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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말고사를 앞둔 6월 말 토요일 2교시 쉬는 시간.
서울 강산 중학교. 3학년 교무실은 아니고, 그 옆의 지도실.
그녀 키의 반 만한, 단단한 박달나무로 만든 '정신봉'을 바닥에 탁 박으며 승빈은
음산한 목청으로 일차 경고를 먹였다.
"야, 좋은 말 할 때 왕구라 까지 말고 다 뱉어!"
"아니라니까요, 선생님. 와 미치겠네! 진짜 아니라구요! 그냥, 했어요. 우연히 가다가
한번 잡아서 깐 거라구요!"
여드름이 숭숭 난 애띤 얼굴이다. 그래도 자기들은 벌써 다 컸다는 건방진 얼굴을
하고 잡혀온 세 놈 중 한 놈이 감히 승빈을 상대로 한번 개겨 보겠다는 자세를 취했
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강승빈 앞에서 감히 왕구라의 이빨을 까려고 하는 아
가들 앞에서 승빈은 하늘을 바라보며 핫! 실소를 했다.
"이것들이 끝까지 내 성질을 돋구네? 그냥 오다가다 한번 잡아서 까셨다? 하. 웃겨.
그런 놈들이 전날 노래방에서 술 퍼먹고 모여 가지고 한번 하자고 뎀볐냐? 이것들이
이실직고를 하면 봐주려고 했더니 감히 개겨? 이 자식들을 그냥, 확!"
바람 소리를 내며 승빈의 손에 들린 정신봉이 겁도 없이 어찌하든지 버텨 보려는
아가들의 귀여운 머리통을 향해 막 날아가려는 순간.....
"강승빈 선생님. 전화 받으세요."
어제, 근처 한곡 중학교 놈들과 패싸움을 했다가 경찰서에 잡혀간 것들을 새벽에
빼온 것이다.
그 중에서 끝까지 승빈을 상대로 입을 나불거리는 이 녀석. 소위 말해 <일진>이요
3학년 짱인 주석하는 일 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3년이나 승빈이 내리 담임을 맡아온
녀석이다.
입학해서부터 지지리도 속을 썩히는 이 놈과의 악연도 어언 3년을 헤아리자니, 서
로가 알건 다 알고 피할 건 피해주는 예의바른 놈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다시 한번
대형 사고를 치고 새벽부터 인간 강승빈을 아침도 못 먹게 하고는 이리저리 휘날려
다니게 하는 죽일 죄를 짓더니, 감히 이렇게 끝까지 열불을 돋구고 있는 것이다.
허구 헌 날, "재수없게 미녀(미친 여자)한테 걸려 가지고 내 인생 망가졌다"고 씨부
렁대는 이 자식은 이번일 말고도 불과 일주일 전에 제집의 에쿠스를 떡하니 무면허로
몰고 나오는 엽기적인 일을 벌여 학교 안을 발칵 뒤집어놓은 놈이다.
그것을 담임인 승빈이 대충 무마해주었으면 말이다. 의리가 있어야지.
그때도 다시는 이런 짓거리 안 하겠노라고 눈물 뚝뚝 흘리면서 제발 형한테는 말하
지 말아달라고 승빈 앞에서 울며불며 매달리던 놈이 아니더냐? 그런데 이 인간이 감
히 배신을 때리고 또 사고를 쳐?
일단 경찰서에서는 데리고 나오기는 했는데 열을 받아 완전히 눈이 뒤집혀진 강승
빈. 깐죽깐죽 버텨보려는 석하의 말에 완전히 속이 뒤집어져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
골통들 머리통을 작정하고 막 정신봉으로 호되게 내려치려던 찰나였다.
지도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학년부장의 목소리에 승빈은 고개를 돌렸다.
간발의 차이로 호된 구타를 면한 인간들 입에서 얍삽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승빈은 부장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후!~~ 이것들을 풀려 가지고 말이지. 얌마! 구석에 처박혀 꿇어앉아 있어! 그래,
오늘 너네들 말야. 내 성깔 건드린 대가로 처절한 응징을 당해봐라. 이것들이 아직도
군기가 빠져 가지고서.... 머리 처박아!"
아직도 분이 덜 풀린 터라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키가 큰 여드름 덩치들 셋의 정강
이를 승빈은 구둣발로 한번씩 걷어차 주었다. 일단 괘씸한 놈들을 구석배기에 원산폭
격을 시켜놓고 나서야 승빈은 아주 상냥한 얼굴을 하고 지도실 문을 나섰다.
오 초 전, 지도실 문안에서의 강승빈.
웬만한 사람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판인 시퍼런 빛이 번쩍이며 웃
음기 하나 없이 냉냉하게 굳힌 얼굴. 쌍욕을 마구 내뱉으면서 체벌 금지라는 이 시대
에 겁도 없이 박달나무 정신봉을 인정사정 없이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서 치마입은 다
리를 번쩍 들어 쪼인트를 까던 그 살기등등한 모습.
학생들 사이에서 <에이즈>(걸리면 죽는다!!라는 뜻임)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강승빈
의 얼굴이 문을 나서면서 갑자기 봄바람처럼 화사하게 풀려간다.
옆 트임의 까만 롱스커트 위에 받쳐입은 티 한 점 없는 하얀 블라우스. 거기다가
퍼머기라고는 전혀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등뒤로 묶었다. 살풋 웃음기를
머금고 지나치는 학생들에게 먼저 안녕?하고 인사하는 저 다정하고 예절바른 선생님
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아, 지독히도 예절바르고 조신한 목소리.
아까 덩치들을 잡을 때의 그 살벌한 고함소리와는 백 팔십 도가 다른 상냥하고 나
긋나긋한 목소리.
"나, 빚쟁이요."
교감 선생님 이하, 모든 나이드신 부장 선생님들이 일등 며느리감으로 탐내는 모범
적인 도덕 선생님 강승빈의 입술이 갑자기 뒤틀렸다.
