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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선: (동영상, 2021.6.28) 지난해 중국에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1921~2021, 위대한 여정, 모든 인민이 풍족한 샤오캉(小康) 사회를 이뤘다고 선언한 중국, 그 업적을 자축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이걸 이뤄낸 3명의 지도자, 중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중국인1: 마오 주석이 없었으면 오늘의 중국도 없을 겁니다.
내레이션: 개혁 개방을 통해 부강의 기틀을 놓은 덩샤오핑,
중국인2: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덕에 중국 인민이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그리고 중화민족의 부흥을 꿈꾸는 시진핑,
시진핑: 중국 공산당, 만세!
내레이션: 시진핑 주석은 1주일 남은 공산당 제20차 당대회(10.16예정)에서 3연임에 도전한다. 마오쩌둥에 이어 장기집권에 도전하는 시진핑,
어린 학생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지요.
내레이션: 지난 100년 중국을 바꿔온 공산당, 그들이 꿈꾸는 중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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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380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리더들을 통해서 지금의 중국을 이해해 보는 시간, 1주일 후면 (10.16)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새롭게 구성되잖아요. 시진핑이 계속 3연임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시원/배우: 우리나라 대통령이 네번 바뀌는 동안 시진핑 주석은 계속 집권을 했잖아요. 이제 중국의 지도부 하면은 시진핑이 딱 떠오르고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번 연임이 결정되는 당대회는 도대체 정확히 뭔가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당대회는 5년에 한번씩 열리는 데 중국 공산당의 굉장히 큰 정치행사입니다 (중국공산당대회(전국대표대회)-공산당의 지도부를 정하는 중국 최대 정치행사), 그런데 4년전에 국가 주석직 연임금지조항을 지워버렸어요. 시진핑 주석이 연임이 된다고 하면 이제 15년이 되는 것이고 마오쩌둥이 27년 했거든요. 그 뒤를 이어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게 되는 그런 인물로 등극하게 되는 겁니다.
허준/방송인: 사실 마오쩌둥이 국부로서 추앙받잖아요. 근데 미국 언론사의 사진을 보면 시진핑이마오쩌둥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 거든요. 이걸 완전히 덮어버리면 중국은 이제 시진핑~
최원정: 마오쩌둥 덩샤오핑 그 다음 시진핑 오늘 시작이 바로 마오쩌둥입니다. 오늘 함께 해 주실 특별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곽재식 작가님, 안녕하세요?
곽재식/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 공학과 교수 겸 작가: 네, 안녕하세요.
최원정: 진시황 전문인 줄 알았는데 (357회 <진시황>편 동영상), 마오쩌둥도 아신다는~
곽재식: (동영상, 오늘 중국을 만든 사람을 뽑아 보라, 당연히 진시황을 뽑겠죠), 현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뽑아보라? 하면 바로 마오쩌둥이 아니겠어요? (중국어로-고등학교 때 중국어를 3년간 배웠어요) (갑자기 중국어 분위기?!)
허준/방송인: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옆에 교수님~그래요?
곽재식: (중국어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오쩌둥이야말로 여러가지 명언을 많이 남긴 인물이죠. 특히 생각나는 거는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너 하나가 희생을 하면 역사를 바꾼다”란 의미, 이런 생각을 계속 주입을 시켜가지고 혁명을 이끌고 나간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해 보면 너무나 역사에서 확실히 무게 있는 인물입니다.
김지훈/한양대학교 사학과 겸임 교수: 중국 공산당을 마오가 이끌어가서 중국 혁명에 성공하고 외세를 물리치고, 국가의 통일, 중화인민 공화국을 건국했고, 사회주의 건설에 노력을 했습니다. 물론 중국혁명에 대해서는 중국인들이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오류라든가 잘못이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래서 중국에서는 공적이 70%, 과오가 30% 이런 식의 평가가 일반적이다.
곽재식: 공칠과삼(功七過三),
최원정: 근데 중국 지도자라 하면 약간 풍채가~ 지도자의 풍채는 (허준, 곽재식을 향해) 이래야 되는 건가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두 분이 다 비슷하지 않아요?
허준: 다 비슷한 겁니까? 잘 먹어서 그래요.
김지훈: 국가 지도자라고 하면 아빠 같은 푸근한 이미지가 있어야 돼죠. 두분같이 풍채가 있으시면, 우리 아빠는 역시 푸근하고~
최원정: 너무 그렇게 달래주지 않으셔도 돼요.
허준: 애들 둘이 양쪽에서 배 베고 데리고 잘 때 기분이 좋습니다.
최태성: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을 정말 존경하더라구요. 5년전에 이윤석씨랑 촬영차 마오쩌둥 기념 중국 훠궈집에 갔는데 마오쩌둥 배지를 달고 나오는 거예요 (동영상) 거기서 직원들이 충자무 忠字舞 춤을 추더라구요. 한자로는 일단 마음심(心) 자를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그 다음에 입구(口)를 그려요. 그리고 두 손을 위로 쭉~쭉~쭉~ 뻗으면서 활을 만들어요.
허준: 忠을 무용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최태성: 네~ 마오쩌둥에 대한 忠誠을 표현~
최원정: 저는 충성 춤은 처음
곽재식: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되었던지 간에 얼굴을 배지로 다는 경우는 없거든요. 이렇게 옛날 지도자를 아직도 배지를 달고 있다는 건 대단한 거죠.
최원정: 마오쩌둥이 어떤 사람이길래 아직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는 걸까요?
김지훈: 당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농민들이었어요. 근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를 해주었고 잘 살 수 있도록 나름대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그러니까 옆집에 숟가락도 똑 같고 우리 집의 숟가락도 똑 같게 한 그런 사회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빈부격차가 심해지니까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은 분들은 덩샤오핑을 좋아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소외 받고 낙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마오에 대한 향수를 느끼죠.
이시원: 아픈 배보다 옛날 배고팠을 때가 낫다 이런 거네요.
곽재식: 마오쩌둥이 인민을 위해서 일하라(爲人民服務) 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세상을 엎어가지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평등한 체제를 만들어줬다는 감동, 이런 것이 진짜 있었습니다. 연설 중에서도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고 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를 위해 죽으면 털끝보다 가벼운 죽음이다 라는 얘기를 했다 라고 해요.
최태성: 멋있는 말인데
허준: 여지 껏 핍박 받고 가난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은 저런 마음을 가진 지도자에 마음이 벅차 오를 수 박에 없을 거예요.
최원정: 인민을 위하여 라고 하니까 그거 하나로 민심을 더 얻게 되는 거야. 정말 대륙을 다 호령하는 거잖아요.
내레이션: (동영상) 1949년 10월 1일 새로운 중국이 탄생했다. 마오쩌둥은 신중국 출범을 선포하기 위해 혁명동지들과 함께 톈안문 단상에 올랐다.
마오쩌둥/중화인민 공화국 초대 주석: 중화인민 공화국 설립을 선포합니다.
인민들: 중국 공산당 만세! 마오 주석 만세!
내레이션: 건국 후 마오쩌둥이 처음 착수한 일은 농촌 토지개혁, 농민들은 마오쩌둥의 주요 지지층이었다. 토지개혁법이 시행되고 지주들에게서 몰수된 토지는 농민들에게 고루 분배됐다. 그것은 신중국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마오쩌둥의 첫 걸음이었다.
허준: 내 땅이 생겼다. 대대손손 내 꿈이 이룬 거잖아요. 얼굴에 하얀 이가
최원정: 토지라는 게 권력이고 신분이잖아요. 근데 토지개혁이라는 것 자체가 정말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대과업인데 강한 의지가 있지 않으면 힘든 것 아닌가요?
허준: 이게 바로 중국 공산당의 시작이에요.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 찬성하는 사람은 여럿~
최태성; 마오쩌둥 같은 경우는 농촌출신이잖아요. 그러니까 농민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사실 1950년 토지개혁 이전에는 지주와 부농들이 전체 토지의 70% 이상을 차지하였거든요. 토지개혁 이후에는 8%로 축소됐습니다. 어마어마한 개혁이죠. 이렇게 토지를 받은 시원씨, 어떻겠어요?
