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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인가‐ 비서구(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맥락에서
* 이 글의 일부는 한국선교연구원(KRIM)에서 발행하는 「현대선교」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에서 발췌하였음을 밝힌다. “예수는 누구인가(Who is Jesus)?: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역사의 시각에서,” 「현대선교」 14 (2012): 67-90.
이번 글로 “예수는 누구인가” 연재를 마친다. 지금까지 유대, 헬레니즘, 동방, 바바리안, 서구의 맥락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비서구의 맥락에서 이를 다루고자 하는데, 공간적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다수세계(Majority World), 즉 남반구(Southern Hemisphere) 지역을 일컫고, 시기적으로는 현재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시대를 일컫는다.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를 지구촌시대라고 부른다. 기독교 역시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라고 불려진다. 세계성과 지역성을 동시에 지닌 기독교가 다양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시점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기독교의 면모를 가장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점이다.
비서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다수세계
기독교 신앙은 이제 오대양 육대주에 걸친 전 지구촌의 신앙이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서구가 겪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종식은 지구촌기독교가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다. 종전을 맞은 1945년 이후 서구 및 일본이 식민지로 지배하던 지역이 신생국가로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비서구 시대의 막이 올랐다. 그와 더불어 유럽의 크리스텐덤은 몰락과 해체의 길을 걷게 되고, 지배자들의 종교로 인식된 기독교와 선교사들 또한 철수하면서 자연스럽게 비서구 교회는 현지인의 지도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지도권의 이양은 비서구 교회의 폭발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기독교 역사가가 보기에 21세기로 접어들며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의 인구통계학적 변화(demographic shift)이다. 바렛(David Barrett)의 통계(World Christian Encyclopedia 참고)에 따르면 1900년 당시 기독교 인구의 83%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권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전 기독교 인구의 절반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과 카리브해 지역의 섬들에 거주하게 되었다. 지난 한 세기, 즉 190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100년의 기간 동안 기독교 인구는 아프리카의 경우 1,000만 명에서 3억 5,000만 명으로, 아시아는 2,000만 명에서 3억 명으로, 라틴아메리카는 6,000만 명에서 4억 8,0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제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기독교 인구만 합해도 유럽과 북미의 기독교 인구를 능가한다. 이러한 역전 현상이 가파르게 진행되는 추세이다. 서구의 크리스텐덤은 이미 그 실체가 없어졌고 새로운 지구촌기독교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역사가인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의 말대로 19세기를 선교의 전무후무한 확장이 이루어진 ‘위대한 선교의 세기’(The Great Century of Mission)라고 한다면, 월스(Andrew Walls)가 목격한 지난 20세기는 기독교 인구의 구성이 뒤바뀐 ‘더 위대한 변혁의 세기’(The Greater Century of Transform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기독교 인구의 무게중심 이동을 역사적 추이로 보여주고 있다.1
이 그림에 따르면 현재(2024) 지금 기독교 인구의 무게중심점은 서부 아프리카에 있다. 이는 기독교 인구가 이 지역에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다는 뜻이다. 인구비적으로 본다면 가장 기독교화된 대륙은 북미도, 유럽도 아닌 아프리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추이가 단순한 인구비적인 변화뿐 아니라 그에 뒤따를 기독교의 신학(더 이상 서구 주도가 아닌), 언어(영어 중심에서 다중어로), 선교(비서구 주도)에서 초래될 변화도 함의하고 있다.
비서구 기독교의 모습
이토록 부상하는 비서구 기독교의 모습은 서구 선교사들이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복음을 접한 현지인들은 예배와 신학적 사고에서 다양한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기독교와 복음의 속성을 잘 대변해준다. 즉 기독교의 진면모를 이야기하라면 한 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함과 동시에 그 신앙고백과 예배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간 선교의 원칙으로 강조한 자립, 자치, 자전을 넘어 자신학화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 신학적 질문과 어젠다가 서구와 다르기 때문이다.
