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해방을 쓴다. 나는 칼 맑스가 주장한 것처럼 산업이 발달한 국가의 대공장 노동자들의 조직들이 사회변혁, 더 나아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혁을 이끌 동력으로서 그들을 지지한다. 레닌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 권력에 매수당하지 않을 때, 노동자학교의 역할을 할 때 그들을 지지한다. 그들 조직이 대공장의 노동자들 스스로 조직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대공장의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없다. 대공장은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의 조직, 노동자민중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기도 한다. 나는 현실을 연구하고 글을 쓰는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쓰는 활동을 하는 개인으로서 그들을 지지한다.
칼 맑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책에서 ‘이윤율 저하’라는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이라든지, ‘잉여가치’를 둘러싼 문제들, 노동력의 착취나 경제 양극화와 같은 현실을 밝히고 있다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자본론]과 같은 맑스의 저작들을 개인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해서 얻어낸 것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맑스의 저작들에 대해 분석한 글들과 말들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다. 나는 지금의 현실에 비추어 맑스의 저작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나의 언어로 다시 써야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칼 맑스의 글들에서 아니 그의 투쟁적인 삶에서 내가 더 관심을 갖는 대목은 이런 것들이다. ‘임금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 결정된다’(경제학철학초고),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현실적 무기가 된다’(헤겔법철학 비판),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공산주의 운동’(독일 이데올로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정치 권력을 전취하는 것이 노동자 계급의 커다란 의무’.(공산당 선언)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밝히는 것과 자본독재의 현실을 변혁하는 것이 별개일 수 없다. 그 양자는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해방을 쓰는 것으로 자본독재의 현실 변혁에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 조직에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유익하지 않더라도 방해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기여라고 생각한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물려받은 것’으로부터
레닌이 폭로하고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던 “혁명적 언사만 늘어놓는 자들”은 기회주의, 사회배외주의, 무정부주의, 프티부르주아, 좌익 공산주의자 등이다. 레닌이 그들을 ‘좌익 소아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혁명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들의 혁명성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타협과 유연함’이다. ‘타협과 유연함’은 투쟁의 전략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레닌의 혁명에 대한 입장으로 이해한다.
레닌은 ‘국가 폐지’와 ‘의회 거부’를 주장하는 자들을 반혁명적이며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한다. 레닌의 주장을 통해 물려받은 기존의 것을 통하여 지양(止揚)해 나가야 하는 것이 ‘혁명적’이라는 레닌의 혁명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레닌은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노동조합’을 거부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부르주아지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수불가결한 조직인 노동조합을 반동성 때문에 거부하고 부르주아지에게 바치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그러한 반동성과 타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을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람시 역시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관료제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하지만 그람시가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좀 더 중요한 지점은 레닌과 다르다. 레닌도 노동조합을 ‘공산주의의 학교’로 여긴다. 그람시가 문제 삼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람시 역시 노동조합을 비판하지만 노동조합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평의회’ 활동을 펼친다. 그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노동조합을 거부한다기보다는 노동조합을 보완하려 한다.
레닌과 그람시가 만나는 지점은 ‘물려받은 것(노동조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키는 방식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은 노동조합을 거부하는 자들을 좌익 소아병자라고 비판하고 폭로하며 추방하는 것이다. 그람시 역시 노동조합을 비판하지만 ‘노동자평의회’ 활동을 통해서 계급투쟁을 이끌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람시가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레닌이 지적한 것처럼 ‘대중들을 훈련, 교육, 계몽시켜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기능을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전위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람시는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국가’가 가진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레닌과 그람시의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은 유사하다. 소중하기에 지켜야 하지만 불가피한 반동성도 인정한다. 그러하기에 노동조합을 지키면서 반동적인 관료주의적인 성격을 대중들과 융합할 수 있는 계급투쟁을 이끌 수 있는 성격의 노동조합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에도 생각이 같다. 그것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레닌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그람시는 노동조합 외부에서 창조하고 확장하려 한다는 데에 있다. ‘창조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과 ‘협력’이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연결의 지점을 찾아가며 협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도 지키면서 계급투쟁을 확장시키는 길이다. ‘새로운 질서’라는 목적이 같다면 그러해야 할 것이고, 그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도 노동자평의회도 반혁명적이고 반동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복무한다면 비판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조직의 관료화가 조직 운영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직 운영에서 발생하는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들에 대한 타협적이고 유연한 대처는 혁명적이기도 하다.
또한, 조직의 운영에서 내부적으로는 절대적인 규율을 따르게 할 권위와 권위에 대한 신뢰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못할 경우 관료화될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다른 조직과 접점을 찾아서 연결하고 협력하겠다는 수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한 경우 관료화 될 것이다. 레닌의 볼셰비키에게 권위와 신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타협과 유연함을 강조한 만큼 다른 조직과의 연결과 협력과 수용에서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생성과 자치는 권위와 신뢰에 기반 한 조직과 결합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람시의 ‘노동자평의회’가 볼셰비키와 같은 권위를 얻고 신뢰를 이루었는지 의문이다. 그런 의문들을 제기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레닌과 그람시가 물려준 인류의 위대한 유산들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에 맞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ㅣ국가권력과 어소시에이션
맑스는 ‘발기문’에서 대륙(주로 영국)의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통해 그들이 처한 세 가지 현실에 대해 쓰고 있다. 1848년 혁명 실패 이후 “노동자 운동의 몰락”, 30년에 걸친 투쟁을 통한 “10시간 법 관철”,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 ‘협동조합 공장’을 ‘자본의 정치 경제학에 대한 노동의 정치 경제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서술하면서 ‘위대한 실험들의 가치’는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였다는 것 때문이다.
