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시차적 관점' 읽기 모임에서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찾아보니 라캉이 <에크리>에서 자기 저서의 중요한 주제로 <도둑맞은 편지>를 다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는 김에 지젝의 윤리관도 다시 복습해봤습니다. 정리가 좀 되면 개인적인 느낀점도 글로 올려보겠습니다...
도둑맞은 편지는 단편으로 내용이 짧습니다. 한 네이버 블로그에 전문이 올라와 있습니다. 읽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고 (개인적으로는) 재미도 있었으므로 전문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문 링크 : https://blog.naver.com/noteksc/221435719736
1. 내용 요약
소설은 왕비가 한 통의 편지를 배달받으며 시작된다. 그 편지는 절대로 왕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때 마침 왕이 내실에 들어오게 되고 왕비는 편지를 탁자위에 펼쳐 놓는다. 업무 보고를 위해 그들을 찾은 D장관은 이러한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의 편지를 자신의 편지를 탁자위에 올려놓은 다음 왕비의 편지를 집어 들고 나간다. 그 후 왕비는 파리 경시 총감에게 비밀리에 편지의 행방을 찾도록 지시하는데 그가 경찰을 동원하여 8개월 동안 D장관의 관저를 속속들이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발견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경시 총감이 뒤팽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고 뒤팽은 D장관으로부터 편지를 되찾아 보상금도 받고 동시에 빈에서의 악연에 대한 복수도 감행할 수 있게 된다. 사실 D 장관은 벽난로 아래로 매달린 편지꽂이에 편지를 꽂아 두었으며 이를 단번에 알아본 뒤팽은 장관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자신이 가지고 간 편지를 꽂아놓고 문제의 편지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출처] [프랑스현대철학] 자크 라캉,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대안연구공동체(CAS)) |작성자 클라우디오 [https://cafe.naver.com/paideia21/5141]
2.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캉의 해석
쉽게 해석해놓은 논문이 있어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출처 : <라캉과 문학-텍스트의 기능을 중심으로>; 김석(2008). 라캉과 문학. 수사학. 8, 8, 51-76] (아래가 해당 논문에서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라캉의 해석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글은 라캉의 주저 <에크리> 제일 첫 부분에 나오는 논문으로, 라캉이 자신의 시니피앙 이론을 포우의 단편소설에 적용하여 해설한 시니피앙의 문학적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편지의 순환에 따라 이루어지는 인물의 역할과 배치, 두 장면의 반복구조, 욕망과 시니피앙의 관계, 문자로도 변역되는 편지의 위상 등 여러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다. 라캉이 해설한 쟁점을 중심으로 <도둑맞은 편지>를 분석해보자.
3.1 전체 구성과 특징
제일 먼저 지적할 것은 소설의 구성이 갖는 특이성과 그것의 효과다. 짜임새 있는 구성은 소설의 재미를 더할 뿐만 아니라 시니파앙과 주체의 삶에 대한 유비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소설의 플롯과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한데, 라캉이 주목하는 것은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이 동일한 구조로 반복되면서 인물들의 자리바꿈을 통해 사건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소설의 구조와 인물들의 역할은 편지에 대한 시선에 의해 규정된다.
라캉은 첫 번째 장면을 원초적 장면, 즉 욕망의 최초 기원과 억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에 대한 은유로, 두 번째 장면을 그것의 무의식적 반복이자 해석이라 말한다. 편지의 순환에 따라 인물들의 역할은 바뀌지만 편지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은 동일하게 구성된다. 장면의 반복은 문자의 속성인 반복과 순환이 거듭되면서 주체가 경험하는 사건의 의미가 사후적으로 부여되면서 주체의 삶에 다시 침투하는 것을 비유한다. 다시 말해 최초 욕망은 사후 의미화의 연쇄적 사슬에 재편될 때 비로소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욕망은 주체의 현재 삶에서 반복되는데 이것은 억압의 회귀와 관련된다. 물론 억압된 것은 시니피앙이다.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중 인물의 역할과 위치가 실제 지위가 아니라 편지의 소유와 그것에 대한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왕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만 사건의 진행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모습이 전형적 예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대칭적 삼각형 구조로 소설이 반복되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편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역사를 이끄는 실질적 주체가 상징계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설의 구성에서 세 역할은 어떻게 설명되는지 살펴보자. 라캉은 이를 편지에 대해 주체가 취하는 세 가지 시선이자 상호주체성의 구조에서 주체의 자리로 본다. 첫째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시선으로 왕과 경찰의 시선이다. 다음으로 영리한 척 하지만 스스로 속는 시선으로 편지를 눈앞에서 강탈당하는 왕비와 장관이다. 마지막으로 강탈자의 시선으로 첫째 장면에서는 장관이, 둘째 장면에서는 뒤팽이 그 역할을 한다. 강탈자인 장관이 둘째 장면에서 처음 왕비처럼 눈앞에서 편지를 도둑맞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상호 주체성의 구조에서 주체의 고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다.