이시원: 신나죠
최태성: 생산이 올라가는 거예요. 1952년을 기준해서 3년전 전국 양식생산량이 무려 43%가 증가합니다.
이시원: 그러면 초반에는 어찌보면 실제로 효과가 있었네요.
곽재식: 농민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이러한 정책에 환호를 보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전통적 악습으로 이야기 하는 것 중에 전족이라고 해서 여성의 발을 꽁꽁 싸매는 이상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전족-여성의 발을 천으로 동여매 인위적으로 작게 만든 중국의 풍습), 발을 아주 싸매면 발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못하게 돼잖아요. 그러면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이상한 걸음을 걷게 돼죠.
일동: 뒤뚱~ 뒤뚱~
곽재식: 그건 이상스러운 전통이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였는데 마오가 등장하고 저런 것들을 급격하게 타파하기 시작하니까 인민의 절반인 여성들이 팍팍 느끼게 되는 거죠.
허준: 지금도 사실 중국은 여성의 목소리가 큰 나라로 인정을 받는 나라잖아요. 그리고 주축이 됐던 농민들이 삶의 질이 올라가면서 다들 야 우리 이제 부터는 밥도 꾹꾹 눌러 담자 이런 세상을 만들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신중국의 시작은 맞는 것 같애요.
김지훈: 근데 문제는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많은 자본들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은 농촌에서 획득할 수 밖에 없었죠. 결국 중국은 대약진 운동이라고 하는 운동이 1958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게 됩니다. 경제성장을 하게 되면 많으면 10% 정도 성장하는데요. 대약진운동은 그 정도가 아니고 농업생산이나 철강생산 이런 것을 한 해에 몇 십 퍼센트 높이겠다는 거예요.
최원정: 새마을 운동 느낌이~
일동: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곽재식: 그거 있잖아요. 귀에 딱 꽂히잖아요. 마오쩌둥 역시 속도전을 강조한 만큼 이런 식의 꽂히는 단어들을 많이 사용했어요. 빨리 변화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곰팡이를 내뿜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약진~ 약진~ 을 했던 거죠.
이시원: 30~40% 성장이 가능한 가요? 그 정도 추세라면 세계 1위 강국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나요?
김지훈: 그래서 15년내 영국을 바로 따라 잡겠다던가~미국을 따라 잡겠다던가 이런 얘기를 하게 돼죠.
최원정: 모두가 잘 사는 중국 속도를 내기 위해서 또 새로운 시도를 이어 갑니다.
----------이광용/아나운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일환으로 거대 프로젝트 두 개를 이끌었습니다. 첫번째는 해로운 네 가지를 제거하자는 제사해 운동~(동영상) 해충없는 세상을 만듭시다. 파리, 모기, 쥐를 없앱시다. 모기, 파리, 쥐, 참새를 박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시원: 모기 파리는 이해가 되는데
최태성: 아니~ 참새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예요?
이광용: 이유가 있습니다. 1955년 농부가 참새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요 라는 탄원서를 올렸는데 그걸 마오쩌둥이 읽고 이렇게 지시합니다. 참새를 소멸시켜라! 이렇게 명령을 하자 참새섬멸 총지휘부 까지 만들어집니다. 참새가 1년에 2.4킬로그램 정도의 곡식을 먹어치운답니다. 참새만 제거하면 70만명이 먹을 곡식을 더 생산할 수 있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돼죠. 1958년 스촨성 일대를 참새 싹 잡아서 없애버려 이런 지시를 내립니다.
------------(동영상-참새 잡아라!) 농민들이 뜰채를 휘두르며 참새를 잡는다, 곽재식 작가가 스튜디오에 나타나다. 작가님 거기서 뭐하세요?
이광용: 작가님이 왜 여기서 나와?
곽재식: 제가 환경공학자 아닙니까? 참새를 대대적으로 잡는다 하길래 확인을 하러 나왔습니다.
이광용: 참새소탕작전은 어떤가요?
곽재식: 단 시일 내에 최대한 많은 참새를 잡기 위해서 독이든 과자를 뿌려 가지고 참새가 먹고 죽게 만든다든가 참새를 따라 다니면서 계속 빗자루 깃발 흔들고 북치고 장구치고 막 이러는 거에요. 약간 안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저걸 계속 끈질기게 하면 참새가 너무 힘들어가지고 떨어진다. 지금 뒤에 보시면 수레에 새까맣게 참새가 달려있지 않습니까? 저게 전부 참새입니다. 1958년 단 한 해 동안에만 2억 1000만 마리가 넘는 참새가 희생당했다. (쏟아지는 참새 동영상),
곽재식: 참새가 곡식만 먹는 게 아닙니다. 참새가 잡아먹어주는 해충의 양도 상당합니다.
이광용: 그렇지~
곽재식: 그런데 참새를 다 없애버리면 해충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
이광용: 해충이 창궐하겠네요.
곽재식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거죠.
이시원: 인간이 자연에 함부로 도전하면 안 되는 거죠,
농민들: (참새 잡는 거 중단),
허준: 참새 잡지 말라구~
이광용: 여러분 다시 주목해 주세요 아까 두 가지 거대 프로젝트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또 다른 프로젝트가 바로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큰 화로독 동영상),
최태성: 보통 증류주 만들 때 필요한 것?
이시원: 도자기 만드는 건가요? 가마?
이광용: 땡! 바로 이게 철을 만드는 용광로입니다.
이시원: 용광로는 엄청 크지 않나요?
이광용: 중국 대약진 시기에 이 용광로가 마을 곳곳에 세워졌어요 (농민들이 노동하는 동영상), 마오쩌둥이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철강생산량을 높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주석의 명령은 곧 법인 거예요. 넓은 땅덩어리에 마을 곳곳에 철을 만들 수 있는 이런 시설을 만들면 생산량이 확 올라가지 않겠어. 그렇게 만들어진 홈 메이드 용광로, 토법고로,
허준: 예를 들면, 원정제철, 시원제철,
이광용: 실제로 건물 3~4층 높이 정도가 된다고 그래요. 이 토법고로가 중국 전역에 100만 개나 넘었데요. 정부의 목표는 철강을 무조건 많이 생산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동네에 굴러다니는 길거리에 보이는 고철을 넣다가 할당량을 못 채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뭘 넣었겠어요?
허준: 집에 있는 거, 옛날에 집에 있는 냄비 엿장수에 팔아 엿 바꿔 먹는 것처럼~
이광용: 그래서 밥을 먹어야 되는데 숟가락 젖가락을 넣기 시작하구요. 그리고 양철지붕을 뜯어서 넣었고 심지어는 그래도 할당량을 못 채우니 멀쩡한 농기구를 넣고~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거죠.
곽재식: (흰 가운을 입고 스튜디오에 등장)
이시원: 큰 일 난 거 같은데요. 이 분은 또 누구세요?
곽재식: 저는 화학자입니다.
이광용: 옷을 갈아입으셨으면 얼굴에 점이라도 하나 찍고 나오시지~ 이 토법고로를 사용해서 철 생산 하는 거 어떻게 봐야 합니까?
