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90 전차
호박에 줄 그어서 수박 되길 바랐던 러시아의 주력전차
T-90 전차는 T-72에서 크게 진화하지 못했다. <출처: Public Domain>
개발의 역사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의 거대한 전차군단은 서방 세계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5만 대가 넘는 기갑집단과 31개 사단을 동유럽에 전진 배치했고 언제든지 나토의 조그마한 군대는 쓸어버릴 기세로 위협했다.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소련은 군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착실하게 핵 전력과 재래식 전력을 증강한 것이다.
소련의 주력전차였던 (좌) T-64 전차와 (우) 수적으로 주력이었던 T-72 전차. 걸프전과 중동전에서 서방 국가들의 전차들과 대규모 기갑전이 펼쳐지기 전까지 서방 세계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여러 국내 문제로 인해 모병제로 전환하면서 군 전력을 감축하던 닉슨 행정부는 국방장관이었던 브라운이 ‘상쇄(offset)’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과 전략의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현 방위고등연구계획국 DARPA의 전신인 고등연구계획국 ARPA를 중심으로 장기연구계발기획프로그램을 추진, 도약적 군사 기술의 발전을 추구했다. 반면, 소련은 미국의 제2차 상쇄전략의 진행에 대해서 나름대로 재래식 전력과 핵 전력을 동시에 증가시키는 대칭적 대응을 실시했다. 이 당시 소련이 개발했던 주요 무기체계 중 기갑집단의 비약은 걸프전을 하기 전까진 서방 세계의 공포와 환상의 대상 그 자체였다. 1964년 Object 432를 기반으로 T-64 전차를 개발한 소련은 T-64의 잦은 고장을 극복하고자 우랄바본자보드에서 T-64를 하청 생산하며 습득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Object 172를 구상, 야전 신뢰성을 대폭 향상시킨 T-72 전차를 1973년부터 대량 양산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걸프전 당시 미군의 M1 전차와 아파치 공격헬기는 일방적으로 이라크의 소련제 군사 장비를 격파하면서 전력의 질적 격차가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출처 : public domain>
당시 소련의 신형 전차 개발은 T-54, T-55, T-62 전차를 개발한 우랄 열차공장(Uralvagonzavod) 산하 우랄(Ural) 설계국(UKBTM), T-64 전차를 개발한 현재는 우크라이나 소속인 모로조프(Morozov) 설계국(현 KMDB), 스탈린 전차로 알려진 IS 시리즈 전차를 개발한 키로프(Kirov) 공장 설계국(LKZ) 등 여러 전차 공장과 설계국(Design Bureau)들의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각 설계국이 개발하려던 기갑 차량들은 소련 국방부 기갑차량 관리부서(GABTU)에서 지정한 ‘설계안’으로 해석되는 ‘오비엑트(объект, 영어 Object)’ 코드가 부여된 후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완성된 후에는 군의 시험을 거쳐 제식으로 채용되면 T-번호가 부여되었다. 이런 복잡하고 다양한 설계국들간의 치열한 알력 경쟁은 결국 공산주의 특유의 ‘일감 나눠 먹기’로 전향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비슷한 개념의 전차인 T-64와 T-72가 동시에 생산되면서 두 전차가 각각 지니고 있었던 T-64의 잦은 고장으로 인한 야전 신뢰성 부족과 T-72 전차의 유폭을 불러올 수 있는 부족한 방어력 및 케로젤식 자동장전장치 디자인을 수정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소련 공산당은 각 공장들의 알력 다툼을 해결하고 T-64와 T-72를 한꺼번에 교체할 우수한 전차를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비엑트-219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오비엑트-219는 키로프 설계국이 담당하기로 했고 T-64 전차를 개발하면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신형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이 당시, 세계는 1950년대 개발된 프랑스의 노드 SS-10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개발되기 시작했던 대전차 미사일이 각국에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당시 대전차 미사일의 속도는 느렸고, 당연하게도 이를 회피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노력이 발전했으며 소련 역시 T-64 전차에 가스터빈 엔진을 장착하는 연구를 통해 오비엑트-219CN1과 새로운 가스터빈 엔진용 구동 장치를 장착한 오비엑트-219CN2를 시험하는 단계를 거쳐 양산형 모델인 오비엑트-219SP2를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제식 명칭으로 T-80을 부여받았다. 소련의 이런 노력들은 모두 전차에 급가속 성능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좌) T-80 전차의 초기 양산 유형, (중) T-80 전차의 가스터빈 엔진용 공기 흡입구, (우) 코르지나 방식의 자동장전장치. T-64를 대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제작한 전차가 T-80이었다. <출처 : 네이버 무기백과>
T-64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전차였던 만큼 각종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제작되었다. 장갑재를 더욱 개량했으며 코르지나 자동장전장치를 채용했다.