비서구 지역에서 영향을 미친 지도자들의 모습 또한 서구 교회가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특성을 드러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선다 싱(Sadhu Sundar Singh), 중국의 워치만 니(Watchman Nee),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Uchimura Kanzo), 한국의 조용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영성과 신학적 사고방식이 서구적 전통이나 정통신학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선다 싱의 깊은 통찰력과 영적 체험은 매우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신학적 방법론으로 일상과 자연의 비유를 들어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너무나도 잘 표현했는데, 이는 서구의 교리적인 관점과 매우 다른 것이다.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의 경우도 서구의 교단주의를 배격하여 무교회주의 운동을 펼쳤지만, 오히려 성서를 철저히 강조하고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함을 추구했다. 중국 지하교회의 지도자로 잘 알려진 워치만 니는 서구 선교사들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삼자교회를 거부하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는 동안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죽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일군 조용기는 ‘3중축복’(요삼 1:2)과 ‘5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축복, 재림)을 한국적 상황에 접목하여 엄청난 교회성장을 일으켰다. 이들의 교리, 교회, 인간, 축복에 대한 이해를 서구 정통교리의 잣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날 아프리카 기독교도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독립교회는 아프리카적인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 자생적 교회를 일컫는다. 그들은 신앙고백과 예배의 표현, 교회의 이름 등에서 아프리카적 특성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러한 특성은 꿈, 환상, 계시, 춤, 치유, 기적 등을 강조하는 이들 교회의 모습에 담겨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성서 중에서 특별히 구약성서가 친아프리카적 특성을 보다 잘 드러내는 책이라 여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 기독교는 영적 리더십 면에서 예언자적 특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라이베리아 출신의 해리스(William Wade Harris)에게서 잘 드러난다. 그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로 인식하고 백색의 망토와 터번을 걸치고 모세처럼 지팡이를 든 채 라이베리아, 아이보리코스트, 가나 지역을 도는 순회전도자로 활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남미대륙을 정복한 것은 단순히 스페인의 식민 지배와 무력만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가톨릭교회는 이 지역의 지배 세력과 결탁하면서 지배적인 상징이 되었다. 이후 1960-70년대 군부독재와 우파 정치 세력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로 점철된 남미의 상황, 그리고 냉전 상황에서 사회주의에 맞서 우파 세력을 지원한 미국의 배후 지원과 경제의 종속체제 등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이후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1968년 콜롬비아 메데인(Medellín)에서 열린 남미가톨릭주교회의(CELAM)에서는 교회와 신학이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신념을 더욱 공고히 표명하기 시작했고, 남미의 특수한 정황에서 시작된 이 신학 사상과 운동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아시아와 아프리카로도 급격히 확산되어 1970년대의 대표적인 상황신학으로 부상했다.
한편 남미에서 해방신학보다 더 대중적으로 더 확산된 특징적인 운동이 있는데, 소위 ‘에반젤리코스’(Evangélicos, 비가톨릭 그룹인 개신교와 오순절파 등을 지칭)에서 불기 시작한 오순절(Pentecostal)운동이다. 해방신학과 같이 오순절운동 역시 가난한 자들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었고, 1990년대 이후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해방신학이 근본적으로 사회의 구조악에 대항하는 입장이라면, 오순절운동은 은사, 치유 등 개인적 체험에 호소하는 운동이다. 해방신학의 탄생에는 페루의 성직자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의 역할이 컸으며,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암살된 엘살바도르의 로메로(Óscar Romero) 대주교는 남미의 성인으로 추앙되기까지 한다. 개신교에서는 코스타스(Orlando Costas), 파딜라(René Padilla), 에스코바(Samuel Escobar) 등이 로잔운동과 같은 복음주의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남미에서의 오순절운동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참여에도 적극적인 성격을 띤다는 특색이 있다. 오랜 정복과 억압,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린 자들에게 사회적·개인적 차원의 ‘해방’을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남미권의 화답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치유자, 해방자, 계시자 외
그렇다면 오늘날, 특히 비서구적 맥락에서 예수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비서구의 종교, 문화적 배경은 비서구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예수에 대해서 비서구 나름의 이해를 특색 있게 보여준다. 기존 서구에서는 히브리인들의 구약 전통에 기초하여 예수를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왕(King), 제사장(Priest), 그리고 선지자(Prophet)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비서구에서는 이런 인식이 변화되어 좀 더 신약적인 그리스도의 모습, 즉 치유자(Healer)와 해방자(Liberator)로서의 예수가 부각되고 있다. 해방신학이나 오순절 및 은사주의적(Charismatic) 신앙 형태에서 보이는 치유 사역이 인식 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라고 하겠다.