'아구구, 머리에 김이 나서 죽을 지경인데 이 능글맞은 인간까지 날 더 스팀돌게 만
드는군.'
이를 갈면서도, 그러나 총애하는 강승빈이 성우 뺨치는 멋진 목소리를 지닌 남자의
전화를 받은 것에 대하여 갑자기 긴장한 교감 선생님 이하, 자신의 둘째 아들과 선한
번 보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정년퇴직을 앞둔 사회 선생님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의
식하며 승빈은 더 화사한 웃음을 머금은 채 목소리를 낮은 음 자리로 팍 깔았다.
"내일 갈게요."
"안되지! 난 지금 아사 직전이야. 적어도 사흘은 당신의 유부 초밥을 먹을 권리가
있는 사람 아니오, 나?"
승빈은 이를 아드득 물었다. 그러나 남들이 들으면 아주 다정한 연인에게 속삭이는
얼굴을 하고, 듣는 휘린도 귀를 수화기에 바짝 대지 않으면 못 알아들을 만큼 은밀하
고 야릇하게 속삭였다.
"때려 죽여도 오늘은 안 되겠네요. 전 퇴근하려면 아직 멀었구요. 더더구나 오늘은
학생들 지도사안이 있어서 오후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거든요. 시장하세요? 그럼 일식
집에 시켜 드시고, 저에게 요금을 청구하세요. 됐죠? 끊습니다."
동생 영빈이 저지른 사고만 아니었으면 평생 만날 일도 없고 고개 숙일 일도 없을
윤휘린이라는 괴이하고 성질 더러운 남자에게 승빈이 진 빚은 모두 5백 만원.
돈이 넘치다 못해 썩어나는 집구석 자식은 그래도 무엇인가 다른지 천 만원을 넘어
가는 입원비 다 필요없단다. 대신 옆구리 터진 김밥으로 빚을 갚으라는 괴이한 그의
선심에 승빈은 냉큼 O.K를 했다.
목적이야 뻔하지 뭐. 만난 첫참부터 연신 쫄티에 파묻혀 불룩 솟아난 승빈의 젖가슴
깨를 유심히 살피던 그 남자의 끈적한 시선을 보면 알만 한 것 아닌가?. 어떻게든 수
작을 붙여 한번 데리고 놀아보겠다는 속셈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 이 남자야?
취미생활로 여자와 방탕한 연애질이나 하고 심심파적으로 가난뱅이 도덕 선생을 놀
려먹는 일 좀 하겠다는데 힘없는 승빈이 어쩌랴? 너 잘났다, 하고 장단 좀 맞춰주다
가 바이바이 하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녀가 윤휘린에게 진 빚은 이제 유부 초밥 3번
이면 다 청산될 참이었다.
승빈은 아주 상냥하게 웃으며 노골적인 호기심을 헛기침으로 표현하는 교감선생님
께 확 꼰질러 버렸다.
"저 무서워 죽겠어요, 교감선생님. 학부형인데 자꾸 전화질을 해대네요. 제가 개인적
으로 마음에 든다나 이러면서... 저 어떡해요? 다음에는 이런 전화 받으시면 저 없다
고 해주세요, 네에!~~?"
지도실로 돌아온 승빈은 원산폭격을 하느라 얼굴에 시뻘겋게 피가 몰려 낑낑대는
불쌍한 똥강아지들 셋을 일으켜 세웠다. 전화로 인해 이미 김이 나가버려 패는 일은
물 건너갔으니 다른 방법으로 응징을 해야지. 아가들에게는 상당히 불행한 일이지만,
승빈은 이번에야말로 열받은 김에 이놈 아가들을 완전히 아작내면서 열분을 풀리라
마음먹은 터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싸늘한 얼굴로 저 <미녀>가 대체 어떻게 우리를 요리할까 눈
치만 보는 아가들을 향해 생긋 웃었다.
"내가 좋은 말로 내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너그들이 졸라 까불어서 내가 완전
히 야마 팍 돌아버렸다. 특히 석하. 네가 나를 상대로 골 때리게 한 게 어디 한 두 번
이냐? 나, 이번에 완전히 열 받았다. 좋다고, 내가 이번에 아주 너를 아작내주마. 내가
할까? 아니면 네가 할래? 보호자 호출 전화."
덩치 크고 주먹세고 깡은 많으면서도 유독 <미녀> 강승빈한테만 약한 불쌍한 주석
하. 갑자기 얼굴이 희멀겋게 변하더니 히힝.. 하고 우는소리를 냈다.
이 놈은 우는소리를 할만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의 폭력 조직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강남파>의 보스가 바로 석하의 형 주지하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는
승빈의 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어떻게 된 것이 저는 조폭 깍두기 주제에 제 동생은 먹물로 만들고 싶은 것인지,
석하가 사고만 쳤다하면 복날 강아지 패듯이 무작정 후드려 패는 지하의 버릇을 아는
지라 석하는 형을 부르겠다는 승빈의 말에 그녀의 무릎에 팍 엎어져 사생결단하고 애
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한번만 봐 주세요!! 형이 또 학교 오게 하면 저를 산채로 파묻어 버린댔
어요! 아시잖아요? 우리 형 지랄 같은 성질. 선생님. 힝힝힝"
승빈은 살벌하게 웃으며 석하의 밤송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여운 놈. 그러니 애초에 잘하지. 쯧쯧쯧. 셋 셀 때까지 전화한다, 실시!"
삼십 분 후, 지도실 안에서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대성통곡소리가 나는 가운데, 서울
깍두기들의 전용 탈것인 검은 에쿠스가 급히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집구석 피가 나쁜가 보다."
승빈은 뒤돌아 서서 창가에 팔짱을 끼고 선 지하에게 커피잔을 건넸다.
지하의 눈은 부하들에게 개처럼 끌려가 승용차 뒷좌석에 처박히는 석하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승빈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소리."
