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세계사]
[난징조약]
아편전쟁 패한 뒤
'치욕적 조약'… 홍콩 뺏기고 무역항 개방
英, 淸 찻잎 수입해 약 100년 간 적자… 해결 위해 마약 몰래 팔다 몰수 당해
이를 빌미로 아편전쟁 일으켰어요
이달 초만 해도 미·중 무역 분쟁이 합의로 끝날 분위기였는데 하루가 다르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어요. 갑자기 기류가 변한 데 대해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중국 공산당 강경파 중심으로 '합의문 초안은 난징조약(1842년) 같은 불평등 조약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어요. 난징조약은 아편전쟁 후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조약입니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중국 대미 강경파가 이를 언급하며 무역 분쟁 종결을 거부한 걸까요?
◇중국 대륙 멍들게 한 아편 무역
17세기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을 하며 상당한 적자를 보고 있었어요. 영국에서 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청나라에서 엄청난 분량의 찻잎을 수입해야 했거든요. 영국 상인들이 찻잎 값으로 한 해 청나라에 지불하는 은이 한때 2만8000t에 달했어요. 약 100년 가까이 영국 은만 청나라로 계속 흘러들어 가는 형국이었죠.
▲ 1842년 난징(南京) 인근 양쯔강에 정박 중인 영국군 콘월리스호(위 그림 가운데)에서 청나라와 영국은 난징조약을 맺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약 조인 당시 콘월리스호 선실을 그린 모습입니다. |
하지만 청나라는 통상을 거부하고 영국 상품을 수입하지 않았어요.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청에 수출합니다. 중국은 아편 수입을 금지했지만 부패한 관료 조직 때문에 밀무역이 계속됐어요.
강경 대응에 나선 청은 1839년 임칙서(林則徐) 주도로 광저우항에서 영국 상선에 실린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합니다. 영국은 이를 문제 삼아 군대를 일으킵니다. 1차 아편전쟁(1840~1842)의 시작이죠. 영국군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1842년 8월 난징 함락 직전까지 갑니다. 청나라가 패배를 인정하고 영국과 맺은 게 난징조약이에요.
◇세계의 중심에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난징조약으로 청나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어요.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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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구에서는 영국과 청이 협의한 관세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도록 했어요. 원래대로라면 청나라가 영국 물건을 수입할 때 세금을 얼마나 물릴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못하게 하면서 실질적으로 영국이 관세를 정하게 되죠. 어려운 말로 '관세 자주권'을 잃어버린 겁니다.
홍콩 섬은 난징조약으로 영국 땅이 됩니다. 이때 넘어가서 1997년까지 영국이 지배하지요.
난징조약에 이어 부속 조약을 맺는데 청나라는 여기서 영사재판권,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게 됩니다. 영사재판권은 영국인이 청나라 땅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청나라 사법기관이 아니라 영국 영사가 재판을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최혜국 대우는 청 왕조가 다른 나라에 해주는 가장 유리한 대우를 영국에도 무조건 똑같이 해주는 거예요.
◇이기고도 부끄러워한 영국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이 가속화됐어요.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중국 교과서는 아편전쟁이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라고 가르친다고 해요.
사실 아편전쟁은 영국 안에서도 비판이 나왔던 전쟁이에요. 하원 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 승전으로 얻을 이득은 확실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로 인해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와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남의 나라에 마약을 퍼뜨린 뒤, 그 나라 정부가 마약을 몰수했다고 전쟁을 일으켜 이권을 챙겼으니까요. 그렇지만 '힘의 정치'가 세계를 휩쓸 때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청나라도 책임이 있죠.
일본은 청의 굴욕을 지켜보고서는 서구와 무작정 충돌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1842년까지만 해도 외국 배는 '무조건 격파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물과 장작을 주고 돌려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죠. 일본은 12년 뒤 미국과 수교하고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감)'를 추진합니다.
[淸, 전쟁 져도 英 오랑캐라 불러]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1840~ 1842)에서 패배했지만 '중화사상'은 버리지 못했어요. 중화사상은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고 다른 문명은 오랑캐[夷]이자 야만인'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난징조약 11조를 보면 '영국과 청의 고위 관료들은 직급에 맞춰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나 청은 이들을 계속 오랑캐라고 불렀어요.
이후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6 ~1860)에서 다시 패배해, 1858년 영국과 톈진조약을 맺습니다. 영국은 이때 톈진조약 제51조를 통해 "앞으로 중국 당국이 발행하는 공식 문서에서 영국 관리나 영국 민간인을 '오랑캐[夷]'라고 부를 수 없다"고 못 박았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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