곽재식: 굉장히 괜찮은 발상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제철제강 산업에서도 철을 스크랩이라고 해 가지고 버리는 철 남는 철을 모아다가 전기로에 녹여서 새 철강 제품을 만드는 거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많이 되는 방법이에요. 그런데 이 거를 할 때 철 속에 들어 있는 미량 성분들, 그 성분들의 함량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합니다. 대표적으로 많이 따지는 게 탄소가 있는데 철에 탄소가 너무 없으면 철이 물렁한 대신에 질겨지고 철에 대한 탄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철이 딱딱한 대신에 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철을 만들려면 철성분의 함량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아무거나 잡히는 데로 철을 넣는다면 품질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제일 큰 문제가 뭐냐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서 숟가락 젖가락을 집어넣는다고 한다면 이건 잘 쓰고 있는 농기구나 철제품을 넣어서 품질이 최악으로 떨어지는 걸 만들게 되니까 이게 과연 잘 될까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이광용: 마오쩌둥이 자본주의 선진국을 따라 잡겠다고 여러 가지 발상을 통해서 노력을 했습니다만 이 두 가지 거대 프로젝트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최원정: 마오쩌둥의 이 프로젝트가 너무나 스케일이 크고 주먹구구식이어서 저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어요. 이게 잘 될 리가 없죠?
최태성: 우리 얘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참새 소탕작전을 벌이고 끝난 그 다음 해에 농촌에는 풍년이 찾아온 게 아니라 메뚜기 떼가 찾아옵니다. 벼농사를 킵니다. 게다가 이때 농민들이 농사 대신 고철 구하랴 땔감 구하랴 농사지을 수 있는 정신을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은 식량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허준: 곡식을 먹는 양은 메뚜기 떼가 가장 많거든요. 메뚜기 떼를 잡아먹는 참새를 없애면~
이시원: 발상은 참신한데 현실적으로 적용성이 없는 것 같애요.
최태성: 나중에는 소련에서 참새 30만 마리를 수입해 와요. 이제 참새의 필요성을 안 거지요.
곽재식: 이거는 너무 심하다. 여기서 멈추자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최원정: 작가님 같은 지식인이 있었을텐데~
곽재식: 그런데 그런 분위기로 가기 보다는 오히려 이건 너무 심한 것 같다 하면 말하기를 마오 혁명 동지께서 말했는데 혁명정신이 부족한 거 아냐 이 사람 큰 일 날 사람이네. 이 사람이 공산당의 적이 될려고 그러나,
허준: 참새와 같은 사람이구만
곽재식: 이렇게 되니까 중간에서 그걸 잡아줄 사람, 이건 너무 심하다 라고 말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큰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김지훈: 그렇지만 생각할 건 있습니다. 뭐냐면 이 시기에 참새를 잡았던 게 마치 중국만 잡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대만 쪽에서도 60~70년대 까지 참새를 잡았습니다. 우리도 논에 허수아비 세워놓고 참새를 쫓기도 했구요.
최태성: 그리고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를 팔았어요.
김지훈: 예전에 수렵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총을 가지고 참새를 잡는 걸 허용했던 기간이 있었구요.
최태성: 또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이상과 현실 속에서 헤매는 모습들이 또 하나 나와요. 바로 토지개혁 얘기가 또 나와요. 토지 나누어 주었잖아요. 그러면 그 생산량은 어떻게 될까?
이시원: 사람마다 다르겠죠?
최태성: 이 집은 농작물 많이 나왔어요. 다 먹고 살만해 남았어 그거 어떻게 해?
최원정: 당연히 팔아야죠.
최태성: 그렇다면 시장이 돌아간다는 얘기잖아요. 그럼 사회주의예요, 아니예요? 이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마오쩌둥은 다같이 잘 살면 잘 살고 못살면 못살고 이랬던 그림인데 경제 격차가 서서히 벌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인민공사, 대규모 집단농장을 도입한 겁니다. (인민공사-농업집단화를 위해 만든 중국의 대규모 집단농장), 인민공사가 토지 가축 농기계 이런 모든 것들을 소유를 하고 생산은 집단적으로 같이 일해서 같이 나누는 모습으로 가는 건데 초반에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3개월만에 전국에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가 조직되었구요. 전 농가의 99%가 이 조직으로 결성이 됩니다.
허준: 국가별로 이런 집단농장들이 있었어요.
최원정: 이스라엘은 키부츠가 유명하죠.
허준: 근데 문제가 뭐냐면 내가 생각해서 많이 나오면 이걸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으면 힘은 들지만 그래도 해야지 하고 하는데 집단농장이면 내가 팔이 아픈데 오늘 일 안 해도 배급은 똑같이 받는데 난 일 안할래. 요만큼만 아파도 안하게 되잖아요. 그럼 점점 생산량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이시원: 받는 건 똑 같은데~
허준: 솔직히 털어놓고 얘기합시다. 똑 같이 받는다면 다들 안나가고 싶잖아요?
이시원: 인간의 본성이지
최원정: 열심히 안하지
김지훈: 당시에 마오의 고민이 있었는데요. 토지개혁 이후에 빈부격차가 다시 생기는 거예요.
최태성: 그렇죠.
김지훈: 그래서 이거를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는 도로 과거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개인의 소유를 없애는 인민공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적으로 얘기 한다면 마오의 생각은 그렇겠죠. 착취계급이 없어지고 자기 것이나 다른 것이나 아무에게도 아닌 그런 상태가 되게 되면 알아서 열심히 일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그런데 실제로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에요. 나에게 이득이 없고 내가 열심히 일해도 대가가 없다면 내가 왜 열심히 일을 해야 되지 이렇게 돼죠. 결국 생각한 것 만큼 생산력이 높아지지 않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것을 어떻게 해결 하였느냐 하면 경쟁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너 네는 얼마 생산할때 너네는 얼마 생산할래 그럼 경쟁적으로 우리는 얼마를 생산하겠습니다. 그러면 옆에서는 더 많이 생산하겠습니다. 더 많이 생산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죠.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농업생산을 높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서 허위보고를 하게 돼죠. 그리고 그 허위보고에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는 거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죠. 그러다 보니까 원래 100t 생산했는데 200t 생산한 걸로 허위보고한 것에 따라서 세금을 걷어가게 되니까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상황이 초래된 겁니다.
최태성: 여기 보니까 마오쩌둥의 이상은 높긴 한데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애요. 이게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엎친데 덥친 격으로 가뭄과 홍수가 계속 발생해요. 1959년부터 2년간 가뭄과 홍수로 자연재해가 계속 이어지다 보니까 이때 굶어 죽는 사람들이 또 얼마가 나오느냐면 약 5000만 명이 굶어죽어요.
허준: 우리 인구보다 훨씬 많은 인구가 굶어서 죽은 거예요?
최태성: 사람들이 그때 버텨낼려고 심지어는 진흙에다 잡초를 섞어서 먹기까지 할 정도였어요,
최원정: 오죽 배고프면 흙을 먹었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흙을 먹으면 어떻게 돼요?
곽재식: 사실 흙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나오는 의서에도 죽기 직전에 흙을 잘 골라서 먹으면 약간의 영양분은 섭취할 수 있다. 그런데 흙 파먹고 사냐? 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로 먹을 수 없는 거죠. 사람의 몸 속에 진흙 같은 게 들어가면 수분을 흡수해 가지고 몸의 모든 신진대사에 위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장폐색을 유발해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허준: 이 정도 되면 거의 모두 한 집 건너 굶어서 죽었다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거든요. 그럼 너희 집도 죽은 사람이 생겼어 이게 다 마오 때문이야 이런 말이 나와야 정상이 아니야,
이시원: 이건 인재라고도 볼 수 있잖아요.
김지훈: 그런데 당시에는 이 부분이 잘 보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상황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느냐면 우리 동네만 좀 힘든 것 같애~ 그러니까 기다리면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겠지 이러면서 지냈던 거죠.
최태성: 당시 국방부장이 고향에 내려가서 고향을 들러봤는데 상상을 초월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여기 저기 쏟아지는 모습을 보니까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써요. 대약진 기간 동안에 올라왔던 보고서는 다 조작이다. 인민들은 지금 죽어나가고 있다. 이 편지를 썼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6.25전쟁때 중공군을 한반도에 끌고왔던 사람 펑더화이, 그런데 마오가 열을 받은 거지. 공개 석상에서 편지를 공개해 버리고 너는 우익 기회주의분자다. 비난과 함께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시켜 버려요.
