두 분, 할아버지 한 분에 젊은 남자 대학생과 젊은 부인 등 모두 7~8명이었다. 교사는 권사님, 남녀 집사님 등 5명이었다. 새신자와 교사가 서로 섞여 얼굴을 마주 보며 빙 둘러앉았다. 원래는 의자가 없는 비닐장판방이었다.
다 같이 이 말씀을 10번, 20번 반복하며 암송했다. 처음에는 완행으로 천천히 암송하다가 점차 급행으로 빨리 큰소리로 암송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으로 암송하면서 큰 기쁨을 맛보게 됐다. 나는 대학생 새신자에게 영어로 따라 하면 더 좋다고 했다. 그러자 눈빛이 살아났다. “아이 앰 더 트루 바인 앤드 마이 파더 이즈 더 가드너(I am the true vine and my Father is the gardener).”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두가 힘차게 따라 했다.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나는 말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입으로 큰 소리로 암송하니 어떤 마음이 듭니까.” “네, 아주 좋습니다.” 모두가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때의 분위기는 마치 오순절 다락방 같았다.
교회 장로가 되고 보니 세무장부를 2중으로 해야만 하는 탐구당 부사장 자리가 날로 부담스러워졌다. 특별한 부정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세무조사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 모든 장부를 감췄다. 어떤 때는 소문만 나고 실제로 사찰을 오지 않을 때도 있었고 열흘 정도 늦게 오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일체의 업무가 중지됐다. 나는 경리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고 책 출판의 실무만 담당했지만 여러 걱정이 앞섰다. ‘만일 세무사찰에 걸려 내 이름이 신문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죄송할 텐데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1978년 드디어 기독교 전문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사업의 흥망은 하나님께 맡기고 정직한 출판을 하기로 다짐했다. 규장각에 있는 한국사 한문 사료들을 국사편찬위원회와 의논해 번각 발행 또는 번역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나의 사명임도 다짐했다.
회사의 이름이 나의 꿈과 일치해야 했기에 여러 친한 학자 교수들과 의논한 끝에 규장문화사(奎章文化社)로 정했다. 규장은 한국문화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정조대왕의 아호다. 규장문화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문화창달의 사명을 띤 출판사라는 긍지를 갖게 됐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2) 문서선교 지상목표로 출판시장 뛰어들어
출판계 몸담아 책 만들 줄만 알았지 얼마나 냉혹한 시장인지 짐작 못 해
규장출판사 직원들이 채플실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직원 예배는 1978년 설립 당시부터 매일 오전 8시 20분에 드리고 있다.
규장문화사 창립에 앞서 ‘규장수칙 일곱가지’를 기도로 정했다. 그 아래에 로마서 8장 28절 전문을 실어 모든 규장 간행본의 판권에 수록하고 있다. 나의 소박한 의지를 담은 ‘규정수칙 일곱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기도로 기획하고 기도로 제작한다. 2.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을 사모하는 독자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책만을 출판한다. 3. 한 활자 한 문장에 온 정성을 쏟는다. 4. 성실과 정확을 생명으로 삼고 일한다. 5.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신앙과 신행일치에의 안내자 역할을 다한다. 6. 충고와 조언을 항상 감사로 경청한다. 7. 지상목표는 문서선교에 있다.’
탐구당 홍석우 사장에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회사를 떠나겠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당신에게 최선을 다했고 모든 일을 당신에게 다 맡겨왔잖소. 인제 와서 그만두겠다니 도대체 무슨 불만이 있다는 거요?”
나는 내 진심을 말했다. “늦게 예수를 믿게 됐는데 장로까지 되고 보니 부득불 기독교 전문출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경제적인 요구도 없습니다. 법정 퇴직금과 제가 그동안 써온 사장님의 책상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20여년을 출판계에 몸담았지만 책을 만들 줄만 알았지 출판시장이 얼마나 냉혹한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과 같은 처지였다. 그저 좋은 책만 잘 만들면 되는 줄 알았다. 출판사의 자본금이라야 퇴직금으로 받은 몇백만원이 전부였다. 교회 장로로서 경리장부는 회계사에게 맡겨 입출금 정리를 정확히 하겠다는 게 유일한 복안이었다.
오직 기도로 기획하고 기도로 제작한다는 것을 첫 규장수칙으로 삼고 그대로 경영하리라는 결심과 각오만 다졌다. 월급을 줘야 하는 직원은 정직한 인상의 영업사원 한 사람과 기초적인 장부를 기재할 수 있는 고졸의 착한 처녀 경리 한 사람 둘만 뽑았다. 책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모든 일은 나 혼자 감당할 생각이었다.
사무실은 종로예식장 입구에 있던, 일제강점기 때 지은 구식 집 옥상의 자그마한 방 둘과 서고로 쓸 좁은 공간이 전부였다. 삐걱 소리가 나는 좁고 낡은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는 3층 집에 전세로 들어갔다. 2층에는 치과가 개업해 있었다.
1978년 7월 1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사무실 문을 열었다. 탐구당을 담당하던 세무사에게 첫 달부터 수고비를 주면서 이중장부가 없는 정직한 출판사를 시작했다.
배순조 서울 성일교회 담임목사님과 장로님 두 분을 모시고 아내와 직원 둘까지 함께 비좁은 사무실에서 경건하게 창업예배를 드렸다. 이후엔 아침마다 나의 인도로 다 함께 직원예배를 드렸다.
일찍이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번각발행권을 위임받았으나 탐구당에서 유보하고 있던 대형국판 2000여쪽의 양장본 ‘여지도서(輿地圖書)’ 번각발행을 200부 한정판으로 출판했다. 한국근대사 연구에 필요한 고전으로서 각 대학 도서관과 지리학자들도 개인적으로 필요로 하는 책이었다. 규장문화사의 이름에 합당한 책이었다.
