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카페 게시글
한옥이야기 스크랩 다포집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299 12.05.04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포집

 

▣ 다포식

   다포식 건축물중 건립연대가 확실한 것은 고려말의 심원사 보광전(1374년)과, 석왕사 응진전(1386년 창견, 1950년 소실)및 호지문(1392년 창견, 1950년 소실)등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북한에 있기 때문에 그 현황을 알 수 없다. 조선초기의 건물로는 역시 북한에 있는 개성 남대문(1394년), 평양 보통문 (1473년)과,  남한의 서울 남대문(1396년 창건, 1448년 중건), 봉정사 대웅전(15세기), 개심사 대웅전(1484년) 등이 있으며, 이들 다포식 건물들은 그 후 크게 유행되어 17세기 이후 사찰의 중요 건물은 물론이고, 궁궐, 성문, 분묘 등 많은 대형 중요 건물에서 보이고,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고려 말이나 조선초기와는 달리 화려하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 응진전의 모습. (일제시대 엽서) 그런데 실제로는 응진전이 아니라 응진당이라고 되어있다. 이 건물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석왕사 전경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설봉산에 위치한 사찰인 석왕사에 있는 조선 초의 건물. 석왕사는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雪峯山釋王寺記)》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의 토굴에서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을 인연으로 하여 이성계가 왕이 되기를 기원하여 크게 절을 창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 고려 말∼조선 초의 건물로 알려진 응진전이 있고, 태조 이성계와 깊은 인연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왕실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받았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이었다.

 연탄 심원사 보광전(燕灘 心源寺 普光殿) 연탄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찬군 연탄읍에 위치

 

 

 남대문

 

 

 

 봉정사 대웅전 외부 공포

 

 내부 공포

 

봉정사 대웅전의 익공식인 다포집

 

개심사 대웅전 다포형식과 용장식

 

 개심사 대웅전의 귀공포와 처마

 

 개심사 대웅전 천정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다포식 건물의 특징적인 요소를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선 축부에서

1. 기둥의 경우

· 기둥에 배흘림이 있는 것 ; 심원사 보광전, 석왕사  응진전

· 기둥에 배흘림이 없는 것 ; 개성 남대문 ,서울 남대문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개성 남대문의 모습 원래의 모습

복원 후 현재의 개성 남대문

 

 

남대문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친필

 

 

2. 창방 뺄목의 형상 (뺄목-부재 머리가 다른 부재의 구멍이나 홈을 뚫고 내민 부분. ≒방두. )

· 뺄목 끝을 직절한 것 ; 평양 대동문, 의주 남문

· 뺄목 끝을 초각한 것 ; 심원사 보광전외 대부분의 건물

 박내겸이 장림에 서서 바라보았을 대동문
자료:『기성전도』(서울대학교 규장각) (부분)

 

일제강점기 보수전의 모습

 

 일제 강점기 시기의 대동문 

형재의 대동문

 

공포에서 

1. 공간포의 배치 내용

· 정면 중앙간에 1구 ; 석왕사 응진전

· 정면 중앙간에 2구 ; 심원사 보광전

· 정면 중앙간에 3구 ; 개성 남대문

· 정면 중앙간에 4구 ; 서울 남대문

2. 공포 외부의 구성

· 출목수

  - 1출목 ; 평양 보통문, 개성 남대문

  - 2출목 ;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석왕사 응진전, 서울 남대문 하층

봉정사 대웅전의 2출목 공포

 

- 3출목 ; 심원사 보광전

· 중공 계심조 ; 심원 보광전외 대부분

· 중공 계심조에 투심조가 보이는 것 ; 평양 숭인전, 평양 보통문, 평양 대동문

· 우설형과 교두형 첨차의 사용

· 우설형만으로 된 것 ; 개성 남대문, 개심사 대웅전, 서울 남대문 하층

· 우설형과 교두형 병용 ; 심원사 보광전, 석왕사 응진전, 평양 보통문, 봉정사 대웅전


가구 구성의 내용을 보면

1. 보와 도리와의 관계

· 보위에 도리를 얹은 경우 ; 개심사 대웅전, 봉정사대웅전

· 보와 도리를 분리한 경우

· 종보 및 대들보를 병용한 경우 ; 심원사 보광전

2. 내부 공간의 구성

· 고주를 세운 경우

  - 1고주 ;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

  - 2고주 ; 평양 보통문(중층)

· 고주가 없는 경우 ; 개심사 대웅전

3. 대공형상

· 동자대공 ;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 화반대공(파련대공 포함) ; 평양 보통문, 개심사 대웅전

4. 솟을 합장재의 유무

· 솟을 합장을 사용한 것 ; 심원사 보광전, 종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평양 보통문

5. 천정의 형상

· 연등천정 ; 심원사 보광전(외진은 빗천정), 개심사 대웅전

· 우물천정 ; 봉정사 대웅전(원래는 연등으로 추정)

  이상 다포 건물의 중요 요소들을 형상별로 분류하여 보았다. 이들 내용에서 고려말 조선초기의 다포 건물를 요약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시킬수 있다.