최원정: 간언하는 신하를 내치면 미래가 밝지 않아요.
김지훈: 펑더화이는 마오쩌둥과 같은 후베이성 출신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마오와 혁명전쟁과 운동을 같이 했던 친밀한 전우이자 부하이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 개인적으로 얘기했던 것인데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면서 펑더화이를 우경 기회주의자다 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게 되니까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아무도 마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죠. 친한 동지의 말마저 저렇게 돌리니 누가 얘기를 하겠어요.
이시원: 아무도 못하죠.
김지훈: 그러다 보니까 피해가 커졌고 결국 이 피해는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상태까지 됩니다. 공산당 7천인 대회 (1962.1)가 열리게 되는데 그 대회에서 결국 일종의 자아비판을 하게 돼죠.
최원정: 그런데 마오쩌둥이 누굽니까. 이대로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내레이션: 중국 역사의 상징 양쯔강 (중국 우한), 해마다 7월 이곳에서는 양쯔강을 건너는 수영대회가 열린다. 중국은 물론 해외에서 까지 수천 명이 참가하는 행사다. 56년 전 같은 날 (1966.7.16) 같은 장소에 한 노인이 등장하고 군중들은 열광한다. 그게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때 나이 73세, 하지만 그는 무려 한 시간 넘게 수영해 거친 양쯔강을 건넌다. 그건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마오쩌둥이 곧 돌아온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광용: 1966년 7월 16일, 마오쩌둥이 양쯔강 15킬로미터를 1시간 5분 만에 건넜다는 놀라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마오쩌둥의 나이가 73세,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났던 마오쩌둥은 화려한 복귀를 알렸습니다.
김지훈: 이건 마오가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나는 양쯔강을 건널 정도로 건강하고 힘이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널리 선전하고 알리기 위해서 이런 캠페인을 한 거죠.
이광용: 그런데 말입니다. 15킬로미터를 1시간 5분에 주파했다는 마오의 기록, 확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오픈워터 수영 국가대표 임다연 선수 모셨습니다.
임다연: 안녕하세요
곽재식: 지금 티브이를 딱 켜신 분들은 임다연 선수가 아나운서인 줄 아실 것 같애요.
이광용: 소개도 하기 전에 오픈워터 수영 이거 생소할 수 있거든요.
임다연: 보통은 실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바다나 강~ 호수 등과 같은 이런 자연의 물 속에서 최단 5킬로미터부터 최장 25킬로미터 까지 장거리를 헤엄쳐서 순위를 가르는 종목인데 일명 수영의 마라톤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종목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되었습니다.
이광용: 마오가 양쯔강 헤엄쳐 건넌 거랑 뭔가 좀 연관이 있는 데~
최원정: 일리가 있어요, 기념하기 위해서
임다연: 말씀 주시니까 저도 생각이 나는 게 사실 아시안 게임도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이 됐습니다.
이광용: 올해 9월에서 내년 9월로 연기된 항저우에서 최초로 오픈워터 수영,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이
임다연: 어떻게 보면 마오쩌둥은 저보다 한참 수영선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쯔강 수영대회는 1934년 부터 매년 7월 16일에 열립니다. 그런데 사실 양쯔강에서 수영하는 건 저와 같은 프로 선수들에게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양쯔강은 수면 아래에 굉장히 빠른 소용돌이와 저류가 있거든요. 소용돌이가 세다 보면 제가 나가고자 하는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최태성: 물살에 쓸려가는 거죠?
임다연: 네,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광용: 15킬로미터 양쯔강을 1시간 5분에 주파했다는 것은 웬만한 빠른 분들도 쉽지 않은 실력인데~ 그걸 어떻게 보세요?
임다연: 사실 기록을 저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쉽게 말씀 드리면 올해 7월에 2022 국제세계수영연맹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남자 10킬로미터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이탈리아 Gregorio Paltrinieri 선수 기록이 1시간 50분 56초였습니다. 마오쩌둥은 5킬로미터나 더 긴 거리를 45분이나 더 빨리 헤엄을 쳤다는 얘기잖아요. 실제로 이 정도라면 정말 수영선수를 했다면 각광받는 선수이지 않았을까?
곽재식: 15킬로미터에 1시간 5분을 계산해 보면 초당 3.8미터이거든요.
이광용: 여러분~ 쑨양 선수 기억하십니까? 쑨양이 초당 1.7미터예요.
최태성: 그러면 마오가 쑨양보다 더 잘 하신다는 거잖아요?
이광용: 여기서 실례가 안 된다면 임다연 선수의 기록은?
임다연: 저의 10킬로미터 최고 기록은 딱 2시간 00분입니다.
이광용: 그러면 마오주석이 갔다는 양쯔강 15킬로미터면 3시간 넘겠어요?
임다연: 네, 전 3시간이 넘겠죠.
김지훈: 마오가 수영을 했다는 기록이 믿을 수 없는 기록이었죠. 이 기록이 알려지게 되자 세계수영연맹에서 대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게 잘못된 보도였을 갓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가설은 수영을 하지 않고 물의 흐름에 밀려 떠내려가면~
이광용: 나는 수영을 하는 게 아니오 물의 흐름에 따라~
곽재식: 양쯔강은 거대한 워터 슬라이드네요.
이광용: 사실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70세가 넘었잖아요(당시 73세), 이런 분이 그냥 수영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좀 놀랍기는 하네요.
임다연: 그렇죠, 말씀하신 것처럼 실내수영장이 아니잖아요. 실내수영장처럼 통제된 환경이 아니라 물살이; 정말 순간 순간 바뀌는 양쯔강을 수영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73세의 나이에 1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쉬지 않고 수영을 했다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기록이 진짜든 아니든 마오쩌둥이 강한 체력을 가진 지도자였던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광용: 마오쩌둥이 양쯔강 건넌 이야기 지금까지 오프워터 수영 국가대표 임다연 선수였습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1966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인민대회당 앞에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대자보를내건다. 그건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겨냥한 것이었다. 反사회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비판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실권파와 투쟁하라는 마오쩌둥의 명령, 그 외침에 대학생은 물론 10대 청소년까지 몰려들었다. 마오쩌둥의 새로운 혁명 동지 홍위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시원: 홍위병이 드디어 등장을 하네요. 마오쩌둥은 왜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명령을 했을까요?
최태성: 마오쩌둥이 물러난 이후에 토지제도에 변화가 생겨요. 정부가 정한 최소 생산물있잖아요.요것 이외의 것은 농민들이 알아서 처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이러니까 농민들의 몫이 가격이 통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으로 또 나와 버리게 되는 거예요. 이때 류사이치가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얘기했던 마오쩌둥의 경제관과는 다른 거죠.
허준: 시장이 있고 그것을 판매하고 사는 사람이 생기면 당연히 부의 재분배가 일어나게 되고 이건 마오가 생각한 평등함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김지훈: 당시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 마오의 입장에서는 류사오치나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이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마오는 계속 60년대 전반에 사회주의를 잊으면 안된다든가 사회주의 교육운동이라든가 하는 것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뭐냐하면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오가 얘기한다고 했을 때는 농업생산량이 떨어지게 되어 중국 농촌이 가지고 있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모주석이 얘기를 할 때는 그걸 그냥 따르는 척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지는 않는 거에요. 그런데 마오는 실제 지방에 가봅니다. 지방에 가서 시찰을 해보면 중앙에서 내가 지시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서 불만을 가지게 됐고 이렇게 자기의 지시를 겉으로만 따르는 관료들, 중국 공산당 고위인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태성: 이렇게 되자 시작된 게 바로 문화대혁명입니다. (문화대혁명(1966~1976)-마오쩌둥 주도 하에 일어난 사회주의 문화운동), 이게 1966년부터 10년 동안 일어나게 되는데요. 중국의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대변혁을 가져오게 됩니다.