아프리카 아칸(Akan)족의 경우 예수를 ‘위대한 조상’(The Great Ance-stor)으로 인식한다.2 아프리카에서 조상의 역할은 이미 육신으로는 이 땅을 떠났지만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존하는 존재이다. 아프리카 신학자 베디아코(Kwame Bediako)는 히브리서를 아프리카인을 위한 서신으로 이해한다. 히브리 레위 지파에 속한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들어 예수가 비록 아프리카인은 아니었지만 아프리카적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분으로 보는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적 상황으로 아프리카적 그리스도론을 정립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죽었으나 살아서(living-dead) 후손들과 함께 살아 있는 위대한 조상이다. 여기에서 토착화된 아프리카 신학의 면모가 잘 나타난다.
오늘날 이슬람권과 같이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 경험되는 예수는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 자신을 계시하는 계시자(Revealer)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의 체험이나 밧모섬에서 예수를 본 요한의 경험과 같다. 강성 이슬람의 철옹성처럼 여겨지는 중동국가에서는 꿈이나 환상 가운데 예수를 만나는 회심이 일어나고 있다. 이슬람 경전인 『쿠란』에서 예수는 ‘이사’(Isa)로 불리며 위대한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물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지 않고 대속의 십자가 죽음도 믿지 않지만, 예수가 스스로를 그들에게 현시하는 것은 전혀 생소하지 않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접촉점이 되고 있다.
인도나 중국과 같이 고대 종교의 전통이 오래된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를 현지인의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틀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다.
인도에서는 우파드야야(Brahmabandhav Upadhyay)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속성을 산스크리트어인 사칫아난다(Sat-Cit-Ananda)로 표현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존재(Sat)-의식(Cit)-행복(Ananda),으로 힌두 베단타(Vedanta)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최고신의 속성으로 스스로 존재하고(Self-Existent), 스스로 알고(Self-Knowing), 스스로 자족(Self-Satisfied)하는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바네르지(Krishna Mohan Banerjea)는 힌두 경전인 베다(Veda)에서 언급되는 프라자파티(Prajapati)가 만물의 창조주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희생하여 만물을 새롭게 한 신임을 참고하여 예수를 ‘참된 프라자파티’로 이해했다. 이는 19세기 당시의 한 사조인 기독교의 성취이론(Fulfillment Theory)에 기반한 것으로, 힌두교의 진정한 이상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리치(Matteo Ricci)와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중국 고전과 원시유교 사상에서 발견한 상제(上帝)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인격적인 최고 신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가톨릭의 다른 선교사들과 교황청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전통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면서 전통과 기독교 사이의 연속점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의 로고스(요 1:1)를, 도교에서 쓰고 있는 도(道)라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는 마치 헬레니즘에서 예수를 로고스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 유사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비서구 교회의 공헌과 유산
서구에서는 오늘날의 시대를 포스트모던(post-modern), 기독교후기(post-Christian) 시대로 부른다. 물론 이것은 서구를 기준으로 한 자기이해 방식이다. 반면에 서구가 걸어온 초대, 중세, 근대의 정형적 역사와 다른 과정을 밟은 비서구 세계가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비서구 기독교의 모습을 서구후기 기독교(post-Western Christianity)로 지칭한다. 비서구적 기독교는 서구의 기독교와는 다른 나름의 전통과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3The Next Christendom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이라는 책을 낸 젠킨스(Philip Jenkins)의 지적처럼 비서구적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훨씬 보수적이며 문자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성서를 바라본다.4 또한 정령숭배의 샤머니즘적 세계관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동하여, 성서에 언급된 초자연적 현상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함으로써 복음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비서구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지구촌기독교, 특히 서구 기독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계몽주의적 영향으로 심지어 복음주의권에서조차 소원하게 생각되는 초자연적 기적 사건이나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대해 긍정적이고 균형 잡힌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촌 시대의 신학은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비서구 교회의 선교적 공헌이다. 한때 은둔의 나라였던 한국은 선교수혜국이 아니라 선교파송국으로, 20년 전만해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아시아 지역에는 많은 화교 교회가 선교적 자각과 함께 경제력을 기반으로 세계선교에 기여하고 있다. 남미의 브라질에서는 오순절파가 복음주의 개신교의 70%를 차지하는데, 브라질은 이제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로 부상하였다. 