   즉, 측부에서는 기둥이 주심포 건물에 비해 배흘림이 적거나 거의 원통형이 기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말의 건물이 심원사 보광전과 석완사 응진전에는 배흘림이 보이고 있어 고려기의 다포식에는 배흘림이 사용되었지만. 조선초기부터는 배흘림이 약해지거나 소멸되는 경향을 읽을 수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배흘림 기법이 당 이후에는 강남에서 약간 보일 뿐 흔치 않으므로 이 기법은 주심포계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는 창방의 뺄목에 주목하면 평양 대동문은 직절하였고, 심원사 보광전 등 대부분의 건물은 초각을 하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평방과 직절한 평방 뺄목이 11세기 초에 나타나고(遼 나라 봉국사 대전. 1020년) 12세기 후반에는 뺄목을 고형(孤形)의 평방(현묘관 삼청전, 1179년, 공묘비정, 1195년)으로 만든 것이 보인다. 화북지방에서는 이후 계속 사용된다. 한국의 평방은 화북의 것과 대비되며, 중국 강남의 경우는 화북보다 이 보급이 좀 늦어져 원대에서도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창방의 뺄목은 중국의 경우는 직절의것이 10세기 말에 나타나도, 12세기중반에는 고형이 화북, 강남 등지에서 함께 나타나 원나라에도 보급되고 명, 청대까지 이어진다.  한국의 장방 뺄목 형상은 원대의 것과 흡사한 점이 많다. 창방 뺄목을 초각 없이 직절한 것은 앞에 예를 든 창방으로 평양 대동문(1576년)과 의주 남문(1521년)인데, 주심포 건물에서는 이미 고려 시대의 봉정사 극락전에 직절의 창방 뺄목이 나타나고 있어 연대를 올려도 무방하며, 이는 중국의 요대에 보이는 것과 대비할 필요가 있다.

   공포에서는 우선 중앙간에 몇구의 공간포가 배치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며, 주상공포와 공간포의 형상이 같은지 아닌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다포식 공포는 주상공포와 공간포의 형식이 동일하며 중앙간의 공간포는 서울 남대문, 신륵사 조사당, 평양 보통문, 평양 대동문 등이 4구를 놓았고, 3구를 놓은 것은 개성 남대문, 석왕사 호지문, 평양 숭인전, 2구는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청평사 극락전, 1구의 건물은 석왕사 웅진전 등 다양하다.

   중국의 다포건물을 보면, 오대산 불광사 대전(875년)에서 공간포를 볼 수있는데, 이 공간포는 주상의 공포와는 다른 공간포로 출목수가 적은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오대의 봉국사 대전(1020년)으로 공간포가 주상포와 같고 요대까지 즉 당, 오대, 요대가지는 중앙간, 협간의 공간포는 각각 1구씩 배치된 것 같다. 북송때에 들어와서는 공간포의 구성기법이 발달하여 남송, 금대의 건물에서는 중앙간에 2구의 공간포가 많이 사용되었고, 원대에도 13세기까지는 그때와 같았으나 14세기에 들어와 중앙 간에 3구, 또는 4구의 건물이 보이고 있다. 명대에서는 권위 건축에 6-8구의 중앙간 공간포도 보이고 있어, 시대가 내려옴으로써 중앙간에 1구 배치된 것은 요대까지 올려 볼 수 있는 기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석왕사 응진전(1386년)은 11세기가지 올려 볼 수 있는 양식이라 생각된다.

    다음은 공포의 출목수(出目數)로 1출목에서 3출목의 것이 주로 보이는데, 1출목인 것은 평양 보통문, 개성 남대문이며 2층목은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석왕사 응진전, 그리고 서울 남대문 하층이고, 3출목은 심원사 보광전이다. 이들 출목과 관련을 지어 생각해 볼 것은  출목과 직교하는 첨차로서 중국에서 말하는 계심조(計心造; 출목과 직교하여 첨차가 좌우로 전개 되는 형식)인지 투심조(偸心造; 출목이 있으나 출목과 직교되는 첨차가 없는 것, 즉 출목에서 좌우로 전개되지 않은 형식)인지가 문제인데, 한국의 고려말 조선초의 다포 건물은 평양숭인전(1467년), 평양 보통문(143년), 평양 대동문(1576년)에 투심조가 보일 뿐 이다.

   부분 계심조이며 출목에 직교하는 첨차가 소첨과 대첨으로 소위 중국에서 중공이라 불리우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중국의 경우는 계심조보다 투심조가 앞서는 양식으로 보고 있으며, 계심조이며 중공형식인 것이 유행한 것은 12세기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보면 현존하는 건물중 강남의 송,원대 건물중 완전한 중공계심조가 보이지 않고 있어 의문이지만, 일본의 다포가 남송의 말기에 강남 오산의 건축에 원류를 갖고 있다는 설을 인정한다면 이곳에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부 학자는 다포식의 투심조가 주심포식의 투심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으나. 다포식의 옛 식 계통의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

   다음은 산미첨차의 선단 형상으로 우설형과 교두형 두 가지 형상이 있는데, 우설형으로만 된 것은 개성 남대문, 개심사 대웅전, 서울 남대문 등이 있고 우설형과 교두형을 함께 사용한 예는 심원사 보광전을 비롯하여  석왕사 응진전, 평양 보통문, 봉정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 우설형은 원래 하양의 선단 부분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 시대에는 하양 구조의 유구는 하나도 현존하지 않고 있어 실제 하앙구조의 건물이 있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고, 다만 임진란 이후의 건물로 현재 전북 완주군의 화음사 극락전이 한 동 보일 뿐이다.