현금으로 구입한 종잇값 때문에 회사는 출발부터 휘청거렸다. 다른 제작비용은 탐구당 거래처들의 호의로 4~5개월 연수표(실제 발행일보다 훗날을 발행일로 정한 수표)로 지급했다. 작지만 비싼 광고가 한 일간신문에 나가자 구매문의 전화 대신 신문사 광고담당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광고를 거저 내는 것처럼 해주겠다는 전화였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3) 기독교 출판계의 샛별… 경제적 어려움에 고통
책 매진되자 광고요청, 모두 들어줘… 종이값·신문광고료 감당할 길 없어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인 여운학 장로가 1978년 규장문화사를 설립한 뒤 출간한 도서들. 여 장로는 ‘이것이 가나안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등 양서를 다수 발간했다.
나는 일찍이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인 일가 김용기 장로님의 저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다만, 본인이 기술한 것도 좋았지만 제3자가 객관적 안목으로 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과정과 그동안 이룩한 공적을 밝힌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제1가나안농군학교 교장과 제2가나안농군학교 교장에게 각각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어느 날 제2가나안농군학교에서 전화가 사무실로 걸려왔다. 당장 강원도 신림에 자리한 그곳을 찾아갔다. 거기서 김 장로님의 둘째 아들 김범일 교장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이것이 가나안이다’라는 책을 출판하기로 합의를 봤다.
우선 경건한 기독교 작가를 찾는 게 관건이었다. 마침내 친지의 소개로 크리스천 작가인 박완씨를 만났다. 그는 일반 기업의 간부들과 함께 1주일간 제2가나안농군학교 합숙훈련을 받았다.
“1년간의 여유를 갖고 ‘이것이 가나안이다’를 써 주시면 됩니다.” 뜻밖에 그는 3개월 만에 완성된 원고를 보내왔다. 조판 인쇄 제본에는 1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유명 일간지에 작은 광고를 냈다.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5000부 초판본이 매진됐다. 재판 3판 나오기가 바쁘게 계속 매진됐다. 그러자 여러 일간지 광고부장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탐구당에서처럼 너그럽게 그들의 광고요청을 다 들어줬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서점에서는 4~5개월 연수표로 결제해 주는데 종잇값은 현금으로 결제해야만 했다. 게다가 거저 내줄 듯이 인심 쓰던 신문광고의 청구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단행본 한 권이 아무리 많이 팔린다 해도 종잇값과 신문광고료를 감당할 정도는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한 셈이다.
당시 규장문화사는 부진했던 기독교출판계의 샛별로 화제가 되었다. 연이어 장기려 박사의 저서 ‘생명과 사랑’ ‘평화와 사랑’을 펴냈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에 대한 세계 명사들의 글모음과 교회구역조직에 관한 조 목사의 특강 등을 모아 ‘죽으면 죽으리라’를 출간했다. 김준곤 목사의 ‘예수 칼럼’(출판대행), 한경직 목사의 전기 ‘한경직 목사’ ‘한경직 칼럼’, 송명희 시집 시리즈, 신상헌 글모음 시리즈 등 신앙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베스트셀러도 꾸준히 발행했다.
그때는 겁도 없이 비싼 고리채를 쓰기 시작했던 시기다. 고리채는 산더미처럼 늘어갔고 경제적 어려움이 닥쳐왔다. 외화내빈(外華內貧), 고통의 삶은 지속됐다.
돌이켜 생각하면 규장문화사의 문을 열고 전반 10년 동안 일어났던 희비애락의 추억들이 산더미 같다. 그중 몇 가지만 뽑는다면 출판을 하면서 가까이 알게 되고 인생을 배우게 된 세 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김 장로님이다. 그분을 통해 믿음과 실천적 삶을 배울 수 있었다. 장로님은 문서로 약속의 보증을 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이름으로 20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문서로 된 계약서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 믿고 약속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으로 그 자체가 불변의 보증이었다.
김 장로님이 세웠던 이상촌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루지 못한 이상촌이었다. 그분의 ‘이동식 가나안농군학교’가 모티브가 돼 훗날 ‘이동식 이슬비 전도학교’와 ‘이동식 성경암송학교’를 만들었다. 그분이 모토로 삼은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6장 33절이다. 나의 모토 말씀은 ‘롬팔이팔’(롬 8:28)이었다. 그다음은 장기려 박사였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4) ‘주 안에서 즐겨 바보 되고, 주 위해서 기뻐 손해 보라’
장기려 박사 ‘나의 이력서’에 감동 주변 도움 받아 엮음 형식으로 출판… 묵필 선물이 내 평생의 좌우명
규장문화사 대표였던 여운학 장로가(왼쪽) 1980년 강원도 원주 신림가나안농군학교에서 고 김용기 장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79년 장기려 박사님을 만난 것은 한 일간신문의 ‘나의 이력서’ 코너에서 박사님의 칼럼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이 코너에 실린 칼럼을 읽을 때면 주인공들이 자신의 감춰진 부분을 드러내고 보여주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장 박사님의 ‘나의 이력서’는 달랐다. 본인이 애써 감췄던 선행을 신문사 측에서 보충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분의 책을 내겠다는 집념은 거기서 비롯됐다.
당장 부산 청십자병원 원장실로 찾아갔다. 온화한 인상의 그는 초면의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김용기 장로님의 신간 ‘이것이 가나안이다’를 드리면서 규장문화사의 일곱 가지 수칙을 소개했다. 신문에서 박사님의 칼럼을 읽었는데 여기에 박사님의 글을 더해 출판하면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줄 믿는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는 정중하게 나의 말을 다 들어줬다. 그리고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이력서는 내가 쓴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쓴 것입니다. 내가 써놓은 글도 없소이다.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나는 조용히 물러 나와 비서역을 맡고 있던 분과 의논했다. 장 박사님의 애제자이자 며느리인 서울 명륜동 안과의원 원장을 통해 출판의 뜻을 이루기로 하고 돌아왔다. 결국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줘 어렵게 여운학 엮음이라는 형태로 ‘생명과 사랑’ ‘평화와 사랑’ ‘장기려 박사’ 세 권을 출판했다.
