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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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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상 스크랩 우리 역사의 인물들 16 - 안시성주 양만춘
보성(甫性) 추천 0 조회 0 11.11.03 07:5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 역사의 인물들 16 

 

안시성주 양만춘

 

645년 고구려-당 전쟁은 또 한사람의 명장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뛰어난 지략과 임기응변의 전법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끝까지 지켜낸 양만춘입니다.

 

양만춘의 생존 연대와 출신에 대해서는 역사기록에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가 영류왕 때와 보장왕 때 안시성 성주로서 성을 강화하고 침략자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재능이 있고 용맹한 양만춘은 나라에 큰 공적을 쌓았으며 군사예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시체로 사다리를 쌓으며 투항분자들의 항복을 받아 겨우 개모성, 료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킨 당나라의 대군은 다음번 공격목표를 놓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고구려의 위력한 성 방위체계의 위력 앞에서 전전긍긍하던 적장들은 명장이 지키는 안시성을 피할 것을 바랐습니다.

 

당태종 역시「손자병법」에서 ‘치지 않을 성이 있다.’고 한 문구를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아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재주와 용맹을 갖춘 안시성을 치지 말고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은 건안성을 먼저 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육군의 대장격인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원래 이름 서세적)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으니 안시를 지나서 건안을 치다가 만일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의 군량수송로를 끊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 하면서 먼저 안시를 치고 다음에 건안을 치자고 했습니다.

 

당태종은 그의 제의를 접수하고 안시성을 공격목표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적들은 오산한 것입니다.

 

이적이 거느린 선봉부대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돕기 위하여 파견한 고연수, 고혜진이 인솔한 15만 고구려 지원군과 안시성 군인들의 협력에 의하여 시작부터 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적은 뒤미처 당도한 당태종의 후군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승리에 자만 도취하여 적을 경시한 고연수, 고혜진이 적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를 당하고 당나라군에 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안시성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홀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의 전략적 구상이 실현되느냐 못되느냐가 안시성을 사수하느냐 못하느냐에 크게 달려있었습니다. 물론 수많은 고구려 성들이 싸움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안시성만큼 준비된 성은 없었습니다. 만약 안시성만 사수한다면 고구려는 더 피해를 입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양만춘은 온 나라의 기대 속에서 성안의 군대와 인민을 이끌어 당나라의 정예대군과 맞섰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양만춘은 명장으로서 군사적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했습니다.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던 양만춘은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남달리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처자를 귀중히 여기며 그것을 지켜 한목숨 서슴없이 바치는 것을 무한한 영예로 여긴다는 전통을 적극 살리는 데 깊은 주의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성을 끝까지 사수하는 길만이 자기 가정을 지키고 나라와 겨레를 지키는 길이며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길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양만춘은 병사대중과 인민들의 가슴마다 애국의 불길을 지펴주었습니다.

 

안시성의 군민들은 분발하여 일떠섰습니다. 그들은 당나라군의 공격을 제때마다 짓부숴버렸습니다. 그들은 당태종의 깃발과 일산(왕의 백주 거동을 알리는 양산의 일종)이 나타나면 직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며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불바다, 피바다로 만든 원수들을 저주하며 조소를 퍼부었습니다.

 

당태종이 그 욕설을 듣고 화를 내자 이적은 성을 이기는 날 남자들은 모두다 구덩이에 묻어버리겠다고 하면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안 사람들은 성을 더욱 굳게 지켰으며 이로써 적들은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항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적장들 속에서는 비관하면서 안시성 공격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분분해졌습니다. 배신자들인 고연수, 고혜진은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여 오골성을 먼저 칠 것을 제의하면서 안시성 사람들이 자기 가족을 생각하여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양만춘이 벌린 군중동원사업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적장들이 오골성을 치자고 했지만 장손무기만 임금이 직접 원정했으니 여느 장수들과 달리 요행을 바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을 취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당나라 침략군의 안시성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적들은 양만춘이 평소에 잘 꾸려놓은 성과 잘 훈련시킨 군사들 앞에서 패배만 거듭했습니다.

 

양만춘은 임기응변의 전법으로 적들의 부단한 공격을 그때마다 짓부숴버렸습니다.

 

당태종이 안시성 공격에 적용한 공성전법은 크게 보면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임’이라는 전법입니다. 그것은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를 내려다보는 전법으로,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고 높은 데서 아래를 향해 공격하는 전법입니다.

 

안시성 공격이 뜻대로 되지 않게 되자 당태종은 강하왕 도종을 시켜 안시성 동남구석에 50만 공수를 들여 60일 동안 토산을 쌓도록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림’이라는 전법에 매달리는 자는 장수로서 졸렬한 자이며, 군사를 피로하도록 만들어 성을 해치는 데는 부족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명장’이라고 자부하던 당태종이 고구려 침략 특히 안시성 공격에서는 궁여지책에만 매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여러가지 공성무기에 의한 공격입니다.

