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64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아라
공신들의 적장자를 회맹하도록 하라
구종서를 처단하고 이숙번을 함양으로 추방한 태종은 틀어쥔 고삐를 더욱 죄었다.
지신사 조말생을 편전으로 불렀다.
“공신들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적장자(嫡長子)들 또한 같다. 기강을 바로잡도록 하라.”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인혁명 19년차. 혁명 피로도가 누적되었다는 것이다.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는 비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화급해진 조말생은 우대언(右代言) 홍유방을 불러 대책을 숙의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혜택을 받는 공신들의 적장자를 한데 모아 맹세식을 갖자는 것으로 결론을 도출했다.
홍유방이 총대를 멨다. 홍유방은 개국공신 홍길민의 아들이다.
경복궁 북동쪽 계곡으로 공신들의 적장자를 불러 모았다. 오늘날의 삼청공원 영수곡(靈水谷)이다.
병풍을 쳐놓은 것 같은 바위가 신령스럽다. 제단에 피가 든 잔을 올린 조대림이 맹세문을 읽어내려 갔다.
“개국·정사·좌명 3공신 적장자 평양군(平壤君) 조대림등은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종묘·사직, 산천백신(山川
百神)의 영전에 고합니다.
신자(臣子)는 오직 충효요, 하늘로 할 것은 군부(君父)입니다. 신 등의 아비가 일찍이 미미한 공적이 있다 하여
신들의 작질(爵秩)을 높여 주시고 신들의 아비(臣父)와 다름없이 보아 주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신 등은 지극하신 뜻을 몸 받고 지성으로 왕실을 협보(夾輔)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를 신(神)에게 다짐함으로써 맹세를 굳게 하겠습니다.
맹약한 뒤는 각자가 시종일의(始終一義)로 사직과 국가를 이롭게 하여 안정과 번영을 보전하여 자손만대에
오늘을 잊지 말게 하겠습니다.”
맹세문을 받아든 태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틀어쥔 고삐를 놓을 태종이 아니었다.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정의 관원들에게 제공하는 점심을 폐하라 명했다.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자는 것이다.
태종을 평생 괴롭히는 것이 한재(旱災)다.
갑작스런 천도에 맞춰 창덕궁을 짓다 보니 여기저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육조청(六曹廳)을 지을 때 축대를 쌓지 않아 허물어질 위기에 있었고 인정전도 문제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기 단축은 부실시공을 불러오나 보다.
이조판서 박신이 인정전을 다시 짓도록 청했다.
“비록 작은 역사일지라도 삼복중에 백성을 부려 고단하게 할 수는 없다. 홑옷(單衣)을 입고 깊은 궁중에 앉아
있어도 더위를 이기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역인(役人)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가을이 되어 서늘해지기를 기다려라.”
인정전 공사를 가을로 미룬 태종은 대(對) 백성 유화책을 폈다.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대역죄를 범한 중죄인을 제외한 모든 죄인을 방면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형조와 의금부는 물론 전국의 옥문이 열렸다.
백성들은 대환영했다.
혁명 피로를 치유하기 위하여 거침없이 치고 나가던 태종 자신에게 피로가 몰려왔다.
드디어 병석에 눕고 말았다. 심신의 피로다.
목숨 걸고 거사에 참여했던 혁명동지 이숙번을 천릿길 함양에 내치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른팔을 잘라낸 아픔이었다. 평생을 같이하자던 하륜은 세상을 먼저 떠났고, 숙번은 곁에 없다. 외로웠다.
어긋나는 양녕
효령, 충녕 등 동생들과 여러 종친(宗親)·부마(駙馬)·의정부·육조(六曹)·삼군총제(三軍摠制)를 거느리고
부왕의 환후를 문안드리고 나온 양녕은 세자전으로 직행했다.
공부를 해야 하나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구종수 사건 이후에 세자전의 숙위가 강화되었다.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양녕은 숨 막힐 것 같았다.
사장(射場)으로 나와 활을 들었다. 과녁을 향하여 시위를 당겼다.