그 후 장 박사님의 거처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청받았다. 그리고 내 평생 좌우명으로 삼은 ‘주 안에서 바보 되고 주 위해서 손해 보라’는 묵필 선물을 그 자리에서 받았다. 1984년 나의 다섯 아들에게도 나의 묵필로 이 좌우명을 써줬다. 지금도 다섯 아들은 이 묵필을 값진 액자에 넣어 가정마다 거실 벽에 걸어놨다.
이 좌우명은 규장문화사와 이슬비장학회의 모토가 됐다. 다만 억지로 바보 되고 눈물 머금고 손해 보기 쉽다 하여 2000년부터는 문구를 보충해 ‘주 안에서 즐겨 바보 되고 주 위해서 기뻐 손해 보라’로 개정했다.
장 박사님에 관한 여러 일화 중 잊히지 않는 게 두 가지가 있다. 부산 피난시절에 그는 부산복음병원을 세웠고 의료보험이라는 실험적 시도를 청십자병원을 통해 추진했다. 당시 가난한 피난민들과 부산지역 빈민층에게 값싼 의료 서비스로 소문이 나자 환자가 너무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처방약이 떨어졌다. 이때 부산항에 정박해 있던 스웨덴병원선 선장의 호의로 종합비타민 알약을 포대로 선물 받았다. 환자들에게 그 종합비타민 알약을 줬더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만병통치약으로 불렸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하나는 부산에서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치료할 때 이야기다. 장 박사님은 외과 전문으로 나무병상에서 온종일 외과수술을 했고 경성의전 후배이자 동료인 전종휘 박사는 내과를 담당했다. 장 박사님은 가족이 아들 하나뿐이었는데 전 박사는 가족이 여럿이었고 구급차 운전사도 가족이 하나였다. 그들 셋은 각자 가족 수대로 월급을 가져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1982년 한경직 목사님의 전기를 냈다. K목사라는 분이 원고를 다 썼고 한 목사님의 출판 허락까지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원고를 보니 아주 부실했다. 어떻게 그런 원고로 한 목사님의 출판 허락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1980년 한 목사님이 머물고 계시던 남한산성으로 찾아갔다. 김 장로님과 장 박사님의 책을 증정하며 이처럼 내가 원고를 다시 써서 출판하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한 목사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나는 온 정성을 다해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5) 한국 교계 원로들 언행록 출판… 하나님께 감사
말씀 생활화의 본 보여준 원로들 아름담고 감동적인 언행 모아… 믿음의 책들 많이 출판 한다 소문
여운학 장로가 규장문화사를 설립하고 1980년대 초 출간한 책들. 한경직 조용기 목사, 장기려 박사, 김용기 장로 등의 책을 펴냈다.
한경직 목사님은 숭실학교 학생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승훈 선생은 숭실학교를 설립한 후 조만식 장로에게 교장직을 맡겼다. 한 목사님 등 학생들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고통 속에 누워 계시던 이 선생을 병문안 차 찾아뵀다. “당근과 채찍을 쓰는 일본 경찰들의 간교한 유린 정책에 애국지사들이 넘어가고 있소. 학생들은 끝까지 나라 사랑의 의지를 지켜주기 바라오.” 이 선생이 몸을 일으키며 학생들에게 호소했던 말을 전하며 한 목사님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한 목사님은 서울 영락교회를 통해 많은 구제사업을 했다. 그중 하나가 장례사업이었다. 누구든지 죽기 전에 영락교회에 등록만 하면 그 사람의 장례를 교회 장례부에서 치러준다는 소문이 났다. 아무리 전도해도 불응하던 청계천 사람들이 죽을 때만 되면 와서 교회에 등록을 했단다. 한번은 장례부장 장로가 교회 내규를 바꿔 등록하고 한 달 이상 된 사람만 장례를 치러 주자고 제안했다. 한 목사님은 “그대로 해주시라요”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고 한다.
비록 극히 작은 부분이었지만 한국교회의 살아계신 원로들이 남긴 아름답고 감동적인 언행록이 책으로 나오는 데 쓰임 받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김용기 장로, 장기려 박사, 한경직 목사는 각각 다르면서 공통점이 있었다. 김 장로님에게서는 엄격한 아버지의 사랑을, 장 박사님에게서는 부드러우면서 강직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목사님에게서는 그 둘을 고루 갖춘 어버이의 사랑을 느꼈다.
세 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충성스러운 아들이었다. 말씀 생활화의 본을 보이셨다. 두 분은 장로로, 한 분은 목사로 사명을 다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셨다. 세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다가 불과 지난 반세기 안에 세상을 떠나셨다. 모두 나라사랑, 민족사랑, 주님사랑의 본을 남기고 가신 것이다. 이처럼 나는 믿음 안에서 출판을 통해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 복을 누렸다.
특히 송명희 시인의 숨겨졌던 믿음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동참케 하신 주께 감사드린다. 1985년 5월 규장문화사에선 그의 시집 두 권과 간증수기 한 권을 출간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의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타고난 육신의 불구로 인한 슬픔과 아픔을 믿음으로 승화시킨 시집의 반향은 컸다. 시집을 읽고 송 시인과 같은 처지에 있던 수많은 청소년이 믿음으로 육신의 비참함을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규장문화사에서 발행한 이영희 전도사님의 주일학교 교재 시리즈도 100종에 이르렀다. 이 시리즈는 한국교회 주요 교단에서 발행하는 주일학교 공과교재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규장이 공과교재를 컬러판으로 바꾸자 교단들의 공과교재도 컬러판으로 바뀌었다.
