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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전도여행을 떠남
사도행전 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행 15:36-41 /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다;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얼마 후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그 전에 전도한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새로 신도가 된 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보자고 제의하였다. 37) 바나바도 찬성하였다. 그리고 요한 마가도 데리고 가기를 원하였다. 38) 그러나 바울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혼자 먼저 돌아가 버린 일을 생각하고 찬성하지 않았다. 39) 두 사람은 끝까지 대립하다가 헤어져 바나바는 배를 타고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가고 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신도들이 주님의 은총을 빌어 주는 가운데 안디옥을 떠나 육로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두루 다니며 여러 교회에 힘을 북돋아 주었다.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를 가지고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지금까지 함께 생명을 걸고 동역했던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각 성으로 다시 가 방문하자(36) 유다와 실라가 떠난 며칠 뒤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지난 세월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주변의 모든 도시의 교회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신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바울이 생각해둔 계획을 말하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총회의 권위 있는 결정과 긍정적인 영향력, 그리고 안디옥 교회의 빠른 안정과 성장에 고무되어 새로운 선교 여행의 사명을 느끼게 된 듯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지역의 이방인 교회들이 안디옥 교회가 겪었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의 편지를 읽혀주고 가르치며 어떤 사람들의 거짓교훈에 미혹되지 않도록 당부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 바울의 제언을 전적으로 찬성한 듯합니다.
옳지 않다 하여(37-38) 바나바는 선교여행에 마가 요한을 동행시키자고 바울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바나바의 생질(골 4:10)로 알려져 있는 그는 바울의 1차 선교여행 때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이 있습니다(13:13). 그 돌아간 이유는 요한이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에게 선교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음으로 인식해 지금 진행하려는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별 도움이 못되리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바울 서신에서 보듯이 마가 요한은 멋지게 장성하여 바울의 편견을 깨고 그의 동역자로서 선교사역에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바울로 하여금 감사하게 만듭니다(골 4:10; 딤후 4:11; 몬 24).
피차 갈라서니(39-41)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이렇게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툴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갖거나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이 인간의 모순이며 실상입니다. 허물투성이의 질그릇에 거룩한 보배를 담은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서 안디옥을 떠나는 장면이 흥미있게 매우 대조적으로 묘사됩니다. 즉 바나바는 매우 화난 사람이 훌쩍 떠나버린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반면 바울의 떠남은 교회 성도들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떠남은 복음의 확장을 위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작하는 대장정의 출발인 것입니다.
적 용 : 우리는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들의 초라한 과거 때문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고정된 편견이나 저급한 평가의 시선으로 대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의 말씀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아 갈고 닦여진 참 보석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국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꼭 찾고 싶은 곳 중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입니다. 여행객들이 방문할 때 안내자는 교회의 역사적 내력과 안치되어 있는 지나간 세기의 유명한 인물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또 현재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지도 설명하였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에 방문객들을 향해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여인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회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설명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지금이 중요합니다.
< 설 교 >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1. 바울과 바나바의 충돌
본문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의 출발과 관련된 에피소드입니다. 제1차 전도여행의 파트너는 바나바였습니다. 출발 당시만 해도 바나바가 주도적 위치에 있었지만, 여행 중에 바울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의 출발은 바울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36) 바울이 제안한 목표는 제1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36) 형제들이 어떠한가? 말하자면 성도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라도록 도와주자는 뜻입니다. 목회의 양대 축은 전도와 양육입니다. 바울은 전도만 해 놓고 방치하지 않고 자라도록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바울과 바나바가 의기투합 했습니다. 좋다! 함께 가자! 화이팅!
그런데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37-39절).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자 하고, 바울은 요한 마가는 절대로 데려 갈 수 없다고 맞섰습니다.
바나바의 입장에서 보면 요한 마가는 생질(누이의 아들)로써 혈육지정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는 장래성 있는 유능한 일군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혹시 과거에 잘못이 있었다 해도, 용서 못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복음 사역은 어떤 불가피한 일이 아닌 이상 도중에 중단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특히 요한 마가가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그만 둔 것에 큰 실망을 했습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38)
“떠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ajfivsthmi”입니다. 영문 성경은 “departed, withdrew, deserted, abandoned”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요한 마가의 행동을 일행을 버려두고 떠난, 일종의 배신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또 배신할 수 있다. 그러니 절대로 두 번째 동반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바울의 사고방식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서로 다투다가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나버렸습니다. 뒤에 남은 바울은 실라를 파트너로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아주 담담합니다. 바울이 옳다든지, 혹은 바나바가 옳다든지 하는 어떤 의견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사실만 전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결론은 나중에 말씀드리고 우선 본문에 나타난 교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역설적 함정
1.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 되라고 해 놓고 자신들은 나뉘는 오류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대표로써 예루살렘 총회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교리적으로 하나 되도록 했습니다. 생활 윤리, 삶의 방식을 통일하도록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교회 일치의 사역을 이루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서로 싸우고 마침내는 갈라섰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입니다. 바울 서신에 보면 얼마나 일치를 부르짖습니까?