   중국에서는 하양의 본래 기능을 갖고 있는 형식을 진앙이라하고 하양의 형식만을 나타내는 산미첨차 끝에 우설형을 조각한 형식을 가앙이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우설형 다포식 공포는 거의가 가앙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에는 가앙이 보이는 최초의 것이 태원 진사 성모전(1023-1102년)이며, 이 건물에 서는 진앙과 가앙을 함께 사용하였고, 가양만으로 된 건물은 산서 진성 야저촌 대묘 대제전(1169년), 강남 소주 현묘관 삼청전(1179)에서 보여, 12세기후반에서부터 가앙의 실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원대 이후 명,청대에서 많은 가앙 건물이 보이며 특히 청대의 건물은 거의 모두 가앙 건물이라는 사실이 조사되었다.


 가구의 구성 내용을 보면, 우선 보와 도리의 관계에서 보 위에 도리를 얹는 경우와 보와 도리가 분리되어 보 위에 도리가 직접 놓이지 않고 보 위에 든 상태인데, 일반적으로 후자의 것이 옛식인 것 같다. 후자의 것으로는 심원사 보광전의 평주 상부에서 보인다. 심원사 보광전에서의 특이한 점은 공포 외부 선단 최상부애 첨차 하나를 올려 놓고 있는 것인데, 이로 인해 도리가 보 위에   뜨게 된 결과를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부의 공간을 보면, 고주를 세운 경우와 고주를 없엔 내부공간으로 둘 수 있는데, 하나의 고주를 세운 건물로는 심원사 보광전과 봉정사 대웅전이 있고, 2고주는 중층 건물인 평양 보통문이 있다. 고주를 없앤 건물은 개심사 대웅전 등이 있다. 대들보나 종보 위에 얹은 대공은 동자주를 세운 데와 화반을 사용한 예가 보이는데, 동자주의 예는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등에 보이고, 화반의 예는 평양 보통문, 개심사 대웅전 등에 사용되었다. 중국 건축의 다포식 전형은 동자주를 얹는것이라 보이므로 한국이 다포 건물에서 화반은 주심포의 영향이 아닌가 추정된다. 솟을 합장의 사용은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개심사 대웅전, 평양 보통문 등이며, 16세기이후 다포식에서는 이 기법이 나타나지 않는다. 천정은 연등천정, 우물 천정, 연등?우물겸용 등이 있는데 심원사 보광전은 내진 상부는 우물천정이고 외진은 판재의 빗천정으로 하였고, 개심사 대웅전은 연등천정이며 봉정사 대웅전은 현재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연등천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다포 건물이 10세기 이후부터 우물천정이 사용된 것을 보면 한국 다포 건물의 연등천정은 옛식이거나. 아니면 주심포식의 양식을 흡수한 영향이라 생각된다.

   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의 주심포식과 다포식 건물들의 중요 요소들을 위에서 살펴 이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1) - 前期

 

1) 개심사 대웅전(開心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특징 :건물은 맞배지붕의 다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내부는 가구가 그대로 보이게 연등천장

을 하고 있어 주심포계 형식의 특징도 보인다.

 

공포는 내3출목으로 짜였는데 특히 외부로 뻗은 쇠서는 밑으로 많이 처져 있어 다포계의 초기적

수법을 보이고, 또 종보 및 마루도리(종도리)를 받치는 대공은 모두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파련대공을 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개심사 대웅전은 그 연대가 말하듯이 이조초의 주심포가 다포로 전환할 무렵의 양상을 잘 나타

내고 있다.

        

 

        

 

        

 

 

 

 

 

 

2) 봉정사 대웅전(鳳停寺 大雄殿)

- 건립년대 :봉정사의 정전(正殿)으로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건물(建物)로 추정된다.


- 특징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주칸(柱間)의 창문(窓門)이나 벽체 등 일부가 초창후(初創後) 변경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양식(多包樣式)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공포(공包)의 힘있고 가식없는 수법(手法)은 초기의 다포양식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건물 내부(內部)에서 가구형식(架構形式)이나 세부기법에서도 외부와 같이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公法)이 초기의 다포양식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단청(丹靑)은 창건(創建)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려적(高麗的) 요소(要素)를 지니고 있어 건물(建物)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繪畵資料)로 주목되고 있다.

 

 

 

 

 

 

 

 

3) 청평사 극락전(淸平寺 極樂殿)

- 건립년대 :청평사( 淸平寺 )는 고려( 高麗 ) 광종( 光宗 ) 24년(973)에 창건( 創建 )되어 백암선원( 白岩禪院 )이라 이름하였다가 문종( 文宗 ) 22년(1068) 이의( 李 )가 중건( 重建 )하고 보현암( 普賢庵 )이라 하였던 것을 선종( 宣宗 ) 6년(1089) 이자현( 李資玄 )이 중건하고 문수원( 文殊院 )이라 하였다. 조선( 朝鮮 ) 명종( 明宗 ) 때(1545∼1567, 재위) 보우선사( 普雨禪師 )가 다시 중건하면서 청평사( 淸平寺 )라고 개칭하고 대사찰( 大寺刹 )이 되었다.