교계에서는 규장문화사가 좋은 공과교재와 믿음의 책들을 많이 출판하는 회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남모르는 높은 이자를 갚기 위해 또 이자를 얻어서 이자의 이자를 갚아나가는 비참한 운명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문제는 1984년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날 아침에 발생했다. 출근하자마자 전화벨이 울어댔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6) 서고 건물에 불… ‘통곡’에서 ‘감사’로
두 개 서고 중 작은 서고만 불에 타… 큰 서고 무사히 지켜주심에 감사
규장문화사를 설립한 여운학 장로는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도로 돌파했다. 규장 직원들이 2013년 2월 회사 내 십자가 기도실에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
“큰일 났습니다. 서울 신설동 서고 건물에 불이 났습니다.” 작은 출판사들은 찍어놓은 책들을 보관하는 일이 큰 과제였다. 비교적 값싼 변두리에 서고를 만들어 책을 쌓아뒀는데, 거기서 불이 났다.
앞이 캄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리채를 투자해 찍어놓은 재고 서적이 탔다니 어찌한단 말인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두 개의 서고 중 작은 서고만 탔다는 것이었다. 작은 서고의 바로 옆방에 괘종시계 월부판매 사무실이 있었다. 세일즈맨들이 밤늦도록 모여앉아 놀다가 그만 전기방석 불을 끄지 않고 나갔다고 했다. 합판 칸막이 옆에서 난 불이 규장서고로 옮겨붙었다. 불길은 잡혔지만 서고 바닥은 물바다가 됐다.
택시를 타고 달려갔다. 소방관 사진사들이 여기저기를 찍긴 하나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그 괘종시계 집만 찍고 있었다. 애매하게 불타버린 규장서고는 아예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괘종시계집 주인이라는 40대 사장의 명함만 받고 회사로 돌아왔다. 소리 질러 애통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공중목욕탕으로 달려갔다.
나는 먼저 아무도 없는 탕 옆에 있는 한증막으로 들어갔다.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이 못난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자 갚아나가기조차 어려운데 설상가상의 환난이 닥쳤습니다.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알지 못하오니 주여, 살려주소서!” 나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통곡했다.
얼마 동안 소리질러 애통할 때 번갯불처럼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들아, 두 서고 중 작은 서고만 타고 큰 서고는 온전한데 감사하단 말은 없고 투정만 하느냐. 이 모습이 너의 참모습이란 말이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주여, 감사합니다.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곧바로 옷을 입고 사무실로 향했다. 내 입술 밖으로 감사가 터져나왔다. 주께서 큰 서고의 책을 고스란히 지켜주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괘종시계 판매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죄인처럼 기가 죽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운학 장로입니다. 이번 화재로 얼마나 놀라셨는지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화재로 인한 손해배상은 요구하지 않겠으니 안심하시라고 전화했습니다.” “네?” “아직 젊은 분이시니 희망을 버리지 말고 다시 일어날 생각만 하십시오. 다른 점포들은 불행 중 다행으로 화재 피해가 나보다 크지 않은 것 같으니 끝까지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날 꿈을 꾸십시오.”
똑같이 불행한 상황에 있었지만 나는 도리어 괘종시계 사장에게 재기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롬팔이팔(롬 8:28)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렇다고 무슨 대책이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이튿날 괘종시계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님, 직원을 보내주십시오. 괘종시계 재고 100개 중 50개는 장로님 것으로 남겨놨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난리입니다.” “그 마음 고맙긴 한데 필요하지 않으니 다 나눠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꼭 보내주십시오.”
한사코 사람을 보내 달라고 졸라서 직원을 보내 괘종시계 25개를 가져왔다. 그걸 인쇄소 제본소 지업사 등 거래처마다 하나씩 나눠줬다. 그리고 직원들 집, 우리 집, 다섯 아들 집에 하나씩 나눠 가졌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그 시계가 때맞춰 정직하게 “뎅 뎅 뎅”하고 시간을 알려준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7) 새신자 교육에 열정… 매주 우편엽서로 인사
통신교육엽서 12장 세트 샘플 제작… 교회마다 몇백 세트씩 주문 쇄도
규장문화사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가 1982년부터 보급한 새신자통신교육엽서와 전도편지. 여 장로는 150가지 엽서를 만들어 한국교회의 전도활동을 도왔다.
1976년 나는 한국교회의 새신자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3개월간 서울 성일교회 새신자반 교육을 받으면서 확신한 것이었다. 기도 중에 주께서 지혜를 주셨다.
‘새로 등록한 새신자에게 매주 주말 받아볼 수 있도록 우편엽서를 12주 동안 발송해보자. 키포인트는 엽서 인쇄 내용에 있다. 몇 가지 원칙을 지키자. 짧고 인정이 어린 성실한 구어체로 인사, 안부, 교육하고자 하는 내용을 쓰자. 다만 가르치려는 자세가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여백을 두어서 거기에 담임목사가 친필 사인을 정중하게 한다. 요즘은 우편물 대부분이 생활정보지다. 거기에 비록 낯선 사람이지만 정중한 자세로 문안이나 신선한 배움의 정보가 있는 엽서를 받는다면 부담스럽거나 싫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샘플을 직원들에게 보여주며 반응을 살폈다. 편집사원이나 경리사원이 그런 샘플에 감동할 이유가 없는 줄 알았다. 행여나 내 진심을 이해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보여줬다. “네, 뭐 좋네요.”
흥분하며 설명했지만 아무도 ‘아이디어가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다섯 아들에게 보이며 열심히 설명했다. “아버지, 이게 뭡니까.” 실망스럽게도 초·중·고등학생 아들 중에 한 아이도 감동의 눈빛을 보이지 않았다.
실망하고 있을 때였다. 전무 직책을 맡던 성철호 형제가 달려왔다. “장로님, 저의 동기 전도사들이 오늘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 샘플을 주시면 제가 가져가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새신자통신교육엽서 샘플 12장 세트를 줬다. 이튿날 내가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성 전무는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장로님, 기뻐하십시요. 제 친구 전도사들이 한결같이 인쇄물이 나오면 당장 자기 교회에서 몇백 세트씩 주문하겠답니다.”