"그렇지 않고서야 저 주먹만한 놈이 뭘 안다고 저따위로 까불겠냐? 허긴.... 저 놈이
나 나나 아는 것이라고는 사시미 칼이나 들고 개지랄이나 할 줄 아는 인간하고 술집
작부 출신 계집이 서로 쥐어뜯고 악다구니나 하는 것이나 본 게 전부이니....."
지하의 말은 씁쓸했다. 그러나 승빈은 커피잔을 받아드는 지하를 아무 말 없이 바
라보기만 했다.
창 하나를 가려버릴 만큼 장신이고 건장한 체구가 비싼 양복에 세련되게 감싸여져
있었다. 단정하게 이발한 머리.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얼핏보면 전문직을 가진 유복
한 여피처럼도 보이는 주지하. 그러나 그가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라 짐작하게 되는
것은, 여간한 사람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매서운 그의 시선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고개를 돌려 승빈을 바라보는 지하의 눈빛은 얼음 풀린 봄의
강물처럼 온유하기만 했다. 얼음처럼 차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주먹과 깡으로 버틴
다는 그 주지하가 오직 강승빈이라는 여자 앞에서만 그렇게 마음을 풀고 웃음 짓는다
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승빈은 알고 있는 것이다. 지하의 눈빛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에 그처럼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승빈은 유달리도 쓰디쓰게 느껴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선배 말이 맞으려면 선배네 같은 집구석 아이들은 전부다 사고뭉치가 되어야만 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많다고. 그건 결국 석하 저 놈의 자유 의지의 문제야.
선배의 논리대로 하자면, 평범하고 정상적인 가정의 아이들은 전부다 범생이가 되어
야 한다는 거잖아. 하지만 날 봐. 난 범생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날라리가 되었
잖아."
"그 날라리가 멋진 도덕 선생이자 모든 남자들이 꿈꾸는 여자로 변했다는 것은 왜
말 안 하는 거냐?"
"인간승리지 뭐. 핫하."
여장부처럼 호탕하게 웃는 승빈을 바라보는 지하의 경직된 입가가 문득 파르르 떨
렸다. 도무지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불가사이하고 미묘한 빛만이 가득 찼던 그의
눈 안에 아주 부드럽고 슬픈 빛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드문 지하의
웃음에 문득 가슴이 아파서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려버린 승빈은 보지 못했다.
한 때, 저렇게 부드러운 지하의 눈빛을 혼자서 소유하기를 절실하게 원했었다. 사춘
기 적 치졸한 열병을 사랑이라 착각했을 때였다.
이제 승빈도 알고 있다.
10년 전 그때. 지하를 향한 무분별한 감정의 집착과 미친 광기의 사랑 놀음은 다만
외로움과 크나큰 상실감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때 승빈은 주지하라는 남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 상대가 누구라 해도 똑같았을 것이다. 지하를 만난 그
때 승빈은 아무 것에라도 몰두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단 한시간도 견뎌낼 수 없었을
만큼 허약해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기적처럼 그녀 앞에 울타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지하였을 뿐이었고, 그래서 그녀가 그토록 그에게 집착을 했던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지하는 바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승빈을 가장 잔인하지만 깨끗한 방법으
로 거절했다는 것을.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승빈도 지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사랑을 내쳐
버린 그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기자이던 아버지. 한국에서도 알아주던 현대 무용가이던 어머니. 그리고 발레를 하
던 승빈.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오히려 오빠처럼 믿음직하던 영빈.
대문간에 몇 십 년 된 모과나무가 두 그루 선 아현동의 작은 집에서 네 식구는 행
복했었다. 한번도 그 행복이 삽시간에 산산조각이 날만큼 허약한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승빈이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가을날이었다.
갑자기 교통사고로 사망한 부모님. 두 분은 어머니의 부산 공연을 마치고 서둘러
빗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날은 마침 승빈의 예술고등학교 입학 시험
날이었다. 전날까지 부산에서 공연을 마친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승빈의 입학 시험
날. 곁에 있어주기 위하여 무리해서 밤의 빗길을 과속으로 달려오다 변을 당한 것이
다.
삽시간에 빼앗겨버린 든든한 울타리. 그리고 안온한 행복. 승빈은 그날 이후로 열
여섯의 어린 나이에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들어놓은 거액의 보험금과 집이 있으니 어떻게든 꾸려갈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첫해 제사가 돌아오기도 전에 아버지
의 한 분뿐인 혈육이자 승빈 남매가 마지막 기댈 수 있던 울타리라 생각했던 고모가
서류를 위조해서 보험금을 지급받고 미국으로 몰래 이민을 가버렸다는 청천벽력의 소
식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승빈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린애들 둘이 헤쳐나가기에
는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것이다.
아현동 집을 팔고, 가재도구를 처분하고 어머니의 보석함까지 정리하고 나니 9평
임대아파트와 두 형제가 근근히 학교를 마칠 정도의 현금이 남았다.
미련없이 승빈은 발레를 때려치웠고 예술 고등학교 합격을 포기했다. 그리고 학비
가 적게드는 근처 공립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곳에서 승빈은 고등학교 2년 선배인
지하를 만났다. 그리고 불꽃처럼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 일대 고교에서 짱으로 통하던 무서운 주먹의 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친 주먹질을 하는 소년답지 않게 짙은 눈썹아래 훤칠한 인상의 잘생
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고, 숨이 막힐 듯이 부드러운 웃음을 짓는 멋진 소년이었다. 그
의 부친이 이미 그 일대를 평정한 건달이라는 소문이 자자해서인지 그를 감히 건드리
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의리도 많고 정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어떤 친구들은 지하
를 산이라 했다.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그늘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지하의 모습에서 승빈은 어쩌면 잃어버린 아버
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승빈이 보기에 지하는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주고 보호하는 '어른'이었다.
