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적 지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파인만의 주특기는 실용적 지식이었다. 파인만에게 있어서 지식이란 '기술記術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성취하는 것'이었다. 상당수의 물리학자들이 문명화된 유럽의 전통 하에서 교육받고 성장했지만, 파인만은 소싯적에 그림을 감상한 적이 없고 음악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다양한 교양서적은 물론 과학책마저도 별로 읽지 않았다. 다른 과학자들이 그에게 뭐든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하면 아주 질색을 하는 통에, 그들을 몹시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래도 그의 학습능력은 놀라워서,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해서든 배우고 말았다. 편견없이 지식을 추구했다는 이야기다. 안식년에는 생물학을 제법 배워서, 유전학자들이 DNA 변이를 이해하는 데 작지만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 언젠가는 "(길이 64분의 1인치 미만의) 초소형 전기모터를 만들어 보라"며 1,000달러의 상금을 공개적으로 내걸었다. (실제로 상금을 줬다.) 이처럼 일찌감치 초소형 기계의 가능성을 떠올린 덕분에, 자칭 나노기술자라는 사람들의 지적知的 아버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잠드는 순간에 펼쳐지는 의식의 흐름을 관찰한답시고 몇 달 동안 실험을 하기도 했다. 중년에는 일체의 감각을 차단한 탱크 속에 들어가, 마리화나를 쓰거나 쓰지 않은 상태에서 유체이탈 환각을 유도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파인만이 살았던 시기는 물리학이라고 불리는 한 줄기 지식이 여러 갈래의 가지로 나뉘는 때였다. 그중에서 연구비를 독차지하고 대중을 휘어잡았던 쪽은 기본입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가장 근본적인 과학은 입자물리학'이라고 주장하며, 고체물리학과 같은 하위분야를 멸시했다. 겔만은 '고철물리학'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파인만은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ies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입에 담지 않았고, 다른 분야를 업신여기지도 않았다.
민주적인 스타일의 파인만은 기술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드럼 연주법, 마사지법, 말 잘하는 법, 술집에서 여자 홀리는 법 등을 스스로 익힌 후, '모두 나름의 규칙을 갖고 있는, 배울 만한 재주다'라고 결론내렸다. 로스앨러모스 시절에는 멘토로 모셨던 한스 베테의 핀잔("50에 가까운 숫자를 제곱하는 법도 몰라?")에 자극받아 혼자서 암산 요령을 터득했고, 그 후에는 훨씬 더 까다로운 미적분 문제를 암산으로 푸는 법까지도 스스로 깨쳤다. 그밖에도 전기 도금한 금속 막대기를 플라스틱 물체(예: 라디오 다이얼)에 부착하는 법, 머릿속으로 시간을 재는 법, 개미를 줄세워 특정한 방향으로 행진시키는 법 등을 혼자 힘으로 알아냈다. 물잔에 물을 채워 즉석 실로폰을 만드는 방법을 어렵지 않게 배운 후, 닐스 보어를 위한 디너파티에서 시종일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실로폰을 연주해 보어를 깜짝 놀라게 했다. 동료 물리학자들과 함께 궁극적 목표(원자폭탄 제조)에 몰두하는 동안에도 짬짬이 곁길로 빠져, 구식 소다수 기계의 죔쇠를 푸는 법, 자물쇠 따는 법, 금고 여는 법 등을 알아냈다. 파인만이 금고를 여는 것을 보고, 동료들은 '회전판이 떨어지는 진동을 손끝으로 느끼나 보다'라고 오해했지만, 그건 몸이 아니라 머리를 쓴 결과였다. (파인만이 사무실의 철제 금고에 매달려 손기술을 연마하는 모습을 날마다 봐 왔으니,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파인만은 무지의 바다에 실용지식의 섬을 띄우는 데 몰입했다. 작도법을 모르면서도 칠판에 손으로만 완벽히 원을 그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음악을 모르면서도 '<말벌의 비행> 같은 곡 하나쯤은 혼자 연습해도 너끈히 연주할 수 있다'며 여자친구에게 내기를 걸었다가 지기도 했다. 한참 후에 그림을 웬만큼 그릴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낭만적인 여성 누드화에 몰두하면서, 친구들에게 "그림 자체보다는 덤으로 익힌 기법(젊은 여성을 설득해서 옷을 벗게 하는 방법)이 훨씬 더 짜릿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사람들의 사인공세를 피하고 강의 초청을 거절하는 법, 행정적 도움을 요청하는 동료들을 피하는 법, 당면 연구과제를 제외한 모든 것을 시야에서 몰아내는 법, 과학자들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는 특별한 노화공포증을 이겨내는 법, 그리고 종국에는 '암과 함께 사는 법'과 '암에 항복하는 법'까지 두루 마스터했다.
파인만이 세상을 떠난 후 수많은 동료들이 묘비명을 쓰겠다고 앞다퉈 나섰는데, 그중 한 사람이 슈윙거였다. 한때 동료였을 뿐 아니라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던 슈윙거는 이런 구절을 택했다. "솔직한 인간, 우리 시대의 걸출한 직관주의자, 과감하게 남들과 다른 장단에 맞춰 춤추면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를 몸소 보여준 본보기." 파인만의 도움으로 창조된 과학은 이전의 어떤 과학과도 달랐으며, 파인만이 속한 문화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업적으로 떠올랐다. 때로는 점점 더 모호해지는 터널에서 좁아지는 갈림길로 물리학자들을 내몰기도 했지만, 그가 창조한 과학의 영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파인만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불확실한 시기에, 뭔가를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 줬다는 것 아닐까?
※ 출처: 같은 책 pp.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