그제야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당장 인쇄 제작에 착수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교회마다 몇백 세트씩 주문이 쇄도했다. 새신자통신교육 12장 한 세트를 담은 예쁜 봉투와 새신자통신교육 엽서의 인쇄 제작, 발송에 손이 모자랄 정도였다.
1988년 기도 중에 담대한 마음이 생겼다. 3박4일간의 ‘새신자교육 세미나’를 열기로 한 것이다. 강의는 새신자통신교육 엽서를 개발한 내가 맡기로 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밤 8시부터 10시까지 가르치기로 했다.
중간에는 그동안 500명분, 1500명분의 통신카드를 주문한 경험이 있는 목사님 두 분의 간증 시간이 있었다. 300명은 참석하리라는 확신으로 서울 종로5가 여전도회관에 숙박비와 300석 세미나실까지 5개월 전에 예약했다. 2개월이 지나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100명밖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200명분의 숙박료를 물어줘야 하는데….’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되뇌면서 처음 믿음을 지키려 했다. 3개월이 지나자 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영업책임자를 불렀다.
“참석자가 적게 올 것 같아. 재계약을 해보라고. 300명 예약을 100명 예약으로 바꿔 달라고 사정해보게.” “여전도회 측에서는 이미 다른 예약신청도 사절해놓고 있다면서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해 보게.” 사탄이 내 마음에 불안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담당 직원이 통사정한 끝에 150명 예약으로 수정했다. 날짜가 가까울수록 불안감은 더 커졌다. 그런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날 아침 일찍부터 참석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300석이 꽉 차고서야 등록이 멈췄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8) 겨우 세미나 숙소 마련… 믿음 없음의 대가 톡톡히
참가자 150여명 등록비 두 배 지불… 하나님, 전원 숙소 예비해 주셔
규장문화사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가 2002년 8월 서울 온누리교회 양재성전에서 개최된 ‘제17기 이슬비전도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당장 150명의 숙소를 마련하는 게 문제였다. 그날 설한풍이 얼마나 억세게 불던지 영하 22도의 강추위 속에 규장 전 직원을 동원해 인근 호텔과 여관을 샅샅이 뒤졌다. 공교롭게도 그날을 전후해 국제행사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기 때문에 값을 아무리 올려줘도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나중엔 우리가 등록 때 받았던 숙박비의 갑절을 준다고 해도 고개를 저었다.
미아리고개를 넘어 신일고등학교 근처 여관집까지 찾았다. “하루까지는 빌릴 수는 있으나 3박은 안 됩니다.” 믿음 없음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50명의 숙소를 빌리는 데 등록비의 갑절을 지불했다. 결국 하나님은 등록자 전원의 숙소를 예비해 주셨다.
3박 4일의 새신자통신교육 세미나는 뜨거운 감격 속에 진행됐다. ‘새신자의 심리이해’ ‘전도는 새신자가 잘한다’ ‘새신자교육의 열쇠는 쉬운 말씀암송이다’ 등 새신자 교육 경험을 위주로 쉽고 진실하며 실감 나게 가르쳤다. 그 후 이슬비전도교육세미나도 여기서 얻은 지혜로 시작했다. 세미나 중에 받은 새신자통신교육 엽서 신청만 수천 세트에 달했다. 새신자 관리가 쉬워지자 전도에 대한 교육엽서를 만들어달라는 교회가 점점 늘어갔다.
당시 한국교회 전도법은 길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수준이었다. 전도 전단을 길에서 받는 사람들의 유형은 세 부류였다. 첫째로 슬쩍 받자마자 길에 버리는 경우, 둘째로 조금 예의를 지켜서 들고 가다가 길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경우, 셋째로 받은 전단을 자세히 보면서 혼잣말로 ‘우리 교회도 이렇게 전단을 만들면 좋겠구나’ 하는 경우 등이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의 사영리 전도는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을 대상으로 훈련된 간사들이 열심히 활용하고 있었다.
이게 한국교회 전도의 현실이었다. ‘아무리 값싸게 만든다 해도 그런 전단을 만드는 비용은 다 성도들의 귀한 선교헌금으로 한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성경적 전도법이었다. 먼저 떠오른 것은 ‘여리고 작전’이었다. 여리고성처럼 꽉 닫힌 사람들의 마음 문을 희생자 하나 없이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전도법이 성경 속에 감춰져 있음을 믿었다. 그래서 기대감을 품고 여호수아서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마음이 들떴다. 금을 캐려고 서부를 향해 달려가던 미국 서부 개척자의 마음 같았다. 드디어 여호수아 6장을 읽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쿵덕 쿵덕’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 하라.” 이 말씀 안에 전도의 열쇠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엎드려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천장 전등을 켰다. 작은 스탠드 등에만 의지해선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아내가 눈이 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왜 자다가 갑자기 불을 켜고 그래요?”
나는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벅찬 마음이었는데 아내가 그 감격을 알 리 없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이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여운학에게 이르시되”로 다가왔다. 그다음 말씀을 읽으면서 준비한 백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19) 평소 원하고 기도드렸던 네 가지 소원 이뤄
전도와 새신자 교육강좌 신청 쇄도… 대출금 이자 빚 청산과 장학회 설립
여운학 장로(왼쪽 일곱 번째)가 2006년 서울 서초구 규장선교센터에서 이슬비장학회 6기 수료식 및 7기 장학생 선발 감사예배를 드린 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수 6:4~7)
하나님의 여리고 작전명령을 그림으로 나타내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전도가 그려졌다. 전도법은 간단했다. 여리고성을 7일 동안 일곱 바퀴 돌아서 무너진다는 여호수아서 내용을 전도에 그대로 적용했다.
핵심전략은 여리고성을 전도대상자로 보고 말씀 선포에 앞서 사랑의 편지를 7주 동안 보내면서 기도와 봉사로 여리고성처럼 단단히 닫힌 전도대상자의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이었다. 전도편지를 1주에 1장씩 총 7주간 보내고 마지막에 교회에 초청하는 방식이었다.
