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梅軒 윤봉길 상해의거 제80주년 기념식 행사 성대히 거행
지난 4월29일 일요일 오전 11시에 서울 양재동소재 매헌기념관(양재시민의 숲)에서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박승춘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하여
황의만 기념사업회장,박유철 광복회장, 윤석민 충청향우회 중앙산악회장
(전 국회의원),유족,시민,학생등 약 1,000여명이 참석하여 80년전
매헌 윤봉길 상해의거의 큰뜻을 기리면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한편 중국 상해 홍커우공원(거사를 하신 현지)에서도 오전10시(현지시각)에
국가보훈처 권율정 보훈심사위원장(정부대표)을 비롯한
김달수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부회장,안총기 주 상해총영사 및 교민등
300여명이 참석해서 국내와 동시에 기념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국내 기념식 거행순서는 11시부터 윤봉길의사 영정입장,국민의례,연보낭독,
대통령 기념메세지 낭독(국가보훈처장대독), 기념사업회장의 개식사.
광복회장 기념사.배용순(윤봉길의사부인)효부상시상,구국청년 선포식
(서울종합예술학교 학생80명),연극“불꽃으로 지다!”,윤봉길의사의 노래제창,
만세삼창등의 순으로 12:30까지 거행되었다.
이번 기회에 25세의 나이로 “殺身救國”하셨던 윤봉길의사에 관해서
우리 모두가 올바른 역사관 확립차원에서 똑바로 알 필요가 있어서
좀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즉 윤봉길 의사께서는 1908년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발이 마을에서 윤 황 공과 김원상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13년 6세때 큰아버지에게 한문수학을 한후,
1918년도 11세때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12세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교육을 배격하고 학교를 자퇴,마을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14세때 오치서숙,성주록문하에서 유학에 정진하였으며,
1922년 15세때 배용순 규수와 결혼, 슬하에 장남 종(宗),차남 담(淡)을 두었다.
1926년 19세때부터 22세때까지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운동을 시작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여,농촌운동교재 “농민독본 ” 3권을 펴냈으며,월진회를
조직하는등 청년시절 교육 계몽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30년3월6일 23세때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는 『丈夫出家生不還』” 이란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 길에 올랐다.
그후 이 정보를 일본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선천(宣川)에서 체포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그리고 출옥후 12월에 따렌(大連)을 거쳐 찡따워(靑島)에 도착하였다.
24세때인 1931년 5월8일 상하이에 도착,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국무령을 만나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큰 뜻을 피력 호소하여,
김구가 단장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김구선생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일왕의
생일연(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 청년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일왕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전승기념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행사당일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들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이 이어졌다.
11시50분경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의사는 물통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경축대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의사는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 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의사는 팔목이 잡힌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쳐됐다.
홍커우공원에서 폭탄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의사는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 등을 죽이고,
총영사 무라이,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제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마모루에게 중상을 입혔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는 이와같은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하였고,이는 그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홍커우공원에서 의거를 거행한 직후, 곧 바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넘겨지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며,1932년5월28일
상하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2월 19일 오전 7시40분경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형 집행으로
25세의 짧은 나이에 거룩한 순국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최후의 진술을 묻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고 윤봉길의사는 의연한 자세로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
윤봉길의사는 거사 이틀전인 1932년 4월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김구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봉길의사는 거사가, 조선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아들에게 남기는 유언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섰다.
두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는데,이를 소개해본다.
『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아비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그후 14년이 지난 뒤에야 1946년도에 국민장으로 용산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으며,
1962년도에 정부는 건국훈장 대한민국 장을 윤봉길의사께 추서하셨다
본인은 행사장에 참석하여 기념행사를 지켜보면서, 25세의 젊은 생애를
조국을 위해 바치신 윤봉길의사의 80년전 상해의거의 “殺身救國” 의 숭고한 애국정신,
그 큰뜻을 다시한번 되새겨 봅니다.
현재의 기성 정치인인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 정부고위층 인사들 일부께서는,
말로는 국가를 위한다고 외쳐대고 있으나, 당연히 내야하는 세금납부문제(납세의무)와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를 갔다 와야하는 문제(병역의무)조차도
진정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는지 되묻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정신을 잘 지키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20~30세대의 우리 젊은이들 중에 윤봉길의사 같은 위인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지? 올바르고 제대로 된 역사교육(특히 근.현대사 교육)은 물론,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뻐져린 교훈을 되새겨서 매헌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값진 희생이
헛되지 않고 큰 뜻을 살리도록 우리 모두 마음속 깊이 반성하고,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나라사랑 정신 그리고 국가안보를 튼튼히 해 나가야 겠다고
다짐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4월 29일
작성자 이 화 영 드림
-----매헌 윤봉길 상해의거 제80주년 기념식행사 이모저모---
...... 끝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첫댓글 충청향우회에서 바쁘게 활동하면서 윤봉길 상해의거 기념행사에 참석한 화영이의 애국정신도 존경합니다.
이런 독립투사들의 헌신이 오늘의 바탕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네.
좋은 일이요. TV에서도 보았는데 이런 선열들의 투쟁을 요즘 젊은이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보훈처장 박승춘 동기의 활동이 보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