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학을 다니던 나에게 희방사역은 유토피아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리산도 설악산도 있었지만 내가 가진 현실에서 너무나 먼 이상향이었다.
경주에서 중앙선을 타면 도착하는 영주역. 그 언저리 어디엔가 있다고 하는 희방사역은 소백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희방사역에서 내려 소백산을 종주하고 중앙선을 타고 다시 경주로 내려오는 등산 코스는 산을 좋아하시던 이채욱 선배와 그의 무리들이 즐겨 이야기하시던 코스였다. 한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었던 현실 속에서 소백산을 꿈꾸었다. 등산화 한컬레 준비하지 못한 현실에서 나는 소백산을 꿈꾸었다.
누구와 : 산능선, 윤톨, 안가, 감포 그리고 대리운전은 indigosea.
어디를 : 소백산 희방사 ~ 연화봉 ~ 비로봉 ~ 국망봉 ~ 초암사
날씨 : 아래쪽은 맑음, 능선근처는 온통 구름과 바람의 세상. 기온은 4월경과 비슷할 정도로 올랐다.
산행만족도 : ★★★☆☆
국립공원 출입료가 없어진 이후에도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다. 사찰에서 문화재를 관리하는 비용이란다. 문화재를 보지 않고 지나간대도 막무가내로 징수를 한다. 대법원은 문화재관람료 징수를 불법이라고 판결을 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관람료를 받는다.
불법으로 징수하고 있는 관람료를 내지 않고 진입하면 어떻게 되나? 관람료부분은 징수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대신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수 있다고 한다. 참 거시기하다.
일인당 2,000원의 문화재 관람료를 지불했다. 희방사로 가는 포장도로와 희방폭포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희방폭포 쪽으로 진행. 꽁꽁언 겨울에는 잘 볼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계곡에는 눈녹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폭포는 거침없이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희방폭포는 높이 25m 내륙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높이의 폭포라고 한다.
희방폭포를 우회하여 만들어 놓은 철제계단을 통하여 희방사로 진행할 수 있다.
희방사 창건 전설 한토막.
태백산 심원암을 떠나 연화봉 아래 동굴에서 기거를 한지도 수년이 지났다. 잡힐 것 같았던 도는 잡히지 않았다. 올 겨울 들어 눈은 쉬지도 않고 내렸다. 눈오는 광경을 바라보던 두운은 며칠전 밤의 일이 생각났다.
분명이 호랑이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낮게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배가 고파 그런가싶어 자신을 잡아먹으라고 몸을 들이밀어도 다가오지 않던 놈이었다. 뭔가 괴로운 기색을 보이면서 입을 벌리고 있는지라 손을 집어 넣아보니 비녀가 나왔다. 틀림없이 여인의 비녀였다. "네이놈 아무리 미물이지만 사람을 잡아먹어, 내가 너와 같은 업을 짓고싶지않아 살려주는 것이니 다시는 사람을 해치지 말거라 이놈아." 호랑이는 조용히 물러갔다.
며칠이 지나자 다시 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런데 호랑이가 물고 온 것은 다름아닌 사람, 그것도 젊은 여자였다. 기절한 사람을 깨워 자초지정을 물어보니 서라벌에 사는 호장의 딸 아롱이란 처자였는데 혼인하던 날 호랑이에게 납치가 된 것이었다. 겨울이라 날이 풀리게되는 봄까지는 꼼짝도 없이 둘이 같이 지내야 할판이었다. 두운의 도에 대한 열정과 같이 지내면서 생긴 연모의 정에 아롱은 청혼을 하였으나 두운은 단호했다. 그리하여 둘은 부부의 정을 쌓는 대신 남매로 남기로 했다. 봄이되자 둘은 서라벌로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호장은 둘을 서로 맺어주려하였으나 아랑에게서 그간의 사연을 전해듣고는 두운이 머물렀던 곳에다 절을 세워주게되는데 바로 그곳이 희방사였던 것이다.
글 : 감포
희방사 이야기를 여기서 끝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곡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사와 현대사의 슬픈 기억의 데쟈뷰인 듯한 사건이 있었다.
1929년 11월14일자 중외일보에 난 기사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당시 불교사의 편집원이었던 도진호씨는 풍기면 희방사에서 월인천강곡을 발견하고 이를 등사하여 온다. 월인천강곡이 만들어진 배경은 세종이 죽은 한비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이었던 수양에게 명하여 석보편을 편찬케 하는데 이에 수양은 석보상절을 지어 올린다. 이를 받아본 세종은 감탄하여 노래를 만드니 그것이 월인천강곡이다. 이때 발견된 월인천강곡의 판본은 훈민정음 창제 112년 이후, 선조원년에 만든 것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 소중한 자료는 육이오전쟁을 거치면서 소실이 되는데 소실된 배경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인위적 손상이었음을 밝히는 보고서가 당시 신문에 보고가 되어있다. 당시 신문 원본을 싣는다.