“대규모로 이루어지며 또 현대과학의 진보와 조화를 이루는 생산은 ‘일손’ 계급을 고용하는 주인 계급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열매를 맺으려면 노동수단이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지배하는 수단이나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혹사시키는 수단으로서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노예노동이나 농노노동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 또한 과도적이고 낮은 단계의 사회적 형태일 뿐이며, 자발적인 손과 건전한 정신과 즐거운 마음으로 근로가 수행되는 연합된 노동 앞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는 것.”(발11)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이 “1848년에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소리 높이 선포되었던 이론에 매우 근접한 실천적 출구”(발11)이며, ‘원칙상 탁월하고 실천 상 유익하다’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판한다. “협동조합식 노동이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으며, 심지어 그들의 빈곤이라는 짐을 눈에 띄게 덜어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발11)
“근로 대중을 해방시키려면 협동조합 제도는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토지귀족들과 자본귀족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의 방어와 영구화를 위해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특권들을 이용할 것입니다. 노동의 해방을 추진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 길에다 자신들의 가능한 모든 장애물들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발11-12)
맑스의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비판은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협동조합 운동’의 한계는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가 ‘얻어야 할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부르주아의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비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협동조합 운동’ 자체를 부정한다기 보다는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서도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일 테다.
사이토 고헤이(이하 ‘사이토’로 약칭)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와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에서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선 ‘탈성장 코뮤니즘’을 구상하는데, 그 실현 방식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커먼common)이며, 실현 주체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다. 그의 방식과 주체는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맑스의 문제 제기를 넘어서고 있는가/넘어설 수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이토는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향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제로179)
사이토의 주장을 통해서 맑스가 창립에 관여했던 ‘국제노동자협회’와 사이토의 ‘어소시에이션’의 연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소시에이션이 ‘국가’가 아니라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이나 법적 보호를 받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NGO, NPO’는 맑스와 사이토의 의미에서는 ‘어소시에이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어소시에이션’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국가의 경제 지원과 법적 보호를 받는 ‘어소시에이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국가의 경제 지원과 법적 보호를 받는’ ‘어소시에이션’은 ‘어소시에이션’이 아니라고, ‘자발적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만 어소시에이션으로 인정하면 그뿐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어소시에이션’이 처한 현실이 보여주듯, 현실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힌 관계를 이루며, 시시각각 변하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이 가변적인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국가와 무관한 어소시에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고, 국가의 지배를 받든, 국가에 대항하든 국가와의 ‘관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소시에이션이 국가 내에서 국가와 관계하면서 국가를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어소시에이션과 국가는 대립 속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소시에이션과 국가는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여지를 지닐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이다.
해서, 그 양자가 처한 현실은 모순적인 관계를 지양해가는 부단한 운동 속에 존재하는 ‘과정의 현실’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소시에이션과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도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운동’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부단한 모순의 지양의 운동을 통해서 어소시에이션과 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의 결과로 주어진 현실을 다시 지양해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사이토가 주장하는 어소시에이션과 복지국가의 ‘물상화 억제의 힘’의 가능성에 대해 필자는 우호적인 입장이다. 다만, 어소시에이션과 복지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서도 현존하는 자본주의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을 동시적으로 해 나가야 하지 않은가라는 입장도 가지고 있다.
사이토는 ‘파리코뮌’의 실패 이유를 ‘고립’에서 찾는다. ‘파리와 지방,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자본주의의 중심부와 주변부, 공동체 간 연결의 결여’가 그것이다.(제로230~232쪽 참조) 또한, 사이토는 ‘복지국가의 한계’를 네 가지로 사유하고 있다. ‘관료지배와 비효율, 남북문제, 수탈과 외부화, 젠더 불평등의 재생산’이 그것이다.(제로190~193쪽 참조)
소련의 실패와 어소시에이션과 복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그리하여 부르주아의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선다는 것은, 어소시에이션이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운동’이 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현존하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것으로 지양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연합Association’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인가, ‘지역적’이 아니라 ‘국제적’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 ‘일국이 아니라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이 그 ‘한계’를 넘어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냐, ‘공유화’냐, ‘노동자국가’냐 ‘코뮤니즘’이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계급투쟁이냐 대중투쟁이냐는 이분법을 넘어 그들의 ‘연결’과 ‘결합’과 ‘연대’와 ‘단결’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ㅣ자치
레닌이 러시아혁명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볼셰비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는 볼셰비키에 대해 ‘역사의 모든 급박한 사태에 대처하는 만만치 않은 싸움’을 이끌었다고 쓰고 있다. 레닌이 직접 서술하고 있는 ‘볼셰비키가 성공한 근본적인 한 조건’에서 볼셰비키에는 ‘가장 엄격하고 강철 같은 규율’과 ‘사려 깊고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유력한 노동계급 내의 모든 분자들로부터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람시가 언급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체현, 새로운 국가에 의한 지배’를 나타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의 서술에서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독재를 이끈 볼셰비키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매일, 매시간’의 ‘끈기, 규율 불요불굴의 정신 및 한결같은 의지를 요구하는 완강하고 필사적인 사활을 건 기나긴 투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관련하여 그람시가 강조하는 맥락은 레닌과 유사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여전히 국민국가이며 계급국가다. 경쟁의 기준과 계급투쟁은 변했지만, 경쟁과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내외적 방어라는 똑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이다. 마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이미 존재하는 양, 사회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국가의 경쟁단계 또는 공산주의 국민경제와 자본주의 국민경제의 무자비한 경쟁단계가 이미 우리 뒤로 지나간 것인 양 행동하고 말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이다.”