곽재식: 이때 당시 마오쩌둥의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건강 이상설이 계속 있었구요,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중풍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가 계속 있었는데 양쯔강을 건너면서 자신의 건재함, 나 아직 끄덕 없다.
이시원: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효과가 좋죠.
곽재식: 아직 건재하다. 10대 20대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죠. 나 끄덕 없이 여기 있으니까 나를 믿고 사령부를 공격하든 폭파하든 행동해라.
최원정: 러시아의 푸틴도 한 겨울에 윗통을 벗고 본인의 건강을 과시했잖아요. 마오쩌둥도 나 살아 있어 내가 너희들도 구해줄게 이런 메시지로 매료시킨 거예요. 그렇게 탄생시킨 게 바로 홍위병인데 그 홍위병들의 행보가 진짜 충격적입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이 톈안문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을 가득 채운 홍위병들은 마오 주석 만세를 외쳤다. 그들의 손엔 마오쩌둥의 어록집 소홍서가 들려 있었다. 홍위병은 봉건구습을 철폐한다는 미명 아래, 중국 전역에 걸쳐 잔인한 파괴를 시작한다. 수많은 고위 간부들과 지식인들도 이들에게 희생됐다. 홍위병들의 폭력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일어났다. 가장 큰 굴욕을 당한 류사오치, 그는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주사파의 선봉으로 공격받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의 아내 역시 간첩으로 비난 받았고 해외 순방 중에 입었던 옷이나 탁구공 모양의 목걸이를 한 채 모욕을 당한다.
장칭/마오쩌둥의 부인: 류사오치는 아주 극악무도한 반혁명 분자이며 매국노 스파이다. 이 매국노 놈을 천 번 만 번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
내레이션: 1969년 12월, 유폐지에서 숨을 거둔 리둔 류사오치, 그의 유골은 십여 년이 흘러서야 유가족에게 전달됐다.
이시원: 와~ 저게~ 정말 너무 참혹하네요. 굴욕이었어요.
허준: 모든 걸 떠나서 저런 광기를 누가 막을 수 있어! 그런데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오가 선동한 거잖아요.
최원정: 아까 전에 숙청 당했던 국방부 장관 펑더화이도 저런 식으로 조리틀림 당했다면서요
곽재식: 펑더화이가 정말 최악의 전쟁터에서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싸우면서 이 나라를 만들었는데 지금 내가 늙어 가지고 이 애들이 나를 붙잡아 가지고 주먹으로 막 때리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애들은 전쟁이 뭔지 알까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 같애요.
허준: 저거는 중국 모든 젊은이가 다 들고 일어난 느낌이에요.
최태성: 홍위병은 황색 옷에 홍색 완장을 차고 선두에 서는데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이시원: 소홍서?
최태성: 그렇죠, 이겁니다.
최원정: 그걸 가지고 오셨어요?
허준: 홍위병 출신이에요?
최태성: 소홍서를 딱 위로 들고 다니면서 아까 열광하는 모습에서 봤잖아요. 근데 이게 지금 아주 작은 포켓 사이즈예요. 가로 8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 총 33장에 427개 마오 주석의 어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11년 동안 무려 10억 부 이상 배포되었어요. 곽 작가님도 책 내셨잖아요. 어떻게 잘 되고 있나요?
곽재식: 제가 책을 내면 항상 어떻게 하면 잘 팔아볼까 정말 별별 궁리를 다 하는데 10억 부는 성경과 비교해야 될 부수거든요. 나도 책을 많이 팔려면 나라를 하나 세워야 하나~ 그런 생각이 다 드네요.
최태성: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열광했으면서 봤을까? 제가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人民~ 교수님 좀~
김지훈: 이건 모 주석 어록인데요. 모택동의 말을 다이제스트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국주의와 일체의 반동파는 모두 종이 호랑이다. 그리고 인민은, 오로지 세계역사를 창조하는 동력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중국에는 문맹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어록을 보고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모 주석의 말을 아주 금과옥조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거였죠.
최원정: 한마디 한디가 다 괜찮아요. 그럴 듯 해요. 나쁘지 않아요.
이시원: 상징성이 있는 것 같고 짧고 간결해 가지고 말 배우기도 좋고 문학적인 미학도 있는 것 같애요. 어릴 적부터 이걸 배웠으면 성경 외우듯이 마음 속에 품고 다녔을 듯해요.
김지훈: 그렇죠, 어떤 일이 있을 때 이 항목을 딱 펴보고 우리 모주석이 뭐라고 말씀하셨지 보게 되는 거죠.
이시원: 종교적인
허준: 이걸 보면서 저는 장말 섬칫한 게 두꺼운 성경이나 코란을 봐도 해석을 달리 하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가 생기고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이 생기거든요. 이 짧고 몇 단어 되지 않는 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이걸 들고 다니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홍위병들이야말로 과연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무 끔찍한 일이 많이 벌어질 수가 있다.
최원정: 약간 쇄내 당하는 느낌이 있어요.
김지훈: 그러다 보니까 그런 교육을 받고 그런 문화를 접한 많은 중국의 젊은 학생들은 마오쩌둥이 그냥 한 사람의 정치인이 아니고 그야 말로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됐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문화대혁명이 시작이 되면서 자신들이 모주석의 말씀을 따르고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혁명에 참여하게 되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웠던 것이죠. 문화대혁명에 참여했던 이 세대들은 지기가 너무 늦게 태어나 가지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혁명에 참여할 수 없었고 자기 부모들은 참여했죠.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까워했어요. 내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위대한 중국혁명에 참여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마오가 갑자기 야~ 우리 혁명이 필요하다. 너희들 혁명에 나서야지 하게 되니까 홍위병 완장을 차고 자기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군복을 자기가 입어요. 그리고 홍위병이라고 하고 나가서 모주석이 얘기하는데 따라서 혁명을 수행하게 돼죠.
이시원: 혁명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거네요. 마오는 그걸 자극한 거구,
최원정: 역사책에서나 봤던 승리의 역사장면에 나도 참여하고 기여했었다 라는 마음이 있었겠네요.
최태성: 문화대혁명 사기에도 고위 지도자 정치인들만 당한 게 아니예요. 그 당시 홍위병들이 막 들고 일어났던 게 뭐가 있었냐면 4구 파괴운동이라는 게 있어요. (4구(四舊) 파괴운동)-네가지 낡은 것을 파괴하는 운동), 4개의 구 낡은 네 가지를 파괴하라는 것인데 이게 뭐냐하면~ 4구는 뭐냐하면 낡은 사상 (4구-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 이거 다 없애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
최원정: 웬만한 지식인들은 다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탄압을 받았다면서요. 그 처참했던 상황을 담은 명작이 있습니다.
--------------영화 霸王別嬉 (패왕별희)중, 친형제와 다름 없었던, 경극 배우 ‘살로와 데이’, 여장 연기로 화제를 모은 장국영,
------------(동영상), 홍위병들 구호: 문화계의 요괴들을 타도하자! 경극 배우들에게도 몰아친 문화대혁명, 군중 앞으로 끌려가 서로를 비판하게 하고, 거역하면 처단하라! 그는 장제스군 앞에서도 노래를 했고 자본가, 지주 앞에서도 가리지 않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반동 부역자입니다. 데이를 처단하라! 결국 서로를 배신하게 되는 아픈 역사의 현장
이시원: 정말 끔찍하네요.
최원정: 집단 광기가 느껴지는 장면
곽재식: 저는 사실 문화대혁명에 이런 게 있다는 걸 저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되게 감명 받아 가지고 저 영화에 보면 패왕이 자신의 마지막을 한탄하며 부르는 詩가 있거든요. 그것을 외우고 그랬었어요. 力拔山교금氣蓋世 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금수不逝 때가 불리하여, 오추마가 나아가지 않는 구나 수不逝금可나何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오금憂금奈若何 우희야 우희야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최원정: 지금 화면에는 자막이 나갑니다.