보호받는다는 안정감. 무엇엔가에 기대고 싶은 나약한 감정을 표출해도 된다는 안
도감. 지하 옆에 있으면 승빈은 더 이상 어른이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이었다.
승빈은 지하의 여자친구로 자청하며 그의 곁에 맴돌 때 그 모든 것을 충족받는 느
낌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살아온 듯, 갑자기 멋진 오빠가 생긴 듯, 아니 그
녀의 곤경과 두려움과 누추함을 해결해줄 백마를 탄 왕자님이 등장한 듯 승빈은 그래
서 지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집착했었다.
그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사랑. 심지어 그에게 생
일 선물을 사주기 위하여 처음 보는 남자에게 몸을 팔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만큼 승
빈은 지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졌고 집착했다.
그에 대한 처절한 소유욕과 지하가 승빈 그녀만을 바라보아 주기를 바라는 치열한
그 욕망을 승빈은 사랑이라 착각했었다. 그래서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받아주는 듯도 하던 그가 결국 자신을 진저리치며 멀리하고 다른 여자에게 날아가는
것에 절망하며 허벅지의 하얀 살결에 담뱃불을 지져대며 절규할 만큼....
승빈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한꺼번에 떠오르는 부질없는 옛 생각을 머리 한번 흔
드는 것으로 떨쳐버리고 침묵한 채 창 밖만 바라보고 있는 지하를 건너다보았다.
"너무 걱정 마. 선배의 옛날을 생각해 보라고. 석하, 아직 어리잖아. 석하 저자식. 그
래도 많이 좋아졌어. 형이 이렇게 든든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야?"
"네가 고생한다. 하지만, 그래도 네가 저 놈 담임이라서 안심이 되는 것은 사실이
야."
"하지만 선배 어머닌 내가 석하 담임인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던데? 핫하하. 학부모
면담날 얼굴이 파랗게 질려 나를 유령 보듯이 하시던 것 생각하면.. 핫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사내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승빈은 창 밖을 바라보았
다.
애초부터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 지 지하 곁에 있던 승빈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그
여자. 거기다가 그 일이 있고 나서 동정심으로나마 지하가 그녀의 곁에서 맴돌며 그
녀를 돌보아 주는 것이 죽어도 보기 싫었었나 보다.
유령처럼 퀭한 얼굴로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벌레처럼 방바닥을 구르며 목이 쉬어버
릴 정도로 울고 지내던 그날. 그녀는 승빈을 찾아 왔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파랗게
질려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승빈을 향해 침을 뱉으며 자기 아들 신세 망치는 더러
운 년이라고 소리질렀었지. 다시 한번 지하를 꼬여내면 그녀가 당한 일을 모두 소문
내어 이 동네에서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서슬 푸르게 협박하던 그 여자.
그래도 이제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란 사람은 어차피 자신의 자식에 대
하여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맹목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말이다.
최소한 그녀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아온 핏덩어리 석하를 그래도 친
자식처럼 받아주었다 하지 않던가?
이제는 미움도 원망도 색이 바랬다. 십 년이나 지난 일이 아닌가 말이다. 떠올리면
그냥 잠시 아프다 마는 고질적인 흉터 같은 것일 뿐이 아닌가 말이다.
담담하게 말을 잇고는 있지만, 그러나 문득 울컥 목이 메여만 가는 승빈의 옆얼굴.
그것을 바라보는 지하의 눈 속에 잠긴 고통은 더 짙어지고 있었지만 그를 외면만 하
고 있는 승빈은 역시 그것도 보지 못한다.
"같이 밥이나 먹자. 오늘 약속 없어. 괜찮지?"
승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밥 한끼쯤 어떠랴? 또한 지하는 누구에게든 식사 대접을 청할 만큼 늘 친절한 사람
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우연히 만나 학교 선후배 사이라도 밥은 한끼 같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니까. 기대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
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학부모가 아닌가?
"잠깐만 교문 앞에서 기다려 줘. 정리 좀 하고 내려갈게."
먼저 지하를 내려 보내놓고 야무진 입매를 단단히 굳히며 승빈은 퇴근 준비를 서둘
렀다.
"정신 차려! 강승빈."
그녀는 소리내어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지하만 대하면 삽시간에 무너지는 마음을
추스리듯이 그녀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기도 했다.
대체 넌 지하 선배에 대하여, 네 삶에 대하여 무엇을 더 기대하는 거니? 그녀는 마
치 자신의 뺨을 찰싹 때리듯이 스스로를 비웃으며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긁어내렸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붉은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의 상처 같은 건 눈을 꾹 감고 똑
딱단추로 잠가 버리면 그만이다. 머리 흔들어 잊은 척 하면 그만이다.
살아가는 건, 견뎌내는 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미래와 삶을 산산조각
낸 그날의 기억, 평생 지워지지 않는 부정한 낙인이 찍힌 그날의 참혹함도 견뎌냈는
데, 그 절망과 끔찍한 시간의 치욕도 극복해냈는데, 이까짓 것쯤 참아내지 못할까? 아
무리 힘들고 아프고 지독해도 그날만큼은 아닐 것이니 말이다.
정신 차려야 했다. 지하에 대하여 더 이상의 미련과 집착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
에게 그런 자격이 없지 않는가?
강승빈이라는 여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행운은 절대로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참혹한 밤 이후, 그녀는 애시당초 그런 행운을 누릴 자격조차
박탈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행복 같은 거, 사랑 같은 거. 그건 벌레보다 못한 그녀
에게 언제나 너무 과분한 단어였다. 강승빈이란 여자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주홍빛 낙인이 태어날 때부터 찍혀 있었던 것이므로.
지하가 데려간 곳은 근사한 이태리 요리를 파는 음식점이었다. 뭘 먹겠느냐는 지
하의 말에 승빈은 머리를 득득 긁었다.
"아는 게 있어야 먹지. 아무 거나 시켜 줘. 난 뭐든지 잘 먹잖아."
