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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잔치’를 벌이십니까?
17헤롯은 요한을 잡아오게 하여서,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헤롯이 자기와 형제간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헤롯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았으므로, 18요한이 헤롯에게 형제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19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요한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그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기 때문이다. 21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을 청하여 놓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22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23그리고 그 소녀에게 굳게 맹세하였다.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24소녀가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 그 어머니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25소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청하였다. “곧바로 서둘러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 26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소녀가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27그래서 왕은 곧 호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호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28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막 6:17-28)
운명공동체
오늘의 복음말씀은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표’(Lectionary)에서 온 것입니다. 원래 ‘성서일과표’가 제시한 본문은 마가복음 6장 14절부터 29절까지입니다. 그런데 좀 길어서 제가 앞뒤 몇 구절을 생략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한 이야기(6:7–13)와 제자들이 맡겨진 사역을 성공적으로 잘 마치고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보고한 이야기(6:30) 사이에 삽입되어 있습니다.[아래의 본문 참조]
7그리고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중략) 12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 [6:14-29] 30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6장 13절 바로 뒤에 30절이 이어져야 자연스러운데, 그 중간에 오늘의 본문인 막 6:14-29이 끼어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가 즐겨 쓰는 ‘샌드위치 기법’인데, 마가는 제자들의 사역 이야기 중간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를 끼어 넣는 ‘문학적 기법’을 통해서 앞으로 제자들이 겪을 운명, 즉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죽임 당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마가는 제자들의 운명이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이 셋이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예수!
아무튼 이런 이유로 마가는 오늘의 복음말씀을 이곳에 위치시켰는데, 문제는 이 본문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입니다. 고민하다가 오늘의 증언 제목을 “어떤 잔치를 벌이십니까?”로 정했습니다.
사실 이 제목은 제가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그 책 제목은 ‘우리가 만난 예수!’인데, 제목 밑에 작은 글씨로 ‘노동자와 함께 읽는 마가복음’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저자는 안병무와 이대수로 두 분인데, 안병무 선생은 신약성서학자이자 민중신학자였고, 이대수 목사는 돌샘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그 책의 출판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7년 2월부터 1988년 3월까지 약 1년 동안 이대수 목사가 돌샘교회 교우들과 함께 마가복음 공부를 했습니다. 그 성경공부는 강의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이대수 목사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후에 이 기록을 읽은 안병무 선생이 크게 감동하여 각 장마다 짧은 ‘응답’의 글을 보태서 이 책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목사가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강의한 책이 아닙니다. 목사가 평신도들과 함께 그들의 눈높이에서 성경을 읽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성경을 해석한 것을 꼼꼼히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 평신도 대부분은 돌샘교회가 위치한 군포지역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자연스럽게 먹물이 든 지식인의 입장이 아니라, 밑바닥 민중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a’ interpretation은 있으나 ‘the’ interpretation은 없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그 해석은 여러 해석 중 ‘하나’일뿐입니다. 그 어떤 해석도 ‘유일하게 맞는’ 해석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 맞고 다른 것들은 다 틀린 그런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증언/설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우리 교회와 똑같은 본문을 사용할 것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표’(Revised Common Lectionary) 자체가 원래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각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가 다 같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비교해 보면 다 다른 것에 놀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이 목사가 한 증언은 맞고, 이와 다르게 한 저 목사의 증언은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둘 다 맞고, 둘 다 진리일 수 있습니다. (물론 둘 다 틀리고, 둘 다 진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둘 중에서 나에게 더 끌리는, 나를 더 감동시키거나 납득시키는, 교회용어로 말하면 나에게 더 은혜가 되는 증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증언만 참이고 다른 것들은 거짓이 아닙니다. 