3.2 편지(문자)의 지배와 주체에게 미치는 영향
편지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할을 뒤바뀌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지닌다.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가로채고 변형시키면서 그것이 마치 여성에게 온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이는 여성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편지에 여성의 필체가 적혀있다는 것과 장관이 여성과 똑같은 운명을 겪는다는 것은 편지가 여성의 시니피앙 역할을 한다는 암시다. 애초 편지는 여왕의 사적인 비밀에 연루된 것인데 장관이 그것을 취하면서 여왕과 동일시된다는 것은 편지의 전능성을 잘 보여준다. 물론 실제로 장관이 여성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편지에 대한 위치와 시선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3.2 편지의 속성
소설 전체를 관통하여 편지는 의미로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순수 시니피앙으로 순환하고 상징계를 대표한다. 편지를 둘러싼 욕망의 갈등과 얽힘(여왕의 비밀, 장관의 탐욕, 비밀을 캐는 뒤팽의 호기심)이 작품의 플롯을 이룬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 즉 의미는 전혀 밝혀지지 않으며, 편지는 계속해서 이동할수록 지연되면서 독자의 궁금증만 증폭시킨다.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편지와 그것의 순환이 몰고 오는 소설적 상황과 반전은 욕망의 의미를 끝까지 알지 못하면서 쫓아다니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유라 볼 수 있다. 더불어 편지의 내용이 소설의 전개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고도 고정적인 의미를 가진 문자, 편지, 문학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시니피앙은 의미의 전달자가 아니다. 소설에서 메시지의 기능이 전혀 ㅂ각되지 않는 편지가 그것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편지가 각 사람에게 상이한 의미를 생산해내듯이 문학작품은 그것을 받아든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를 줄 수도 있는데, 이것은 언어가 발신인의 의도가 아니라 시니피앙의 자율성의 법칙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편지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편지의 수신인인 여황도 그것의 완전한 소유를 보장받지 못하는데 ‘도둑맞은 편지’라는 제목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암시한다. 강탈자 장관이 편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편지가 오로지 상징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상징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가 주체를 지배하고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문학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장관처럼 작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작품의 영향을 받게 된다. 텍스트의 순환에 따라 텍스트와 독자의 위치는 바뀌는 것이다.
3.4 욕망과 문자의 관계
편지의 순환은 욕망이 자신의 대상을 차지 못하고 시선의 사이로 끝없이 미끄러지도록 만드는 상징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잘 안다고 믿으면서 스스로 속게 된다. 결국 인간은 상징계의 그물망 속에서 자신의 영리함을 믿다가 속고마는 여왕이나 장관의 잘에 머물 수밖에 없다. 욕망의 대상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고 그나마 그것의 일시적 향유도 금지된 편지와 같다. 장관이 편지를 취한 순간부터 그것을 감추고 마치 아무 일도 ㅇ벗었던 것처럼 가장해야 했던 모습은 욕망과 대상의 관계를 암시한다. 장관은 자신의 보물이 전혀 값어치 없는 물건인 것처럼 더럽히고 구겨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지만 거꾸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고 만다.
욕망의 대상은 항상 상징계 속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는데 상징계는 상호 주체성의 관계를 전제한다. 상호 주체성의 관계에서 너와 나의 말은 욕망의 진정한 대상을 지시할 수 없다. 욕망은 주체나 의미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 사이의 틈에서 언뜻 언뜻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편지는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 그것은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없어야 할 곳에 있다. 경시총감이 편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지나치게 합리적인 판단만 믿었기 때문이다. 경시총감은 스스로의 판단과 경험만 믿다가 진실을 보지 못하는 눈먼 에고를 상징한다. 여왕의 고귀한 편지가 더렵게 훼손되어 벽난로 옆에 보란 듯이 놓여 있다는 것이 총감의 합리적인 사고에는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것을 찾는 곳에는 그것은 늘 우리의 시선을 피해 달아난다. 그리고 우리는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언급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장관이 편지를 잊고 있어도 편지가 장관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듯이 욕망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차라리 진리의 목소리에 몸을 맡기고 합리성을 내세우는 에고를 잠재울 수 있을 때가 진리를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때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친절한 자료들 잘 보았습니다~
라캉이 말하는 진리의 목소리가 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