음식주문을 마치고 그들이 몇 마디 이야기를 채 나누기도 전이었다. 실내 깊숙한
자리에서 식사를 마치고 걸어나오던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마주앉은 승빈과 지하를
보고는 우뚝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지하...씨?"
"유나?"
앞에 선 여자를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자신 앞에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
을 수가 없다는 듯 지하의 눈은 휘둥그레 열려 있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건 유나나 지하나 마찬가지였다.
오유나.
십 년이나 지났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도도하고 아름답고 가냘픈 그 여
자. 지하의 첫사랑이자 아직도 마음속에 잠들어 잇는 꽃 한송이. 유일한 그의 연인 유
나.
서로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을 옆에서 이방인처럼 바라보며 승빈의 심장 깊은 곳에
푹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 아주 아픈 것이 꽂히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는? 언제 귀국한 거니?"
"여전히 강승빈은 지하씨 옆에 있네."
지하의 말은 듣지 못한 듯 승빈과 지하를 번갈아 바라보는 유나의 시선은 차가웠
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로는 그냥 부드럽고 애잔했지만 승빈의 귀에는 어떤 비아냥
같은 것을 담고있는 듯 했다. 그때도 지금도 오직 해바라기처럼 유나만 사랑하고 그
리워하는 지하. 그럼에도 미련맞게 그런 무정한 남자에게 부끄러움이나 수치심도 없
이 끈끈한 혹 덩어리처럼 붙어있는 승빈에 대하여 그녀는 굳이 경멸감을 감추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아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유나의 것이었던 지하의 옆자리. 그런데도 교활한 족제비처럼 그 자리를 욕
심내어 지금도 여진히 어리석은 미련을 끊지 못하고 지하 옆을 맴도는 그녀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말이다. 그 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나 그녀의 것이었으니, 초라한 너
따위는 터무니없고 과분한 욕심을 내지 말라고 말이다.
승빈은 문득 지하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유나를 바라보면서도 차마 그녀가 나타난
것을 믿지 못하는 그런 얼굴. 너무 눈부셔서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고 아직도
사랑하기에 차마 앉아라 말하지 못하는 그 수줍음.
감추지 못하는 지하의 사랑, 눈 속에 가득한 그것의 감정은 아마도 남자의 마음에
아직도 살아있는 첫사랑이자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집착이리라. 그 것을 억지로 빼앗
겨야만 했던 남자의 깊은 슬픔과 상처이리라.
승빈은 목이 부러진 꽃대궁처럼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철부지였던 그녀가 과거에 지은 너무 큰 죄 - 그토록 사랑했던 아름다운 이 사람들
을 억지로 떼어놓고 그들의 인연을 망쳐버린 그녀의 죄가 가슴을 쇠망치처럼 후려쳐
서 가능하면 승빈은 바닥으로 꺼지고 싶었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 것처럼
이미 벗어났다 싶은 과거지만, 그 흔적은 이렇게 아직도 남아 그녀를 극한까지 초라
하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다.
승빈은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유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앉으실래요? 선배하고 저도 우연히 만났어요."
"그래도 될까? 두 사람, 어쩐지 중요한 시간인 것 같은데."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그러나 승빈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서슴치 않고 자리에
앉으려 하는 유나를 제지한 것은 뜻밖에도 지하였다.
"우린 상관없지만 네가 괜찮겠어? 일행이 있는 것 같은데... 그리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말야."
계산을 마치고 그녀를 기다리는 여자를 돌아보며 지하가 말했다. 그토록 사랑했지
만, 억지로 놓아야했던 사랑하는 여자를 이렇게 갑작스럽게 재회한 것이 당황스러웠
던 것일까? 그는 유나를 이런 식으로 우연히 조우한 것에 있어 대놓고 엄청나게 감격
적이거나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나의 얼굴은 처연했다. 그녀가 지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상관없어. 날 기다리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 이혼했거든. 지하씨."
유나의 폭탄같은 그 한마디에 지하가 훅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인 듯 했다. 그건 승빈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명문가의 며느리가 되었다던 그녀.
비록 결혼은 강제적이었는지도 몰라도 간간이 들려오는 그녀의 소식은 적어도 이혼을
할 정도까지 최악은 아니라 했었다.
누가 더 당황하고 놀란 것일까? 지하일까 승빈일까, 아니면 그런 말을 태연히 내뱉
는 유나일까?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전하듯이 이혼했다고, 그러니 우리 이제 떳떳하게 만
날 수 있다고, 아직도 난 널 잊지 못하고 있다고, 널 사랑하고 있다고 암시하는 유나
의 눈빛이 지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승빈은 문득 비주룩히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유나와 지하 사이에서 승빈은 십 년 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
역시 철저하게 관객이었다.
너무 깨끗하고 잔인하게 말 한마디로도 사람을 밀어낼 수 있는 여자가 유나였다.
차분하고 세련되게, 언제나 그 맑은 눈에 물기를 반은 담고, 지하를 다시 무섭게 흔들
고 있었다. 이제는 새장 속에서 나와 자유롭게 그에게 날아올 수 있다 말하고 있었다.
이 것이 운명인가 보다. 이것이 승빈 그녀에게 정해진 몫의 전부인가 보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두 분이 어쩐지 긴 이야기를 하셔야 할 것 같네요. 난 갈게, 선배. 선약
이 있었는데 잠시 잊었어. 미안해. 식사는 담에 하자."
무어라 지하가 만류하기도 전에 재빨리 식당을 빠져나온 승빈은 무작정 거리를 달
려가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그 곳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끼여들 수 없게,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감격적으로 재회한 그 곳에서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가 망
쳐버린, 아무리 욕심내도 얻을 수 없는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만난 그 것
을 축하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강승빈은, 그러고 보면 절대로 착해질 수는 없는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사랑받을 가치도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는 여자인 것이다.