(좌) T-72 전차의 케로젤 방식의 분리형 포탄 적재 모습과 T-80 전차의 코르지나 자동장전장치의 적재 모습 <출처 : community.battlefront.com>
당시 소련은 전차 엔진 기술 부족으로 대전차 미사일 회피가 가능한 기동성이 우수한 전차를 제작하기 위해 작은 차체와 포탑을 채택했고, 당연하게도 여유 공간의 부족으로 포탄과 장약은 포탑 아랫부분에 위치하게 되었고, 공간 효율성을 위해 포탄과 장약이 분리된 채로 유지되게 되었다. 또한, 방어력 개선 측면에서 장갑재를 개량, 이전 T-64보단 소폭 성능이 향상된 복합장갑을 채택했지만, 기동성을 위해 전차 중량을 41t으로 동급 서방제 전차에 비해 가볍게 설계하여 장갑 방어력은 서방제 전차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T-80 전차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먼지에 취약한 가스터빈 엔진의 잦은 고장 등의 유지 관리 비용, 각종 첨단 기술이 집약된 신형 전차의 비싼 제작 단가는 대량으로 양산되었던 T-64 전차와 T-72 전차를 모두 대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후 소련은 수도 모스크바 방위를 위한 제1근위전차군에 집중적으로 T-80을 배치했고, 상대적으로 서방의 위협이 덜한 곳에 T-72를 배치했다. 따라서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국 및 제3 세계 등 외국에 주로 판매되는 전차는 자연스럽게 T-72를 중심으로 판매되게 되었고 중동 지역의 여러 국가들과 함께 이라크도 T-72를 주로 수입했던 국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막상 걸프전의 장막을 열어보니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전차포의 통상적 교전 거리인 2km가 아니라 4km 밖에서 맞아도 포탑이 폭발하면서 전차가 전소되는 현상이 수도 없이 발생한 것이다. 앞서 지적했던 기동성을 위해 희생한 약한 방어력과 포탑 하단부에 위치한 자동장전장치, 그리고 장약과 포탄을 분리시킨 구조의 T계열 전차의 문제는 73이스팅 전투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 육군 제2기갑기병연대의 진격을 이라크군 최정예 기갑사단이었던 타와칼라 사단이 매복, 기습 공격을 실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라크군의 T계열 전차는 심지어 브래들리 전투 장갑차에게마저 격파당했으나, 미군의 M1 전차는 격파되지 않은 것이다. 최정예 사단이었던 만큼 타와칼라 사단의 전차들은 주력이 T-72였다. 당시 교전에 참여했던 미군 장병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이라크군 전차들이 전차포에 명중 당하면 어김없이 2차 폭발이 일어나 포탑이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M1A1 전차의 120mm 전차포 날개안정 분리 철갑탄에 피격된 T-72 전차. 대전차호 안에 엄폐했지만, 철갑탄은 전면장갑에서 후면부까지 관통하고 빠져나갔으며, 포탑 아래 위치한 케로젤 자동장전장치 및 포탄과 탄약이 유폭되면서 포탑이 튕겨져나갔다. <출처 : public domain>
걸프전에서의 경악스러운 실전 결과는 소련 육군에게 일대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본격적인 악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소련이 망해버린 것이다. 디폴트 상태의 국가 경제를 그대로 물려받은 신생국 러시아는 수적 주력이었던 방대한 T-72 기갑전력을 대체할 새로운 전차를 생산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나토와 군사적으로 대치 중인 상황에서 서방제 전차들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T-72 전차를 그대로 수적 주력으로 사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대책이 공격력만이라도 T-80 수준으로 향상하기 위해 T-80 전차를 개발하면서 습득한 사격통제장치와 반응장갑을 추가한 수준의 전차를 제작하게 됐다. 21세기 러시아군의 주력전차 T-90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T-90 전차는 크게 화력, 방어력, 기동성으로 구분하여 분석할 수 있다.