이 그림대로만 해도 실패염려 없이 전도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 이 전도법을 가리켜 그 유명한 ‘여리고 작전 이슬비전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슬비전도편지를 7장 한 세트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새신자통신교육과 이슬비전도법 강좌를 실시했다. 꽉 막혔다고 생각했던 교회별 전도와 새신자관리의 길이 확 트였다.
교회마다 앞다퉈 이 강의를 듣기 원했다. 처음에는 나 혼자만의 강좌로 4일간 각 3시간씩 진행했다. 교회들은 더 짧은 기간에 마칠 수 있는 교육을 원했다. 그래서 4일을 3일로 줄였다. 그래도 강의 요청이 너무 밀려 부득이 2일 교육으로 단축했다.
이동식 이슬비전도학교는 국내 어디서든지 열릴 수 있었다. 그러자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외국에서도 이슬비전도와 새신자교육 강좌 신청이 쇄도했다.
이러는 사이에 이자가 비싼 고리채부터 원금을 갚기 시작해 2~3년 안에 은행 대출금까지 깨끗이 갚았다. 나는 평소에 원하고 기도만 드렸던 몇 가지 소원을 이루기 시작했다.
첫째 소원이었던 빚 청산이 이뤄졌다. 둘째 소원이었던 인재양성을 위해 신학대학원 2학년생 중에서 장학생을 선발해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는 이슬비장학회를 1995년부터 시작했다. 셋째 소원이었던 사무실 용지를 교통이 편리한 양재동에 샀다. 넷째 소원인 사옥도 건축했다. 이랜드와 계약해 1년 만에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지었다.
나는 60이 넘어서면서부터 문서출판 사역의 바통을 차세대에게 넘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규장문화사의 출판업무를 인계하기 위해 막내인 다섯째 진구를 일찍부터 업무의 기초인 서점 관리부터 창고 도서 관리까지 시켰다. 진구는 영업부장 상무 전무 부사장을 거쳐 1999년 사장 직무를 맡게 됐다.
주님은 내 생애의 마지막 사명을 주셨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창하셨던 ‘민족개조의 꿈’이다. 그는 독립운동에 온 생애를 바치며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이대로 나아간다면 독립을 이뤄도 세계적 경쟁 속에서 독립을 지켜나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민족개조 운동을 주창한 것이다.
그는 이 엄청난 일을 이루려면 기성세대의 의식과 성품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민족성을 바꾸기 위해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하자는 무실역행(務實力行), 서로 이해하고 서로 양보하며 서로 사랑하자는 정의돈수(情誼敦修), 자아를 희생하고 하나로 뭉치자는 대동단결(大同團結) 등을 모토로 젊은이들을 훈련하는 흥사단을 조직하고 훈련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20) 엄마의 ‘말’ 아닌 ‘삶’ 통해 자녀의 성품 형성
심각한 청소년 문제 해결하려면 태아기부터 태교훈련 철저히 진행… 성경 말씀 암송하고 반복 묵상해야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오른쪽)이 2010년 5월 경기도 안양 남서울평촌교회에서 개최된 303비전꿈나무 제7기 감사예배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청소년 문제가 너무 심각해졌다. 그만큼 인간 성품이 형성되는 태아기부터 태교훈련을 철저히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를 위해선 먼저 엄마가 말씀을 암송하고 그 말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반복, 묵상하는 성경암송 태교로 아기를 낳는 일까지 해야 했다. 그 후에 영유아기부터 유치·유년기, 나아가 청소년기까지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기간이 중요하다. 엄마의 말이 아닌 삶을 통해 자녀의 성품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비에 옷이 젖듯 점진적으로 자녀들이 엄마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에서 ‘이슬비성경암송교육’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더욱 더 강력한 의지와 굳건한 신앙으로 이 교육을 진행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확실한 지혜를 주셨다. 그것이 ‘303비전’이었다. ‘303’의 뜻은 한 세대가 30년이니 100년 후를 바라보며 3세대에 걸친 성경적인 꿈을 갖자는 뜻이었다. 2004년 가을부터 ‘이슬비 성경암송학교’를 ‘303비전 성경암송학교’로 개명했다.
1999년 11월 내가 섬기던 돈암동 성일교회(원용식 목사)에서 시작된 유니게과정 1단계 100절 암송교육이 오늘도 진행되고 있다. 19년간 자그마치 122기 교육이 진행됐다.
1기 출신 엄마 김은희 집사는 현재 유니게과정 정규 강사다. 당시 다섯 살과 네 살의 딸 중 언니 다솜은 지금 미국에서, 동생 새미는 숙명여대 영어과를 각각 졸업하고 미국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다.
지금까지 303비전성경암송학교 유니게과정을 수료한 엄마는 1만명이 넘는다. 반가운 사실은 이 땅에 말씀암송 태교로 태어난 ‘슈퍼 신인류’로 부르는 아이들은 적어도 3000명으로 추산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태어날 슈퍼 신인류들을 생각하면 잠자다가도 기뻐서 벌떡 일어난다.
‘303비전 성경암송교육’의 유니게 제1단계 교육과정 100절은 이렇게 짜였다. 첫째 주는 사도바울의 ‘사랑 장’으로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 1절부터 13절까지와 ‘쉐마’라 부르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까지 암송한다. 모두 19절이다.
둘째 주는 로마서 3장 23, 24절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암송한다. 십자가의 도를 익히기 위해서다. 그리고 마태복음 7장 7절부터 14절까지, 시편 1편과 23편 전편 각 1절부터 6절까지 모두 23절을 암송한다.
셋째 주에는 시편 100편 1절부터 5절까지 암송하고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16절까지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까지 모두 22절을 암송한다.
넷째 주에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 암송한다. 다섯 째 주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과 예수님의 사랑 장 요한복음 15장 1절부터 17절까지 모두 18절을 암송함으로 1단계 100절을 암송한다.