곽재식: 이걸 외워서 언제 써먹을까 했는데~
최태성: 지금 드디어 30년 만에 빛을 발하는 암기력~
이시원: 저는 문화대혁명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 수필을 본 적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만들어서 읊어야 되고 공개해야 되는 게 너무 처절하게 느껴졌어요.
최태성: 8~9월에 베이징에서 2천여 명 가까이 살해가 되었구요, 상하이에서는 700여 명이 자살을 합니다. 이렇게 집단광기가 전개되면서 홍위병들도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적인지 동지인지 분간을 못하는 것입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에 홍위병 활동기간은 2년 반정도 밖에 되지 않아요.
최원정: 짧았네요.
최태성: 이들의 행보가 너무 심하니까 1968년 12월에 마오쩌둥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지식 청년들은 농촌으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아라. 상산하향운동이라고 하는 건데 겉으로는 사상을 단련하고 농촌발전을 이끌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홍위병들을 흩어지게 해 광풍을 잠재우려는 거였죠.
최원정: 꼬리 자르고 토사구팽 하는 수순이네요.
허준: 아니 대약진운동이 대실패해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구요. 퇴출 당해서 자기가 다시 권력 잡으려고 기존 권력자들을 내쫓기 위해서 홍위병 동원같은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고 사실은 성공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근데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왜 그렇게 존경 받는 지도자인 거예요?
최원정: 결국은 문화대혁명이 중국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긴 거잖아요.
최태성: 지금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인민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던 과정의 일부야 그걸 마오가 해낸 거야. 여전히 마오는 인민들에게 영웅이고 거의 신적인 단계고 지금까지 유지하지 않는가
곽재식: 심리적으로 중국의 근대사라고 하면 영국한테 털려가지고 홍콩 내주고 그 다음에 일본한테 계속 침략당해서 만주도 날아가고 상하이도 뺏기고 충칭으로 도망가고 이런 거만 이어지고 있다가 지금은 미국 닉슨 대통령과 마주 앉아 가지고 대등하게 이야기 하면서 겁도 줄 수 있는 그런 지도자 마오가 했고 마오가 이런 나라를 만들었다. 중국은 황제가 있던 시대 대국이 되었구나 이런 심리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거죠.
김지훈: 자신들의 현대 역사가 마오의 혁명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마오를 부정하게 되면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갔던 사람들의 역사와 인생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항상 홍위병 내지는 폭력만 기억하지만 실제로 중국은 1964년도에 원자폭탄을 개발했고 1966년에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1967년도에는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1970년에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중국의 근대 역사를 보게 되면 한 때는 세계에서 GDP 규모가 가장 큰 나라였거든요. 19세기 전반까지 그랬죠.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마오가 미국이나 강대국에게도 할 말을 하는 나라 그런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줬죠. 우리 입장에서 보면은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을 강한 나라 중국의 자존심을 강화시켜준 점에서 마오의 과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오에 대해서 존경을 하고 있습니다.
최원정: 사실 마오쩌둥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을 꿈 꾸었는데 그 이상이 워낙 달콤하고 원대했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못했다고 오늘 얘기 나누어 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중국 공산당의 두번째 지도자 덩샤오핑 편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80회 공산당 리더선출 기획, 누가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는가 ① 마오쩌둥에서 정리)
① 지난해 중국에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1921~2021, 위대한 여정, 모든 인민이 풍족한 샤오캉(小康) 사회를 이뤘다고 선언한 중국, 그 업적을 자축하는 행사였다. 이걸 이뤄낸 3명의 지도자, 중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개혁 개방을 통해 부강의 기틀을 놓은 덩샤오핑, 그리고 중화민족의 부흥을 꿈꾸는 시진핑, 시진핑 주석은 1주일 남은 공산당 제20차 당대회(10.16예정)에서 3연임에 도전한다. 마오쩌둥에 이어 장기집권에 도전하는 시진핑, 지난 100년 중국을 바꿔온 공산당, 그들이 꿈꾸는 중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당대회는 5년에 한번씩 열리는 데 중국 공산당의 굉장히 큰 정치행사다. 4년전에 국가 주석직 연임금지조항을 지워버렸다. 시진핑 주석이 연임이 된다고 하면 이제 15년이 되는 것이고 마오쩌둥 27년의 뒤를 이어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게 된다.
②오늘 중국을 만든 사람을 뽑아 보라, 당연히 진시황을 뽑는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뽑아보라 바로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여러가지 명언을 많이 남긴 인물이다. 특히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운다. 너 하나가 희생을 하면 역사를 바꾼다” 이런 생각을 계속 주입을 시켜가지고 혁명을 이끌고 나간 그런 인물이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을 이끌어가서 중국 혁명에 성공하고 외세를 물리치고, 국가의 통일, 중화인민 공화국을 건국했고, 사회주의 건설에 노력을 했다. 중국혁명에 대해서는 중국인들이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다만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오류와 잘못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마오는 공적이 70%, 과오가 30% 식의 평가를 한다. 공칠과삼(功七過三),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을 정말 존경한다. 존경의 표시로 마오쩌둥 배지를 단다. 당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농민들이었다. 그런 농민들에게 마오는 토지를 분배를 해주었고 잘 살 수 있도록 나름대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빈부격차가 심해지니까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은 분들은 덩샤오핑을 좋아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소외 받고 낙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마오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③마오쩌둥은 인민을 위해서 일하라(爲人民服務) 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니까 세상을 뒤엎어가지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평등한 체제를 만들어줬다는 감동, 이런 것이 진짜 있었다. 연설 중에서도 인민의 이익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은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고 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를 위해 죽으면 털끝보다 가벼운 죽음이다 라는 얘기를 했다. 1949년 10월 1일 새로운 중국이 탄생했다. 마오쩌둥은 신중국 출범을 선포하기 위해 혁명동지들과 함께 톈안문 단상에 올랐다. 중화인민 공화국 설립을 선포했다. 중국 공산당 만세! 마오 주석 만세!
④ 건국 후 마오쩌둥이 처음 착수한 일은 농촌 토지개혁, 농민들은 마오쩌둥의 주요 지지층이었다. 토지개혁법이 시행되고 지주들에게서 몰수된 토지는 농민들에게 고루 분배됐다. 신중국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마오쩌둥의 첫 걸음이었다. 토지라는 게 권력이고 신분이었다. 근데 토지개혁 자체가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대과업인데 강한 의지가 있지 않으면 힘든 과업이다. 마오쩌둥은 농촌출신으로 농민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1950년 토지개혁 이전에는 지주와 부농들이 전체 토지의 70% 이상을 차지하였다. 토지개혁 이후에는 8%로 축소됐다. 어마어마한 개혁이다. 생산이 올라갔다. 1952년을 기준해서 3년전 전국 양식생산량이 무려 43%가 증가했다. 초반에는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신중국의 시작은 맞는 것 같다. 근데 문제는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많은 자본들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은 농촌에서 획득할 수 밖에 없었다. 1958년부터 중국은 대약진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마오는 15년내 영국과 미국을 따라 잡겠다는 얘기를 하게 됐다.