<5>
푸른 나무들이 비에 씻긴 말간 팔을 치켜들고 있는 교외의 도로를 달려 휘린은 서
울 근교에 자리잡은 고급스런 클럽 앞에 차를 세웠다. 이제 막 해가 넘어가려는 서녘
하늘은 진주황색 비단을 펼쳐놓은 듯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주차요원이 구르듯이 다가와 문을 열어주고 그에게서 키
를 받아 들었다. 한 달에 한번씩 열리는 황태자들의 모임. 그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윤휘린을 몰라보는 사람은 이 클럽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모임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넓은 주차장에는 각양각색의 고급 승용차
들이 20여대가 넘게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도 휘린 그가 가장 늦게 온 모양이다.
휘린은 단단하게 굳힌 입매를 애써 부드럽게 풀며 육중한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클
럽 문을 천천히 들어섰다.
사실은 조금도 참석하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애초에는 이름만 들으면 다 알만한 기업들. 그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젊은 2
세 기업인들이 서로 정보나 나누고 친목이나 도모하자며 모인 자리였다. 그러나 어떤
모임이든지 타성에 젖으면 언제나 처음의 좋은 취지는 차츰 사라지고 만다. 대신 이
제 그들의 모임은 애초에 금 숟가락을 물고 태어난 팔자좋은 인간들이 자신들이 소유
한 부와 권력을 만끽하며 끼리끼리 모여 놀고 먹자판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휘린은 그 자리에 항상 있었다. 그것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사업을 하려면 첫째, 절대로 속내를 알 수 없게 하는 미소로 가면을 쓰고 살 것. 누
구에게든지 사람좋은 척 접근하며, 그 인간의 약점을 찾아 이용해야할 것. 또한 하기
싫은 일이라도 가장 즐거운 일이라는 듯이 나서서 해야할 것.
사실 이 모임을 만들어진 것은 휘린의 형 하린이 국내에서 잠시 머물며 사업을 총
괄하던 몇 해전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국내에서 공부했던 하린이 고국에 돌아와서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들이나 만나자며 알음알음해서 모인 사람들이 이 친목모임의
첫 시작이었다. 그러나 하린의 친구들이라야 대강 그 물에서 그 물이니 자연스럽게
그 모임은 경영자 2세들의 고급스런 사교클럽으로 변했고, 이제는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하는 가장 인기좋은 그러나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가장 배타적인 사교 클럽으
로 변해 있었다.
"오랫만이다, 윤휘린!"
"어서 와! 오늘은 늦었다?"
파트너들을 데리고 온 팔자좋은 녀석들은 끼리끼리 모여 술잔을 들고 담소하고 있었
고 휘린처럼 청승맞게 싱글인 인간들은 큐대나 잡고 포켓볼이나 치고 있거나 컴퓨터
오락이나 하고 있는 처량한 신세였다. 휘린은 누구나 다 속아넘어가는 쾌활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날리며 바텐더가 서서 칵테일을 만드는 라운지 바(BAR)로 다가갔다.
"블루 하와이 한잔."
낮은 목소리로 음료를 주문하고 나서 휘린은 실내의 사람들을 권태로운 눈빛으로
한바퀴 휘 둘렀다. 그러다가 그는 별로 보고싶지 않은 사람과 눈이 마주친 터로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는 다름 아닌 김정우의 큰오빠인 강우였다.
조심해야 한다. 간신히 덮어둔 상처가 분노와 괴로움이 강우를 보는 순간 심장에서
사납게 들끓어 휘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도 남은 미련이 지워지지 않는 괴로움
이 강우를 보는 순간 해일처럼 그를 덮쳐와 그는 지긋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가 사랑한 여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드 것을 다 빼앗아 간 존재들이다. 그 가
엾은 아이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안기는커녕, <너만 없어지면 우리 집은 행복할
텐데...>라는 모진 말로 그 애를 먼 이국으로 쫓아낸 사람이다.
<네 엄마는 허수아비 병신이었대. 그래서 우리 엄마가 네 엄마를 쫓아낸 거야. 아
버지도 너 같은 건 딸로도 생각하지 않는대. 그래서 널 외갓집에서 안 데려온 거야>
어린아이는 잔인하다. 그것이 얼마나 듣는 사람에게 지독한 상처가 되는 지도 모르
고 자신이 듣고 이해한 그대로 내뱉고야 마니까.
그런 말을 다름 아닌, 오빠라 생각했던, 믿고 의지할 가족으로 생각했던 이의 입으
로부터 들었을 때 그녀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고 아프게 여겼을
까?
그러나 그 모든 고통과 절망을 견뎌내고 밤하늘을 밝히는 찬란한 유성처럼 빛으로
살아간 그녀. 내가 사랑한 여자 김정우.
그러나 사랑인 줄도 모르고 어리석게도 놓아버려 평생 가슴의 말뚝이 되어버린 그
사람.
정우가 죽고 난 후, 한해도 채 되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 김교수와 강우 어머니 장
혜선 교수는 이혼을 했다.
김교수는 마치 자신의 모든 기억과 아픔에서 도망이라도 치듯이 이혼을 하고 교환
교수를 청해서 벨기에로 나가버렸고, 이혼의 조건으로 모든 재산을 얻어낸 장교수는
여전히 정력적인 연주활동을 벌이며 당당한 음악계의 대모로 생활하고 있다하였다.
그러고 보면 상처를 견뎌내고 고통을 뚫고 나가는 힘은 남자들보다 여자가 더 많이
가지고 있나보다.
"오랜만이구나."
"아 형. 오랜만이군요."
휘린은 냉담하게 인사만 하고 바텐더가 전해주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대놓고 더 이상, 난 당신하고 할 말이 없소 하는 뜻이 역력한 휘린의 표정으로 인
하여 일부러 그에게 다가온 강우가 어색한 지 흠흠 기침 소리를 냈다.
"한동안 안보이더니, 사고가 났었냐?"
"아, 이거?"