해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만 해석이 다를 뿐입니다. 또한 예전에 큰 감동을 받았던 증언을 지금 다시 들었는데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똑같은 증언이 그때 거기서는 은혜가 되었는데, 지금 여기서는 왜 은혜가 안 될까요? 그 이유는 증언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니, 증언을 듣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a interpretation이 있을 뿐이지 the interpretation은 없다”는 사실을 웅변해 줍니다. 성경은 하나지만, 성경해석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입니다. 해석자의 삶의 자리에 따라 해석이 다 다릅니다. 또 그 해석을 듣는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같은 해석도 달리 들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해석의 다양성에 대해서 인정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기 해석의 한계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합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각자의 지식과 경험에 기초해서 “코끼리는 ○○과 같다”라고 해석하고 주장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자기 경험을 ‘절대화’해서 그것만이 옳고 그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이런 태도로 자기와 다른 남을, 자기 해석과 다른 남의 해석을 이단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진짜 이단입니다.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곧 성경해석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한계가 있을 때 참 자유일 수 있습니다. 아무거나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한계가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래서 성경해석에는 자유와 함께 분명한 ‘한계’도 필요합니다. 신학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을 전문 용어로 은유적 접근법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그 한계를 설정해 주는 것을 역사적 접근법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접근법은 “지금 여기”와 “그때 거기”의 간격을 해소해 줍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의 경험과 지식에 입각해서 성경을 해석하면, “그때 거기”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 바로 역사적 접근법입니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날듯이, 성경해석에는 은유적 접근법과 역사적 접근법 둘 다 필요하며, 이 둘 사이의 균형도 요청됩니다.
앞서 소개한 우리가 만난 예수!라는 책에서 돌샘교회 교인들은 “지금 여기서” 자유롭게 은유적 해석을 펼칩니다. 이에 대해서 안병무 선생은 그들의 해석 중 “그때 거기”에서 너무 벗어난 것을 역사적 해석으로 바로 잡아주며 전문가로서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이런 신학과 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이 바로 노동자와 신학자가 함께 쓴 새로운 ‘마가복음 해설서’ 우리가 만난 예수!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상당히 독특하고, 때로는 굉장히 파격적인 성경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의 본문을 읽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너무도 다른 두 잔치
우리가 만난 예수! 제6장은 마가복음 6장 14절부터 44절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너무도 다른 두 잔치”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들이 마가복음 6장을 읽으면서 14절부터 44절까지를 한꺼번에 읽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29절에서 끊어 읽는데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토막 내어 읽는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고, 또 단락마다 소제목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성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소제목도 붙어있지 않았고, 심지어 장절 구분도 없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장절 구분은 16세기에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 ‘스테파누스’가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장절 구분이 없었던 이유는 성경은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기’ 위해서 쓰인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 때 겨우 성경 몇 구절만 읽지만, 초대교회는 예배 때 성경 전체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가교회는 예배 때 마가복음 전체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겠나 싶지만, 우리 선조들이 판소리 완창을 한 자리에서 다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실제로 내러티브 크리티시즘(narrative criticism)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시카고 루터교신학대학원(Lutheran School of Theology, Chicago) 신약신학 교수 데이비드 로즈(David Rhoads)는 매년 판소리 완창 공연처럼 복음서 등을 외워서 발표하는 공연을 했고, 그것을 녹화하여 보급도 했습니다.
아무튼 제 말의 요점은 “성경 이야기를 토막 내어 읽는 것은 성경해석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장절과 문단을 다 무시하고 통째로 읽을 때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막 6:14-29가 그렇습니다. 이것을 끊어 읽으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막 6:30-44은 ‘오병이어(五餠二魚), 즉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를 각각이 아니라 통째로 읽으면, 이제껏 보이지 않던 전혀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혀 다른 이 두 이야기에 공통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음식을 차려놓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즐기는 ‘잔치’입니다.
그렇습니다. 막 6:14-44에는 묘하게도 헤롯의 생일잔치 이야기와 예수님의 오병이어 잔치 이야기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아니면 마가의 의도적인 서술이었을까요? 우리로서는 정확한 답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 눈에는 그것이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는 대로 읽었습니다.