여섯 째 주는 감사제로서 조별로 분담해 앞으로 나와 1단계 100절을 양손으로 절수에 맞추어 손가락을 꼽으며 암송한다. 이때 좌석에 앉아있는 엄마들도 작은 소리로 함께 암송함으로, 암송 경쟁이 아닌 암송 축제를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드린다.
2단계 100절도 이 같은 순서로 진행한다. 이를 모두 마친 후에 나는 앞에 나와 진심 어린 칭찬과 격려로 말씀 암송의 보람을 나눈다. 암송을 잘하는 엄마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엄마도 있다. 3주 이상 출석자에게는 교육수료증을 수여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에 나타났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21) 엄마들, 말씀 암송하며 자녀 양육과 지혜 나눠
어린이들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엄마가 열심히 즐겁게 암송하면 그대로 따라 하며 배우기 마련
경기도 안양 남서울평촌교회에서 2015년 12월 개최된 ‘제16기 303비전꿈나무장학생 선발감사예배’ 후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2004년 가을 21기 유니게과정 1단계 교육에 백은실 집사가 16개월 된 아들 조이를 업고 참석했다. 그는 디자이너로 청소년 찬양지휘자인 이형동 집사가 남편이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아들을 키우는 건 쉽지 않았다. 아들을 성경적으로 키우려는 일념을 갖고 있던 그는 최에스더 사모의 ‘성경 먹이는 엄마’를 읽고 감동해 유니게과정에 등록했다.
그는 열심히 배웠다. 내 권면대로 같은 조로 공부하던 다섯 엄마와 교육 이후에도 매주 모였다. 출석교회도, 사는 곳도 달랐지만 매주 돌아가면서 자녀와 함께 모여 암송 가정예배와 자녀 양육의 지혜를 나눴다. 엄마들은 열심히 말씀을 암송하면서 어린 자녀들도 사랑과 지혜와 인내로 말씀암송을 익히게 했다.
백 집사는 말씀암송태교로 세 자녀를 더 낳았다. 그동안 남편은 늦게 신학을 공부해 지난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제 사모가 된 백은실 집사는 일찍이 유니게과정 간증 강사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말씀 심는 엄마’ ‘말씀 심는 가정’을 저술했고 극동방송과 CGNTV 등에서 방송도 한다. 특히 어린 네 자녀를 홈스쿨링하면서 날마다 온 가정이 한 자리에서 자녀 주도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 조이 온유 사랑 시온 네 남매는 모두 303비전꿈나무 지속장학생이다.
현혜현 부르신교회(김종욱 목사) 사모는 의사이면서 교회의 성경암송반을 직접 지도한다. 은상 희상 두 아들은 303비전꿈나무 지속장학생이다. 42세에 말씀암송태교로 낳은 ‘슈퍼 신인류’ 단영은 올해 다섯 살이다. 현 사모는 레지던트 시절 은상이를 조산아로 출산했다. 은상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그러던 은상이가 엄마의 말씀암송과 지혜로운 보살핌, 날마다 경건하고 즐겁게 드리는 가정예배를 통해 역시 303비전꿈나무 지속장학생이 됐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동생 희상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하루는 가정예배를 드린 후 “엄마, 나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했단다. 그다음 날 가정예배 때 희상이가 말하더란다. “엄마 같은 여자애가 없어요.” 자녀들이 ‘우리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지도한 엄마의 사랑과 지혜가 부럽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단다. “엄마, 유니게과정 언제 또 해요?” 왜 그랬을까. 엄마가 유니게과정 교육을 받을 때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가 좋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엄마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면서 자녀를 대할 때에는 ‘내 새끼’가 되는 경우가 흔하다.
어린 세 자녀를 키우고 있는 어떤 엄마는 이렇게 고백했다. 유니게과정에서 공부할 때에는 집안에 공기청정기를 달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단다. “어린 세 자녀를 키우면서 소리치면서 때리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했어요. 유니게과정 교육을 받으면서 스스로 자숙하다 보니 온 집안이 조용해지고 그런 감이 들었어요.”
어떤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엄마가 집안 걸레질을 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를 반복하기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손장난을 하면서 놀고 있던 다섯 살 아들이 ‘시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지 않겠어요?”
엄마는 열심히 말씀을 암송하려 해도 자꾸 까먹기만 하는데 어린 아들은 제 놀이를 하면서도 엄마가 막히는 곳을 터주었다는 이야기다. 어린이들은 가르치려는 특별한 노력 없이도 엄마가 열심히 즐겁게 말씀을 암송하기만 해도 그대로 따라 하게 마련이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22) 서울 지하철역에 ‘사랑의 편지함’ 설치
일본 교육 연수 중 지하철 광고서 착안… 지하철 본부 찾아가 정식 인가 받아
규장문화사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가 1987년 서울지하철 역사 안에 설치한 ‘사랑의 편지’ 보관함. 사랑의 편지는 지금도 많은 지하철 이용객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1987년 시작한 ‘서울지하철 사랑의 편지’도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70년대 후반 탐구당 부사장으로 일할 때다. 아시아 출판관계자들이 유네스코의 출판인 교육연수를 위해 2개월간 도쿄 신주쿠 혼마치에 모였다. 거미줄처럼 짜인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는데 그곳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1985년 10월 서울지하철 1~4호선 전 구간이 개통됐다. 당시 전도열이 뜨거웠던 나는 지하철 탑승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무료로 모든 계층의 승객들에게 값없이, 그러면서 이슬비에 옷이 젖듯 하나님의 사랑이 싹트게 하는 길이 무엇일까.’ 승객들이 다음 전철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에 자유로이 뽑아 읽을 수 있는 ‘사랑의 편지함’을 설치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서울지하철기독교선교협의회 사무국장 류중현 목사와 함께 지하철본부를 여러 차례 찾아가 어렵게 ‘사랑의 편지’를 설치하도록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장년판, 청년판, 청소년판, 어린이판 등 네 가지 ‘사랑의 편지’를 규장에서 만들었다. 처음에는 1호선과 2호선 100여개 지하철역마다 양편에 하나씩 설치했다. 우편함과 비슷한 빨간색 상자 4개를 만들고 그 속에 100장씩 편지를 꽂았다. 그리고 이런 문구를 써넣었다. “이 사랑의 편지를 읽으신 후 다른 독자를 위해 제자리에 다시 꽂아주세요.”