 

당태종은 전쟁준비를 할 때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잘 지킨다는 데 생각을 해서 여러 가지 공성기재를 만들도록 했으며 제 스스로 직접 선택했다고 합니다. 자료에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적이 안시성 공격때 당차를 벌려놓고 돌을 날려 성의 다락과 치를 허물었다고 합니다.

 

셋째로, 분번식 공격이다.

 

당태종은 자기 시위 군사들까지 내몰아 번을 갈라 교대로 안시성을 공격하도록 해서 하루에 6~7차나 교전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자기 병사들을 쉬도록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단한 공격을 들이대여 성안의 고구려 군사들이 피로해서 지치도록 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양만춘은 적들의 이러한 공격에 대처하여 임기응변의 전법으로 위기를 막아내곤 했습니다.

 

적들의 ‘임’ 전법으로 공격하는 데 대하여 양만춘은 높은 데서 높은 데를 방어하는 전법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적들의 토산이 높아지는 데 따라 즉시 성우에 대성(행성이라고도 한다.)을 쌓아올려 적의 공격에 대처하도록 했습니다.

 

적들의 토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었을 때 고구려군사들 수백 명이 무너진 곳으로 뛰어나가 토산의 적들을 격파하고 그곳을 점령했습니다. 토산을 점령한 군사들은 3일간 적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토산을 사수했습니다. 용맹하며 그 어떤 정황에서도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준비되어있던 고구려 군사들의 투쟁으로 두 달 동안 50만 공수를 들여 준비했던 당태종의 ‘림’공격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양만춘은 적들이 각종 공성무기를 동원하여 공격해오면 그에 대응한 수성무기로 즉시 반격을 했습니다. 적들이 당차로 성벽과 다락을 파괴하면 즉시 목책을 세워 막았습니다.

 

양만춘은 적들의 ‘분번’식 공격에 대응해서 역시 ‘분번’ 식 방어를 조직했습니다. 그리하여 성안의 군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하면서 적들의 하루에 6~7차나 계속되는 공격을 여유 있게 막아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양만춘은 이밖에도 놈들의 공격수법을 연구하여 그에 기초해서 미리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적들은 요동성 공격 때 적용했던 성 밑으로 땅굴을 파서 공격하는 ‘공동’(땅굴을 파서 성벽을 파괴하는 것), ‘혈’(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공성전법 따위는 전혀 써보지도 못했습니다.

 

양만춘은 방어에서 적극성을 높이는 데 깊이 주의를 돌린 재능 있는 군사지휘관이었습니다. 방어는 소극적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로 되어야 합니다. 진지에 가만히 앉아서 적이 공격해올 것을 기다렸다가 타격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며 부단한 습격조 활동으로 적의 유생역량과 무기, 전투기술기재에 손실을 주며 적들이 피로하도록 하고 늘 공포에 떨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양만춘은 이적의 선봉부대가 고연수, 고혜진이 거느린 고구려 지원군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있을 때, 성문을 열고 제때에 반격으로 이행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야간 습격전을 조직하여 적의 진영을 혼란에 빠뜨리도록 해서 적을 피로에 빠지도록 했습니다.

 

피동적인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전을 도입한 데에 바로 양만춘이 군사예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양만춘은 특히 평소에 군사들의 사격술을 높이는데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안시성 군사들의 높은 사격술에 적들은 혼이 났습니다. 안시성 공격 때 당태종은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애꾸가 되었다고 합니다.

 

양만춘의 능숙한 지휘를 받은 안시성 군민들의 완강한 항전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고 앉아 뭉개고 있던 적들은 바닷길로 적의 배후에 진입하여 퇴로와 보급로를 끊어놓은 연개소문의 적후교란활동으로 더는 견딜 수 없어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양만춘은 곧 추격부대를 조직하여 퇴각하는 적들에게 다시 한 번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옛 중국의 사가들이 인정한 바와 같이,

 

“이른바 나라가 크고 갑병이 강하며 책략이 풍족하다는 것만 믿고 이길 수 있다고 자부하던 당태종은 이른바 훌륭한 군사는 펴지 못했다.(묘한 계책을 내놓고 군대를 잘 지휘하지 못하였음을 이르는 말)

 

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인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당태종이,

 

“어질고 명철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 군사를 다루는 데 한없이 기묘한 전술로써 향하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고 과대평가하면서도,

 

“동방을 정벌하는 사업이 안시성에서 패했으니 안시성의 성주는 그야말로 비상한 호걸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라고 양만춘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했습니다.

 

후세 우리나라에서는 안시성 군민들의 항전을, 성을 끝까지 지켜내는 위훈의 대명사로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양만춘은 군민을 단합시키고 불러일으켜 잘 준비된 위력한 방어수단들을 써서 뛰어난 군사적 지략과 능숙한 전투지휘로 ‘명장’ 당태종의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적들의 속전속결전략을 파탄시키고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군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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