그람시의 언급에서 눈에 띄는 것도 ‘기나긴 투쟁’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앞서 확인했듯이 그람시는 그 기나긴 투쟁을 이끈 것이 볼셰비키였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기나긴 투쟁과 관련한 그람시의 위 언급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실천’, 즉, ‘자치(self-government)’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과 그람시 두 사람 모두 부르주아가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낡은 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생각이 같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볼셰비키가 이끌었다는 점, 그런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생각이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낡은 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시간, 그것도 투쟁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투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투쟁의 ‘주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게 될 조직의 ‘운영’의 문제라고 여긴다.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알아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해 나간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치’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그람시의 말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자치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 더 깊이 와 닿는다. 그 훈련이 결코 프롤레타리아 스스로 알아서 하기 어려운 훈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들이 서로 협력할 때 그 훈련이 더 용이하고 협력하는 과정 자체가 그 훈련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볼셰비키와 전위 조직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훈련하며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람시는 ‘노동자평의회’라는 조직을 통해서 그람시의 말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스스로 하도록 훈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도 자치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훈련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자치를 위해서도 자치가 가능할 환경이 필요할 것이고 그 환경을 이루는 것에 사람은 필수적이다. 자치에도 규율은 필요할 것이고 규율을 함께 만들고 조정해 나가고 협력하며 지키는 것이 자치이기도 하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 각자가 볼셰비키가 되고 전위가 되고 레닌이 되고 그람시가 되어 스스로 독재를 실천할 수 있는 자치의 상태가 되도록 훈련하고 투쟁하고 경험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집권화한 위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천도 자생적인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자치의 실천도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수조건으로 보인다. ‘위아래’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오히려 문제는 기나긴 투쟁의 과정에서 그러한 조직 내의 ‘위아래’ 혹은 조직들 간의 ‘위아래’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일 것이다. ‘강력한 규율’과 ‘자생성’의 상호작용을 매개해 줄 ‘사람들’에 대해 그람시는 말한다. “러시아혁명은 지금까지 역사가 그 앞길에 뿌려 놓은 모든 장애물들에 대해 승리를 거둬왔다. 혁명은 러시아 민중에게 다른 나라에는 없었던 훌륭한 정치인들을 발굴해 주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일생을 헌신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 수십 년 간의 망명생활 동안 혁명의 제반 문제를 세밀히 해부하고 분석했던 사람들, 짜리즘에 대항한 힘에 부치는 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강철같이 단련시켰던 사람들, 유럽, 아시아, 미국 등지에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문명과 접촉한 생활을 통해 그들의 책임의식을 명확히 함으로써 제국을 점령한 자의 칼처럼 자신의 의식을 벼렸던 사람들을.”
‘자생성’, ‘자치’는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중앙집중화’한 조직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오히려 그러한 ‘중앙집중화’를 어떻게 유지하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레닌은 ‘전위’의 역할을 강조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규율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 규율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전위의 헌신, 대중들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이 중요하다. 대중들은 전위를 통해서 자생력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단번에 생겨날 수 없다. 그것들은 꾸준한 노력과 고난 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해서만 창출된다.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레닌은 ‘전위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밝힌다. 레닌은 전위만으로 결전을 치르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한다. 광범위한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기에 레닌은 ‘위-아래’, ‘지도자-대중’의 분리는 허튼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볼셰비크가 “위로부터”인가 아니면 “밑으로부터”인가, 지도자들의 독재인가 아니면 대중들의 독재인가 하는 따위의 이 모든 지껄임을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허튼 소리로, 곧 어떤 사람의 왼쪽 다리와 오른 쪽 팔 중 어느 쪽이 그에게 더 쓸모 있느냐에 대해 토의하는 것과 같은 짓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이분화야말로 새로운 질서를 위한 기나긴 투쟁에서 경계해야 할 일일 것이다. 위아래의 상호작용을 통한 유기적인 결합을 위해 협력해 나가는 데에 자치의 훈련은 필수요건일 것이다.
하영진(작가, 현대사상연구소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