그러나 오전 중에 편지를 꽂자마자 금세 없어졌다. 우리 삶의 수준이 그러했다. 다시 꽂아 놓아도 역시 그랬다.
하는 수 없이 두꺼운 타블로이드판으로 인쇄해 벽에 붙였더니 그것마저 누가 떼어갔다. 1992년부터는 알루미늄 액자를 만들어 벽에 붙이고 투명 플라스틱으로 막았더니 그것을 깨기도 하고 액자 문을 열어 떼어가기도 했다.
효과는 컸다. 당시 지하철 사랑의 편지를 읽기 위해 역마다 내려서 읽는다는 독자가 있었다. 회사 동료들에게 편지를 나눠줬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회사원도 있었다. 밤늦도록 사무실에서 사랑의 편지 원고를 쓰고 있으면 문구와 관련해 충고해주는 전화도 걸려왔다.
서울지하철 사랑의 편지는 3~8호선이 각각 생길 때마다 수요가 늘었다. 부산 대전 대구 광주 지하철로 규모가 확대됐다. 천주교와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선교편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공개적 선교방법이 있었다. 서울 서초구 규장 사옥에 설치한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문구가 적힌 광고판이다.
1996년 건물을 세우고 옥상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붙였다. 이듬해 6월부턴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로 교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상 초유의 IMF 외환위기로 경제난이 엄습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그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신사 한 분이 찾아와 30만원의 감사헌금을 내밀었다. “사업 파산으로 절망에 빠졌는데, 그 글을 읽고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성공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어떤 장로는 믿지 않는 친구와 골프를 치다가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와 이리 안 맞노”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불신자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야야, 양재동 가봐라. ‘와 걱정하노 기도할 수 있는데’라꼬 써 있대이.” 이 광고판은 지금도 낮에는 원색으로, 밤에는 뒤에서 비치는 전등불빛을 통해 말없이 불행한 영혼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여운학 (23·끝) 문서선교보다 훨씬 넓은 신앙인격 향상 새 사명
지상목표인 문서선교 잘 지켜왔듯이 앞으로 태교교육과 장학회를 통해 신세대 인재양성에 ‘힘’ 보탤 것
여운학 303비전성경암송학교장(오른쪽)이 문서선교의 ‘바통’을 이어받은 다섯째 아들 여진구 규장 대표와 함께 지난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3년 전부터 테필린(Tefillin) 교육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40년 전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해도 나는 모든 유대인이 탈무드를 암송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탈무드가 트럭에 실어도 남을 정도의 율법과 지혜 모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모세오경, 곧 토라(Torah)를 다 외우는 줄 알았다. 잘 모르던 시절 그들의 암기능력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토라도 아니었다. 그들의 진짜 힘은 테필린에 있었다.
테필린 말씀은 불과 31절밖에 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구원(출 13:1~10) 봉헌(출 13:11~16) 봉사(신 6:4~9) 축복(신 11:13~21) 네 영역으로 된 테필린을 2500년간 나라 없는 백성으로 떠돌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자손손 전수했다.
각자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각 가정의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는 일(신 6:8~9)을 지속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암송능력에 대한 감탄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장자 정신과 긍지, 끈기, 노력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었다.
신앙인격과 실력을 갖춘 한국교회 303비전 사명자들을 위해 ‘새 테필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맞는 새 테필린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까지 품게 됐다.
깊은 묵상 끝에 신구약 성경 말씀 가운데 구원에 관한 말씀, 새 계명 곧 사랑에 관한 말씀, 성품에 관한 말씀, 성경에 관한 말씀, 찬양과 기도에 관한 말씀 등 53절을 뽑았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한 번 이상 사모하는 마음으로 테필린을 암송·묵상하고 그대로 살기를 힘쓴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자라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새 테필린의 개요는 이렇다. ‘구원의 말씀(요 3:16, 행 1:8, 행 3:23~24), 사랑의 말씀(요 13:34~35), 성품의 말씀(수 1:8~9, 마 5:3~16, 마 6:33, 마 7:7~14), 성경의 말씀(요 1:1, 살전 2:13, 딤후 3:16~17, 히 4:12~13), 찬송과 기도의 말씀(시 100:1~5, 사 43:21, 렘 33:3, 사 41:10, 마 6:9~13).’
이렇게 온 교회에서 함께 구원, 사랑, 성품, 성경, 찬송과 기도에 관한 구약 11절과 신약 42절을 포함해 53절을 항상 암송·묵상하도록 했다. 이를 실생활에 적용함으로써 성도의 삶이 자연스럽게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내가 출석하는 분당 할렐루야교회에서 새벽예배를 위해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남녀 성도 10여명은 매주 한 절씩 암송하기 시작해 석 달 만에 53절을 다 암송하게 됐다. 특히 성품에 관한 말씀은 암송에 1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평소에 설교로 많이 듣고 익혔던 말씀이기에 불과 석 달 만에 다 암송하게 됐다. 그래서 새벽마다 셔틀버스 타는 것이 큰 즐거움으로 변했다.
지금까지 문서선교와 말씀암송, 차세대 신앙전수에 바친 나의 삶을 소개했다. 규장은 그동안 규장수칙 마지막 다짐인 ‘지상목표는 문서선교에 있다’를 잘 지켜온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갓피플과 이슬비전도학교, 303비전성경암송학교 유니게과정처럼 문서선교보다 훨씬 넓은 신앙인격 향상의 선교 사명을 주셨다.
앞으로 신앙향상을 위한 양서발행 및 갓피플의 건전하고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함께 말씀암송태교교육과 303비전꿈나무장학회를 통한 신세대 인재양성의 새 사명을 다하는 규장이 되도록 주께서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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