 

- 특징 : 다포계양식( 多包系樣式 )의 팔작집으로 그 건축수법( 建築手法 )이 우수하여 국보( 國寶 )로 지정되었던 극락전( 極樂殿 )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6·25동란( 動亂 ) 중 회전문( 廻轉門 )(보물 제164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 燒失 )되었다.

현재( 現在 )의 극락전( 極樂殿 )은 근년에 신축( 新築 )하였다.

 

정면3칸 측면3칸 단층 팔작지붕이다.

내부가구는 천장을 가구한 탓으로 아무렇게나 모아 짜여 있는 듯한 감이다.

즉, 내부고주는 주두설치도 없고, 도리의 배치도 등간격이 아니며, 중종보 위의 대공도 동자주형

이며, 천장달대도 현대식의 간단한 구조이다.

 

이러한 처리는 점차 후기건물이 기능적으로 변화해 가는 징표이다.

 

 

 

 

 

4) 남대문(南大門)

- 건립년대 :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특징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층공포는 내외 모두 2출목이며 기둥머리에는 키가 큰 창바을 걸었고, 창방과 기둥 위에는

넓적하고 두툼한 평방을 돌려, 그 위에 기둥 직상과 정면에는 柱間에 4구, 측면과 他柱間에는

각2구식의 중간포로 배열하고 있다.  

 

 

 

 

 

5) 평양 보통문(平壤 普通門)

- 건립년대 : 현재의 건물은 1473년에 고쳐 세운 것을 1644년, 1719년,1777년과 그 이후의 계속

되는 보수 끝에 오늘에 이른 것이다.

 

- 특징 : 정면3칸, 측면3칸, 우진각지붕.

내고주와 퇴주로 연결하고 고주상부에 종량으로 건너지른 기본형이며, 따라서 고주부분은 창방

뿐이고 평방은 없어 주심포로 구조되어 있다.

 

고주머리에 얹힌 樑頭 화반  등 세부는 수덕사 대웅전과 흡사하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2-1) - 中期

 

1)관룡사 대웅전(觀龍寺 大雄殿)

 

- 건립년대 : 관룡사는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이 대웅전은 1965년 8월 해체보수 공사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조선(朝鮮) 태종(太宗) 원년(元年)(1401)에 창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불타서 광해군(光海君) 9년(1617)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25년(1749)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 구조개요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다듬은돌 바른층쌓기의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공包)는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으로, 기둥위와 기둥사이 평방위에도 짜올린 다포식이다. 초제공(初諸貢)과 이제공(二諸貢)의 살미첨차(山彌첨遮)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으나, 안쪽에는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 있어 건실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우물천장을 이루며 중앙 후열에 세운 두 개의 고주(高柱)를 의지해 만든 불단(佛壇) 위에는 닫집을 달았다

 

이 건물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가구방식은 공통으로 평범하나 다음의 몇 가지 세부양식의

변화는 후기의 변화까지 겸하여 고려할 때 주목할 만하다. 즉

쇠서의 형태, 3단첨차살미 모양의 삼분두형, 大樑 및 衝樑머리의 拳鼻形, 내부의 교두첨차,

同 3단째 樑捧形의 雙S形 의 重加變貌, 退高柱上의 보아지형, 화반형 등은 중기양식의 표준으로

간주된다.

 

      

 

 

      

 

        

 

       

 

 

 

 

2) 통도사 대웅전(通度寺 大雄殿)

 

- 건립년대 :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 구조개요 : 규모는 정면 3칸·측면 5칸이고, 지붕은 정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보통의 법당은 정면(도리칸)이 측면(보칸)보다 넓은 법이나 이 법당은 측면이 넓은 독특한 구조

이다.

內外陣으로 구성되었으나 고주의 일부는 생략하엿다. 따라서 大樑은 고주사이에 결구되기도 하

고 고주와 내목사이에 결구괴기도 하였다.

宗中樑은 대량위에 있되 4분,3분변작법에 따라 만들어 지지 않았다. 중대공이 고주 밖의 딴 선상

에 위치하였다. 이에 비하여 종량은 법식에 따라 가구되었다.

특색있는 이런 구조는 지붕의 형태를 고려한 데서 나온 것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4출목으로 중기양식 치고는 出目數가 많은 건물이다. 

 

 

        

 

 

 

        

 

 

3)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 건립년대 :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조선 인조 4년(1626)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재건하였고, 최근(1968)에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팔상전은 법주사의 오층목조 탑파건축(塔婆建築)으로, 1984년 4월 30일 쌍봉사의 대웅전으로 쓰이고 있던 삼층목조탑이 화재가 발생하여 없어지게됨으로써, 한국 목조탑(木造塔)의 유일한 실예(實例)가 된 중요한 건축물이다.