먼저 화력으로, T-90 전차는 주포, 대공 기관총, 동축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주포는 2A46M 125mm 활강포 1문을 장비하고 있으며 이 포는 T-80 전차의 주포와 동일한 주포로 내부 포탑을 분해하지 않고 교체할 수 있으며 9119M Refleks 대전차 미사일을 포함한 다양한 포탄을 발사할 수 있다.
2A46M 125mm 주포 설명도 <출처 : Army-news.ru>
포탑은 2E42-S Zhasmin 2면 전기 기계 안정화 시스템에 의해 전동으로 구동되며 신속한 포탑 회전을 보장하여 더 강력한 수평전투를 가능하게 한다.
포탑의 하단부에는 케로젤식 자동장전장치와 탄약이 위치해 있으며 총 22발의 주포탄약이 장약과 분리되어 장전되어 있다.
차체는 총 3명의 승무원이 탑승한다. 차체 중앙 하단에 조종수가 위치하면서 아래 사진과 같이 전시에는 조종수 관측경을 통하여 밀폐조종을 실시한다. 조종수가 위치한 차체 정면은 날개안정분리 철갑탄(KE, Kinetic Energy Sheel) 기준 800mm의 방호력을 지니고 있으며 전조등이 위치한 일부 공간들은 1,050mm의 방호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전에서 우크라이나군 경보병들의 N-LAW 대전차 로켓에도 격파당하고 있어 실제 차체 장갑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좌) T-90 전차의 조종수 관측경으로 본 창밖 풍경과 (우) 조종수 운전석의 모습 <출처 : thaimilitaryandasianregion.wordpress.com>
포탑의 방어력은 전차장과 포수가 탑승하는 포신 기준 좌우측은 날개안정 분리 철갑탄 기준 860mm의 방호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포신 중앙부 일대는 450mm의 방호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정면장갑이라 할지라도 포신 중앙부 일대를 명중 당하면 그대로 관통될 우려가 있다. 이점은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 대전차 화기의 특성인 고정밀성과 Pop-up 기능을 지닌 대전차미사일이나 매복해 있는 전차가 정밀조준사격을 가하면 정면장갑이라 할지라도 격파되는 사례가 상당 부분 속출하고 있어 T-72 계열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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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기동성 분석이다. T-90 전차는 수랭식 V-84MS 4행정 V-12 피스톤 엔진시스템을 장착하고 있으며 최대 1,600리터의 연료를 실을 수 있다. 이 엔진시스템은 B-92 C2 디젤 엔진으로 구성되어 있고 예열 없이 영하 20도에서도 작동할 수 있고 736마력의 출력을 낼 수 있다.
B-92 C2 디젤 엔진. <출처 : public domain>
이외에도 토션바 서스펜션이 장착되어 있으며 기계식 변속기에는 1차 감속기어, 2개의 최종 기어박스, 2개의 최동 드라이브가 포함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최고 속도 시속 60km, 정속 주행 시 항속 거리 550km, 장애물 등판능력 0.85m의 준수한 성능을 지닌 것으로 제조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체첸 침공과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이는 현실은 제조사가 주장하는 준수한 역량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Shtora-1 시스템과 Kontakt-5 폭발 반응장갑은 대전차 로켓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측면과 후면은 물론 정면에서 날아오는 대전차 로켓도 재밍하거나 반응장갑을 폭발시켜 대전차 고폭탄의 화학 에너지를 상쇄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대 대전차 로켓이 반응장갑에 적응하여 탠덤탄두를 적용한 부분도 작용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러시아의 반응장갑의 성능이 저열하고 반응장갑 외 전차의 기본적인 장갑이 얇아서 대전차 로켓 또는 대전차 미사일을 제대로 방어해 내지 못하고 있다.
제원전장: 9.53m
전고: 3.78m
전폭: 2.22m
중량: 46.5톤
장갑: 최대 17mm
주무장: 125mm 2A46M 주포 1문(자동장전장치 42발 / 외부적재가대 22발)
부무장: 12.7mm 중기관총 1정, 7.62mm 동축 기관총 1정
엔진: B-92C 디젤엔진(736마력)
현가장치: 토션 바(torsion bar)
항속 거리: 550km(도로 주행)
최고 속도: 60km/h
사거리: 포 발사 미사일- 5km 이내(9M119M Refleks) / 4km(125mm 탄약)
발사 속도: 분당 7발
승무원: 3명
저자 소개
임철균 | 군사 칼럼니스트 / 출처 ㅡ유용원의 군사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