연희대학교 민영규 교수는 약 1개월에 걸쳐 태백·소백의 험악한 산줄기를 타고 영주·영천·안동 등(외 13개 군) 주로 경상북도 일원에 산재해 있는 사찰·고적을 찾아 갖은 애로와 난관을 무릅쓰고 현지를 탐사하여 戰災를 겪은 후의 사찰문화재의 피해상황을 실지조사하고 돌아왔는데 이번 탐사결과는 예상하였던 것보다도 훨씬 비관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특히 당시의 경북도 당국자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무참히도 소실되고만 것은 심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고귀한 사찰문화재의 막대한 소실은 우리 민족문화의 상실일 뿐더러 문화국민이라고 자칭하는 배달민족의 일대 수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문화재가 소실하기까지의 경로를 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단기 4283년 1월 10일 영주군 풍기면 일대에 소개령이 내리자 그 부근에 있는 喜方寺 근처가 무인지경이 됨으로 인하여 그 사찰에 비장해둔 고귀한 문화재가 유실될까 염려한 영주군수는 이의 소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그 비용으로 금 10만 원을 경북도청에 공문으로 청구하였으나, 그 공문은 물위에 떠도는 浮草처럼 경북도청 내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다가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도 못한 채 다음해 1월 13일에 이르러 아차산에 있는 광흥사의 방화(6년 전 야소교 신자들의 소치)에 연달아 희방사 등의 회진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비장해 둔 月印釋譜 2집 1권과 그 판목 222장 등 15장 훈민정음 판목 400여 장 기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예술적 가치가 풍부한 불상 및 중요문화재가 거대한 사찰과 함께 한줌의 재로 화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로 봐서 그 때 소개비용 10만 원이라고 하면 당시의 시가에 의한 백미 7·8가마 값 밖에 되지 않는 돈인데 그 금액만 있었다면 능히 안전지대에 옮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한 경북 당국자들의 소치는 실로 가탄할 바이며, 특히 당시의 문교사회국장이었던 임병진씨는 마땅히 이에 대한 총책임을 지고 선처하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오불관의 태도를 취하여 마침내 막대한 국보의 소실을 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또한 희방사 일대의 길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석불은 무지각 한국군 사병들의 사격목표가 되어 한 놈의 수십 발의 탄환을 받아 길이 2寸 이상이나 되는 상처를 무수히 내고, 심지어는 台石 위에 안치해 둔 돌부처를 꺼내려다가 두부를 떼어 팽개쳐 버리고 또는 두 조각으로 잘라 내던지는 등 만행을 하여 우리의 지보인 문화재를 여지없이 파괴하고만 것에 대하여 근방 주민들의 원성은 자못 높다하여 군인들의 문화재에 대한 교양을 높이는 데 있어 금후 강력한 추진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실정에 비추어 “앞으로는 如斯한 방법으로든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영원히 보존하여야 할 것이 가장 선급한 일이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국보를 아낄줄 모르는 지극히 낮은 민도에 있는 우리나라 현상으로는 약간의 난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해서 방관할 일도 아닌 일이므로 이에 대한 어떠한 강력한 당국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동 교수는 강조하였다. 요즈음 국보의 해외반출문제가 대두되어 세인의 이목을 끌고 있는데 이것은 “정부당국자들의 국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묘책인 것은 짐작하나 이는 일시적인 그리고 가장 소극적인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외국에다 보관하여 둔다 하여도 시간적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일이므로 어쨌든 또다시 국내에 들어와야 할 것은 □지인데 국민의 국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로 있다면 또 한 번 파괴의 고배를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를지도 모르니, 此際에 전 국민의 국보에 대한 심심한 이해와 공공물을 아낄 줄 아는 公德心을 기르는 대대적인 일대 국민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지방행정을 강화하여 유사시에 민첩하고 □기적인 활동으로 문화재를 보호할 수 있는 방책을 세우는 한편 직접적으로 전화를 입지 않을만한 국보를 안전지대에다 두고 관계 학자들이나 기타 국민들이 다 같이 수시 견학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하면은 고귀한 문화재의 사장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반출하는 수고를 덜고 전 국민의 이에 대한 인식에 가일층의 자극을 줄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며 실질적인 방법이 되리”라고 말하였다. 여하튼 국민문화향상에 유일한 반려이며 민족예술의 무이한 표지인 고귀한 문화재의 보관에 대해서는 정부당국에서의 각별한 조치가 있기를 바라며 영주군에서 일어난 바와 같은 전철을 두 번 다시 밟지 않기를 국민은 요망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2. 11. 12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다. 부끄럽고도 부끄럽도다.
아픈 과거가 있는 희방사를 뒤로하고 연화봉으로 올랐다. 얼어붙은 계단과 땅이 군데 군데있어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고는 진행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희방깔딱재를 올라서자 소백의 차가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왔다. 키낮은 철쭉들은 바람을 피해 낮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주능선에 올라서자 더욱 바람은 기승을 부렸다. 뿌연 구름속 한곳에서 끊임없이 바람은 불어왔고 바람을 타고 구름은 밀려왔다.