휘린은 왼쪽 눈 아래서부터 볼을 완전히 내려그은 붉은 상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이스 하키를 하다가 몸싸움에서 밀렸었지. 이제 거의 아물었으니 상관없어."
휘린은 몸을 돌이켜 강우를 정시했다.
"이제 할 말이 없으면 나 혼자 좀 놓아주겠수? 오늘은 별로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
니어서 말이야."
대놓고 내치는 말에 문득 강우의 잘생긴 얼굴에 잔 경련이 일었다. 모욕이라도 당
한 듯이 점점 붉어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휘린은 술잔을 들어 다시 입술을 축였
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독한 상처를 주면서
도 어째서 자신이 받은 아주 작은 부당함이나 모욕은 참아내지 못하는지, 휘린은 강
우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강우는 그 자리에서 떠나는 대신 휘린이 앉은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
았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윤휘린."
"하시죠."
건성의, 아주 무성의한 그의 대답에 강우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오래 전부터 휘린과 대화를 나눌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너, 나한테 화내고 있니?"
"내가 형한테 화를 낸다?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유? 우리가 서로 얽힐 일이 있
어야 화도 나고 그러는 것 아닌가? 형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내가 감히 형한테
화를 내겠소?"
"...정우.."
"그만! 거기서 그만 합시다. 형."
휘린은 정색을 하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 대하여 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겁니까?
죽은 사람은 죽은 것으로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끝낸 것인데.. 그런데 왜 나와 형 사이
에서 아직도 그녀의 이야기가 남아있어야 하는 거죠?"
"....그 애 때문에 우리 가족 전부다 힘들었었다. 그 애만 힘들었던 거 아니다."
"그러니까 이게 난 우습다는 거지. 형 집안 사정을 왜 이제 와서 남인 내가 들어야
하느냐고? 내가 물어 봤어? 궁금하댔어?"
냉정하고 지독히도 찬 휘린의 대꾸에 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휘린은 그
것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메마르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 새겨보자고, 우리. 난 그 애하고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어. 안 그래? 그 앤
독한 성미 그대로 세상 전부를 혼자 정리했고,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아주 행
복하게 세상을 떠났어. 나 윤휘린이는 김정우라는 여자에 대하여 아무 것도 이야기할
것 없고 그럴 권리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 정도로 끝내자고. 왜 지금 와서야 형 입으
로 고해라도 하듯이 그 애 때문에 형네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어야 하는
지 난 모르겠다."
강우가 문득 소리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일그러진 고
통과 자책의 그늘인지도 모른다.
"살아있다면 용서라도 빌 수 있어. 그애가 말을 했다면 나도 내 속내를 털어놓았을
거다."
"이미 늦은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 거지?"
강우는 냉랭한 휘린의 반문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속으로만
삭혀내던 터라 드디어 곪아터진 상처가, 그의 입에서 밀물처럼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갔어. 그런
데 내가, 우리 가족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의 모
든 치부를 드러내게 하는 그 애의 존재가 과연 너였다면 달가웠으리라고 생각하니?
순간 순간마다 우리 형제로 하여금 죄인이게끔 느끼게 하는 그 애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 나나 신우도 쉽지 않았다. 네가 미워하는 우리 어머니도 그 애 못지 않게 커다란
희생자였어. 남편의 껍데기하고만 평생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쉬웠다고 너, 쉽게 말하
지 마라."
".... 결국 정우가 독한 년이라는 말이군. 가족의 행복을 깨뜨리는 불순한 존재여서
그렇게 밀어내고 외면하고 끝내는 먼 이국에서 홀로 죽어가게 했다는 거군. 그런 벌
을 받아도 싸다는 거군, 안 그래? 형은 지금 형네 가족의 그 모든 잔인한 행동이 정
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 좋다고. 형이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이
미 정우는 그런 인간의 애증과 복잡함에서 벗어나 버렸는데 말이야. 내가 무엇을 더
이상 말할 수 있겠어? 형이 편한 대로 생각해."
조금도 너의 말이라고는 들은 생각도 없다는 듯이, 마치 얼음을 바숴뜨리는 듯이
버석이는 냉기가 흐르는 휘린의 대꾸에, 강우는 결국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휘린
의 곁을 떠났다. 휘린은 가슴속에 담겨진 분노를 꾹꾹 주워 담듯이 술 한잔을 다시
청해 단숨에 마셔 버렸다.
죽은 사람은 오히려 행복하다. 그것으로 끝이니까.
그러나 죽지 못해 이 길고 긴 시간을 지옥처럼 걸어가는 사람은 어찌하란 말인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끌어안고, 고름주머니처럼 엉겨있는 회한과 통곡과 미련과 고
통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어찌하란 말인가? 그리하여 삶을 살아내는 것이 하루하루
견딜 수 없는 숙제가 되어버린 사람은 어찌하라 말인가?
"왜 그래? 기분 좋은 날에 너답지 않게 심각하게 굴 거야?"
포켓볼을 같이 하자 부르는 친구들의 손짓에 손을 흔들어 사양하는 휘린에게 경익
이 다가오며 퉁박을 주었다.
한성 물산의 기획실장인 유경익은 휘린의 고교, 대학동창이기도 하고 그가 마음을
털어놓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그는 또한 고교 시절, 정우와 연극부에서 같이 활동한
선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어쩌면 정우와 휘린의 기이하고 끈질긴 인연의
모습을 가장 가까운 데서 지켜본 타인인지도 모른다.
"어, 기분이 좀 그렇다. 신경쓰지 말고 놀아."
머쓱하게 웃는 휘린의 어깨를 그가 툭 쳤다.
"임마. 기분 전환하러 온 거 아냐? 이왕 온 거, 즐겁게 보내라고. 너답지 않게 청승
떨 거야? 그리고 말이야 강우형도 기분별로야. 그러니까 너무 잡지 말어, 저 형, 미국
에서 이혼하고 온 거 아직 몰랐지?"
"강우형이 이혼했어?"
