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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살롬 ! (2022년 8월17일 신우회 예배 말씀)
계절적으로 말복이 지났지만 아직도 무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폭우는 쏟아져 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고 있습니다.
정말 지구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자연환경에 힘을 써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우리가 더욱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는 내 나라도 서로 미루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달나라에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서 그곳도 망가뜨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것도 나만의 생각인가요...
본문말씀 : 요한복음 11:30-35 (하나님나라 신약선경)
예수님께서는 아직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르다를 만나셨던 그 자리에 계셨다.
마리아를 위로하며 집에 함께 있던 유대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짐작하고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분을 보고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깊이 동요하시고 몹시 괴로워하셨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말했다. “주여, 와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눈물을 터뜨리셨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Blessing's on the mourner's)
MZ세대에게 너는 너의 영혼을 드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글쎄요 아마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저 직장은 나의 삶을 위한 시드 머니(seed money) 장소로만 여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저 돈을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여행하는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애끓는 마음으로 고통속에 살아가야 하나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이 혹시 다른 것이 아닌가요. 혹시 말씀이 역사가 아니라 허상은 아닌가요. 고대로부터 유대인이나 오늘날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질문은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라면 왜 나는 그렇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끄셨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고, 다른 것이 또 무엇이 있지 않냐고 찾는다면 이는 허구를 허상을 찾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야웨께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시고, 그들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삼으셨다,‘ 이 신앙고백은 신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갔다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고대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며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쓰고 힘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허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웨께서는 파라오의 실체를 밝혀내시고 이집트의 모든 신들을 다 합해도 결코 야웨를 두려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이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기 조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들도 구원하시러 그들에게로 돌아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속량하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생의 짐으로부터 오던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시며 모든 것을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야웨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주님의 날에 자신들에게 귀환하셔서 이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언제일찌라는 말은 그 누구도 그 때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 이 말에 현혹되어 지금도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대 유대인에게 귀환하셔야 했던 이유는 그들 조상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것 중에 하나는 여호와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고대 근동지방의 여러 신들을 동급으로 놓고 모두로부터 복 받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 외의 모든 신들이 우상이며 그 신들을 섬기고 있던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는 가짜 존재임을 드러내시며 오직 자신만이 그들과 온 세상을 자유하게 복된 인생을 살게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다른 신들도 복을 준다고 하니 그들에게서도 받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의 시작은 역사적 사실을 믿음으로 신앙고백으로 내려오는 것은 이 역사적 사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내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으며 무어라고 기술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시며 수많은 이집트 신들이 허상임을 폭로하셨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섬김받던 수많은 신들이 여호와 주님 앞에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집트 사람들의 삶도 축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신들의 현현이라고 추앙받던 파라오는 자신들의 지배에서 당당하게 나왔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잡으려고 쫓다가 자신의 백성을 홍해에서 몰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들과 싸워서 승산이 없으니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어리석은 파라오의 압제 아래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동급으로 섬기며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모습은 그 일의 여파로 포로로 끌려왔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고대 유대인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유대인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학자 에스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에 애쓰지 않고 살던 것에 충격을 받아 넋을 잃고 하루 종일 성전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들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잠깐 그들을 징계하시고 마침내 자신들에게로 돌아오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실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70년의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들의 살아가는 삶을 보니 너무도 안타깝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 당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에스라는 하루 종일 성전에 주저앉아 멍때리고(슬픔에 젖은 모습) 있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도 동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야웨께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백성 삼으셨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대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주님의 때가 이르러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이제 야웨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로 귀환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던 자신들을 주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아직 성도들의 삶이 완전히 복 받은 상황은 아닙니다.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다시 성전을 짓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던 에스라에게 여러 고통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임재하셨다고 노래하는 교회에도 여러 다양한 억압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공생애 기간 동안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던 마리아에게도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급병으로 잃게 되는 힘든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갑작스런 비극을 경험했던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비극과 그로 인한 슬픔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을 찾으신다는 전갈을 받고 짓눌린 비극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그녀가 겪은 비극과 그로 인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분출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의 비통함에 함께 눈물을 떠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시 생명을 얻게 하셨고 마리아의 비극은 끝났으며 그녀의 슬픔은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라버니를 졸지에 잃게 된 마리아는 이웃들의 진정한 위로도 뒤로 하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분이 이곳에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하며 원망어린 말로 비통함에 멍 때리고(슬픔에 젖은 모습) 있었습니다. 그 때 찾아오신 예수님이 이미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마리아에게 크나큰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두 사람 에스라와 마리아에게 진정한 위로는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분노하게 되고 쓴맛(지옥의 맛)을 보게 됩니다. 이 때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자신의 회개와 연결됩니다. 그 때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아니 불평의 부르짖음도 위로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들어와 좌정하게 됨으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찾았던 많은 이들은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께로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그녀는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는 뜻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영이 가난한 사람은 항상 주님앞에서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안녕하세요 살롬 ! (2022년 8월17일 신우회 예배 말씀)
계절적으로 말복이 지났지만 아직도 무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폭우는 쏟아져 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고 있습니다.
