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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13일 토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수도회] 주님께 의탁하여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제 18,1-10ㄱ.13ㄴ.30-32
† 복음 마태 19,13-15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데 어린이들이
방해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막지 말라고 이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우리는 많이 보고 듣고 배울수록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만족하다 보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하느님마저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할 수가 없게 되지요. 그렇게 신심
깊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까?
어린이들처럼 아무런 개인적 욕심이나 이기심에 얽매이지 않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실천하려 할 때만 우리는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유다인들 가운데
내려오는 격언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들만이 지혜로운 랍비들보다
하느님께 가까울 수 있다.”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는 내용이지요.
우리 역시 늘 순수함과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고, 주님의 뜻을 옳게
깨우치며 이를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들
2016년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제1독서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1-10ㄱ.13ㄴ.30-32
복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3-15
명절날에 꽤 많은 분들이 제게 과일이나 명절 음식을 보내주십니다.
아마도 혼자 명절을 보내는 것이 안쓰러우셔서 그렇겠지요.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 양이 저 혼자 소비하기에는 너무
많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올 초의 설 명절 때에도 너무 많은 선물을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기 위해 과일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쎄 상자 맨 위에 보이는 부분은 빛깔이나 크기가
너무나 좋은데 반해, 바로 밑에는 크기도 작고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 과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절 하루 장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윗줄과 아랫줄의 너무나도
큰 차이로 인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최고의 상품인
윗줄만을 보고서 그 과일 가게를 좋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다 나쁜
상품일수도 있는데 좋은 상품이 절반이나 되니까 훌륭한 집이라고
말할까요? 아마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상품이 있는
아랫줄만을 생각하면서 속여 파는 집으로 그 과일 가게를 나쁘게
볼 것이고 이제 더 이상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일 상자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과일 상자의 윗부분은 우리가 현재 받는 외적인
평판이고, 보이지 않는 과일 상자의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성품이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외적인 평판은 좋지만, 실제의 성품이 좋지 않다면 어떨까요?
사실 외적인 평판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품은 바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드러지게 되어 오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품이 사람들의 모든 판단을 뛰어넘어서 이제까지의
평판에 관계없이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평판에 신경을 써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성품에 신경
써야 할까요?
사람들이 어린이들은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합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지요. 사실 당시에는
어린이의 존재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바쁜 예수님께 이런 어린이들까지 데리고 오느냐는 것이지요. 바로
그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들을 보신
것입니다. 만약 당시의 어른들처럼 단순히 외적인 부분만을 봤다면
거절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순박함, 단순함,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가 입은 해를 잘 잊는 것 등등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성품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품을 계속해서 키워나갈 수
있도록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본성상 가지고 있는 성품을 계속해서 키워나가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떤가요? 혹시 성품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외적으로 보이는 평판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를 사랑하는 것은 재미있는 삶이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의미있는
삶이다(주철환).
수원신학교에 있습니다.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
정신분석 이론 중에서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영아가 정상적인 감정, 사회적 발달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주 보호자(primary caregiver)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배고플 때 먹여 주고, 울면 달래 주고, 졸릴 때
재워 주는 엄마(양육자)를 통해 아이는 자신과 타인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애착 이론’은 인간이 보호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입니다.
양육자 없이 정상적인 성장을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양육자가 반드시 ‘엄마’일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엄마’가
양육자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다른 이가 이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누군가만 보호와 양육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이가 이런 책임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세상이 좀 더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수원신학교 성당입니다. 어제 개학한 신학생들과 함께 있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주님께 의탁하여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임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마태 19,13-15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Jesus blessing the children
주님께 의탁하여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임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청하는 이들을 꾸짖습니다(19,13).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니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며 손을 얹어주십니다(9,14-15).
여기서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것으로 보고 어린이들의 접근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적대자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었고 어떤 재화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축복을 빌어달라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
이라 하신 것을 보면 어린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힘없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이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주님의 생명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처신은 사회적 약자들이 하느님과 관계 맺는 것을
막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지닌 지위나 재물, 세상의 지식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자만심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료 인간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참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어린이 같은 순수함을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함은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순진무구함, 무죄함 또는 도덕적으로
흠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그분과 함께
있고자 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이런 영적 순수함을 지닌 가난한 이들은 어린이처럼 전적으로 남에게
종속되고 온전히 의존합니다. 우리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겠지요.
하늘나라는 오직 하느님께 집중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기준을
주님께 두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시선을 가지런히 하여 영으로 단순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그분의 축복 안에 머물 수 없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개방성과 수용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고,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으신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 안에서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소외시키지 말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모두가 존귀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고요히 주님 앞에 자신을 두고, 혹시라도 마음의 문을 닫고
제한적으로만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며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는 않는지 살피며, 주님의 축복을 청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원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에제 18,30)
오늘날 사회는 불공정한 출발점이 문제가 됩니다.