- 구조개요 :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5칸, 3·4층은 정면과 측면 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모두 2칸의 정방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상부에 상륜부(相輪部)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공포(공包)의 양식(樣式)은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 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식(柱心包式)이나, 5층은 주간(柱間)에도 공포를 짜 올린 다포식(多包式)으로 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내부 중앙에는 찰주(擦柱)의 심초석이 있어 이 위에 심주(心柱)를 세웠고, 이의 네 귀에 우고주(隅高柱)를 세웠다. 1층의 변주(邊柱)와 우고주를 연결한 퇴보 위에는 2층의 변주를 세웠다. 이러한 가구법은 목조탑의 전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 높이는 기단부에서 상륜(相輪)까지 약 24m로서 현존하는 한국의 탑파 중에 제일 높은 것이다.

 

- 1968년 해체시 현장에서 세밀히 조사된 바로는  이 건물은 각층마다의 구조가 제각기여서 한

시대에 동시에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전후복구의 중건시, 또는

인조 때의 중수시에 편한대로 경비절감 등을 위하여 용도가 폐기된 건물들을   뜯어다 그 재목

으로 적절히 구성하였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건물의 가치는 그 법식이나 기법에 있지 않다.

        

 

 

       

 

       

 

       

 

 

 

4) 쌍봉사 대웅전(雙峰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쌍봉사는 우리나라 현존 유일의 3층 목탑식 전각이어서 보물로 지정되어 보호하여 왔으나 1984년 불에 타 다시 지었다

 

- 법주사 팔상전과는 달리 각층마다의 공포조작은 엄격한 규제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어, 창작의

우수함을 나타내고 있으나 , 전자와 비교 할 때 회화적인 변화의 묘보다는 건조한 비례의 미가

더 우세한 초기적 경향이 강한 건물이라 하겠다.

 외부첨차살미의 牛舌形은 弧形으로 휘어 올라가서, 평방과 서까래 끝까지 연결하는 부드러운

소매깃 같은 역할을 하고 있고, 각 부재의 크기도 알맞은 치수를 가지고 있다.

또 중기의 특징으로는 3단째 첨차살미의, 예리하게 3각형으로 뻗은 초각수법과 4단째의 拳鼻形

初層첨차 내부가 翹頭形으로 간소하게 짤린 점 등을 들 수 있다.

 

                   

 

 

                                             1984년 화재이전 모습

 

 

5)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

 

- 건립년대 :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 구조개요 :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정면 7칸·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중간포는 측칸에 1개, 어칸에 2개씩
공포는 상하층 모두 2출목.

 

목조건물에서 중층의 집을 지을 때 귀기둥이 담하는 역할이 매우 크다.

여기서는 내진의 귀기둥과 외진귀기둥이 45도 각도의 멍예로 결구되고 이 멍예위에 2층의 귀기둥

이 서있는 구조이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2-2) - 中期

 

1) 장곡사 하대웅전(長谷寺 下大雄殿)

- 건립년대 : 장곡사는 칠갑산에 있는 절로 신라 후기 보조국사가 세웠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정조 1년(1777) 고쳐 짓고 고종 3년(1866)과 1906년, 1960년에 크게 고쳐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구조개요 : 이 건물(建物)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다포양식(多包樣式)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정면 중앙칸은 양쪽 협칸(夾間)에 비해 주칸(柱間)을 넓게 잡았으며, 지붕 구조는 맞배형식을 하고 있다. 이러한 다포의 맞배지붕 형식은 조선(朝鮮) 중기(中期), 즉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 유행(流行)한 지방적(地方的)인 건축양식(建築樣式)인데 이 건물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소규모의 법당이지만 가구에 특색이 있다. 2間通이므로 고주를 세울 필요없이 대량을 바로

건너질렀다. 그 위로 종량을 얹었는데 이 법식이 통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기에서는 중대공을 생략하고 길이도 길게하여 아예 대량과 평행시키고 말았다.

종량이상은 우물반자로 가렸다.

 

대웅전은 내외2출목의 다포집이다. 다포집은 팔작이나 우진각 지붕이 보통인데 이 집은

맞배지붕이다. 다포의 맞배지붕일때  공포배열은 앞뒤에만 하는 유형과 측면에도 배열

하는 유형이 있는 데 이 법당은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

 

주심도리를 배치하지 않고 내목도리와 외목도리의 평형구조의 타당성을 증명하고 있다.

외출목 첨차살미의 牛舌形은 아직 강직하여 밑으로 뻗은 데서 약간 위로 휘어 올라간 것

같은 초기형을 따르고 있다.

주두나 소로의 형이 균형잡히어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

내부의 대들보를 지지하고 있는 보아지의 線刻形도 쌍S자형의 변화한 形이상으로 변화

되지 않고 있다.

기둥은 뚜렷한 배흘림이 눈에 뜨이며 창방머리의 線刻도 쌍S자형의 초기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2) 범어사 대웅전(梵魚寺 大雄殿)

- 건립년대 : 경상남도 3대 절 중 하나로 유명한 범어사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통일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일본인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의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싸우기도 했던 중요한 곳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불상만을 모시는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이곳 범어사 대웅전에는 미륵보살과 가라보살을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함께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이 대웅전은 조선 선조 35년(1602)에 다시 지었으며 광해군 5년(1613)에는 한 차례 보수 공사가 있었다.

