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피린의 알리바이
한상신
아스피린 한 알을 물과 삼켰는데 물만 넘어갔을 때
내가 다시 유리컵에 물을 따라 들고 있을 때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
나의 하루는 자주 500mg짜리 흰 두통이다
염전의 외딴 소금창고를 닮은 밤에 대해
항상 증거가 불충분한 나의 생활에 대해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 불면 그 미제사건에 대해
어차피 기록을 남길 수 없으므로
아스피린이 비명도 없이 동그랗고 조그맣게 추락한 후
내가 소금기 마르듯이 잠이 든다면
신기루를 스쳐 아스피린 몸피들이
잠속인지 잠 바깥인지 알아차릴 때까지
내가 빈 책장처럼 딱딱하고 허전하게 잠이 든다면
내일 아침에 어쩌면 어제 아침에 내가 아닌 것처럼 깨어나
여기가 어디죠?
마리앙투아네트 증후군처럼 하얗게 증발하며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식도 어디쯤에 매달린 아스피린처럼
내가 벽에 달라붙어 잠을 청하는
내가 내 조서(調書)를 읽어 내려가듯 드문드문 잠을 청하는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 2020년 <시산맥> 봄호, 신인 시문학상 수상작
■ 한상신 시인
- 1969년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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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공모전 당선 詩 소개
아스피린의 알리바이/ 한상신 *2020년 <시산맥> 봄호, 신인 시문학상 수상작
시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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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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