노려보는 과격이 어리의 얼굴로 다가온다. 보고 싶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
또다시 시위를 당겼으나 마찬가지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어리의 모습이 환하게 웃고 있다.
더더욱 보고 싶다.
천추절을 하례하기 위하여 공조참판 신개가 명나라로 떠나는 날, 태종은 세자를 내보냈다.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올릴 때에는 내가 친히 배송(拜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체기(體氣)가 편안치 못하여 친행(親行)하지 못하겠다.”
체기는 구실이었고 세자 수업이었다.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이렇게 의욕적으로 세자와 국정을 챙기고 있는데 세자의 비행이 또 터졌다.
이른바 양화진 나루터사건이다. 구종서 사건에 묻혀있던 일이 뒤늦게 불거진 것이다.
망연자실한 태종은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 정신도를 부평에 보내 전 판사(判事) 이문관과 양화도승(楊花
渡丞) 서사민을 의금부에 잡아오라 명했다.
이들을 순군옥에 투옥시키고 심문한 의금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전하께서 강원도에서 강무(講武)하였을 때, 차중보와 이홍이 세자를 유인하여 초저녁에 세자전을 나가
첫닭이 울 무렵 부평에 있는 이문관의 집에 이르러 자고, 이튿날 세자가 이문관 3부자(三父子)를 거느리고
철관포(鐵串浦)에 이르러 매사냥을 하였습니다.
그 뒤, 세자가 또 출유(出遊)하였는데 이문관은 그 아들 이미 등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갖추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경기감사 이관은 이문관의 족제(族弟)입니다.”
“그 당시는 세자가 반드시 이문관으로 하여금 이 일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추핵(推劾)하지 않음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아이들이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여 출입에 절도가 없었는데 이문관이 말하지 않았으니 죄가 있다.
지금 의금부에 있는 죄인은 외방으로 귀양 보내지 말고 단지 장(杖)만을 쳐서 석방토록 하라.”
이홍은 장(杖) 1백 대에 가산은 적몰(籍沒)하고, 이문관·변신귀는 장(杖) 1백 대를 속(贖)하게 하며, 이지·이미·
관음노·제석노·이선 등은 장(杖) 1백 대를 때리고 서사민과 세자전별감(世子殿別監) 조이는 석방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왕자 성녕대군, 세상을 떠나다
양화진 나루터 사건을 가벼운 형벌로 처결한 태종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이 위독하다는 것이다.
평소 몸이 허약했던 성녕은 완두창(剜豆瘡)으로 시름시름 앓더니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다.
완두창은 완두콩 모양의 종기로 전염성이 강하고 치사율이 높았다.
태종 이방원은 총제(摠制) 성억에게 명하여 향(香)을 받들고 흥덕사에 나아가서 정근(精勤)하고 기도하게
하였다. 승정원에 명하여 점을 잘 치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성녕의 길흉을 물어보게 했다.
검교판내시부사(檢校判內侍府事) 김용기가 성녕의 구병원장(求病願狀)을 싸서 받들고 절령(岊嶺)
나한전(羅漢殿)에 나아가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구병원장: 임금이나 귀인(貴人)이 병들었을 때 부처님의 공덕으로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글을 적은 서장(書狀)
좋은 약재와 치성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녕이 눈을 감았다. 대군 나이 13살이었다.
태종과 정비 민씨 사이에는 아들이 넷이다.
하지만 진정한 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성녕대군 이종(李褈) 뿐이었다.
성녕의 바로 위 형 충녕을 비롯한 양녕과 효령은 엄격한 의미에서 태종이 왕에 등극하기 이전에 태어난
아들들이었다.
어의를 두고 있는 왕실의 왕자가 완두창에 희생될 정도이면 일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을까 미루어
짐작이 간다.
바이러스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당시의 사람들은 완두창이 창궐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고
방사를 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며 예방법이었다.
그래서 두창신(痘瘡神)이 등장하기도 했다.
다음. 165에 계속
첫댓글 한재와 완두창의 이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