- 구조개요 : 이 대웅전은 정면(正面)과 측면(側面) 모두 3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다포(多包)집이다.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이고 옥내(屋內)에는 2개의 고주(高柱)를 세워 대량은 고주에 결구되고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어서 그 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였으며 불단위에는 화려하게 장식한 닫집을 얹었다.

이 건물은 기둥머리와 두공(枓)과 처마의 구조가 섬려하고 아담한 교창(交窓)이 달렸으며, 닫집과 불단의 조각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조선(朝鮮) 중기(中期) 불교건축(佛敎建築)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3)율곡사 대웅전(栗谷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율곡사는 신라 경순왕 4년(930)에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절이다. 절과 관련된 고려·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지만 현재의 대웅전은 2003년 해체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묵서명 기록이 나와, 조선 숙종 4년(1679)에 대대적으로 중수(重修)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구조개요 :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다듬은돌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包)는 내(內)·외3출목(外三出目)으로, 기둥 위와 기둥 사이 평방(平枋) 위에 모두 짜올린 다포식(多包式)으로 되어 있다.

첨차(첨遮)가 내·외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조선 초기의 양식을 이루고 있으나 외목도리(外目道里)를 고정시키고 있는 조각(彫刻)의 모양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이라 추측된다.

       

 

 

 

 

       

 

 

       

 

 

 

 

4) 화엄사 대웅전(華嚴寺 大雄殿)

- 건립년대 :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구조개요 :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든 우물 천장이며, 삼존불 위쪽으로 장식적인 성격을 띠는 지붕 모형의 닫집을 놓아 엄숙한 분위기를 한층 높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어 조선 중기 이후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5) 무량사 극락전(無量寺 極樂殿)

- 건립년대 :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구조개요 : 이 건물은 중층(重層)으로 된 불전(佛殿)으로 무량사(無量寺)의 중심 건물이다. 얕은 기단 위에 높직한 기둥을 세워 하층평면(下層平面)을 구성하고, 상층(上層)은 하층(下層)의 내진기둥(內陣柱)을 높여 상층기둥이 되어 내부공간(內部空間)을 높고 시원하게 처리하였다.

주간(柱間)은 하층이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공包)는 다포식(多包式)으로 18세기에 유행하던 세부기법(細部技法)을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중층의 건물로도 중요하지만, 가구기법(架構技法)과 세부수법(細部手法)이 견실하고 외관이 장중한 중층 건물의 대표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6)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이 대웅전은 1916년 수리시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宣祖) 38년(1605) 일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光海君) 6년(1614)에 불이나 모두 타버림으로써, 다음해(1615)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哲宗) 6년(1855) 규영화주(奎塋化主)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 구조개요 :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쌓기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 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올린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外二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으로 되었고, 쇠서(牛舌)의 모양은 섬약하며, 귀공포에는 나무로 깎은 인물상(人物像)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내공포의 공간포(空間包)는 첨차(첨遮)가 교두형(翹頭形)이나 주상(柱上)에서는 초각(草刻)된 판형(板形)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7) 전등사 약사전(傳燈寺 藥師殿)

- 건립년대 : 이 약사전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고종(高宗) 13년(1876)에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 구조개요 : 이 전각의 건축양식은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다포식(多包式)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이다. 장대석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에는 약한 배흘림이 있다. 공포(공包)는 외1출목(外一出目) 내2출목(內二出目)으로 초제공(初齊工)과 이제공에 놓이는 살미첨차(山彌첨遮)의 끝은 모두 앙서(仰舌)로 되었고, 안쪽은 기둥 위에 놓이는 공포에서는 판형(板形)으로 되어 초각(草刻)을 하였으나, 기둥 사이의 공포에서는 교두형(翹頭形)을 취하고 있다.

이 전각의 특징은 다포식 건축이면서도 창방(昌枋)위에 평방(平枋)이 놓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3-1) - 後期

1) 서울 東大門

- 건립년대 :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 구조개요 :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내소사 대웅보전(來蘇寺 大雄寶殿)

- 건립년대 :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전으로 조선 인조 11년(1633)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 구조개요 :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짜은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포개진 모습은 우리 옛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포는 외 3출목으로 길게 뻗은 쇠서가 겹겹으로 처마밑을 향하여 소매깃의 역할을 하고 있고

내부 5출목으로 이들의 첨차살미에는 길게 돌출한 蓮봉을 조각하였다.

대들보에 걸린 충량머리와 추녀 밑 첨차 상단에는 龍頭를 새겨 넣었다.


벽체 윗부분에 있는 부재 끝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충량머리에는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 건물의 화사함을 더해 준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지붕 윗부분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또한 앞쪽 문에 달린 문살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당시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엿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공예로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과 독창적인 장식물 등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 양식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3) 풍남문(豊南門)
- 건립년대 : 조선시대(朝鮮時代) 관찰사(觀察使)의 소재지(所在地)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城郭)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東西南北)에 각각 문(門)이 있었는데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 모두 파괴되었다.

성곽과 성문이 다시 수축(修築)된 것은 영조(英祖) 10년(1734)이며 이때 남문(南門)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명견루는 영조 43년(1767) 큰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에 당시의 관찰사(觀察使) 홍낙인(洪樂仁)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豊南門)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그후 순종(純宗) 융희(隆熙) 원년(元年)(1907) 도시계획의 일환(一環)으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다.