뜨악하게 되묻는 휘린의 말에 경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처럼 휘린의 시선이 강
우에게로 향했다. 강우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자켓을 걷어들고 출입문을 막 나가
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정확해. 그 마누라는 이혼을 하고 싶지 않아 했는데, 형이 그만 두
었다고 하더라고. 아마 위자료 깨나 주었을걸."
"이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
심드렁하게 내뱉는 말에 경익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혼 사유가 죽은 김정우 때문이라면?"
"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만큼 떨어진 사람들이 흘깃흘깃 휘린과
경익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경익이 한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야 하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큐대를 놓고 그가 손가락을 튀겨 맥주 한 병을 청했다. 그가 맥주 한 모금을 마시
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죽은 김정우하고 그 집 어머니하고 사이가 나쁜 거야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일 테고,
그애가 호주로 나간 것도 그 어머니가 억지로 보낸 거라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인 거
고... 그 애가 왜 억지로 호주에 보내지게 되었는지 넌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아마도 강우형이 정우를 사랑했다고 그 어머니하고 부인이 오해를 한 것 같아."
경익은 손을 들었다. 파랗게 질리는 휘린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이..
"그렇다고 뭐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 것 같지는 않아. 아니 그것이 말이
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그 집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하고 또
친한 사이였잖아. 우연히 귀밑으로 듣게 되었지. 어쩌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
었던 것도 사실이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해를 할 정도로 강우 형, 유난스럽게
정우를 많이 챙겼어. 넌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그 집안하고 더 친했으니까 내가
본 것이 더 정확할거야."
경익은 탕 소리가 나게 술병을 카운터에 놓으며 휘린을 바라보았다.
"정우 그렇게 안타깝게 죽은 것은 정말 안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강우형을 미
워하지는 말란 말이다.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우, 그 집 식구들에게 미움만 받고 구
박덩이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그 말이다. 신우형도 그랬어. 연극연습이 늦게 끝나면
신우형이 꼭 정우를 데리러 왔어. 정우는 퉁명스럽게 입을 내밀고 가는데 형은 정우
머리를 툭툭 치면서 가더라고. 이복 남매인데도 참 다정해 보였어. 하루는 비가 오는
데, 끝날 때까지 신우형,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둘이 같이 우산을 쓰고
차에까지 가는데 참 보기가 좋더라. 강우형도 마찬가지고."
경익은 팝콘을 집어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에 휘린이 적
응하는 시간을 주려는 듯 했다. 휘린은 조용히 말했다.
"이야기 더 해봐."
"뭘?"
"강우 형이 이혼한 이야기."
"나도 내 마누라랑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일 뿐이야. 겉으론 나무랄 데 없이 참
해 보이고 요조숙녀라는데 성격은.. 글쎄... 그다지 별로였던 것 같아. 남편을 독점하고
싶어 형을 힘들게 한다는 소문이 있었어. 정우 일도 그렇잖아, 말도 되지 않는 오해와
의혹을 만들어 결국 그애를 호주로 쫓아 내보낸 것 보면 말야. 그러다가 정우 죽고...
뭐. 그 다음은..."
"자신의 자책감과 죄를 마누라에게 뒤집어 씌웠군"
다짜고짜 내뱉는 휘린의 비아냥거림에 경익이 피식 웃었다.
"짜식이 꼬기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안하면 계속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거 별로 좋지는 않다. 너도 어쩌면 진실을 보기 두려워 눈을 감고 다른 사람에게
네 죄책감을 뒤집어씌우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말조심해!"
날카롭게 대꾸하는 휘린을 바라보는 경익의 얼굴은 일종의 연민 같은 것이었다. 그
는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휘린을 정시했다.
"잘난 윤휘린. 내, 충고 하나 하자."
경익은 휘린을 정시하며 딱딱 끊어지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그만 정우를 놓아주는 게 어때?"
놓아줄 수 있다면 외과 수술로 머리 속에 든 종양을 도려내듯이 사랑했던 기억들
을, 놓쳐버린 그 사람에 대한 원통한 미련들을 파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했다. 노력해
서 잊혀지고 놓아줄 수 있다면 그는 무한정 노력했었다. 그러나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 잊어버리고자, 놓아주고자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럴 수록 심장을 더 쥐어뜯으며 새겨지는 기억들과 회한도 있다는 것을 아직도 사람
들은 모른다.
경익은 휘린의 얼굴을 정시하며 말을 이었다. 친구에 대한 연민을 감추지 않으며.
"나도 이해한다. 너의 정우에 대한 감정. 시작도 해보지 않고 끝나버린 사랑이고 인
연이라, 네가 더 미련맞게 집착하고 있는 줄 알아."
"아니, 넌 몰라. 절대로 내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넌 알지 못해."
휘린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나 경익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야. 누구나 자기 자신의 고통만이 전부라고 최악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또 그게 아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또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야. 넌 살아있고 그 앤 죽었어. 네가 그 강을 건널
수 없다면 넌 살아가야만 해. 이제 그만 정우 네 마음에서 풀어주고 다른 사람 만나
라. 사랑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새로운 사랑뿐이라고 하더라. 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내 친구가, 이제는 살아 숨쉬는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시체처럼 경직
되어 혼을 몽땅 빼앗긴 허수아비처럼 살아가는 너, 하나도 멋있지 않아, 임마."
머리 속이 온통 벌떼가 웅웅거리는 것처럼 복잡했다. 도대체 정리되지 않고 갈피잡
을 수 없는 감정, 진실. 그리고 사실이라 여긴 것들이 가진 이면(裏面). 그가 아는 사
실이란 정말 진실일까?
결국 휘린은 하나도 재미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도 재미없는 잡담이나 나누며
하나도 즐겁지 않은 얼굴로 즐거운 척 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휘린은 간
신히 아홉 시를 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차의 시동을 켠 다음 그는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생각나는, 같이 있고 싶은 한 사
람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당신 지금, 어디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