정말 지구는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자연환경에 힘을 써서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우리가 더욱 마음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는 내 나라도 서로 미루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달나라에 화성에 우주선을 보내서 그곳도 망가뜨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것도 나만의 생각인가요...
본문말씀 : 요한복음 11:30-35 (하나님나라 신약선경)
예수님께서는 아직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분은 마르다를 만나셨던 그 자리에 계셨다.
마리아를 위로하며 집에 함께 있던 유대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짐작하고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분을 보고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여!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깊이 동요하시고 몹시 괴로워하셨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들이 말했다. “주여, 와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눈물을 터뜨리셨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Blessing's on the mourner's)
'야웨께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시고, 그들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삼으셨다,‘ 이 신앙고백은 신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갔다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고대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이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기 조상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들도 구원하시러 그들에게로 돌아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자신들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을 속량하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인생의 짐으로부터 오던 슬픔을 즐거움으로 바꾸시며 모든 것을 만족하는 삶을 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야웨께서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주님의 날에 자신들에게 귀환하셔서 이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 유대인에게 귀환하셔야 했던 이유는 그들 조상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야웨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것 중에 하나는 여호와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고대 근동지방의 여러 신들을 동급으로 놓고 모두로부터 복 받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 외의 모든 신들이 우상이며 그 신들을 섬기고 있던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억압하는 가짜 존재임을 드러내시며 오직 자신만이 그들과 온 세상을 자유하게 복된 인생을 살게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야웨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시며 수많은 이집트 신들이 허상임을 폭로하셨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섬김받던 수많은 신들이 여호와 주님 앞에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집트 사람들의 삶도 축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신들의 현현이라고 추앙받던 파라오는 자신들의 지배에서 당당하게 나왔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잡으려고 쫓다가 자신의 백성을 홍해에서 몰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들과 싸워서 승산이 없으니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어리석은 파라오의 압제 아래서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동급으로 섬기며 유일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모습은 그 일의 여파로 포로로 끌려왔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고대 유대인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유대인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학자 에스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에 애쓰지 않고 살던 것에 충격을 받아 넋을 잃고 하루 종일 성전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들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잠깐 그들을 징계하시고 마침내 자신들에게로 돌아오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실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초대교회도 동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야웨께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셔서 자신의 백성 삼으셨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대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주님의 때가 이르러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이제 야웨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로 귀환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고 선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던 자신들을 주님이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아직 성도들의 삶이 완전히 복 받은 상황은 아닙니다.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다시 성전을 짓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던 에스라에게 여러 고통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임재하셨다고 노래하는 교회에도 여러 다양한 억압과 그로 인한 슬픔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공생애 기간 동안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던 마리아에게도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급병으로 잃게 되는 힘든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갑작스런 비극을 경험했던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비극과 그로 인한 슬픔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예수님이 자신을 찾으신다는 전갈을 받고 짓눌린 비극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그녀가 겪은 비극과 그로 인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분출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의 비통함에 함께 눈물을 떠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예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라버니 나사로가 다시 생명을 얻게 하셨고 마리아의 비극은 끝났으며 그녀의 슬픔은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리아를 찾았던 많은 이들은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께로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나아갔을 때 그녀는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는 뜻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영이 가난한 사람은 항상 주님앞에서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