먼저 헤롯의 생일잔치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분명 로마식 식사자리였을 것입니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음식을 저들은 먹고 또 먹었을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처럼 포식(飽食)을 넘어 폭식(暴食)을 했을 것입니다. 토하는 약을 먹어가면서, 먹고 토하고 또 먹고 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의 생일잔치에 차려진 진수성찬은 갈릴리 민중들의 고혈로 차려진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 음식을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요인들”(21절)이 모여서 함께 먹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 춘향전에 나오는 변 사또의 생일잔치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춘향전에 보면 암행어사 이몽룡이 변 사또의 생일잔치에서 당시 탐관오리들의 실상을 폭로하는 멋들어진 시 한 수를 읊습니다.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이요,
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라.
옥쟁반에 담긴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 민루락)이요,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라.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 높구나.
이렇듯 민중의 피와 땀으로 차려지고 그 뒤에 백성의 눈물과 원성이 숨어 있는 헤롯의 잔치는 어떻게 끝이 납니까? 그 잔치의 끝에는 음식이 담겨있어야 할 쟁반에 음식 대신 참수된 세례자 요한의 목이 들려나오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잔치는 죽음의 잔치였습니다. 그 잔치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상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에는 민중들의 죽음이 깔려있고, 그 마지막에는 백성들에게 높은 신망과 존경을 받던 한 지도자의 죽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왜 세례자 요한을 참수했습니까? 마가는 당시의 ‘궁중 비사’를 인용해 헤로디아의 원한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소개하지만, 그것은 채색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사실은 로마 황제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허 받고자 헤롯이 벌였던 모든 일들, 즉 본부인과 이혼하고 이복동생의 처와 결혼한 일, 갈릴리에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고 갈릴리 호숫가에서 유통되는 모든 생선 및 그 가공품들에 세금을 매긴 일 등등에 감춰져 있던 헤롯의 야망에 대해 세례자 요한이 반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헤롯은 자기 생각과 다른, 자기 야망을 방해하는 반대자를 배척하고 제거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의 잔치는 어땠습니까! 예수의 잔치는 광야에서 사흘씩이나 굶으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 기진맥진한 사람들이 벌인 잔치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에 대해 한 노동자가 “떡 5개와 생선 2마리로 5천명을 먹인 것은 예수님이 요술을 부린 겁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다른 사람이 대응하기를 “자기가 먹을 것을 혼자 먹으려고 숨겨두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성하고 내 놓은 것 같아요”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혼자만 먹는 이기심에서 같이 먹는 공동체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사실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헤롯의 밥상은 다량의 음식을 소수의 사람들만 ‘독점’했던 것이었다면, 예수의 밥상은 소량의 음식을 다수의 사람들이 ‘나누어 먹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도 넉넉히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잔치는 자기 것이라고 제 입에만 넣지 않고 배고픈 다른 이들에게 내놓으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서 이것 자체가 바로 기적 아닙니까? 기적은 기적을 낳습니다. 그 결과로 사랑이 변해서 된 음식을 그들 모두가 포식하고도 아주 많이 남아서 포만한 행복을 누렸다는 것이 그 잔치의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헤롯의 잔치는 독점이었고, 예수의 잔치는 나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결과는 전자는 죽임이었고, 후자는 생명 살림이었습니다. 돌샘교회 노동자 교인들은 막 6:14-44에서 바로 이 메시지를 읽어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까?
이렇듯 <나>만 생각하면 죽음을 결과합니다. 나만 먹고자 하면, 나만 옳다고 여기면 그곳에서 사랑이 사라지고, 사랑이 사라진 곳에서는 결국 생명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나>가 아니라 <너>를 위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들이 서로 합쳐지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교회는 천국 잔치를 지금 여기서 미리 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에서의 삶을 지금 여기서 미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서울제일교회에서 어떤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까? 헤롯의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까? 우리들만의 이기적인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를 위하는 이타적인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답을 말이 아니라, 몸과 삶으로 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서울제일교회가 천국 잔치의 현존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들이 그 역할을 능히 감당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