이들은 국내 원주민뿐 아니라 카리브(Caribbean) 지역 같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권은 물론, 먼 해외로까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한편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이 유럽에서 역선교를 하는 모습, 심지어 중국 같은 곳에서 아프리카 유학생들이 선교활동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과 같이 디아스포라가 많이 움직이는 시대에 이민을 통해 비서구 기독교가 서구의 교회 지형도에 미치는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 예로 런던 교회의 변화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2012년 런던의 교회 숫자는 4,800개에 달했는데 이는 2005년도 영국교회 센서스(English Church Census) 통계인 4,100개보다 700개나 더 많이 증가한 수이다. 매주 두 교회씩 7년간 증가한 셈이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변화의 요인 중 하나는 오순절 계통의 흑인교회가 증가(700개 증가분의 3분의 2에 해당)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많은 이민교회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의 보스턴 같은 지역에서도 소위 ‘조용한 부흥’(Quiet Revival)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미, 카리브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이주자들이 조용한 부흥을 견인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내 흑인교회와 유럽계 이민교회의 건강한 교회성장도 한몫을 하고 있다.
비서구 기독교의 위기와 도전
오늘날 비서구 지역의 교회들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나, 그 교회들에는 번영신학과 기복신앙 등의 위험 요소도 내재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가 성장하는 곳은 주로 가난한 지역이다. 비서구권 교회에서(서구도 예외는 아니지만) 종종 나타나는 번영신학은 대부분 가난한 지역의 상황과 복음에 대한 왜곡된 이해인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른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은 한국 기독교 신앙의 기복적 요소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5 예수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초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단계에서 ‘복 주시는 분’(Blesser)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복’은 지극히 성서적 개념이다. 창조 이후 하나님이 모든 생물과 인간과 만물에게 복 주시는 행위(창 1:22, 28, 2:3)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구속사에 나타난 복에 대한 언급(창 12:1-3)에서, 그리고 제사장의 축복기도(민 6:22-27)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문제는 복을 나 자신만을 중심으로 하는 이기적 개념의 ‘기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언급하는 복은 이웃과 모든 족속을 범위로 하는 이타적 개념의 ‘복’이다. 앞으로 예수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화해자(Reconciler)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발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남북한의 분단 상황, 이념 대립, 계층 갈등을 두고 상황적으로 고민하는 화해의 신학, 화합의 신학, 화평의 신학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 시대, 지역, 문화권별로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복음은 결코 진공 속을 달려오지 않았으며, 시기마다 특정한 문화권이라는 매질을 타고 역사의 여정을 걸어왔다. 이러한 차원에서 결국 복음의 여정은 ‘문화간 여정’(cross-cultural journey)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기독교의 역사적 과정(historical process)은 역사가 제공해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라는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즉 역사적 과정은 그리스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매질로 이해할 수 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는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의 접점에서 우리를 만나주었고, 복음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지나온 역사는 성서 속에 계시된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예수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상황화’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월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변방의 타문화와 타언어 속에서 증거하려는 시도 속에 우리는 전에는 한번도 깨닫지 못한 그리스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6 다시 말해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 속에서 이해된 그리스도는 한결같이 구속사적 흐름에서 나름 공헌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더욱 확장되고(enlarged), 풍요로워지며(enriched), 증진되어(enhanced)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역사 과정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는 바울이 이해한 교회에 대한 비전으로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2:23)에 대한 선교적 해석과 이해이다. 월스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충만케 되는 객체로서 설명한다.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라기보다 선교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더욱 채워져 감으로써 그리스도가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월스는 ‘에베소적 시점’(Ephesian Moment)이라고 명명한다.7
지난 한 세기간 선교역사 서술에서 1세대와 2세대를 대표하는 라투렛과 월스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다시 고찰해본다. 라투렛에게서 나타나는 예수는 역사의 ‘영향력’(influence) 내지는 ‘원동력’(impulse)으로서 설명된다.8 그러나 월스에 와서 예수에 대한 이해는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이후 전개될 선교역사와 기독교 확장 과정의 양식(mode) 내지는 전형(prototype)이라는 것이다.9 이러한 면에서 예수는 고정된 축이 아니라 움직이는 바퀴와 같다. 물을 보내는 펌프라기보다 그 자체로 흐르는 물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예수는 역사의 원시점에만 존재하던 분이 아니라 시점마다, 그리고 현시점에도 존재하는 분이다.