옛적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였지만
오늘날엔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출발점이 차이가 나면 왠만해서는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부모의 기본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사회적 성공을 거두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정하십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무 상관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직 우리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신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열심한 신앙인이었다해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큰 죄인이었다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모의 그 어떤 유형무형의 유산도
나의 구원에는 아무 영향을 못미칩니다.
신앙은 누구가 대신해 줄 수가 없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그 누구도 환경 탓을 할 수 없으니
하느님은 참으로 공정하신 분 아니신가요?
오늘 우리도 하느님처럼 공정한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도 그의 배경에 따라 판단하지 않고
오직 그 사람 자체만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도 공정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차별없이 공정하게 대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공정하게 사람을 바라봄으로써 자비를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2016년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 19,13-15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던 어린 시절,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심청전, 장화홍련전 같은 연극이나 마술쇼를 보여주고 만병통치약도
팔고 하던 유랑극단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였습니다. 심청이
역할을 맡은 예쁘고 어린 여배우에 홀딱 반한 동네 형들은 밤마다
극단 숙소 근처를 어슬렁거렸습니다. 심청전 연극에 푹 빠진 동네
아주머니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려댔고 치맛자락에 팽!
하고 코를 풀었습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입담이 걸쭉한 아저씨 한분이 나와
야리꾸리한 음담패설을 섞어가면서 만병통치약을 판매합니다. 판매를
시작하기 전에 아저씨가 꼭 던지는 말씀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자~ 애들은 가요!”였습니다. 애들 들으면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기도 하겠지만, 돈 한 푼 없는 애들 들어봐야 사지도
않을게 뻔하니,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가기 싫었지만 주변 어른들도
눈을 부라리며 빠지라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잠시 뒤로 물러나는
시늉을 하곤 했습니다.
요즘에야 아이들을 대체로 금지옥엽, 애지중지 키웁니다만 과거에는
애들에 대한 대우가 정말이지 밑바닥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존귀한 존재,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아직 익지 않은 열매로 봤습니다. 아직 인간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특히 남성 및
어른 중심의 과거 문화 안에서 어린이는 온전한 한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실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향해 꾸짖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스승님께서 설교하고 계신
것 안보입니까? 지금 엄청 바쁘시거든요.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저
아이들 당장 데리고 나가세요! 자~ 애들은 가라!”
제자들은 당시 분위기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고방식에 따르면 온전한 인간 존재도 아닌 어린이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이들, 축복하고 기도해줄 가치조차 없는
어린이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는 어린이들을 쫒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꽤나 화가 나셨습니다.
인간 존재를 대하는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큰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어린이들을
비롯한 나환우들, 이방인들, 세리와 죄인들, 중풍병자들, 마귀 들린
여인들, 임종환우들은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눈에는
생명 붙어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소중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함, 무죄함을 높이 칭찬하시며 속이
구린 어른들은 그들을 본받으라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오 19장 14절)
우리 인간들과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른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때로 내 처지가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터지더라고 울고 있는 내 모습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큰 위안이 됩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2016년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 19,13-15
며칠 전에, 치과엘 갔습니다. 1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저의 치아 상태가 양호하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덤으로 제게 이렇게 이야길 해 주셨습니다. ‘이곳을 찾는 신부님들
중에서는 아주 양호한 편입니다.’ 숙제검사를 마치고 선생님께서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주시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기분 좋은 일이 더 있었습니다. 명동에서 혜화동 가려면
140번 버스를 타곤 합니다. 신호등을 건너는데 버스가 막 도착하는
것입니다. 버스에 탑승을 했는데 앞자리의 승객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겁니다. 작은 일이지만 그날도 행복했습니다.
브라질의 리오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기대한 것 보다 성적이 좋지 않은
선수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올림픽의
기본 정신은 인류의 화합과 축제입니다. 성적과 메달의 숫자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참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소탈하시고, 겸손하시고,
틀에 억매이지 않으시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시고, 복음적이시고,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십니다. 이 순수함이 모든 불신과
갈등을 허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수함이 이념, 율법, 체제라는
견고한 벽을 허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교황님과
함께 지내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어야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수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연일 무더운 날들입니다. 오늘은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을
떠올리면서 윤동주님의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시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기도손이 아름답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8월13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 19,13-15
기도손이 아름답다.
구역미사에 가면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합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하면서
특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봉헌
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봐야 합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는 3-5살 박이 미카엘라, 젬마, 새랑이도
참석합니다. 모임을 갖는 동안 말썽 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헤어질 때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모으고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면 십자고상을 가리키고
성모상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을 줄도 압니다.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금방 따라 합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기도의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 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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