4:4-7 /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소망도 하나입니다. 5) 우리의 주님은 한 분이며, 믿음도 하나고, 침례도 하나입니다. 6) 또 우리 모든 사람 위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모든 지체들을 꿰뚫어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입니다. 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풍성한 은사의 창고에서 알맞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다투다가 나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에게 하나 되라고 외치면서 나는 나뉘지 않습니까? 요즘 ‘우스운 교회 광고’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 소풍은 장소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 취소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 되세>란 주제로 열리는 찬양 축제는 성가대의 선곡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여 연기되었습니다.’, ‘전교인 한마당 큰 잔치는 당회원들의 의견이 맞지 않아 취소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몸이라고 외치는 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갈라집니다. 가족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늘 형제우애 하라고 훈시합니다. ‘가화만사성’이란 글귀를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이혼합니다. 그러면 가정은 뭐가 되고 자식들은 뭐가 됩니까? 사회적으로 하나 되자는 구호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야가 밤낮 하나 되자고 합니다. 남북이 하나 되고 민족이 하나 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욕하고 등을 돌립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가 하나 되게 하려고 노력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서로 다투고 갈라섰습니다. 성과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몰라서도 아닙니다. 잘 알고 있고, 업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서로 나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오늘 내 자신 속에 분열의 소지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나와 교인들 사이에, 혹은 가족 관계에서, 아니면 사회생활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나뉘는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 속에 있는 근본적인 약점 혹은 결함 때문에 나타난 결과임을 먼저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항상 외치는 구호대로 내가 먼저 하나 되기 위해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2. 거창한 목표에는 합의하고 작은 일로 나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2차 선교 여행에 전혀 이견 없이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동행자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구원 문제가 걸린 교리적 문제도 아닙니다. 생활 윤리 문제도 아닙니다. 정의와 불의의 문제도 아닙니다. 무슨 큰 죄의 문제도 아닙니다. 단순히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동행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싸웠습니다. 끝까지 싸우고 갈라설 때까지 싸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렇게 싸웠다는 것이 우습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교단 분열의 원인은 교리적 문제도 있기는 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분열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부부가 다투는 것은 큰 이슈 때문이 아닙니다. 자식을 잘 기르자든지, 가정 경제를 이루자든지 큰 명분은 좋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일들 때문에 아옹다옹 합니다.
예를 들면 양말을 벗어 아무데나 던져 놓는다든지, 발을 씻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들이나 혹은 식사 문제, 물건 정돈 문제, 청소 문제와 같은 일들입니다. 직장에서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업무상의 문제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안색이나 표정, 혹은 말투가 문제가 됩니다. 큰 문제는 합의하고 작은 일로 나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평생 좌우명이 있습니다. 항상 웃자, 항상 밝은 표정을 짓자! 항상 웃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최고의 서비스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 항상 웃어주면 남편은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됩니다. 교인들이 항상 웃는 표정을 짓는다면 그 교회에 사랑이 많으니 적으니 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직원들 모두는 이러한 삶을 삽시다. “우리는 서비스 맨이다. 교우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자! 명찰을 달고 웃는 일부터 하자!”
우리도 집에서 한 번 해 보세요. 큰 아파트 장만하는 일, 자식 공부 시키는 일, 노후 준비 같은 거창한 구호에 매달리기 전에 작은 일부터 잘 하십시다. 우선 하루하루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도록 서로 웃어주는 일부터 해 보십시다. 항상 서로를 기분 좋게 하는 말버릇부터 갖추십시다. 거창한 문제들은 저절로 풀려 갈 것입니다. 나뉨은 큰 일이 아닌 작은 일에서 결정됩니다. 작은 일에 유의하여 서로 하나 되십시다.
2. 합력하여 교회의 유익을 이루시는 하나님
바울과 바나바의 나뉨을 통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항상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갈라지고 나눠져야만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관자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사람에 의해 나뉘어졌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결코 나뉘어지지 않았습니다.