* 박형진 교수님의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 이해”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편집부
주(註)
1 이 지도에서 이야기하는 기독교 인구의 무게중심점은 기원후 33년에서 2100년까지 25개의 시점으로 표기되어 있다. 무게중심점은 그 위치(경위도의 좌표점)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눌 때 위, 아래, 좌, 우 각각 기독교 인구의 수가 모두 같아지는 평형점을 의미한다. 이 개념적 지도에서 우리는 무게중심점의 이동 추이가 크게 네 시기로 나뉨을 볼 수 있다. 첫 시기(33-600)는 기독교가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소아시아 지역으로 확장된 시기이다. 둘째 시기(600-1500)는 점차 유럽을 향해 북서쪽으로 이동한 시기이며, 기독교가 서구화된 시기를 가리킨다. 셋째 시기(1500-1970)에는 무게중심점이 점차 하강하는데 이는 신대륙의 발견, 아프리카와 같은 남반구 지역에 기독교 인구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시기(1970-2100)에는 그 추이가 남쪽으로 하강하지만, 급격히 동진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중국, 인도를 포함하여 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빠르게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2 Kwame Bediako, Jesus and the Gospel in Africa History and Experience (Maryknoll: Orbis, 2004), 22-32.
3 Lamin Sanneh, Whose Religion Is Christianity? The Gospel beyond the West (Grand Rapids: Eerdmans, 2003), 1-3.
4 Philip Jenkins,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hilip Jenkins, The New Faces of Chris-tianity Believing the Bible in the Global South(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5 김흥수,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한국전쟁 이후의 기독교 신앙양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제37호 (1999): 3-15.
6 Andrew Walls,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Studies in the Transmission of Faith (Maryknoll: Orbis, 1996), xviii.
7 Andrew Walls, “The Ephesian Moment at a Crossroads in Christian History,” in The Cross-Cultural Process in Christian History: Studies in the Transmission and Appropriation of Faith (Maryknoll: Orbis, 2002), 72-81.
8 Kenneth Scott Latourette,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History,”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54, no. 2 (1949): 259-276.
9 Walls,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xvii, 26; Walls, The Cross-Cultural Process in Christian History, 29.
박형진|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선교 역사 및 지구촌기독교(World Christianity)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으며, 지금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선교학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저서로 『지구촌기독교 선교 역사 이해의 지평들: 아돌프 하르나크에서 앤드루 월스까지, 선교역사가 8인의 눈으로 본 기독교』가 있다.
첫댓글 비서구 지역에서 영향을 미친 지도자들의 모습 또한 서구 교회가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특성을 드러냈다.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선다 싱(Sadhu Sundar Singh), 중국의 워치만 니(Watchman Nee),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Uchimura Kanzo), 한국의 조용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의 영성과 신학적 사고방식이 서구적 전통이나 정통신학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선다 싱의 깊은 통찰력과 영적 체험은 매우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신학적 방법론으로 일상과 자연의 비유를 들어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너무나도 잘 표현했는데, 이는 서구의 교리적인 관점과 매우 다른 것이다.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의 경우도 서구의 교단주의를 배격하여 무교회주의 운동을 펼쳤지만, 오히려 성서를 철저히 강조하고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함을 추구했다. 중국 지하교회의 지도자로 잘 알려진 워치만 니는 서구 선교사들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삼자교회를 거부하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는 동안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죽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일군 조용기는 ‘3중축복’(요삼 1:2)과 ‘5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축복, 재림)을 한국적 상황에 접목하여 엄청난 교회성장을 일으켰다. 이들의 교리, 교회, 인간, 축복에 대한 이해를 서구 정통교리의 잣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오늘날 아프리카 기독교도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독립교회는 아프리카적인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 자생적 교회를 일컫는다. 그들은 신앙고백과 예배의 표현, 교회의 이름 등에서 아프리카적 특성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러한 특성은 꿈, 환상, 계시, 춤, 치유, 기적 등을 강조하는 이들 교회의 모습에 담겨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성서 중에서 특별히 구약성서가 친아프리카적 특성을 보다 잘 드러내는 책이라 여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 기독교는 영적 리더십 면에서 예언자적 특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라이베리아 출신의 해리스(William Wade Harris)에게서 잘 드러난다. 그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로 인식하고 백색의 망토와 터번을 걸치고 모세처럼 지팡이를 든 채 라이베리아, 아이보리코스트, 가나 지역을 도는 순회전도자로 활약했다.