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일환으로 두 개의 거대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첫번째는 해로운 네 가지를 제거하자는 제사해 운동. 파리, 모기, 쥐, 참새를 박멸하자는 것이다. 1955년 농부가 참새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라는 탄원서를 올렸는데 그걸 마오쩌둥이 읽고 지시한다. 참새를 소멸시켜라! 참새섬멸 총지휘부 까지 만든다. 참새가 1년에 2.4킬로그램 정도의 곡식을 먹어 치운다. 참새만 제거하면 70만명이 먹을 곡식을 더 생산할 수 있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자 1958년 스촨성 일대를 참새 싹 잡아서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단 시일 내에 최대한 많은 참새를 잡기 위해서 독이든 과자를 뿌려 가지고 참새가 먹고 죽게 만든다든가 참새를 따라 다니면서 계속 빗자루 깃발 흔들고 북치고 장구치고 막 이러는 거다. 1958년 단 한 해 동안에만 2억 1000만 마리가 넘는 참새를 잡았다. 참새가 곡식만 먹는 게 아니다. 참새가 잡아먹어주는 해충의 양도 상당하다. 참새를 다 없애버리니까 해충이 창궐하게 되었다. 참새 잡기중단, 다른 프로젝트가 바로 여기서 이루어졌다.,
⑥ 토법고로, 철을 만드는 용광로, 중국 대약진 시기에 이 용광로가 마을 곳곳에 세워졌다. 마오쩌둥이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철강생산량을 높이라고 명령했다. 주석의 명령은 곧 법이다.. 넓은 땅덩어리 마을 곳곳에 철을 만들 수 있는 홈 메이드 용광로가 세워졌다, 실제로 건물 3~4층 높이 정도 토법고로가 중국 전역에 100만 개가 넘었다. 정부의 목표는 철강을 무조건 많이 생산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동네에 굴러다니는 길거리에 보이는 고철을 넣어도 할당량을 못 채웠다. 할당량을 못 채우니 멀쩡한 농기구를 넣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토법고로를 사용해서 철 생산 할 때 철 속에 들어 있는 미량 성분들의 함량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대표적으로 많이 따지는 게 탄소가 있는데 철에 탄소가 너무 없으면 철이 물렁한 대신에 질겨지고 철에 대한 탄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철이 딱딱한 대신에 깨지기 쉽다.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철을 만들려면 철성분의 함량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게 중요하다.
⑦ 아무거나 잡히는 데로 철을 넣는다면 품질이 떨어진다.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서 숟가락 젖가락을 집어넣는다. 잘 쓰고 있는 농기구나 철제품을 넣어서 품질이 최악으로 떨어지는 걸 만들게 되니까 너무 비효율적이다. 마오쩌둥이 자본주의 선진국을 따라 잡겠다고 여러 가지 발상을 통해서 노력을 했다. 프로젝트의 결과는 참새 소탕작전을 벌이고 끝난 그 다음 해에 농촌에는 풍년이 찾아온 게 아니라 메뚜기 떼가 찾아왔다. 식량생산량이 급격히 떨어져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참새의 필요성을 알게 되어 나중에 소련에서 참새 30만 마리를 수입해 왔다. 이렇게 되니까 중간에서 그건 너무 심하다 라고 말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 큰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이상과 현실 속에서 헤매는 모습들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토지개혁 얘기다.
⑧ 토지 나누어 주었다. 그 생산량은 어떻게 될까. 먹고 남은 건 당연히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다면 시장이 돌아간다. 사회주의가 아니다. 마오쩌둥이 반대하는 거다. 그래서 나온 게 인민공사, 대규모 집단농장제도 도입이다. 인민공사가 토지 가축 농기계 모든 것을 소유 하고 생산은 집단적으로 같이 일해서 같이 나누는 체제로 초반에는 인기가 많았다. 3개월만에 전국에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가 조직되었다. 전 농가의 99%가 이 조직으로 결성이 되었다. 먹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 수 있으면 힘은 들지만 그래도 해야지 하고 하는데 집단농장이면 일 안 해도 배급은 똑같이 받는데 일을 열심히 안하게 된다. 점점 생산량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당시 마오의 고민이 있었는데 토지개혁 이후에 빈부격차가 다시 생기는 거였다. 이걸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는 도로 과거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의 소유를 없애는 인민공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적으로 얘기 한다면 마오의 생각은 그렇다. 착취계급이 없어지고 자기 것이나 다른 사람 것이나 아무에게도 아닌 그런 상태가 되게 되면 알아서 열심히 일을 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나에게 이득이 없고 내가 열심히 일해도 대가가 없다면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다. 결국 생각한 것만큼 생산력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 하였느냐 하면 경쟁을 시켰다. 너 네는 얼마 생산할 때 나는 얼마 생산할래 경쟁적으로 우리는 얼마를 생산하겠다. 그러면 옆에서는 더 많이 생산하겠다. 더 많이 생산하겠다.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농업생산을 높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결국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서 허위보고를 하게 되었다. 그 허위보고에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는 거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됐다. 실제 100t 생산했는데 200t 생산했다고 허위보고한 것에 세금을 걷어가니까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⑨ 마오쩌둥의 이상은 높은데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때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고 엎친데 덥친 격으로 1959년부터 2년간 가뭄과 홍수가 계속 발생했다. 이때 약 5000명이 굶어 죽었다. 한국 인구보다 훨씬 많은 인구가 굶어서 죽었다. 이 정도 되면 이게 다 마오 때문이야 이런 말이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보도가 되지 않았다. 국가적인 재난상황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동네만 좀 힘든 것 같다. 기다리면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겠지 하고 지냈다. 당시 펑더화이 국방부장이 고향에 내려가서 들러봤는데 상상을 초월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여기 저기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썼다. 대약진 기간 동안에 보고서는 다 허위 조작이다. 인민들은 지금 죽어나가고 있다. 이 편지를 썼던 사람이 바로 6.25 한국전쟁 때 중공군을 이끌고 한반도에 왔던 사람 펑더화이였다,
⑩ 마오는 열을 받았다. 공개 석상에서 편지를 공개해 버리고 너는 우익 기회주의분자다 라는 비난과 함께 그를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과 같은 후베이성 출신이다. 그는 오랫동안 마오와 혁명전쟁과 운동을 같이 했던 친밀한 전우이자 부하이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이 개인적으로 얘기했던 것인데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게 되니까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아무도 마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피해가 커졌고 결국 이 피해는 도저히 감출 수가 없게 되었다. 공산당 7천인 대회 (1962.1)가 열렸는데 그 대회에서 마오는 일종의 자아비판을 하게 됐다. 그는 국가 주석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마오쩌둥이 누구인가.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 중국 역사의 상징 양쯔강 (중국 우한), 해마다 7월 이곳에서는 양쯔강을 건너는 수영대회가 열린다. 중국은 물론 해외에서 까지 수천 명이 참가하는 행사다. 56년 전 같은 날 (1966.7.16) 같은 장소에 한 노인이 등장하고 군중들은 열광한다. 그게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때 나이 73세, 하지만 그는 무려 한 시간 넘게 수영해 거친 양쯔강을 건넌다. 그건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마오쩌둥이 곧 돌아온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⑪ 1966년 8월 5일, 마오쩌둥은 인민대회당 앞에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대자보를 내건다. 그건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겨냥한 것이었다. 反사회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비판하고 이들을 보호하는 실권파와 투쟁하라는 마오쩌둥의 명령, 그 외침에 대학생은 물론 10대 청소년까지 몰려들었다. 마오쩌둥의 새로운 혁명 동지 홍위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마오쩌둥은 왜 사령부를 폭파하라고 명령을 했을까. 마오쩌둥이 물러난 이후에 토지제도에 변화가 생겼다. 정부가 정한 최소 생산물 이외의 것은 농민들이 알아서 처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농민들의 몫이 가격 통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장으로 나와 버리게 되었다. 이때 류사이치가 이런 얘기를 한다.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은 마오쩌둥의 경제관과는 다른 거였다. 시장이 있고 그것을 판매하고 사는 사람이 생기면 당연히 부의 재분배가 일어나게 되고 이건 마오가 생각한 평등함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당시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 마오의 입장에서는 류사오치나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이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라고 하였다. 마오는 계속 60년대 전반에 사회주의를 잊으면 안된다든가 사회주의 교육운동이라든가 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⑫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마오가 얘기했을 때는 농업생산량이 떨어지게 되어 중국 농촌이 가지고 있는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모주석이 얘기를 할 때는 그냥 따르는 척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마오가 지방시찰을 해보면 중앙에서 마오가 지시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오는 거기에서 불만을 가지게 됐고 자기의 지시를 겉으로만 따르는 관료들, 중국 공산당 고위인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시작된 게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966~1976), 1966년부터 10년 동안 마오쩌둥 주도 하에 일어난 사회주의 문화운동인데. 중국의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대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이때 마오쩌둥의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건강 이상설이 계속 있었다, 그는 양쯔강을 건너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나 아직 건재하다. 10대 20대 젊은이들에게 나 끄덕 없으니까 나를 믿고 사령부를 공격하든 폭파하든 행동해라. 그렇게 탄생시킨 게 바로 홍위병인데 그 홍위병들의 행보가 진짜 충격적이다.