주능선의 눈들도 녹고있었다. 약간은 질퍽거리는 길과 얼었던 눈이 녹으면서 무릎까지 쑥 빠지는 길이 반복이 되었다. 연휴의 마지막날 답게 산꾼들은 거의 없었고 단체로 산행을 온 두어팀과 무리를 이루지 않은 서너팀 정도의 산꾼을 만났다.
주목감시초소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준비해간 라면과 떡국을 끓였다. 처음에는 비어있던 초소가 안개와 추위를 피해 숨어든 사람들로 조금씩 붐빌때 쯤 다시 서둘러 길을 나섰다.
아직도 구름은 걷히질 않았다.
초암사 내려가는 길은 국망봉 도착직전 0.3km 지점이다. 0.3km정도야 국망봉을 보는 재미에 비하면 노고랄 것 도 없지. 모두들 두말 없이 국망봉을 다녀왔다.
초암사로 내려오는 하산길 중간 쯤. 생긴 모양이 꼭 복돼지를 닮은 바위를 만났다. 특히 돼지해가 드는 해에는 복을 기원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다고 안내판에도 적혀져 있더라.
복이야기 나오면 꼭 끼이고 싶어하시는 윤톨성님은 돼지 입에다 손을 집어넣고서는 사진을 찍어달랜다. 복을 많이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소백산 낙동강 발원지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내려온다. 가파르던 하산길은 어느듯 순해지고 계곡의 물소리도 더욱 웅장해졌다. 죽계구곡 중의 일곡을 지나자 초암사 주차장이 나타났다.
초암사는 근처의 비로사에 얽힌 설화를 공통분모로 사용하는 곳이다. 여지도서에 나오는 초암사 관련 부분을 찾아보았다. 草庵寺 在府此十五里小白山下竹溪上流僧傳義相創浮石時先入此山結草爲庵故名云靑雲臺在寺前溪邊舊稱白雲臺李滉改今名 초암사는 부에서 십오리 떨어진 소백산 아래 죽계게곡 상류에 있다. 승전에 이르기를 '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던 시기에 먼저 이 산으로 들어와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든것에서 이름이 만들어졌고, 절앞에 있는 계곡의 주위를 청운대라고 부르는데 과거에는 백운대라고 불렀으나 이황이 이를 지금과 같이 고쳤다." 라고 되어있다.
사진에 나오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을 제외하고는 새로이 만든 건물과 구조물 들이다. 초암사에서 초암사 주차장까지는 한참을 시멘트 도로를 따라내려와야한다.
순흥 쪽에 원래 묵밥이 유명하다고 그래서 찾아간 식당.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세에 비해서는 조금 오래된 건물이다. 굳이 다른 곳 찾아가야할 이유도 없구 일단 들어간다.
묵밥 네그릇과 태평초 대자 하나. 위의 사진이 태평초라고 불리우는 안동의 먹거리 중의 하나이다.
이름의 연유가 궁금하여 주인할머니에게 여쭈어보니 겨울 사랑방에서 새끼꼬고, 거적만들고 할 때 태평하게 앉아서 먹던 음식이라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귀뜸을 하신다.
그러나 태평초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서기 좋아하는 감포가 이 정도를 못 찾아 낼리 없다.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이란 말이 있다. 영조임금시대 시행했던 탕평책이란 정책을 아시리라. 남인, 북인, 서인, 동인, 노론, 소론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 인재를 등용했던 정책말이다. 탕평책과 같이 동서남북 대표음식(이걸 오방색이라하나)을 골고루 섞어 만든 음식이 바로 탕평초. 오행의 대표적인 색인 청적황백흑색을 가진 음식을 섞어 만든 음식이 탕평초란 말씀. 탕평초에 들어가는 비싼 청포묵과 쇠고기를 대신하여 메밀묵과 돼지고기를 넣어 만든 음식이 태평초라고 불리웠단 것이 거의 정설이다.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돼지고기를 뽁은 후 김치, 대파, 물을 넣고 끓인다. 돼지고기가 익으면 묵과 나머지 양념(마늘, 고추 등 입맛대로)을 넣고 한번 더 끓여 소금이나 국간장으로 간을 한다. 김은 고명으로 얹는다. 술상을 마련해놓고 태평초를 끓여야 제대로 된 맛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따끈한 태평초 한 그릇에 조로 만든 동동주 한잔에 취기가 올랐다.
서녘에 해가 떨어질 무렵 도착한 대구에서 다시 한잔 더. 저녁에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낮의 따사로움을 지워버리고나서야 자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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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대 그리고 나 원문보기 글쓴이: 감포
첫댓글 올겨울 처음으로 맞아보는 칼바람...
추워도 행복한 시원한 바람이었네요..
태평초 설명하시던 할머니....설마했는데...
오랫만의 고향산, 고향음식, 행복한 산행이었네요...
모든분들 올해도 안전산행을 빌어드립니다....^^*
이런 슬픈.. 아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나?
청화산엔 칼바람이 없었느데...
역시 소백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