1. 선교지가 넓혀졌습니다.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선교에 나섰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 길리기아 루가오니아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두 지역 다 제1차 전도여행 때에 들렸던 곳입니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으로 최초의 선교지입니다.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두 지역을 분담함으로써 바울의 선교지는 오히려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빌 1:15-18 / 물론 개중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쓰시는 데 대한 질투심으로 덩달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두려움 없는 전도자라는 명성을 듣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6-17)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쓰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애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해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속상해 하고 질투하게 만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18) 그러나 그들의 동기야 어떻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만은 사실이니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전도에 특별한 열심을 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바울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적으로 우월하고, 지도력이 우월하고, 그래서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더 이상 지도자의 지위와 권위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좋지 않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교회가 부흥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부흥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나 교단의 분열이라는 우스운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가 둘로 나뉜 후에 각자 상대편보다 더 잘 보이기 위해 더욱 열심을 냈다는 얘깁니다. 전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건축도 열심히 했습니다. 주님은 불순한 동기에서 한 일을 좋은 결과로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매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번의 경우와 달리 깊은 상처만 남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2. 당사자들에게 성숙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바나바 요한 마가에게 각성과 성숙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우선 사건의 당사자인 요한 마가입니다. 요한 마가는 분명히 자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선 것을 알고 크게 당황했을 겁니다. 그래서 몇 백 배 복음을 위해 더 열심히 헌신했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가는 로마에서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고,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창설하고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성경 4복음서 중에 하나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것은 가장 큰 업적입니다. 후일 바울 기록을 보면 마가는 바울에게 매우 유익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마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성숙되었습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집니다. 바울은 보다 관용적인 인물이 됩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마가와 화해하는 것은 물론, 그들이 얼마나 유익한 일군인지 여러 교회에 알렸습니다.
고전 9:6 / 왜 여러분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생활비를 주면서 바나바와 나만은 생계를 위해 계속 일을 하게 합니까?
마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베드로에게 큰복을 내리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내게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을 계속할 테니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해 달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갈 2:9 /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9)
골 4:10 /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친척 마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전에도 내가 당부한 대로 마가가 그곳으로 가거든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해주십시오.
골 4:10 /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는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친척 마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전에도 내가 당부한 대로 마가가 그곳으로 가거든 뜨거운 마음으로 환영해주십시오.
몬 1:24 / 나의 동역자인 마가와 아리스다고와 데마와 누가도 문안합니다.
딤후 4:11 / 누가 한사람만이 내 곁에 남아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 마가도 함께 데려오시오.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나바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사소한 일로 다투고 양보하지 않고 갈라서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바나바 역시 크게 깨달았을 겁니다.
3. 바울에게는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실라라는 인물입니다. 실라는 예루살렘 총회 후에 바울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로 파송된 인물입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사역하는 가운데 탁월한 됨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기대대로 실라는 바울의 제2차, 3차 전도여행은 물론 평생 동역자로서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전도에 유익했고,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 안에서 이방인 사역에도 유익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는 공동의 발신자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콤비가 나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은 또한 실라를 준비하셨습니다. 인간의 나뉨과 결별 속에 하나님은 또한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십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잘못도 멋있게 덮어주셨고, 더 크게 일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4.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 요한 마가는 주 안에서 화해하고 하나님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인간적 갈등도 언젠가는 주님이 화해하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화목 제물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원수된 것을 화해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원수된 것도 화해시키십니다.
엡 2:14-18 /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유대 사람과 여러분 이방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고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15)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 사이의 강한 적대감을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그 적대감은 유대인만을 특별히 사랑하고 이방인들을 배제시킨 율법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 전체를 쓸어 없애고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까지 서로 대립해 있던 두 무리를 한데 융화시켜 자기 몸의 지체로 삼으심으로써 하나의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드디어 평화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16) 우리는 이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서로간의 분노는 사라져 버리고 양쪽이 다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불화는 십자가에서 드디어 끝이 난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 이방 사람들에게나 가까이 있던 우리 유대 사람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복음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18) 이제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 이방 사람이든 모두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그 구원의 성업에 따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나뉘어져도 하나님은 합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교회의 원리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교회 밖에서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 행동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부흥케도 하시고, 하나님이 소멸케도 하십니다.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가 타락하면 하나님이 준엄한 심판을 내리십니다.
오늘날 과거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모든 교회는 다 사라졌습니다. 유럽의 교회들도 마찬가집니다. 오늘날 영국이나 스코틀란드의 교회들도 대폭 소멸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신앙을 잃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 되고 윤리적으로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부흥케 하시는 유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면 결론을 내립시다. 누가는 왜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을까요?
우리 중 누구든지 이런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바나바만큼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 중에 바울처럼 정의감에 넘치고 열정적이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보다 백 배, 천 배 훌륭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고 헤어졌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소지가 있습니다.
결국 인간 자신의 근본적 결함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분열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하나 되어 가는 것은 주님이 주관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분열 중의 교회를 통합시키십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교회를 정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회개케 하시고 각성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부흥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징벌을 내리시고 소멸케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위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히 순종할 뿐입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