⑬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이 톈안문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을 가득 채운 홍위병들은 마오 주석 만세를 외쳤다. 그들의 손엔 마오쩌둥의 어록집 소홍서가 들려 있었다. 홍위병은 봉건구습을 철폐한다는 미명 아래, 중국 전역에 걸쳐 잔인한 파괴를 시작한다. 수많은 고위 간부들과 지식인들도 이들에게 희생됐다. 홍위병들의 폭력 앞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일어났다. 가장 큰 굴욕을 당한 류사오치, 그는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주사파의 선봉으로 공격받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의 아내 역시 간첩으로 비난 받았다. 류사오치는 아주 극악무도한 반혁명 분자이며 매국노 스파이다. 이 매국노 놈을 천 번 만 번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 1969년 12월, 유폐지에서 숨을 거둔 리둔 류사오치, 그의 유골은 십여 년이 흘러서야 유가족에게 전달됐다. 이런 건 마오가 선동한 거였다. 전에 숙청 당했던 국방부 장관 펑더화이도 조리틀림 당했다. 펑더화이는 최악의 .전쟁터에서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싸우면서 이 나라를 만들었는데 지금 내가 늙어 가지고 이 애들이 나를 붙잡아 가지고 주먹으로 막 때리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애들은 전쟁이 뭔지 알까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 같다. 홍위병은 황색 옷에 홍색 완장을 차고 선두에 서는데 항상 소홍서 라는 모택동 어록집을 가지고 다녔다 소홍서는 아주 작은 포켓 사이즈로 가로 8센티미터 세로 10센티미터 총 33장에 427개 마오 주석의 어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11년 동안 무려 10억 부 이상 배포되었다.
⑭ 소홍서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길래 홍위병들이 열광하면서 봤을까. 소홍서는 모택동의 말을 다이제스트한 건데 예를 들어서, 제국주의와 일체의 반동파는 모두 종이 호랑이다. 인민은, 오로지 세계역사를 창조하는 동력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어 있다. 당시에 중국에는 문맹자들이 많았다. 이 어록을 보고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모 주석의 말을 아주 금과옥조처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한마디 한디가 다 괜찮다. 그럴 듯 하고 나쁘지 않다. 상징성이 있고 짧고 간결해 말 배우기도 좋고 문학적인 미학도 있다. 어릴 적부터 이걸 배웠으면 성경 외우듯이 마음 속에 품고 다녔을 듯 하다. 그런데 이걸 보면서 섬칫한 게 두꺼운 성경이나 코란을 봐도 해석을 달리 하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가 생기고 종교전쟁으로 이어지는 데 이 짧고 몇 단어 되지 않는 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이걸 들고 다니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홍위병들이야말로 그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무 끔찍한 일이 많이 벌어질 수가 있다. 모두가 쇄내 당하였다.
⑮ 그런 교육을 받고 그런 문화를 접한 많은 중국의 젊은 학생들은 마오쩌둥이 그냥 한 사람의 정치인이 아니고 그야 말로 우상과 같다. 그런데 바로 문화대혁명이 시작이 되면서 자신들이 모주석의 말씀을 따르고 거기에 따라서 새로운 혁명에 참여하게 되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문화대혁명에 참여했던 이 세대들은 자기가 너무 늦게 태어나 가지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혁명에 참여할 수 없었고 자기 부모들은 참여했다.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까워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위대한 중국혁명에 참여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마오가 갑자기 야~ 우리 혁명이 필요하다. 너희들 혁명에 나서야지 하게 되니까 홍위병 완장을 차고 자기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군복을 자기가 입었다. 홍위병이라고 하고 나가서 모주석이 얘기하는데 따라서 혁명을 수행하였다. 마오는 그걸 자극했고 혁명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고위 지도자 정치인들만 당한 게 아니다. 그 당시 홍위병들이 막 들고 일어났던 게 4구 파괴운동이 있었다. 4개의 舊 낡은 네 가지를 파괴하라는 것인데 이 4구는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이다. 이거 다 없애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
ⓐ 웬만한 지식인들은 다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탄압을 받았다. 그 처참했던 상황을 담은 명작이 있다. 중국 영화 霸王別嬉(패왕별희) 中, 친형제와 다름 없었던, 경극 배우 ‘살로와 데이’, 여장 연기로 화제를 모은 장국영, 홍위병들 구호: 문화계의 요괴들을 타도하자! 경극 배우들에게도 몰아친 문화대혁명, 군중 앞으로 끌려가 서로를 비판하게 하고, 거역하면 처단하라! 그는 장제스군 앞에서도 노래를 했고 자본가, 지주 앞에서도 가리지 않고 노래했습니다. 그는 반동 부역자입니다. 데이를 처단하라! 결국 서로를 배신하게 되는 아픈 역사의 현장 정말 끔찍하였다. 이건 집단 광기의 노출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 수필을 보면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만들어서 읊어야 되고 공개해야 되는 게 너무 처절하였다. 홍위병 난동으로 8~9월에 베이징에서 2천여 명 가까이 살해 되었다, 상하이에서는 700여 명이 자살을 했다. 이렇게 집단광기가 전개되면서 홍위병들도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적인지 동지인지 분간을 못하는 지경이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에 홍위병 활동기간은 2년 반정도 된다고 한다.
ⓑ 이들의 행보가 너무 심하니까 마오쩌둥은 1968년 12월에 이런 얘기를 한다. 지식 청년들은 농촌으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아라. 상산하향운동이라고 하는 건데 겉으로는 사상을 단련하고 농촌발전을 이끌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홍위병들을 흩어지게 해 광풍을 잠재우려는 거였다. 대약진운동이 대실패해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로 마오는 퇴출 당해서 다시 권력 잡으려고 기존 권력자들을 내쫓기 위해서 홍위병 동원같은 끔찍한 방법을 사용했고 사실은 성공한 게 아무것도 없다. 근데 마오쩌둥이 중국에서 왜 그렇게 존경 받는 지도자인 걸까. 문화대혁명은 중국에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지금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인민들을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던 과정의 일부를 그걸 마오가 해낸 거다. 여전히 마오는 인민들에게 영웅이고 거의 신적인 단계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심리적으로 중국의 근대사라고 하면 영국한테 털려가지고 홍콩 내주고 일본한테 계속 침략당해서 대만을 내주고 만주도 날아가고 상하이도 뺏기고 충칭으로 도망가고 이런 거만 이어지고 있다가 지금은 미국 닉슨 대통령과 마주 앉아 가지고 대등하게 이야기 하면서 겁도 줄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지도자 마오가 했고 마오가 이런 나라를 만들었다. 중국은 황제가 있던 시대 대국이 되었구나 라는 심리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거다.
ⓒ 중국인들의 현대 역사가 마오의 혁명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마오를 부정하게 되면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갔던 사람들의 역사와 인생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항상 홍위병이나 폭력만 기억하지만 실제로 중국은 1964년도에 원자폭탄을 개발했고 1966년에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했다. 1967년도에는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1970년에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중국의 근대 역사를 보게 되면 19세기 전반까지 세계에서 GDP 규모가 가장 큰 나라였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마오가 미국이나 강대국에게도 할 말을 하는 나라 그런 나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줬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은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을 강한 나라 중국의 자존심을 강화시켜준 점에서 마오의 과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오에 대해서 존경을 하고 있다. 사실 마오쩌둥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을 꿈 꾸었는데 그 이상이 워낙 원대했고 현실이 따라주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