한편 남미에서 해방신학보다 더 대중적으로 더 확산된 특징적인 운동이 있는데, 소위 ‘에반젤리코스’(Evangélicos, 비가톨릭 그룹인 개신교와 오순절파 등을 지칭)에서 불기 시작한 오순절(Pentecostal)운동이다. 해방신학과 같이 오순절운동 역시 가난한 자들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었고, 1990년대 이후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해방신학이 근본적으로 사회의 구조악에 대항하는 입장이라면, 오순절운동은 은사, 치유 등 개인적 체험에 호소하는 운동이다.
남미에서의 오순절운동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참여에도 적극적인 성격을 띤다는 특색이 있다. 오랜 정복과 억압,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린 자들에게 사회적·개인적 차원의 ‘해방’을 선포하는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남미권의 화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나 중국과 같이 고대 종교의 전통이 오래된 지역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를 현지인의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틀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다.
인도에서는 우파드야야(Brahmabandhav Upadhyay)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속성을 산스크리트어인 사칫아난다(Sat-Cit-Ananda)로 표현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존재(Sat)-의식(Cit)-행복(Ananda),으로 힌두 베단타(Vedanta)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최고신의 속성으로 스스로 존재하고(Self-Existent), 스스로 알고(Self-Knowing), 스스로 자족(Self-Satisfied)하는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전통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면서 전통과 기독교 사이의 연속점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의 로고스(요 1:1)를, 도교에서 쓰고 있는 도(道)라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이는 마치 헬레니즘에서 예수를 로고스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 유사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비서구적 기독교는 서구의 기독교와는 다른 나름의 전통과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3The Next Christendom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이라는 책을 낸 젠킨스(Philip Jenkins)의 지적처럼 비서구적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훨씬 보수적이며 문자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성서를 바라본다.4 또한 정령숭배의 샤머니즘적 세계관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동하여, 성서에 언급된 초자연적 현상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함으로써 복음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비서구의 보수적인 기독교는 지구촌기독교, 특히 서구 기독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계몽주의적 영향으로 심지어 복음주의권에서조차 소원하게 생각되는 초자연적 기적 사건이나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대해 긍정적이고 균형 잡힌 도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구촌 시대의 신학은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 속에서 이해된 그리스도는 한결같이 구속사적 흐름에서 나름 공헌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더욱 확장되고(enlarged), 풍요로워지며(enriched), 증진되어(enhanced)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역사 과정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는 바울이 이해한 교회에 대한 비전으로서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2:23)에 대한 선교적 해석과 이해이다. 월스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물을 충만케 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충만케 되는 객체로서 설명한다.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라기보다 선교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더욱 채워져 감으로써 그리스도가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월스는 ‘에베소적 시점’(Ephesian Moment)이라고 명명한다.7
복음은 결코 진공 속을 달려오지 않았으며, 시기마다 특정한 문화권이라는 매질을 타고 역사의 여정을 걸어왔다. 이러한 차원에서 결국 복음의 여정은 ‘문화간 여정’(cross-cultural journey)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기독교의 역사적 과정(historical process)은 역사가 제공해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라는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즉 역사적 과정은 그리스도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매질로 이해할 수 있다.
감사하게도 그리스도는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의 접점에서 우리를 만나주었고, 복음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지나온 역사는 성서 속에 계시된 복음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예수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상황화’되어 왔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