풍남문은 그후 종각(鐘閣), 포루(砲樓)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地面)이 묻히는 등 그 옛모습이 크게 훼손(毁損)되었는데 지난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다시 그 원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 구조개요 :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옆면 3칸, 2층이 앞면 3칸·옆면 1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고 창방 위에는 鬼面 또

는 蓮花文華盤을 만들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門의 특징은 주심포집과 다포집의 혼성으로 이루어진 점이다.

       

 

       

 

       

 

 

 

4) 보현사 대웅전(普賢寺 大雄殿)

- 건립년대 : '普賢寺事蹟記'에는 初創은 고려 제5대 景宗王之三年(978)으로 되어 있고, 最終으

로 乾隆二十六年辛巳(1761)에 失火된 것을 慧信大師가 重創하였다.

 

- 구조개요 :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3칸이며 팔작지붕에 배흘림 기둥이다.

공포는 외 3출목 내 5출목으로 모두 내소사 대웅전과 유사한 세부수법으로 되어 있다.

                           

 

 

 

5) 신륵사 극락전(神勒寺 極樂殿)

- 건립년대 : '事蹟記'에 의하면 정조21년 丁巳年(1797)에 시작하여 嘉慶5년(1800)에 완공을 본

건물이다.

 

- 구조개요 : 공포는 외 3출목 내 4출목으로 첨차살미의 牛舌形은 지극히 복잡하다.

쇠서 상단에 큰蓮봉을 올려놓고 내부는 동대문에서 본 것 같은 운공이 우물천장 밑끝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같은 경내에 있는 祖師殿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포 건축양식의 架構圖(3-2) - 後期

 

1) 석왕사 대웅전(釋王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서산대사의 〈설봉산석왕사기〉에 의하면, 이성계는 등극하기 전에 왕업을 이루기 위한 기도처로서 응진전(應眞殿)을 세워 오백나한재를 개설하였고, 이때에 천진당·진헐당·인지료·용비루 등을 지었다.

또 왕이 된 뒤에 거찰을 이룩하였으며, 1401년(태종 1)에는 이곳에 와서 동구에는 소나무를, 뜰에는 배나무를 심었다. 그뒤 왕명에 의하여 이곳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였고 좋은 배를 임금에게 바치게 하였다.

 

1732년(영조 7)에는 대웅전과 영월루, 흥복루, 범종루, 용비루, 조계문 등을 개수하였다. 31본산 시대에는 대웅전, 응진전, 팔상전, 명부전, 해장전, 극락전, 석왕사, 인지료, 신한각, 운한각, 천서각, 만춘각, 백련당, 진헐당, 심검당, 군당, 보명전, 연빈관 등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며, 48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었다.

 

- 구조개요 :석왕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1951년에 소실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자료인 《조선고적도보》12권에 사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며, 기둥에 배흘림이 있고, 공포의 화두자 장식, 금모로단청 장식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양식의 건축물로 추정된다.

 

공포조작을 보면 외4출목 내5출목이라는 유례없는 출목수를 가지고 있고 내외 쇠서형태

또한 극단으로 장식화한 절정의 작품이다.

외부첨차의쇠서는 S형으로 굽어 위로 치솟아 각단의 쇠서첨단은 사선으로 연결되어 처마

밑을 받들도록되어 있고, 쇠서뿌리에는 화려한 蓮봉을 조각하고 최상단에는 龍頭를 돌출

시키고 있다.

출목수는 많고 中間包도 비교적 좁은 간격으로 배열되어 완전히 構體와 屋蓋 사이에, 별

도의 의미를 가진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2) 신계사 대웅전(神溪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신계사는 원래 대웅전을 중심으로 그 앞에 현존하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동측에 칠성각, 대향각, 극락전이, 서쪽에는 나한전, 어실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남북 축선 상 남쪽에 만세루가 있었는데 그 좌·우에는 향로전과 최승전 그리고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축물들은 한국전생시에 모두 소실되었으나, 현재 조계종에 의해 2004년 대웅보전이 복원되었고 나머진 건물들은 복원 진행 중이다.
신계사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후(1597년) 중창한 것을 1887년(고종 24)에 중수한 것으로, 유점사 능인보전과 함께 북한의 조선시대 말기 사찰건축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 구조개요 : 대웅전은 정면 3칸(12.45m),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어칸이 협칸보다 넓다. 기둥은 민흘림으로 되어 있고, 외 9포, 내 13포의 높은 두공을 짜올린 포식건물이다.

기둥 위에는 안팎을 관통한 용틀임조각을 놓고 그 위에 두공을 짜올렸는 데 첨차는 꽃가지형이다. 길게 휘여내민 쇠서형 살미들과 그 위에 활짝 핀 연꽃과 꽃 봉우리를 엇바꾸어 가며 덧붙였다. 안쪽의 제공도 연꽃봉오리와 활짝 핀 연꽃으로 장식하였는데 층마다 그 형태가 다르다.

