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커피 한 잔
상당히 뜨거워진 초여름 오후, 에어컨이 돌아가는 실내에서 일하는,
오늘 저의 기분은 뜨거운 핸드 드립 커피입니다.
드립커피 전용으로 디자인된 주둥이 넓은 호리병처럼 생긴 유리 기구
위에 필터를 얹고, 커피를 제가 딱 좋아하는 입자 크기로 갈아 올립니다.
커피가 가장 맛있다는 온도에 딱 맞춘 뜨거운 물을 되도록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부어 주면, 미세 입자가 된 고체와 그 속에 숨어 도사리던 기체와
고온의 액체가 만나 벌이는 한판 향기로운 화학 작용이 벌어집니다.
커피액이 황금색의 잔거품을 일으키며 부풀어 오르는 그 사랑스러운 현상을
인내심 있게 지켜보며, 이에 맞추어 물을 붓는 물리적 속도를 조정합니다.
진한 커피 향이 밴 농축액이 필터 끝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모아, 뜨거운
물과 섞어 마침내 제가 딱 원하는 향과 농도의 드립커피를 만들어 내고야 맙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이 동네에서 커피 맛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핸드 드립 전도사라도 된 양, 수많은 사람들에게 드립 커피 맛을 전
파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저의 영향으로 드립 커피
장비를 구매한 사람만, 적어도 몇 십 명은 될 거라 추정합니다.
이 명단에는 70대이신 저의 엄마와 엄마의 친구분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드립 커피를 내리면, 모두 모여 함께 커피를 나누신다고 합니다.
남편 일찍 보내고 자식 손자들 다 키우고 삶이 무료하다 고립감과 허무감에
빠지기 쉬운 분들께 드립 커피의 풍부하고 시끌시끌한 우정의 맛을
전해 드린 것이 저는 참 뿌듯합니다.
무시무시한 족쇄를 풀고 탄생한 ‘실험 세포’
사람을 가두는 족쇄 중에 가장 무서운 족쇄는 말의 족쇄입니다.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족쇄인 만큼 자각도 힘들고 빠져나오려는
의지를 갖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요리 못해.’라는 이 한 문장이 나를 발전하지도 시도하지도
않게 만들었던 족쇄였고, 참 오래도 저를 가두어 묶고 있었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말에 묶여 있는 마음은, 서로 음식을 해서 나누어 먹는
어느 자리에도 마음 편히 다가가지 못하게 했고, 남편의 밥을 챙겨야 한다는
‘결혼’과 애들 밥을 챙겨야 한다는 ‘자녀 출산’도 두려워하게 했으며, 제대로 된
한 끼 밥상을 타인에게서 찾는 스스로를 의존적인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커피를 스스로 만들어 볼 생각도 않고,
자판기 커피와 카페 커피에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오랫동안 블랙커피의 맛은 쓴 맛이라고만 생각했고, 커피에 우유와 설탕 시럽을
잔뜩 넣은 단맛을 즐길 줄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일회용 커피 믹스나 커피
바리스타가 레시피 대로 만드는 카푸치노나 라테 같은 커피가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친한 지인이 블랙커피를 찾았습니다.
당시 집에는 믹스커피 밖에 없었는데 말이죠.
다음번에 지인이 다시 방문했을 때는, 옛날 어머니들이 집에 사놓으시곤
하던 인스턴트커피를 한 통 사놓았다가, 뜨거운 물에 타 드렸습니다.
커피를 홀짝이는 지인의 얼굴은 결코 만족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신선한 원두로 만드는 블랙커피가 맛있다는 말을 슬쩍 흘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주워 들었습니다.
지인이 맛있다고 한 원두커피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도 아이들 키우면서, 잠깨려고 매일 들이켰던 인스턴트
믹스 커피에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질렸던 참이었거든요.
원두로 내리는 블랙커피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일회용 믹스 커피와, 카페에서 파는 라테의 차이가,
인스턴트커피와 원두커피의 차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인스턴트 블랙커피와 원두 블랙커피는 뭐가 어떻게 다를까.
나도 그 맛을 알고 싶다, 내 집에 온 손님에게 맛있는 블랙커피 한 잔
만들어 주고 싶다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마시는 커피라면,
인스턴트보다는 원두가 더 건강한 선택일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이 가슴을 파고드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머릿속으로 커피 만드는 과정을 시뮬레이션해 보았어요. 연구소 실험실에서
성장한 ‘실험 세포’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서 가설을 세웠습니다.
“원두를 갈아서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거 아닐까”
자신감의 향기
저는 원두커피와 그라인더를 사다 놓고, 집에서 온갖 실험을 다 해보았습니다.
커피를 갈아 그대로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 입자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보기도 했고, 프렌치 프레스 기구, 이탈리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많이 쓴다는
주전자처럼 끓여 쓰는 에스프레소 기구, 여러가지 집에서 시도해 볼 수 있는
간단해 보이는 장비들을 다 사서 시도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도, 커피 입자가 완전히 걸러지지 않고 커피에 둥둥 떠 있는 것이
거슬려서, 결국 필터를 써서 걸러야겠다는 생각까지 갔어요.
필터도, 종이 필터부터 천 필터, 스테인리스 필터까지 다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지금 사용하는 무표백 종이 필터를 쓰되
뜨거운 물에 한 번 헹궈내고 쓰는 방식입니다.
필터를 얹기 쉬운 여러 가지 기구를 다 보다가,보로실리케이트 유리라는
재료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디자인도 심플해서 관리가 쉽겠다고 판단하여,
현재 쓰는 기구 (케멕스)를 한화로 3만 원 정도에 약 10여 년 전에
구매했고, 중간에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실수로 깨뜨린 걸,
다시 똑같은 것으로 사서 몇 년째 잘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입자를 다양하게 갈아보고, 원두도 브랜드 별로, 로스트 방식 별로, 생
산지 별로 다 사서 맛을 보고, 물 온도도 다양하게 시도해 본 후,
지금 제가 내려 마시는 방식에 정착했습니다.
내가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만들 수 있고, 손님을 기쁘게 하는
커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가져온 자신감의 진한 향기에 저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한껏 취했습니다. 낯부끄럽게도,
한때는 동네 아는 얼굴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 때나 문 두드리라고,
정말 맛있는 커피 내려준다고 떠들고 다닌 적도 있었답니다.
커피는 저에게 무거운 ‘못한다’
족쇄를 풀여준 열쇠이자, 인간 승리이자, 자신감입니다.
반드시 어떻게든 해내는 저의 끈질긴 집념과 능력을 보여준 살아 있는 증거,
‘프라이드’입니다. 나를 믿는 자신감 향 커피만 있으면,
에너지 드링크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커피는 그렇게 나를 일으키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나다운 향기입니다.
평생 자랑스러울 ‘내가 잘하는 요리’입니다.
by. 하트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