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세월의 설계자
2월은 24절기 중에 입춘(立春)과 우수(雨水)가 있다. 실제로 봄을 느끼기에 턱없이 부족한데도 달력은 우리에게 봄을 이야기한다. 대부분 겨울은 한 계절의 끝이고 봄은 그 시작으로 여긴다. 실제로 겨울의 끝을 알리는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이 들어있으니 1월이 한해의 마지막이라면 진정 2월은 그 해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봄을 말하기가 너무 어색하다. 24절기는 황도(黃道) 즉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서 중국 베이징과 화북지방의 기후에 맞추어서 1년을 24계절로 나누어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날씨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우리의 농사 시기와 맞지 않는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세종대왕은 정초(鄭招)와 변효문(卞孝文)에게 우리 기후에 맞는 농법을 만들라고 명령하여 세종 11년(1429년)에 농서(農書) 「농사직설(農事直設)」이 편찬되었다.
2025년 올해 2월은 유난히 추웠다. 봄을 선언하던 입춘(3일)에는 전국이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얼어버렸고 비(雨)가 되고 물(水)이 되어야 하는 우수(18일)에도 눈과 얼음은 녹을 기미가 전혀 없었다. 설산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계곡의 물은 동장군의 기세에 옴짝달싹 못해도 당당하게 봄을 말할 수 있는 기개가 가상할 뿐이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배운다. 그렇게 동장군과 사투를 벌이던 2월이 3월에게 바통을 넘겨주면 막연했던 봄이 성큼 다가온다. 아직 한반도 중북부지방은 추위가 위세를 떨치지만 남녘은 봄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다. 추위의 기세로 죽은 듯했던 겨울나무에 물이 오르고 파릇하니 새싹이 겸연쩍게 고개를 내밀며 생명의 증거를 보여준다. 가끔씩 시샘 부리는 놈이 최후 발악을 해도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은 전국노래자랑을 개최하여 만휘군상(萬彙群象)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지금 가장 듣고 싶은 그 노래를 부른다. 바로 봄이 오는 소리다. 밝고 환한 햇살은 곳곳에 숨어 있는 동장군의 잔존 세력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고 끝까지 빙설 감방에 갇혀있던 포로들은 일제히 해방의 기쁨을 큰 함성으로 외치며 봄의 노래에 화음을 더한다. 이내 웅장한 교향합창곡을 이루고 그 피날레(finale) 장식은 장엄하기 그지없다. 그 노래에 만물은 감동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쏟는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매해 변함없이 내려주는 은혜다.
우리의 근대역사는 어두웠고 겨울처럼 추웠다. 역사적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지만 부인하고 싶은 우리의 치욕의 근대사는 일제강점기다. 국권상실, 인권유린이란 톱니가 맞물린 고난의 바퀴가 기약도 없이 돌아갔던 때다. 한 겨울 동장군의 포로처럼 모든 국민이 왜놈들의 포로가 되어서 사람대접도 받지 못했던 그 시절이었다. 그런 혹한의 추위에서도 당당하게 봄을 선언했던 민족의 기개를 맛볼 수 있었던 우리의 입춘 역사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봄을 느낄 수 있는 3월을 열면서 민족의 영원함을 외쳤던 만세운동이다. 3월의 첫날 온 국민은 동시다발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하늘 꼭대기로 쏘아 올리며 민족의 기상을 만천하에 보였던 자랑스러운 역사다. 때는 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지 9년이 지난 1919년 기미년, 식민지배 처음부터 일제는 이 백성의 기세를 꺾으려고 강압통치를 일삼았던 때다. 감히 일제에 항거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역경의 시간이었다. 그 누구 하나 일제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서 숨죽여야 할 때 우리 민족은 한마음으로 일치단결하여 이 나라 만세를 외쳤다. ‘만세(萬歲)’는 ‘만년세월(萬年歲月)’의 줄임말이다. 영원을 말하고 장구한 세월을 의미한다. 나라가 망했으니 아무런 힘도 없던 민족이 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매해마다 추위 속에서 입춘을 맞이했던 당당한 민족의 기개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 미술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문인화의 기본은 사군자(四君子)이며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소재로 한다. 모두 절개와 관련 있는 식물들이다. 특히 눈이 내리는 한 겨울 중에도 꽃을 피우는 매화(雪中梅), 서릿발이 심한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지킨 절개라 해서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국화를 우리 선조들은 특히 사랑하고 이렇게 글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더위는 피해야 건강하다 해서 피서(避暑)라는 말이 생겼다. 반면 추위는 당당히 맞서야 강해진다고 한다. 겨울에 모든 옷을 다 벗어버리고 추위에 당당했던 겨울나목이 어김없이 새 봄에 생명의 소식을 알리는 비결이다.
올해 3월을 열면서 또다시 나라와 민족의 만년세월을 노래하고 외친다. 사실 만년세월은 내 시대가 아니고 우리 후손들의 날이다. 그들의 때에 밝고 환한 국가의 미래를 열어줘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100여 년 전 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피 끓은 외침, 삼천리강산에 울려 퍼졌던 그 소리가 다시 조국의 산하에 울리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 함성에 놀라서 경칩(驚蟄)에 잠자던 개구리가 깨어나듯이 온 국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내 나라의 만년세월을 설계해야 한다. 봄의 계절 3월의 첫날에 문득 노산 이은상(蘆山 李殷相)의 '동무생각(思友)' 이 입가에 맴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서 백합 필 적에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부르던 시인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리스도인은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린 나라를 생각하며 ‘동무생각(思友)’을 노래했던 그 시심(詩心)을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내 나라의 만년세월을 설계할 봄의 전령사임을 명심하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으니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아가 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