공포의 연화와 연봉 조각은 조선후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전체의 품격을 부여하는 대웅전의 화려한 두공은 조각장식의 원숙함에 있어 같은 형태의 두공인 표훈사 반야보전의 것을 능가하고 유점사 능인보전에 가깝다. 이러한 차이는 이 건물의 시대적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복원공사중(사진 :한국일보)

            

 

                                                                                    

                                                                                        (사진출처 : 메뎅이 블로그)

 

3) 건봉사 대웅전(乾鳳寺 大雄殿)

- 건립년대 : 건봉사는 일제때의 행정구역으로 고성군 오대면 냉천리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거진읍 냉천리로 되어 있으며 세칭 한국 4대사찰이라 이르던 대찰(大刹)이었으나 6.25동란 전후로 수백칸의 가람이 다 불타 버리고 지금은 당시 건조물미불이문 한칸과 능파교와 석계(石階), 초석(礎石), 부도(浮屠)등이 남아 있었으나 1990년도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지표조사를 마치고 사지정비와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동지전, 명부전 등의 건물을 새롭게 복원했다.

 

- 건봉사의 事蹟에는 이 대웅전이 高宗年間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柱上에 있는 거대

한 龍頭形이나 첨차 상단에 있는 鷲頭形, 내부에 있는 복잡한 雲工과 蓮봉 紋刻과 용두는 여실히

이를 증명하고 있다. 

                    

 

                         

 

 

4) 동화사 대웅전(桐華寺 大雄殿)

- 건립년대 : 동화사(桐華寺)는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創建)된 후 8차례의 중창을 거듭하였으며, 대웅전 역시 여러 차례의 중창(重創)을 겪었다. 현재의 건물(建物)은 조선(朝鮮) 후기(後期)인 영조(英祖)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建立)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 구조개요 :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 건물로 공포(공包)는 내5출목(內五出目), 외3출목(外三出目)이며 바깥의 제공(諸貢) 쇠서끝이 날카로운 곡선(曲線)을 나타내고 있다. 내부(內部) 첨차(첨遮)도 한몸으로 초각(草刻)되고 끝이 뾰족한 연꽃봉오리로 장식(裝飾)되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一般的)인 장식적(裝飾的) 성향(性向)을 보여준다. 이 건물에서는 정면의 꽃살 문짝과 모서리 기둥이 주목된다. 문짝은 솟을빗살에 활짝 핀 꽃잎을 색색으로 새기고 그 바탕에 네 개의 잎을 배열(配列)시키는 등 장엄한 장식을 하였고, 기둥은 가공(加工)하지 않은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세워 건물의 안정감(安定感)과 자연미(自然美)를 나타내고 있다.

 

 

 

5) 은해사 대웅전(銀海寺 大雄殿)

- 건립년대 : 은해사는 신라(新羅)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809)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현 운부암(雲浮庵) 아래 해안평(海眼坪)에 해안사(海眼寺)로 창건되었으나 조선(朝鮮) 인종원년(仁宗元年)(1544)에 대화(大火)를 입어 명종원년(明宗元年)(1545)에 천교화상(天敎和尙)이 현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러나 명종(明宗)18년(1563)의 대화(大火)와 그 후 수차례의 화재로 건물이 많이 소실되었다.

1919년 지석담주지(池石潭住持)에 의해 대중창이 이루어져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되었으나 근년에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과거의 모습은 많이 잃었다.

- 구조개요 :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진주(內陣柱)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만들었다. 정면 창호구성을 보면 어칸은 4짝 여닫이문으로 좌우협칸은 3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구체부, 즉 주고를 높게 잡은 관계로 문높이가 높아 정첩이나 돌저귀로 지지하기가 어려웠던지 내측에 둔테를 달아 개폐토록하였으며, 개폐방식도 독특하다. 그리고 좌, 우측면 전면칸에 외짝여닫이문을 두고 배면어칸에도 문을 설치하였으나 좌측면 문은 후면칸에 설치되었으나 근년에 전면쪽으로 옮긴 듯하다.

기둥상부는 창, 평방을 설치하고 정면 주간포(柱間包)는 2구(區)씩, 측면 주간포는 1구씩을 얹은 다포작(多包作)으로 꾸몄으며, 공포구성은 외(外)4출(出) ·내(內)6출목(出目)이다.

일반적으로 내출목이 외출목보다 1출목 정도 더 설치되는 것이 상례인데 반해 여기서는 2출목을 더 설치하여 지붕구배를 급하게 잡았다. 이는 사찰이 자리한 부지가 평지인 경우 자주 채택되는 법식으로 건물고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보여진다.

불단상부는 낙양각이 조각된 보개(寶蓋)를 얹고 용(龍) 과 단조(단鳥) 및 비천상(飛天像)으로 장식하였으며 대량(大樑)위에 걸친 충량(衝樑)머리는 용두(龍頭)를 조각하였는데 조선말기의 과장된 수법이다.

천장은 외진(外陣)쪽으로는 공포의 경사에 따라 빗반자로 처리하고 내진(內陣)은 어칸엔 소란반자를, 협칸은 우물반자로 처리하여 중앙부분을 강조하였으며,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으로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전통적인 색조를 띄우고 있으나 내부(內部) 포벽(包壁)의 불화(佛畵) 등의 처리는 조잡하다.

   

 

 

 

 

 출처 :산바라기 원문보기 글쓴이 : 산바라기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